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에 대한 검토를 청담을 통해서 더욱 발전해 갈 수가 있다고 보면, 독서회는 청담의 예찬 대상이라고 볼 수가 있다. 독서회에 대한 필자의 생각중에서, 말장난이라고 할 수가 있는 독서회와 독사회의 비교를 먼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필자는 가끔 독서회를 일부러 독사회라고 발음한다. 왠지 독서회라고 말 할려니까 무슨 대단한 거물급의 모임에 나간다고 할까봐서 먼저 겁먹는 나자신이 되어버린다. 또한 나자신을 자화자찬 할려고 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싫다.
꾸준하게 무엇인가를 견디어내지를 못하는 성격이라서, 독서회에 오랬동안 참여하다 보니 자랑감이 생긴 것도 기분이 우쭐해 진는 것은 당연하다. 독사란 굉장히 무서운 존재이다. 만약 산에서 만난다면 나는 화들짝 놀랄 뿐만 아니라, 이제 죽었구나 싶은 감정으로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것이 상상된다.
얼마전까지 열심히 독서회에 참여하던 L씨가 뱀을보면 그렇게 귀여워 보이는 데, 쥐는 무척무서워 도망가지만 땅꾼처럼 뱀을 꼭 따라가서 잡는다고 하던 말이 기억난다. 평범하고 또한 나보다는 무척이나 젊은 L씨의 말에 잠깐 충격이 일었던 것같다.
성서에서는 뱀을 지혜롭게 표현하였다. 비둘기같이 순하고 뱀같이 슬기로워지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에서는 가장 지혜로운 동물을 올빼미라고하여 지혜의 여신을 나타낼 때 사용하고 있다.
지혜의 왕을 솔로몬이라고 한다. 아기의 진짜 부모를 찾아준 판단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경주의 최부자는 지혜를 사용하여,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식인쥐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가 별을 관찰하다가 그만 우물에 빠져서 다른이들로부터 가난한 바보 취급을 받고, 참기름 짜는 기계로 부자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독서회에 참여하는 것은 청담을 함께 논함은로써, 세상읽기에서 지혜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터득하는 과정이라고 보여진다. 지혜란 자신과의 투쟁인 데, 책과의 고독한 싸움을 통하여 세상읽기에 인간의 어리석음을 조금씩 벗어 날려고 노력하는 과정인 것같다.
학교의 어원이 여유라고하며 여유에서 학자적인 기질이 생겨난다고 본다. 영국의 속담에도 할아버지의 책위를 기어 다니는 사람이 학자가된다고 하였다. 학자란 학술에 대한 원리와 체계가 세워진 사람이다. 또한 학술에 대한 개념을 꾸준히 검토함으로써, 학술에 대한 과학기술(technology)을 후세에 전수하는 인물임은 말할 필요가 없겠다.
학자적인 자질은 학술에 대한 지혜가 먼저이다. 인도에서 문학박사는 책을 한 트럭 정도 외워야 한다. 이것은 방법상의 문제이고 실제로는 학자적인 자질을 시험하기 위해서 이다. 그 끈기와 인내를 감당하는 과정을 보고, 앞으로 이 사람이 소위 어용이나 잔재를 피움으로써, 지혜를 남용하는 학자가 될 소질이 있으면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청담을 생각하고 실천할려고 마음먹는 다면, 소위 도를 닦는 사람의 지혜를 터득하게 될 것이다. <청담예찬>에서 청담을 형이상학이라고 하였으므로,그 뜻이 형이상학의 예찬이 되었다. <청담일지>는 청담을 실천할려는 고귀한 마음씨 혹은 기상을 일컫는다고 본다.
청담이란 독서토론의 과정이 전개될 때, 지적인 과정이 서서히 형이하학에서 형이상학으로 드높여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바꾸어 말하면 상식에서 학술로 점진적으로 바뀌는 장면을 청담이라고 볼 수가 있겠다.
어느 한 나라에서 문화의 응축된 형이상학은 속담에서도 찾을 수가 있겠다. 또한 문화이론에서 잘 이해될 수가 있다. 마침 나는 졸저 <효용미학>에서 문화이론중에서 효용미학이라는 문학예술의 이론이 만들었으므로, 쉽게 형이상학으로 나아갈 수가 생긴 셈이다.
문화이론은 인간을 보다 잘 이해하여 보자는 취지에서, 문화이론이 나와야함은 마땅하다고 본다. 효용미학은 인간의 정신 문화인 문학예술이, 인간의 정신적인 만족감인 정신의 정화(혹은 정서의 정화)를 통해서, 소위 “거듭 태어나는 인간”을 지향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듭 태어난다는 말은 성서에서 나왔지만, 여기서는 신앙인으로서 보다 차원 높은 종교인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교양인으로서 보다 인간구원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사회생활에 임할 수가 있는 진정한 지성인으로 변신할 수가 있다는 정도에서 그칠려고 한다.
청담일지(淸談逸志)란 청담일지(日誌, 일기의 뜻)가 아니다. 청담이란 “명리를 떠난 청아한 이야기(on unworldly topics)”이며, 일지란 “세속을 벗어난 고결한 뜻(noble intention)”이란 의미이다.따라서 청담일지란 “세속에서 벗어난 고결한 의도로 형이상학적인 논제를 (검토할려는 의도)”라고 해석할 수가 있겠다.
청담에서 논의할 논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문화라고 본다. 문화란 무형문화와 유형문화 중에서 주로 유형문화에 관한 것으로 볼 수가 있겠다. 유형문화도 자국의 문화와 외국의 문화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외국의 문화를 받아 들여야 문화의 지체를 막을 수가 있다.
문화를 받아들일 때는 문화의 이식과 동화가 이루어진다. 문화의 수입에는 문화에 대한 이론적인 접근을 통해서 비판을 거칠 수가 있겠다. 문화의 비판은 문화에 대한 보다 깊은 해석을 전제로 할려면 문화이론이 확립되어야할 것이다.
문화이론은 각각의 분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서양의 문화이론을 학습하여 소위 논문을 쓸 수가 있겠다. 또한 동양의 문화이론을 빌려와서 연구할 수가 있겠다. 문화이론 중에서 필자가 관심이 있는 부분은 예술과 관련된 미학이다.
미학은 헤겔의 <미학>에서 강조한 예술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문학예술이라고 보아야하며, 문학예술의 이론이 가장 흥미롭게 관찰될 성격이라고 보여진다. 문학예술에 관한 이론을 학습하여 보면, 먼저 모방이론(일명 미메시스)에서 흥미를 느끼게 될 것이며, 다음으로 효용이론도 관심을 약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효용이란 독자가 작품을 감상한 후에 느끼는 효과라고 볼 수가 있다. 주로 경제학에서 최소의 경비로 최대의 효과라고 할 때, 여기서 효과와 비슷한 것이라고 본다. 독자가 작품으로 깊이 만족한다고 볼 때, 만족은 주로 작품이 주는 쾌락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쾌락은 작품속의 감정(정서)이 독자에게 전이된 경우인 데, 효과적으로 감정의 전이(transfer)가 이루어 질려면, 감정이 Aristotle의 <시학>에 의하면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느끼도록 플롯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플롯은 희극이나 비극이 있지만, 특히 비극에 제시된(구성된) 감정이 정화되어, 소위 카타르시스(Catharsis)란 현상이 독자에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문학의 효용은 감정의 정화 즉 카타르시스로서 그 실체가 파악되는 셈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파악한 카타르시스의 개념은 비극에서 일어나며, 공포와 연민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간단한 언급뿐이어서, 사실 효용에 대한 약간의 개념 소개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효용을 이론화하여 효용이론으로 나아갈려면 새로운 도전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필자는 효용을 이론화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검토와 노력 끝에, 약간의 성과를 거둔 상태인 데, 바로 졸저 <효용미학>을 통하여 카타르시스 즉 감정의 정화에 대한 이론을 전개한 바 있었다.
<효용미학>에 의하면 카타르시스는 한가지 사실인 공포라는 기분 나쁜 감정에 의해서 일어났다기 보다는, 공포라는 쾌락을 통해서 독자가 만족하게 된다는 것을 제시하였다.여기서 기분 나쁜 감정과 쾌락의 관계는 많은 미학연구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므로 구태어 여기서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필자가 카타르시스와 쾌락의 관계를 전개할 때에, 쾌락을 주로 프로이드의 리비도(성적 에너지, 혹은 성적 충동)에 의지하여 이론을 전개하였다. 쾌락이 곧 카타르시스임은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잘 알려진 상식이기 때문이다.
이론의 전개는 쾌락이란 리비도외에도 플롯(Plot)에서 사용하는 긴장감이란 정서도 사용하였다. 이론의 전개에 따라서, 플롯이란 감정의 정화에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는 가정하에서, <시학>에서 플롯의 개념을 재검토하여, 쾌락과 긴장감이 플롯의 사건에 연결내지 결합된 요소로 파악하여 정리하였다.
결국 효용이론은 플롯에 의해서 전개된 이론이 되었으며, 플롯의 재해석이 불가피하였다. 독자가 문학예술을 읽고 감정의 정화가 일어났다면, 플롯에 의해서 정화가 일어났다고 볼 수가 있다.그런데, 여기서 전개된 플롯의 두 감정(쾌락과 긴장감)이 사건속에서 단순하게 독자에게 작용한 것이 아니고, 역동적인(dynamic) 작용을 하면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두 가지 감정이 역동적으로 작용함으로써, 감정의 정화가 일차원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이차원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보아서, 문학예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볼 수가 있어서 좋은 것이다.
문학예술에서 감정의 정화가 역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결국은 문학예술을 이차원적인 정서의 전달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재미가 있을 것으로 본다. 문학예술의 이론을 통한 접근이 문학예술의 깊은 이해와 통찰을 가져올 수가 있으며, 결국 문화에 대한 교양이 생겨날 것으로 예상된다.
청담이 야만인에서 교양을 갖춘 지성인으로 거듭 태어나는 데 필요하듯이, 문화이론을 계속해서 검토하게 해줌으로써 새로운 문화창조에 밑거름이 될 수도 있을 것같다. 따라서 청담을 통하여 새로운 문화이론으로 정립할려면 학자적인 자질을 갖춘 청담인이 많이 나와서, 독서토론을 통한 청담이 바로 문화창조의 주역을 담당하게 될 날을 앞당겨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