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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18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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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일본이 야욕을 드러내자 청나라는 양국이 함께 조선의 내정개혁을 수행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일본이 이를 거부하고 조선에 주둔해 있던 청나라 해군을 기습 공격하자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의 거듭된 공격에 청나라는 결국 화친을 요청했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음으로써 전쟁이 종결되었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청나라의 중화질서가 붕괴되었다.
19세기 서양 열강들이 아시아에 진출하면서 청나라, 조선, 일본 3개국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었다. 우선 청나라는 국내외적으로 태평천국 운동과 아편전쟁을 겪으면서 근대화에 대한 의지를 다졌으며, 야심차게 양무 운동을 실시했다. 하지만 양무 운동은 여러 가지 한계를 드러내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또한 당시 조선은 서양과 일본의 통상 수교를 거부하면서 쇄국 정책을 고수했다. 조선은 오직 청나라와의 외교 관계만을 중시한 채 주변과 국제 정세에 적절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편 일본은 1853년 미국의 개방 요구를 받아들인 데 이어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적 통일 국가를 건설하고, 자본주의를 크게 발전시켜 근대화를 이룩했다. 또한 제국주의의 확장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조선에 대해 강압적, 침략적 태도를 보였다.
1875년, 일본은 일본 해군 측량선 운요호를 조선 해안 탐측을 핑계로 강화도 앞바다에 침투시켰다. 이에 조선이 방어적 포격을 가하자 일본은 이를 구실로 무력을 앞세워 통상 수교를 강요했다. 1896년, 결국 조선은 일본과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을 맺고 일본에게 개항을 허락하고 말았다. 강화도 조약의 제1조는 조선의 독립 주권을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종주권을 배격하고자 한 것이다. 게다가 1880년에 일본이 조약에 따라 한성에 공사관까지 설치하자 청나라는 조선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아시아 지역을 둘러싼 청나라와 일본의 갈등은 이전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 진출의 야욕을 고스란히 드러내자 청나라는 더 이상 일본을 묵과할 수 없었다. 1882년, 조선에서 군란이 발생하자 청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여 영향력을 입증했고, 이듬해에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맺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다. 1884년에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이를 3일 만에 진압했고, 일본과는 향후 조선에 출병할 때 상호 통고할 것을 약속한 톈진 조약을 맺었다. 조선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지배력에서 우위를 차지한 청나라는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외교와 내정에 깊이 간여했다. 그러나 일본은 자국의 경제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 침략을 중단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군비 증강을 멈추지 않았다.
1894년, 조선 농민과 동학교도들이 폭정을 제거하고 왜구를 몰아내자는 구호를 내걸고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다. 동학농민군이 순식간에 전주를 점령하자 조선은 청나라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청나라는 톈진 조약에 따라 일본에 파병 사실을 알리고 위안스카이를 특명전권대사로 임명하여 원군을 파병했다.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자 일본도 톈진 조약을 근거로 조선에 파병했다. 그러나 청나라와 일본 두 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즈음, 동학농민군은 조선 정부군과 화의를 맺고 전주에서 철수한 상태였다.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되자 청나라는 일본에게 양국의 동시 철군을 제의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제의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이 함께 조선의 내정 개혁을 수행하자고 제안했다. 청나라가 일본의 제안을 거부하자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면서 청나라에게 시비를 걸었다. 일본의 도발에 청나라 정부는 전쟁을 벌이자는 파와 화친을 하자는 파로 나뉘었다. 광서제(光緖帝)는 일본과의 전쟁을 통해 친정(親政)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고 일본의 세력 확장을 억제하고자 했다. 반면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태후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광서제에게 권력이 이동될까 두려워 일본과의 화친을 주장했다. 그리고 또 다른 화친 주장파인 이홍장은 열강들이 나서서 청나라와 일본 문제를 중재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열강들은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을 원했고, 일본의 전쟁 도발에 암묵적인 지지를 보냈다.
1894년 7월, 일본이 조선의 아산만 근처에 주둔해 있던 청나라 해군을 기습 공격하면서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청나라 군대는 조선의 평양으로 후퇴하여 재집결했다. 이에 일본은 육군을 네 개로 나누어 평양으로 진격해 청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청나라의 좌보귀가 격렬히 항거했지만 결국 숨을 거두었으며, 섭지초는 도망쳤다. 전선은 해전으로 확장되어 황해(黃海)에서 청나라의 북양함대와 일본 해군과의 격전이 벌어졌다. 정여창과 유보섬은 북양함대 소속 10척의 군함을 이끌고 12척의 일본 해군과 맞섰으나 일본 해군에게 대패했다. 이 해전으로 큰 피해를 입은 북양함대는 여순항으로 피신했고, 일본은 황해의 통제권을 장악했다.
한편 평양을 빼앗긴 청나라 군대는 압록강 근처의 요새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군대를 정비한 일본 육군이 몰래 압록강을 넘는 데 성공하여 단둥 동쪽 호산에 위치한 청나라 군대 주둔지를 공격했다. 청나라 군대가 단둥으로 후퇴하자 일본 육군은 단둥을 향해 다시 진격했다. 이로써 청일전쟁의 전선이 청나라 영토 안으로 확장되었다. 이와 동시에 또 다른 일본 육군이 요동 반도의 도시를 점령해 나갔고, 결국 여순항은 일본군에 포위되고 말았다. 1894년 11월, 여순은 마침내 일본 군대에게 함락되었다. 여순을 함락한 일본 군대는 오늘날 '여순 대학살'이라고 불리는 학살을 자행했다. 여기서 학살된 시민들의 수는 무려 2만 여 명으로 추정된다.
수세에 몰린 청나라는 이홍장을 전권대사로 파견하여 일본과 화친을 요청하고, 굴욕적인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음으로써 청일전쟁이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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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대학살이 있은 후 청나라는 일본에게 화친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일본은 웨이하이(威海衛)로 피신한 북양함대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일본 육군과 해군은 20여 일 만에 웨이하이를 점령한 후, 유공도(劉公島)를 점령했으며 북양함대를 궤멸시켰다. 그러나 당시 북양함대는 일본군과 일전을 벌일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이홍장이 소극적 방어를 고수했기 때문에 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일본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요동 반도, 발해만, 산동 반도를 점령해 나갔다. 아울러 대만을 점령하기 위해 팽호도 작전에 돌입했다. 1895년, 결국 청나라는 이홍장을 전권대사로 파견하여 일본과 화친을 요청했다.
이홍장이 건립한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함대로, 청일전쟁 때 황해해전에서 일본군 함대에 대패해 괴멸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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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4월, 청일전쟁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며 종결되었다. 전쟁의 승리로 얻은 시모노세키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청나라는 조선이 완전한 자주 독립국임을 인정한다.
둘째, 청나라는 요동 반도, 대만, 팽호도를 일본에게 할양한다.
셋째, 청나라는 2억 냥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넷째, 사시, 중경, 소주, 항주 등의 4개 항을 개항하며 일본 선박의 자유로운 양쯔 강 항해를 보장한다.
다섯째, 일본군의 웨이하이 주둔권 보장과 일본인의 거주, 영업, 무역의 자유를 승인한다.
시모노세키 조약은 난징 조약 체결로 형성된 청나라의 반식민지 상태를 더욱 심화시킨 조약이며, 일본뿐만 아니라 다른 열강들이 또다시 청나라에서 이권을 챙길 수 있는 도화선이 되었다.
먼저 러시아는 일본의 요동 반도 진출에 위기감을 느끼고 프랑스, 독일과 연합해 일본에게 요동 반도를 청나라에 돌려주라고 압력을 가했다. 일본은 3국의 압력에 굴복해 요동 반도의 반환 의사를 표명했고, 대신 3천만 냥의 배상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이를 부담할 능력이 없었다. 이에 러시아는 청나라를 도와 독일, 프랑스 은행에서 1억 냥을 빌릴 수 있게 하고, 도움을 준 대가로 여순과 대련의 조차를 허락했다. 계속해서 청나라는 프랑스에게 광주만과 광동, 광서, 운남을, 독일에게는 자오저우만을, 영국에게는 웨이하이, 구룡, 양쯔 강 유역을 조차할 수 있게 했다.
이처럼 청일전쟁의 패배는 청나라를 조각조각 분할시켰으며, 청나라 사람들에게 식민통치에의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청나라가 조선 종주권을 포기하고, 과거 조공국인 일본에게 우세한 자리를 내줌으로써 중화질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ㆍ 1853년 : 일본이 미국의 개방 요구를 받아들이고,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이룩하다.
ㆍ 1884년 : 조선에서 일어난 갑신정변을 청나라가 3일 만에 진압하고 일본과 톈진 조약을 맺다.
ㆍ 1895년 :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음으로써 청일전쟁이 종결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