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작성 과정 해설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3 - 1649)
영국 교회의 39 신조에 서명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종교 정책에 있어서 중도의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이런 태도는 오히려 양쪽의 반대를 받게 되니, 카톨릭 교회 측에서는 개혁 교회 쪽을 지지한다고 보았고, 개혁 교회권에에서는 불완전한 개혁을 가속화하여 카톨릭 교회의 잔재로부터 교회를 깨끗케(Purify)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어나 '퓨리탄(Puritan)을 형성하였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었을 때 후계자가 없었으므로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를 왕으로 모셔옴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합병합니다. 이 왕이 제임스 1세(JamesⅠ)인데, 그는 퓨리탄들의 청원서를 거절하면서 '감독 없이 왕이 없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즉 감독 제도를 포기하는 것은 왕권의 존립 자체를 위협한다고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영국사에서 교회가 한 사람의 감독에 의해서 지배되는 체제와 한 나라가 왕에 의해서 지배되는 체제는 맥락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장로들에 의해서 지배되는 장로정치와 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의회정치는 맥락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임스Ⅰ세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서는 사태를 잘 파악하였으니, 만약에 영국이 청교도들처럼 장로교 국가가 되면 결국 왕권이 유명무실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감독 없이는 국왕이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청교도들에게 대한 회유책으로서, 1611년에 '흠정역'(King James Version)의 번역을 허락하였습니다.
제임스Ⅰ세가 죽고 난 다음에 찰스Ⅰ세가 국왕이 되었는데 이 찰스Ⅰ세는 영국 성공회에 대한 대단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영국 성공회야말로 가장 깨끗한 전통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찰스 1세는 영국 교회에 대해서 카톨릭 제도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스코틀랜드 교회에 대해서도 감독제를 취할 것을 강요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영국과 스코틀랜드 사이에 내전이 발생합니다. 그러자 청교도들은 스코틀랜드를 적극 지원하게 되었고, 따라서 영국 안에서도 내란이 일어나게 되어, 1642년에서 1649년까지 왕당파와 청교도들 사이에 충돌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내란은 점차적으로 청교도들의 승리로 굳어져 갔는데, 이러한 정세 속에서 1643년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하게 됩니다.
즉 영국 의회는 당시 격렬한 논쟁이 되고 있던 일련의 신앙 문제들을 정리하기 위한 신학자들의 회의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개최하게 됩니다. 회원들의 면모로는, 영국 교회 소속의 청교도 목사들 121명, 평신도 국회의원 30명, 에라스티안 3명, 스코틀랜드에서 온 자문관 6명 등입니다.
회의는 '영국 교회의 39개조 신조의 교리를 수호하라'는 명령에 따라 이에 대한 개정 작업에 들어갔지만(1643, 7, 1), 다시 의회의 새로운 요구를 받고(1643, 10, 12), 신조 개정 작업이 아닌 아예 새로운 신조 작성 작업으로 들어가 첫 위원회를 갖게 됩니다(1644. 8. 20). 3년 여의 수고 끝에 신앙고백서 초안이 작성되어 상원에서 통과를 본 후(1647. 2.) 하원으로 넘어갔습니다.
하원에서 심의를 기다리는 동안 스코틀랜드 대표들은 이것을 본국으로 가져가 스코틀랜드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공표하게 합니다(1647, 8,2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첨부된 성경 구절들에 대한 보다 면밀한 검토가 끝난 후 마침내 하원에서도 통과됩니다(1648. 6. 20).
여기에 덧붙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주석하고 보충 설명하는 196문답으로 구성된 대요리문답이 작성되었고,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기 위하여 이것을 좀더 간결하게 다음은 107문답의 소요리문답 작성이 마쳐진 후 의회의 승인을 받게 되었습니다(1948. 9. 15).
총 33장으로 구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1장에서 모든 진리의 원천인 성경에 대한 고백부터 시작합니다. 두 번째 부분(2-5장)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며, 세 번째 부분(6-20장)에서는, 죄를 범한 인간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언약(6-7장),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8장),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길과 효과(11-20장) 등을 고백했습니다.
네 번째 부분(21-26장)은 기독교 윤리를 다루었으며, 마지막 다섯 번째 부분(27-33장)은 교회와 성례전과 종말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로마 천주교회가 발렌시아 교회회의(Council of Valencia, 1229)를 열어, 모든 신앙과 생활을 성경에 근거하여 살려고 하던 피터 왈도(Peter Waldo)와 그의 사상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말씀만 사랑하던 100만 명의 성도들을 처형하고, 성경을 금서로 지정하면서, 중세 교회는 무지와 미신이 왕 노릇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지와 미신으로부터 교회를 해방하기 위해, 1517년 마틴 루터가 성경적인 개혁운동을 시작하였고, 그를 이어 쯔빙글리, 부쳐, 칼빈, 베자 등에 의한 개혁 운동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운동을 최종적으로 종합하고 오직 성경에 근거한 신학을 확립한 것이 1643년 7월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서 열린 웨스트민스터 총회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던 영국 의회에 의하여 주도되었는데, 의회는 1643년 6월 12일 영국 교회의 정부 형태와 예배를 정착하고, 그릇된 교훈과 해석으로부터 영국 교회의 교리를 정화하며 옹호하기 위하여 교회회의로 모일 것을 결의하고, 영국 전역의 경건한 청교도 목사 121명과 상하원에서 파송한 30명의 의원으로 총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뉴잉글랜드, 스코틀랜드와 하나됨을 나타내기 위해 존 코튼(John Cotton)을 비롯한 3명의 뉴잉글랜드 청교도와 알렉산더 핸더슨(Alexander Henderson)을 비롯한 8명의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를 총회에 초청하였다.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은 회의에 참석하여 많은 공헌을 하였으나,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당면한 문제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의회는 참석자들에게 매일 4 실링씩 주도록 예산을 책정하고, 사회자와 서기를 선발하여 회의를 인도하게 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1643년 7월 1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헨리 7세 채플(Chapel of Henry VII)에서 개회되었다. 청교도들은 칼빈의 신학 전통에 따라 성경의 권위를 최종적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역사적, 문법적으로 해석하여, 그에 근거한 교리, 예배, 교회 정치 원리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그들은 매 월요일 아침마다 다음과 같이 서약해야 했다. 내가 회원으로 있는 이 회의에서, 나는 교리에 관하여는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합치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고, 또 권징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교회의 화평과 유익을 위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기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며 서약합니다.
청교도들은 교리와 예배와 교회 정치 사상이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확정되기를 소원하면서 자주 경건회를 가졌다. 그 한 예를 들어보자. 총회에 참석하였던 베일리(Robert Baillie)의 기록에 의하면, 경건회는 기도와 말씀으로 채워졌다. 트윗세 박사(Dr. Twisse)가 간단한 기도로 시작하였다. 마샬(Marshall)이 경건하게 총회 회원들의 죄를 고백하면서 2 시간 기도하였다.
애로우스미스(Arrowsmith)가 1시간 설교하였다. 그리고 찬송이 있었고, 바인즈(Vines)가 2시간 기도하였다. 팔마(Palmer)가 1시간 설교하였고, 씨맨(Seaman)이 2시간 기도하였다. 찬송을 드린 후 트윗세 박사가 간단히 기도한 후 축도로 폐회하였다.
청교도들은 이와 같은 성경적 신학 원리와 경건 훈련에 기초하여 총회를 운영하였다. 그들은 토요일과 주일에는 모이지 않았고, 그 외의 날들은 매일 9시에 회의를 시작하여 오후 1시나 2시까지 논의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오후에는 소위원회 별로 모여 분과별 토의를 가졌다. 이러한 시간표에 따라 총회는 1649년 2월 22일까지 계속되었다.
5년 6개월에 걸쳐 1,163번의 회의를 가진 결과, 개혁주의 신학의 정수라고 불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대요리문답(Larger Catechism), 소요리문답(Shorter Catechism), 교회 행정 지침서(Form of Church Government), 공예배 지침서(Directory for the Public Worship of God)와 같은 성경적인 문서를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문서들은 영국 국교회의 딘 스탠리(Dean Stanley)가 지적한 것처럼, 어떤 신학적 작품보다도 신학적 통찰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심오한 문서들로 성경만을 신앙의 표준으로 받아들이는 전 세계 개혁주의 교회들의 신앙적인 표준 문서가 되고 있다.
(오덕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