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폰에선 오른쪽 상단
앱으로 보기를 클릭하시면 보시기 편리합니다.
밤 차 (1) _ _ 유승엽
" 멀리 기적이 우네. . ."
기적이 우는게 아니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슬픈 노래를 끝으로 가수의 꿈을 접은 나는
스스로 작곡가가 되어(사실 작곡가는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악보만 조금 그릴 수 있다면
가능 합니다. 한글을 알면 누구나 시를 쓸수 있듯이 말입니다.)
저 자신에게 최면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너는 할 수 있어... 라고 말입니다.
이일이 아니면 딱히 할 일이 없었으므로 작곡가로 인정을 못 받으면 제 인생은 끝나는 거였지요.
더군다나 연애를 해 결혼을 덜컥 해버렸으니 그야말로 벼랑 끝 전술 이였지요. 그런데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슬픈노래는 싫어요 ” 를 작곡하면서 어느 정도 내공은 쌓아놓은 지라 자신은 있었지요.
저는 우선 매니저가 있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그때 당시 제일 잘 나가던 박영걸 씨를 찾아 갔습니다.
그 당시 그는 신중현씨의 “미인” 을 히트시켜 많은 매스컴의 집중을 받던 사람 이였는데 제가 만나자고
하니 만나줄 이유가 없었지요. 이런 저런 궁리 끝에 직접 맞닥뜨리기로 하고 방송국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그를 보고 저는 꾸벅 인사를 하고 나는 아무개라고 하는 작곡가인데 나를 작곡가로 스카웃을 하면
큰돈을 벌 것 이라고 운을 떼였지요.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지금까지 쓴 곡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길래 “슬픈노래는 싫어요”
한곡 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럼 자네가 그 노래를 부른 유승엽 이냐고 묻는 것 이였어요.
저는 그렇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그는 그 노래를 무척 좋아했던 거였습니다.
그러더니 대뜸 내일 계약 하자고 약속을 하더군요. 말이 계약이지 계약금도 없는 계약 이였지요.
단지 내가 너를 키워주마... 아니 잘하면 키워 줄 수도 있다... 뭐 그런 약속을 쓴 서류였습니다.
지금은 작곡가가 히트 치면 돈방석에 올라앉지만 그때는 그야말로 자기 자신이 좋아서 하는 거라
누구한테라도 작곡가라면 깡통 차는 직업으로 여길 때였지요. 3년을 계약했는데 일주일 뒤에 다시
5년을 하자는 거였어요.
그때는 전혀 제 의사를 말할 단계가 아니 였으므로 시키는 대로 싸인 을 했습니다.
그래도 당시 제일 잘 나가는 매니저 를 두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위안 삼았으나 그 사람도
그때 신중현씨와 헤어지고 사무실도 없이 방송국 앞 커피숍에서 일을 보던 때 였습니다.
그때는 보통 미군부대 쇼 에서 잔뼈가 자란사람 들이 매니저를 했는데 보통 거칠고 욕들도
많이 하고 좀 쌍스러웠습니다.
그나저나 계약은 했으니 무슨 일을 시키려나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하루는 다방으로 나오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기타를 들고 나갔는데 어디서 후질 구레 한 아저씨를 소개하는데 가수 이은하 아버지라는 거였어요.
저는 그때 당시 우리가요를 아주 경시하던 때였는데, 이유는 나의 음악세계와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조금
건방을 떨 때 였어요.
왠 만한 트로트는 노래라고 인정하지도 않았지요.
나훈아 남진 등이 인기를 날릴 때였는데 저는 그때 그들이 얼마나 촌스럽게 보였는지 그들의 음악을
듣지도 않을 때였지요. 그러니 이은하 라는 가수를 알 턱이 없었지요.
서로 인사를 나누는데 그쪽에서도 나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지요. 하긴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그 나름대로 유명 작곡가 만 찾아다녔을 것이니까요. 공교롭게도 그때 이은하 씨도 박영걸씨와
계약을 맺고 바로 시작을 할때 였는데 저하고 콤비를 맺어준 것이지요.
이렇게 첫 만남은 서로 탐탁지 않게 시작 되었는데 그때 알고 보니
이은하 아버지는 청량리에 있는 그래도 꽤 큰 설렁탕집을 딸 가수시키는
바람에 팔아버린 그런 사람 이였어요. 옛날에 유랑극단 비슷한데서
연주를 했는데 그때마다 딸을 데리고 다니면서 살아서 이은하씨가
곧잘 노래를 따라 부르던 모양 이었나 봐요.
그래서 주변에서 가수 시키라니까 시작한 모양인데 13살 때 “님마중”
이라는 노래로 데뷔를 해서 몇 년만에 모아놓은 돈 모두 날리고 박영걸씨
한테 까지 오게 된것 같았습니다.
마땅히 연습할 장소도 없어 정릉에 있는 이은하집 에서 연습을 시작했는데
첫날부터 서로 핀트가 엇나가는 거였어요.
내 나름 대로 힘들여 작사 작곡한 “밤차”를 시키는데 트로트 만 부르던
스타일이라 전혀 물과 기름처럼 잘섞이지가 않는 거였습니다.
나는 그때 그래도 내 나름대로 최고의 리듬을 찾아내서 새로운
스타일에 도전 해보고자 했는데 상대 가수는 이해를 못하는 거였어요.
우선 음역 폭이 좁아 그것을 지적했는데 연습을 지켜보던 이은하 아버지가 알았다고 하면서 며칠 있다가
보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며칠 후에 갔는데 방안에 있던 기타가 부러져 있는거예요. 기타 없이 연습을 하는데 안 올라가던 음이
충분히 올라 가는거였어요.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그 기타로 산에 올라가 연습시키다가 잘 안되니까,
때린 모양 이더라구요. 하여튼 음이 높이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서울 녹음실에서 녹음 을 했는데. 그때는 통상적으로 한 프로(약3시간) 단위로
계산을 했는데 보통 한 프로에 12곡정도가 녹음 되었지요.
그러나 제가 데리고 간 연주자들은 데블스 라는 그룹 이였는데 그때 그들도 박영걸씨가 데리고 있었죠.
요 근래에 고고70 이라는 조승우 와 신민아 출연의 영화가 있었는데 그 영화가 그들의 스토리를 영화한 것이지요.
특이하게 브라스를 두명 쓰는 그룹 이였는데 그때 세계적인 그룹 코모도스 사운드를 내는 국내 유일의 그룹 이였어요,
그런데 그 들은 약점이 악보에 익숙지 않았지요. 그러나 악보에 익숙지 않은 사람은 청각이 발달 합니다 ,
그야말로 이가 없으면 잇몸인 것이죠. 그러나 그들의 즉흥성과 재능은 이 “ 밤차” 를 전무후무한 히트곡으로
만들어주었지요.
그들이 근무하는 여의도 관광호텔에서 연주 끝나면 짬짬이
연습을 했는데 서로 입으로 맞추었지요.
구궁,짜가짜,구궁,짜가짜,구궁, 짜짜짜작 뭐 이런 식으로 연결해
나갔습니다.
그들도 녹음실 경험이 별로 없어 시간이 많이 결렸는데 한 프로에
12곡이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들은 한 프로에 한 곡도 못 들어갔지요
녹음실 기사가 돈 못 받을까봐 안절부절 못했지만 저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다음 날 또 시작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 프로를 쓰고 한 곡을 녹음했는데 그때 당시에는
꽤 드문 일이였습니다. 노래까지 끝내 놓은 후 평을 들어보니
워낙 새로운 스타일이라 평이 안 나오는거 였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동양 텔레비전 에서 첫 생방을 했는데
(그때는 쇼도 생방송이라 위에 있는 조명이 터지면 방송중에 가수들이 도망도 가고 그랬음) 노래가 신나게 나오는데
가수고 백댄서고 할것 없이 모두 우왕좌왕 하면서 춤추는 꼴이 말이 아니였습니다.
지금 장난으로 추는 군바리 춤으로 이 곡을 노래 부르고 안무를 했으니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이은하 를 지방공연을 4개월 보냈는데 목적은 안무를 해오라는 거였지요. 1978년 3월쯤에 지방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이은하가 드디어 쇼 쇼 쇼 에 섰는데 , 이번에는 막 사방을 찌르는 거예요. 아마 죽기 살기로 그런 것
같았는데 방송국 카메라가 이것을 못 잡는 거였어요.
그때만 해도 방송카메라를 고정시켜놓고 노래를 부르던 때였으니까요. 심각하게 우리 팀은 회의를 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할것 인 가. 과연 더 찌를 것인가 말것인가. 우리는 노심초사 끝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 찌르자 !!! 될 때 까지 찌르자 !! 방송국에서는 그런대로 재미있는지 섭외는 계속 들어왔지요.
그렇게 찌른 지 3개월 되던 어느날...
밤차편 계속...
첫댓글 사진이 아직 미착이라...그냥 제가 찾아서 올렸습니다... 새로운 사진이 도착되면 다시 올리겠습니다.
그 시절 저도 '밤차' 노래 좋아했었어요...
그 시절,, 이은하의 "밤차" ...그야말로 폭발적이었지요.. 사방팔방, 마구마구..찌르기 춤..구궁,짜가짜
제 동생이 재롱을 부릴떄 이은하의 밤차로 찌르기하며 춤추던 기억 ,가족들을 웃게 했답니다.
밤차 참 지겹게 들었는데 저 역시 대중가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근성으로 듣고 T.V 에서 하도 많이 나와 지겨울 정도였습니다. 유명 가수와 가요는 이렇게 다듬어 지고 만들어 지는군요. 그냥 되는게 하나도 없군요.
많이 듣던 뱜차가 그렇게 탄생 하였나 봅니다..이거 아는사람은 숲속단원들 밖에 없을 꺼에요
밤차의 비밀을 알게됐녜요. 빨리담차로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