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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종 엄마/노정희
얼마만인가, 작은아이가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사귀었던 훈이 엄마를 만났다. 자칫하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을 텐데 자석처럼 서로의 시선을 당긴 것이다. 골목에 모여 이런저런 정보를 교환했던 십 수 년 전의 추억이 와르르 쏟아졌다. 횡설수설 말의 순서가 얽히고설킨 만큼 궁금한 것이 많았다. 아이들은 많이 컸겠지. 하긴 벌써 대학에 입학했으니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흐른 세월이 있으니 훈이도 많이 의젓해 졌을 거야. 근황을 묻자 미간을 찡그린다.
“왜 그러는데?”
곤히 잠든 새벽녘의 전화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을 깼단다. 돈이 없어 택시를 탈 수 없으니 팔공산 어디서 무작정 기다립니다요 하더라나. 연신 하품을 하면서 차를 몰고 접선장소에 도착하니 몇 명의 남녀 애들이 어울려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 희희낙락이었다. 시내를 한 바퀴 돌다시피 하며 훈이 친구들을 집 앞까지 배달시키고 나니 부아가 치밀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분을 못 이겨 홍수에 봇물 터지듯 와르르 욕설을 퍼 부었더니, 되레 삿대질하는 아드님 말 하는 본데 좀 보소.
“왜 그렇게 아들을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세요?”
잡아먹지 못해서?
“가가 가가?”
말을 댕강 잘라먹는 나를 불만스럽게 바라보던 훈이 엄마가 잠시 후 상황판단이 되었는지 피식 웃음을 짓는다.
“가가 가다.”
병아리 빛깔의 옷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니는 훈이가 나타나면 골목이 떠들썩했다. 목청은 또 얼마나 컸던가. 하루는 다짜고짜 부모님 결혼사진을 달라고 졸랐다. 유치원에서 ‘결혼’에 대한 수업을 한다며 부모님 결혼사진을 가져 오라고 했단다. 그러고 보니 당시 집집마다 장식장이나 탁자위에 바른생활 교과서처럼 반듯하게 올려 진 결혼사진이 훈이네 집에는 보이지 않았다. 사진을 시골 할머니 댁에 두고 왔다고 해도, 너무 깊이 보관하다 보니 찾을 수가 없다고 해도 막무가내이었다.
훈이 고집을 누가 당하랴,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해 두었던 사진을 결혼식 이후 처음으로 꺼내 보았다. 사진 속 뽀얀 얼굴의 신부는 목련꽃처럼 피어나고, 목련꽃 옆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신랑 모습이 영화배우 저리가라였으니 훈이 인물이야 따져보나 마나가 아니겠는가.
훈이는 그 멋진 결혼사진에 연신 입을 맞추더니 자신도 사진속의 예쁜 엄마하고 결혼할 거라고 공표를 했겄다. 마누라 예쁘다는 말에 기분 좋아진 훈이 아빠도 벙글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 아들은 역시 눈이 높아요. 아빠를 닮아서 여자 보는 안목이 있다구.”
하하 호호 가족이 웃음꽃에 파묻혀 꽃향기에 취해 가는데 갑자기 훈이가 입을 삐죽거렸다.
“그런데 엄마는 밥을 얼매나 묵었길래 이케 배가 뚱뚱해 졌노?”
“으응. 그케, 밥도 많이 먹었고 과일도 많이 먹었더니 배가 커졌나보네.”
갑자기 식은땀이 등줄을 타고 흘렀다. 그런데 아직도 웃음꽃 향기에 취해 있던 훈이 아빠가 한마디 거들었다지 뭔가.
“인마, 그건 밥을 많이 먹어서 배가 커진 것이 아니고, 네가 엄마 뱃속에 들어가 있어서 그런 거야.”
에고야, 태초에 하느님이 남자를 만들 때 지능지수를 낮게 만든 것이 분명하다. 또한 눈치코치 없게 만든 것도 분명하며, 여자 속 뒤집어 놓으려고 만든 것도 분명하다. 여자는 무슨 죄가 많아서 뒤통수치는 남자에게 밥 해 먹이고 평생을 수발해야하나. 그동안 꼭꼭 숨겨왔던 결혼사진을 아이에게 보여주기까지 조마조마 새가슴이 되었거늘, 다행히 무사통과 되려나보다 싶었는데 아주 가까이에 악역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숨을 죽이고 훈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훈이는 한참동안 턱을 괴고 멀뚱멀뚱 눈을 굴리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목청이 어찌나 큰지 대성통곡수준이었다. 달래면 달랠수록 발버둥을 쳤다.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한 아름 안겨준 후에야 울음이 잦아들었는데, 도대체 그렇게 슬프게 운 까닭이 무어냐고 물어 보았다.
“사진 속의 엄마가 나를 잡아 묵어서 배가 뚱뚱해 졌잖아, 엄마는 배가 고파서 나를 잡아 묵었는지 몰라도 나는 얼매나 아팠겠노?”
졸지에 식인종이 되어버린 훈이 엄마 때문에 눈가에 주름이 서너 개는 더 늘었지 싶다. 그 사건 이후 훈이 엄마는 본의 아니게 '식인종'이라는 명찰을 달게 되었다. 옛날을 생각하며 한참을 웃다가 다시 한숨 쉬는 훈이 엄마를 다독였다. 훈이 뒤에는 여자애들이 줄을 이어 구애를 한다니 며느리 맞아들이기 힘든 세상에 이 또한 횡재일 터, 늦복 터졌다고 어깨를 감싸안았다. 젊은 날에 사랑놀이하는 것은 당연지사제, 공부만 잘 한다고 출세한다던가. 훈이 엄마도 어린 나이에 연애해서 훈이까지 덤으로 뱃속에 넣어 결혼식 올렸잖아. 아마도 친정부모 속깨나 썩였을거야. 하지만 지금 알콩달콩 남부럽지 않게, 행복하게 살고 있잖은가.
원래 양반의 새끼는 어려서는 말썽 피우고 미운법이라고 했다.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가 되었다는 동화를 누누이 강조했다. 자신의 젊은 시절 기억은 꼭꼭 덮어두고 자식은 연애하지 말라며 붉은 융단으로만 걸어가라고 종용하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학생이 연애 한다고 출세하지 말라는 헌법조항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우리가 진정 자식을 사랑한다면, 자식노릇만 강요할 것이 아니라 부모노릇도 반듯하게 해야 할 것이다. 물질적인 뒷바라지가 아니라 정신적인 지주역할을 해야 되겠지. 진정한 사랑은 자식을 조금 더 믿고 기다려주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