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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陽 洪氏 先係 十世譜(남양홍씨 선계 10세보) 이력
선계 10세보는 시조 태사공 이상 10세의 사적(事跡)으로 조선조 숙종조 때에 안무공(安武公)의 방손(傍孫)이라는 노승(老僧)이 간직한 보첩(譜牒) 석발보(石鉢譜)에 태사공 이전의 선(先)십세의 기록이다.
(옛날 한 일가(一家)분이 산사에서 늙은 스님을 만났는데 이름을 법운이라고 하고 스스로 속성(俗姓)을 홍씨(洪氏)라 말하였다.
그 방랑을 푸니 과연 보첩(譜牒)이 있었으며 그는 바로 안무공(安武公)의 방손(傍孫)이었는데 태사공 위에 또 십대(十代)가 기록되어 있고 학사공(學士公)의 관직(官職) 사적(事績) 배위(配位) 묘소(墓所)가 매우 자세하게 기재 되어 있었다.
이것이 석발보(石鉢譜)라 일컷는다.
※南陽 洪氏 先係 十世譜(남양홍씨 선계 10세보)
世 係孫 子孫
1世 홍천하 洪天河
2世 문명 文命 우명 禹命 순명 舜命
3世 흥하 興夏
4世 척해 陟海 제해 濟海
5世 득영 得泳 득함 得涵
6世 협리 協理 정업 定業
7世 신제 愼濟 대평 大平
8世 공 貢 섭 涉
9世 경여 警汝 척여 陟汝 용 庸
10世 몽주 夢疇 우 宇 책 策
※ 당나라에서 오신 선시조(先始祖)
선시조 휘(諱)홍천하(洪天河) 자(字)는 명보(明甫)이신 홍학사는 대대(代代)로 중국 강남성 휘주인(中國 江南省 徽州人)이다
(지금에 양자강 부근)에 살던 양반(兩班)의 가족(家族)으로 당나라에 벼슬 하여 학사가 되었다. 서기 639년 삼국시대에 고구려 영류왕(榮留王)이 덕예(德藝) 문학의 선비를 뽑아 보내 달라는 사신을 당나라에 보냈다
그랬더니 당나라의 태종이 홍학사를 비롯한 8학사 홍(洪).은(殷).목(睦). 길(吉). 위(魏). 방(房). 기(奇). 봉(奉)를 파견 하엿는데 그 어른이 우리의 선시조 이신 학사공 휘(諱)홍천하(洪天河)이시다.
선시조 학사공께서는 중국에 강남성에서 태어나서 고구려 요동 땅으로 건너가 절개(節槪)를 지키다가 오랑케와 더불어 선비가 있을 곳이 못되어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승주부해(乘舟浮海) 즉 배를 타고 좋은 곳을 찾아 해외로 나가 물살을 헤치며 좋은 곳을 발견하고 두 눈에 번쩍 띄는 곳에 닷을 내려 물(즉 땅)에 올라가 몆대나 살수 있을까 점쳐보니 이 땅의 기둥으로(뜻 높은 신하) 영원할 것이다 하여 정착한 곳이 고구려 땅인 당성군 지은 수포리(唐城郡 之銀 樹浦里)즉 포구가 은수포 또는 남경로(南京路) 서(西) 20리(里)(지금에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전곡리(京畿道 華城郡 西新面 前谷里) 내백(來佰)하여 처음 머물은 곳이 당성(唐城)이라 하였고 여기를 중심으로 중국 문화를 받아 들이면서 처음 동국의 풍속(風俗)이 널리 개척 되었다.
또한 당나라 교통에 요지이며 삼국시대 말엽에는 서로 탐내서 싸움이 그치지 않았으며 고구려(高句麗)가 망하매 선시조께서는 환난을 피하여 배를 타고 동쪽 덕산(德山)(현재 경남 산천군 덕산면)으로 옮겼다.
이소식이 전하여 지자 신라 선덕여왕은 이 어른을 귀빈(貴賓)으로 보시고 예의로 잔치를 베풀고 덕산촌주(德山村主) 봉(封)하고 우대(優待)하여 당신(唐臣)(당나라 사람)이라 존칭(오늘날 쉽지 않은 상대를 일컫는 호칭으로 굳어진 것이다) 하고 따로 그 도호(道號)를 당동(唐東)이라 부르고 더욱이 문무왕(文武王)은 성(城)을 쌓아 성(城) 이름을 당성(唐城) 이라 하였다.
녹(祿)을 주어 당성백(唐城伯)을 봉(封)하였으며 신문왕은 이 어른을 태잩태사(太子太師)(즉 태자의 스승으로 추대 하기로 했고) 효소왕은 당성후(唐城候)를 삼기로 했다.
어쨌든 신라5대의 임금이 모두 스승으로 섬기고 있었으니 그 덕망과 예능(藝能)은 짐작 하고도 남음이 있다.
※ 南陽 洪氏 先係 十世譜
※1세(世)천하(天河) 8학사의 1인( 八學士 一人)
자는 명보(明甫) 중국 희주강남(中國 徽州江南) 출신이다.
문학(文學)으로 이어진 집안에서 태어나 당나라에 학자(學者)가 되었다.
당태종(唐太宗) 계묘(癸卯)년 고구려(高句麗) 영류왕(榮留王)이 사신(使臣)을 보
내 당나라의 문학지사(文學之士)를 청하여 미개(未開)한 풍속(風俗)을 교도(敎導
하여 개혁(改革)코자 청하니 이때 당나라 태종이 팔학사를 보내 교도(敎導) 하거
늘 공(公)이 수반(首班)으로 평양에 왔다.
보장왕(寶藏王) 4년 연개소문(泉蓋蘇文)의 난(亂)에 공(公)은 선덕왕이 현인(賢
人)을 잘 대우 한다는 말을 듣고 난(亂)을 피하여 신라로 가니 선덕왕이 상빈(上
賓)으로 우대하여 환영하고 예(禮)를 갖추어 날마다 극진히 향연(饗宴)을 베풀고
덕산촌주(德山村主)로 봉(封) 하엿다.
신라 진출 하(夏)나라 제도(制度)를 가지고 이민족(異民族)을 교화(敎化)시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후 신라 신문왕이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임명하고 당성
백(唐城伯)을 봉(封)하였으며 관적(貫籍)은 당성(唐城)이다.
묘(墓)는 광주 개건동(廣州 開乾洞)언덕에 있는데 진좌(辰坐) 배위(配位)는 설씨
(薛氏)로 당나라 영주(瀛州) 18학사(十八學士) 태상경(太尙卿) 유(攸)의 따님이
다.
세아들을 두었으니 첫째아들의 휘(諱)는 문명(文命)이다.
※ 2세(世) 문명(文命) 천하(天河) 의 子
신라 신문왕 갑신(甲申)에 금마(金馬)의 반적(反賊) 민(閔)을 평정시키고 대서발
한(大舒發翰)(관명=대각우(大角于)으로 당성후(唐城后)의 봉함을 받았다
공(公)일을 마치자 한가히 물러나 벼슬을 하지 않고 광주(廣州)의 두니강(斗尼江
아래에 살았다.
이곳을 당성도(唐城島)라 말하는데 지금은 당정(唐亭)이라 한다.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묘(墓)는 인천 불사동(仁川 佛詞洞)에 있는데 유좌(酉坐
이고 배위(配位)는송(宋氏)로 당나라 예부상서(禮部尙書) 감(勘)의 따님이다.
※2세(世) 우명(禹命) 천하(天河)의 二子
아찬阿餐)(관명)이었다. 신라 문무왕 경오(庚午)에 고구려가 망하자 검모잠장(劍
牟岑將)이 보장왕(寶藏王)의 서자(庶子) 안승(安勝) 보덕왕(報德王)으로 왕을 삼
고 단나라의 관숙(官屬)과 귀족(貴族)을 모두 죽일 때 형(兄)인 당성백을 당나라
로 돌아가 화(禍)를 면(免) 햇고 공(公)은 화(禍)을 입었다.
※2세(世) 순명(舜命) 천하(天河)의 三子
검모잠장(劍牟岑將) 난(亂)에 토착(土着)한 홍씨(洪氏)라 말하여 화(禍)을 면(免)
하게 되었다.
※3세(世) 휘(諱)흥하(興夏) 문명(文命)의 子
당나라 중종 갑오(甲午)연에 당나라에 들어가 진사(進士)가 되었으니 성덕왕(聖
德王)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각간(正角干)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 문현(文顯)이다.
배위(配位) 수원 백시(水原 白氏)로 당나라 부도독(副都督) 현(絢)의 따님이다
한 아들이 잇었으니 휘(諱) 척해(陟海)이다.
※ 4세(世) 척해(陟海)흥하(興夏)의 子
당나라 현종(玄宗) 갑자(甲子)에 당나라에 들어가 진사(進事)가 되었으며 신라
에서는 대아찬(大阿餐)이었다.
시호(諡號)는 문성(文成) 묘(墓)는 안흥직동(安興直洞)에 있다.
배위(配位)는 경주 설씨(薛氏)이시니 아버지는 대각간(大角干) 이상(伊祥)이요
조부는 잡간(雜干) 승익(承益)이고 증조는 대아찬(大阿餐) 교(喬)이며 외조는
김원성(金元聖)이다.
관향은 김해(金海)이다.
한 아들과 한 딸을 두었으니 아들은 휘(諱) 득영(得泳)이다.
※ 5세(世) 득영(得泳) 척해(陟海)의 子
벼슬은 사간(沙干)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다. 배위(配位) 황보
(皇甫)씨로 당나라 지제고(之制誥) 박(縛)의 따님이다.
첫째 아들은 협리(協理)이다.
※ 5세(世) 득함(得涵) 제해(濟海)의 子
※ 6세(世) 협리(協理) 득영의 자 (得泳의 子)
벼슬은 대도독(大都督)으로 신라 애장왕(哀蔣王)의 피살(被殺)될 때 공(公)은
왕을 호위하다 순사(殉死)했다. 천성이 충직(忠直)하고 배움에 힘썼으며 서화
(書畵)를 잘 했다. 문성왕(文聖王) 때에 당성백(唐城伯)으로 추봉(追封) 하였고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라 했다.
묘(墓)는 길창군 명옥동(吉昌郡 明玉洞)에 있다.
배위(配位)는 경주김씨(慶州金氏)로 소성왕(昭聖王) 공주(公主)였다.
조부(祖父)는 세자(世子)로서 충혜왕(忠惠王)으로 추존(追尊)된 인겸(仁謙)이고
증조(贈祖)는 원성왕(元聖王)이다.
한 아들이 있었으니 휘(諱) 신제(愼濟)이다.
※6세(世) 정업(定業) 득함의 자(得涵의 子)
※7세(世) 신제(愼濟) 협리의 자(協理의 子)
신라 희강왕(僖康王)때 김명(金明)이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 서니 공
(公)이 분개(憤慨)하며 각간(角干)김양(金陽)을 책망하며(왜 역적을 토벌치 않으냐) 은밀히 각간(角干)인 김양(金陽)과 같이 김명(金明)을 토벌치(討伐)하고
신무왕의 아들 우징(祐徵)을 왕으로 세웠다.
큰 공(功)을 세운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후 문성왕(文聖王)때에 누차(屢次)
높은 관직을 주엇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특별히 대각우(大角于)에 임명 되었고 당은후(唐恩候)에 봉함을 받았다.
시호(諡號)는 충무(忠武)다
묘(墓)는 보성군 모성동(寶城郡 慕聖洞)에 있다,
배위(配位)는 정명부인(貞明夫人) 이씨로 대서발한(大舒發翰)의 신 (義山)따님
이다. 두아들과 두 딸을 두었으니 첫째 아들이 휘(諱)공(貢)이다
※ 7세(世)대평(大平) 정업의 자(定業의 子)
※ 8세(世) 공(貢) 신제의 자(愼濟의 子) 貢文이라고도 함
신라 문성왕(文聖王)때에 삼중대광(三重大匡)였으며 당성백(唐城伯)에 봉함
(封函)을 받았다
배위(配位) 죽산박씨(竹山朴氏)로 시중광열(侍中光列) 문간공(文簡公)의 따님
이다. 두아들을 두었으니 첫째 아들의 휘(諱)는 경여(警汝)이다.
※8세(世) 섭(涉) 愼濟의 二子(신제의 2자)
※8세(世) 서(敍) 대평(大平의 子)대평의 자
※9세(世) 경여(警汝)공의자(貢의 子)
내성집사(來城執事)이며 당성백(唐城伯)에 추봉(追封)되었다. 당시 진성여왕
(眞聖女王)이 음란하고 추잡하여 나이 젊은 미장부를 끌어 들이고 멋대로 요
직(要職)을 주니 이로 말미암아 아첨(阿諂)하여 임금에 총애를 얻어 전횡(專橫
하며 기강이 무너지고 사방에 도적이 크게 일어나 공(公)이 사간(沙干)벼슬을
하던 척여(陟汝) 공운(孔雲)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종적(踪迹)을 감추고 벼슬
을 하지 아니 하였다,
배위(配位)는 경주 최씨(慶州崔氏)이다
한 아들이 있으니 휘(諱)는 몽주(夢疇)이다
※ 九世 척여(陟汝)공의 2자(貢禹의 2子)
사우(沙于) 용(庸) 서의 자(敍의 子)
※ 十世 몽주(夢疇) 경여의 자(警汝의 子)
태자첨사(太子詹事)벼슬을 하셨고 신라 효공왕(孝恭王)때에 삼중대광(三重
匡)에 추봉(追封)되었다.
묘(墓) 토산(兎山)의 상운판(祥雲版)언덕의 유좌(酉坐)에 있다.
배위(配位)정부이(貞夫人)목산김씨(穆山金氏)로 대아찬(大阿餐) 득대(得大)
의 따님이다.
즉 태사공(太師公)이 공(公)의 자(子)이다.
※十世 策(책) 용의 자(庸의 子)
▶ 팔학사(八學士)칠언연구(七言聯句)
登登錦嶽 聘蒼茫 (은세통(殷世通) 오르고 또올라 화려항 산악에서 머나먼
등등금악 빙창막 바다를 내려본다.
信步層岩 近太陽 (홍천하(洪天河) 걸음따라 기암도 발밑에 눌리고 나니 태
신보층암 근태양 양은 바로 내곁에 있다고 하리라
九萬北辰 宣曳履 (목충(睦沖) 아득한 당나라 조정에서 벼슬길에 나아
구만북진 선예이 갈 이내몸이
三千東海 可蹇裳 (위령(魏齡) 조그만한 동국이나마 삶의 터전을 마련
삼천동해 가건상 할만 하다.
西瞻庶檄 燕京帝 (방비(房丕) 서쪽으로 머리를 돌리니 연경융족(燕京
서첨서격 연경제 戎族)에게 선전 포고를 할 만하고
南望將擒 日出王 (기모(奇牟) 남으로는 일본국왕도 사 로잡을 만하다
남망장금 일출왕
嶺酪勝區 無限景 (길영(吉寧) 명승지의 엄청난 경치를 담뿍안고
영락승구 무한경
憑虛疑駕 大鵬翔 (봉수현(奉守賢) 허공에 의탁한 몸이 대붕(大鵬) 의 나래
빙허의가 대붕상 를 걸터 탈가 한다
→ 八 學 士
은세통.홍천하.목충.위령.방비.기모.길영.봉수현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에 따르면 고구려 영류왕(永留王)때의 8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인 천하(天河)의 후손으로 명기(明記) 되어 있다.
그 후 삼한통일(三韓統一)이 되자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천하(天河)의 대공(大功)을 기리어 당성백(唐城伯 ; 南陽)에 봉(封) 하였고 신무왕(神武王)때 태자태사(太子太事) 효소왕(孝昭王) 때에는 당성후(唐城候)에 봉록(封錄)된 것에 연유(淵由)되어 고려 때의 광익경제공신(匡翊經濟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과 태사를 역임한 은열(殷悅)을 일세조(一世祖)로 삼고 본관을 남양(南陽) 당성(唐城)으로 삼아 오늘에 번영을 누리고 있는 명문(名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