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지순례를 시작하면서.......
순례의 여정은 구세주의 발자취를 따르며 지나온 삶들을 회상하고, 자신의 복음화로 진리를 따라서 오늘을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빛바랜 순례사진들을 다시 보면서 진지한 성찰의 여정을 시작하며 주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이집트까지 이미 순례를 다녀오신 분들에게는 회상을 통한 자신의 복음화에 도움이 되고, 다녀오시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참고자료가 되면 좋겠습니다.
★ 이스라엘에서 이집트 여정2. 시온산과 골고타 언덕길, 최후의 만찬 기념성당, 성모영면성당, 골고타 십자가의 길 제1처 기도시작성당, 주님무덤성당
* 2012년 1월 1일 - 1월 2일
* 시온산과 골고타 언덕길, 최후의 만찬 기념성당, 성모영면성당, 골고타 십자가의 길 제1처 기도시작성당, 주님무덤성당
1. 시온산과 골고타언덕길
예루살렘성 통곡의 벽을 순례하고 시온산으로 갔다. 시온산은 예루살렘성 남서쪽에 위치한 해발 765m의 산이다. 하느님 도성의 상징적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이스라엘의 신앙적 상징인 산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바빌론 유배기간 동안에 '시온'은 넓은 의미에서 그들의 잃어버린 조국의 땅 전체를 의미 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민족의 디아스포라(해외동포)들에게 '시온으로 돌아가는 귀향'을 하나의 신앙적 메시아운동으로 발전시켜 2천년 유대인의 방랑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고,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국가를 다시 건설하게 하는 원천이 되었다고 한다.
시온산은 그리스도교인, 유대인, 회교도 모두가 성스럽게 여기고 있는 산이다. 시온이란 '산등성이' 혹은 '요새' 즉 성벽으로 둘러싸인 언덕을 뜻하는 말로, 예루살렘의 성을 가리키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사시던 당시의 시온산 지역은 예루살렘 성안에 있었어나 16C 중엽 오스만 터키의 술래이만 황제가 성벽을 구축할때 성밖으로 제외하였다.
비아돌로로사(VIA DOLOROSA)로 불리는 이 길은 원래 '아픔의 길' 혹은 '슬픔의 길'이었다. 성지 이스라엘을 순례하는 사람이라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보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이 '십자가의 길'은 1294년 리칼두스 신부에 의해 대략 위치가 정해졌다고 하는데, 그 후 1540년경 프란치스코 수도사들에 의해 지금의 코스가 확정되었다고 한다
* 시온문(시온 게이트)
* 최후의 만찬 기념성당 앞의
다윗왕
2. 최후의 만찬 기념성당
이 천 년 전 예수님의 흔적을 기억할만한 것은 없다. 이 성당을 점령한 무슬림과 유다교에 의해 그리스도교의 흔적은 모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치식 기둥 중간쯤에 전설의 새 펠리칸의 조각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신의 몸을 쪼아 낸 피로 자식을 살린다는 펠리칸은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을 구한 예수님의 상징적 이미지로 이 성당 안에 남은 유일한 그리스도교 상징이다.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다락방에 세워진 '최후의 만찬 기념 성당'과 그 지하에 '다윗왕의 무덤'이 있고, 바로 곁에는 성모 마리아님이 돌아가신 '성모 영면 성당'이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본거지가 시온산에 있었으며 그들은 1세기 무렵 이곳에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이 교회는 전쟁터에서 벗어난 지역인 관계로 전쟁터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으며 비잔티시대에는 더욱 확장이 되었다고 한다. 614년에 페르시아로 부터 파괴 되었다가 십자군에 의해 2개의 교회가 연결된 형태로 재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1176년에 아래 경당이 다윗의 무덤이 자리했던 곳으로 확인 되었고 1552년에 터어키인들에 의해 그리스도교인들이 경당에서 쫓겨나 이후 회교도의 기도 소리가 울려 퍼지는 회교도사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 펠리칸 조각
아치식 기둥 중간쯤에 전설의 새 펠리컨의 조각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신의 몸을 쪼아 낸 피로 자식을 살린다는 펠리컨은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을 구한 예수님의 상징적 이미지로 이 성당 안에 남은 그리스도교 상징이다.
* 이슬람들이 사용했던 흔적
이슬람 미랍(Mihrab)
* 다윗왕 무덤으로 간다. 남자는 모자를 쓰야한다
3. 성모영면성당
시온문 바로 남쪽에 위치한, 최후의 만찬 성당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성모 영면 성당은 시온산에서 가장 위용있는 건물로서, 예수님의 어머니 동정녀 마리아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워진 건물이다. 성모님께서 예수의 제자들과 함께 여생을 보낸곳이라고 전해 진다(사도1,13-14)
성모 영면 성당이란 말은 이곳에서 성모님께서 ‘잠드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이 성당은 성모님께서 생애의 마지막을 제자들과 함께 하고 하늘에 오르셨음을 기념하는 성전이다. 성모 영면의 모습을 재현한 상 주위로 참배객들이 둘러 서 있다.
전승에 의하면, 성령 강림 후 성모님은 이곳 시온 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지상 생애의 여생을 보내셨고, 시온산 위에서 돌아가시고 키드론 계곡에 묻히기 위해 옮겨졌으며 그곳에서 승천하셨다고 한다. 동방정교의 색채가 농후한 이콘이 제대 주변에 붙어 있다.
이곳에는 이미 초세기 사도들 시대에 기념 성전이 있었고 383년경에는 비잔틴양식의 성전, 415년경에는 예루살렘 주교 요한 2세가 대성전 '하기아 시온(거룩한 시온)'을 건립했었다. 이 대성전은 614년 페르샤군에 의해 파괴, 1009년에는 회교도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터키의 압둘마미드2세가 독일 왕 빌헬룸 2세에게 방문 기념으로 폐허가 된 부지를 선물하였다. 독일 황제는 쾰른 대 주교에게 주어 이 곳에 독일 천주교 베네딕도수도회가 현재의 기념성전을 1906년-1910년에 지어진 것으로 베네딕도수도회에서 관할하고 있다.
이 성당 지하에는 성모 마리아님의 영면하는 모습의 석상이 있고 교회 내부 천정과 벽, 바닥에는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 되어 있다. 20세기 중엽, 교황 비오 12세는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지상의 생애를 마치신 뒤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로 들어 올림 받으셨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진리'라고 선포했다.
성모 승천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같은 차원으로 생각하는 것이 교회의 오랜 전승이지만, 마리아는 '들어 올림을 받았다'고 표현하며,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표현으로 구분한다.
4. 골고타 십자가의 길 제1처 기도시작성당
라틴어로 ‘비아 돌로레스’(Via dolorosa, 고통의 길, 슬픔의 길)이라고도 하는 십자가의 길은 동쪽 성 밖에서 스테파노의 문이라고도 부르는 사자 문으로 들어가 곧장 가다가 300m 쯤 왼쪽에 보이는 한 아랍인 학교에서 시작한다. 이 학교 자리는 안토니오 성(城) 혹은 안토니오 요새가 있던 곳이다. 헤로데 대왕(기원전 37~기원후 4)이 자신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위해 지은 성채였다. 하지만 원래의 성채는 유다 독립 항쟁(기원후 66~70) 때 완전히 파괴되었고 지금은 학교 건물 아래에 흔적만 약간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초등학교 맞은편 길 오른쪽에는 작은형제회 수도원이 있다. 수도원 안에는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끌려 나오셨을 때 병사들에게 채찍으로 맞으신 것을 기념하는 채찍 성당,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을 기념하는 사형선고 성당 등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순례하는 한국인 순례자들은 보통 안토니오 요새 자리인 아랍인 학교에서가 아니라 이 채찍 성당에서 또는 이 성당이 있는 수도원 경내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시작하며 제1처를 바친다.
(마태16,24)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5. 주님 무덤 성당'(The Holy Sepulcher)
십자가의 길 기도 제10처부터 14처까지는 골고타 언덕에 있는 '주님 무덤 성당'(The Holy Sepulcher) 안에 있다. 예수부활성당, 또는 성묘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당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신 곳이며,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담긴 성지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324년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와서 예루살렘 주교에게 골고타와 예수 무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황제에게 청해 신전을 헐고 그 후 10년이 흘러 예수의 죽음과 부활기념 성전을 세운다. 이 기념 성전은 614년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손되고, 629년 보수되지만 1009년 카이로 출신 '칼리프 엘 하킴'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게된다.
이것이 '십자군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성전은 보수 및 개조되어(1149-1180년) 오늘날 성전의 모체가 되었으며 이후 예수 부활성당에서 무덤성당으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이후, 1545년 지진으로 종탑을 비롯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고,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으나 1808년 화재로 인해 상당 부분이 타버렸다.
그리이스 정교회 측에서는 러시아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고 오스만 터키의 외교정책을 힘입어 성전을 보수하고 보수한 부분을 자기들의 소유로 만들었다. 이 성당 안 제10처, 제11처, 제13처는 로마 가톨릭 교회, 제12처, 제14처는 그리스 정교회 관할이다.
* 예수님 무덤 경당
예수님 무덤 성당 중앙에는 '예수님 무덤과 부활 경당'이 있다. 이 경당은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공동 소유여서 무덤 입구에 3층 촛대(맨 아래 그리스 정교회, 가운데 아르메니아 정교회, 맨 위쪽이 가톨릭 소유)를 밝히고 있다. 예수님 무덤 경당 뒤편에는 무덤의 원주인인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요한 19,38)의 무덤이 있다.
* 제13처 예수님의 시신이 내려 놓였던 곳이라고 한다.
첫댓글 순례한 성지라 입력이 잘 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