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된 십계명(신5:1-21)
2001년
우리는 흔히 인간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하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인간 문제의 해결 방안이라도 되는 듯이 사람들은 말을 하곤 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가고 대가 달라지고 똑똑한 사람이 많아지면 좀 나아지지 않겠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모세는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인간이란 긍정적으로 생각할 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주에‘사곡한 종류요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고 탄식했던 것에서 보았던 것처럼 모세는 인간 이스라엘에 대한 염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간은 원래 기대할만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가고 대가 달라져도 인간은 여전히 나아질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고 있으며 똑똑한 인간 공부 많이 하고 배운 인간이 많아져도 나아질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40년간 광야에서 대를 이어 공부를 해도 인간은 나아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십계명을 다시 설교 합니다. 이 설교 속에는 인간의 참된 모습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처음에 주ᅳ셨던 십계명과 오늘 본문의 설교를 비교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십계명과 오늘 본문에 있는 십계명을 비교 해 보면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며.....”___신5:8-“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____우상을 만들려는 자기 중심성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신을 동원하려는 것은 인간의 자기 중심성 때문입니다.
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라...”___“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기억하라’는 막연한 표현에서 ‘지키라’는 말로 구체화 되고 강화 되었습니다-에누리 하고 핑계로 이용해 먹는 인간성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일을 이용 해 먹을려는 우리들과 같습니다. 인간은 하나님도 신앙도 이용 해 먹을려는 무서운 심사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대로’라는 구절은 설교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육축이나”__“소나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율법을 가나안 농경 생활을 예상하고 환경에 맞게 응용해서 설명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___“...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___동일한 안식을 명령... 남종,여종은 외국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종에게 안식을 누리도록 하면서 자기들의 근본을 기억하도록 하십니다. 이스라엘도 근본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들에게도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도록 함으로써 이스라엘 자신들도 종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는 속담은 인간의 속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의 “창조 안식”을 신명기에서는 출애굽 안식으로 바꾸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뜻이 피조세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안식이기 때문에 이렇게 바꾸어 말해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5계명: “네게 준 땅에서 생명이 길리라”__“길고 복을 누리리라”--강화시켰습니다.
9계명: “거짓으로(무고하게,רקשׁ) 말하지 말라”___“사악하게(אושׁ) 말하지 말라”.--악한 쪽으로 강화되는 인간의 심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10계명: 신명기에서는 “네 이웃의 아내”가 집보다 먼저 언급 됩니다. 출애굽기에서는 ‘네 이웃의 아내’가 그 집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에서는 여자를 별도로 앞에 내세워 놓았습니다.이것은 여자의 지위를 강조했다기 보다는 특히 가나안 땅에서 여자로 인한 죄악이 크기 때문이겠습니다. 그리고 ‘밭이나’라는 말이 추가되어 있는데 농경 사회를 예상하고 추가한 것 같습니다.
이상에서 몇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지만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말씀이 더 강화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가고 공부를 하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세월이 가고 공부를 해도 여전히 그 악한 근성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공부하고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여 지식적으로 나아졌다고 해서 신앙이 드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악한 상태로 그냥 남아 있습니다. 배운다고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적으로는 알지만 배운 그것이 신앙은 되지 않습니다.
이 점을 우리가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배우면 그것이 신앙이라도 되는냥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라도 좀 많이 배우고 성경학교나 신학교 공부라도 하고나면 그것이 곧 신앙이 나아진 것처럼 착각을 하고는 마음이 으슥해져서 가르치려고 하고 지도하는 위치에 서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착각하지 맙시다. 이런 것을 했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적인 만족이요 동의입니다. 신학생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많이 볼 있으며 네비게터나 학생 선교 단체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문제가 제시되면 ‘열나게’ 거품을 흘려가면서 토론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그것이 자기가 가진 종교적인 열심이었고 지적인 만족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자기 자신은 그 말씀에 순복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따라 행동하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 사랑 자기 존중의 정신이요 신앙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도 이러한데서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난 몇주간 선택론이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고 여러분이 가지고 있던 구원론과 맞지 않는 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신앙은 이해하기 힘들어도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말씀을 살펴보고 그렇다면 이해할 수 없으도 받아들이고 더 배우고 알아야 하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지식은 그것을 거부하게 만듭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표준으로 삼아 성경이 그러한가를 상고해 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말씀이 올무가 되고 덧이 됩니다. 마치 예수님의 시대에 사람들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설교하시니 사람들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 ‘물러가고 다시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6:60,66)고 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을 근거로 해서 가르쳤는데(요6:45) 이 사람들이 깨닫지 못했던 것은 자기들의 지식을 표준으로 삼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 같은 이는 말씀이 그러한가 하고 궁구하는 자세를 가지고 찾다가 결국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신앙인이거든 겸손하게 먼저 바로 배우려고 하십시오. ‘나는 이미 많이 배웠기 때문에 잘 알고 있어’라고 하면서 ‘설치고 해볼려고 하지 말고 인도자가 되려고도 하지도 말고’ 겸손하게 듣고 말씀이 그러한가 하고 주의해서 배우십시오.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속지 마십시오. 내가 좀 배웠으니 인간이 나아졌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배우고 오래 교회 생활 했다고 해도 인간성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의인인 채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성경 공부는 무엇할려고 합니까?’라고 반문하겠지요. 죄인인 줄 확인하고 주님을 의지하기 위하여 성경공부를 하고 신학공부를 합니다. 설교를 듣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죄인인 줄 알고 주님을 바라 보도록 하는 것이 성경 공부요 신학 공부입니다. 이것이 되지 않고 배운 채 하고 아는 채 하는 것은 쓸 데 없는 짓거리들을 하는 셈입니다. 이것이 되지 않은 채 공부하고 오래 믿은 것은 못된 것만 더 쌓여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는 말과 같이 남을 떠받고 괴롭히는 지식만 늘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을 경상도 말로 더부된다고 합니다. 꺼꾸로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좋아하지 마십시오. 배운 것을 믿지 말고 배운 채 하지 말고 아는 채 하지 마십시오. 지난 날의 경력을 가지고 현재를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런 모습은 모두가 자기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어찌하라는 말입니까? 모세가 십계명을 반복하여 설교하면서 더욱 내용을 강조하는 것은 여전히 죄인이니 교만하지 말라는 뜻에서요 그러므로 주의 말씀만을 받들고 살라고 하기 위해서입니다. 5:1절이 이것을 말해줍니다.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고 합니다. “들으라”는 말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삼가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경청하라는 말입니다. 규례와 법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경청하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경청하는 가운데 배우는 것이 있고 지켜서 행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지켜 살려고 하지 않는 것은 생명 걸고 살아야 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각하게 경청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경청하면 살게 되어 있습니다. 경청하는데 왜 안됩니까?라고 하겠지만 그것에 대한 답은 경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경청하면 잊어먹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잊어먹고 따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별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오늘 현재에 경청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과거에야 어찌 했던지 그것을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현재에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신5:3)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늘 경청해야 합니다. 경청이 없는 것은 우리 마음이 교만하여 있거나 하나님에 관하여 관심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대신 다른 것이 관심의 대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이 죄를 회개하면서 옛적에 하신 말씀으로써 오늘날도 여전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죄인의 위치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믿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을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무엇이 그렇게 답답합니까? 망해도 자기 망하지라고 할 것이지만 망하는 것은 자기 죄에서 망할지라도 망할 때까지 외치는 것이 외치는 자의 심령입니다.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예수님에게서 이런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망할 때까지 외치는 것이 외치는 자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평생 믿으도 죄인의 모습이라면 교회에서 모여 우리가 이야기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실패하고 회개한 것, 은혜 주셔서 살게 한 것 뿐입니다. 이에서 지난 것은 헛된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형제님,자매님’ 하면서 이야기 하고 대화한 것은 자기 삶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항상 꾸미고 포장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죄인 그대로를 보여 주고, 은혜를 보여 주도록 하십시오. 말씀을 경청하고 살게 되는 것, 주님이 살게 하시는 것을 나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