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집의 추억
김 승 희
지금도 집하면 떠오르는 것은 초가집의 모습이다. 가족이 함께 살았던 곳으로 어린 시절 추억이 생생하게 숨 쉬고 있어서, 기억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초가집은 제주시 칠성통에 있었다. 칠성통은 그 당시로서는 꽤 사람들이 붐비는 번화가로 주변에 북초등학교, 중앙극장, 나사로병원, 책방이 있었고 장사하는 가게들이 들어서있는 동네였다. 낡고 허름한 집이었지만 9남매의 친구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떠들썩하고 활기에 넘쳤다. 아침에 밖으로 나가면 지린 냄새가 진동하며 코를 찌른다. 아마도 취객들이 담벼락을 화장실로 착각해서 오줌을 쌌는지 길바닥이 질퍽하게 젖어 있었다. 하루의 일과는 돌담을 씻는 일부터 시작된다. 유신시절 막내오빠가 대문 앞을 청소하다가 경찰서에 잡혀가는 해프닝도 있었다. 장발이라는 이유로 잡혀 간 것이었다.
초가집 안으로 들어가면 우물이 있고 마당에 무화과나무가 있었다. 여름이 되면 빨갛게 익은 무화과를 따먹었는데 꿀맛이었다. 무화과에서 나오는 우유빛깔 액이 무좀에 효과가 있다고 발가락에 바르던 기억도 있었다. 비오는 날에는 우물 안에 살고 있는 장어가 수면 위에 떠오르는 것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엄청난 폭우를 동반한 태풍이 불었던 해에 부엌에 물이 넘쳐서 가족들이 함께 퍼냈다. 태풍으로 밥을 할 수 없어서 빵을 먹게 되었다. 가족들이 물을 퍼낸 후에 먹었던 빵은 맛이 끝내줬다. 집에서 즐겨 먹었던 것으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오는 뜨거운 밥에 버터와 간장을 놓고 김치에 비벼 먹었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입 안에서 퍼지는 감칠맛으로 입맛을 끌어당겨 한 사람이 두 그릇 이상을 먹었다.
아버지는 엄격한 면도 있으시지만 유머가 넘치고 가족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형제간 화목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고 근검절약하며 돈을 가치 있게 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는 밥상머리 대화가 유익하고 재미있었다. 가족끼리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도 하고 다른 형제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서울에서 오빠와 언니가 방학이 되어 집에 내려오면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 시간을 통해 가족끼리 한 마음으로 뭉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초가집 안으로 들어가면 연달아 방이 이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방마다 책상을 놓아 주셨는데 부지런히 공부하라는 뜻이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가끔씩 방에 들어와서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알 때까지 파고드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어쨌든 초가집에 살면서 대학에 여섯 명이나 들어갔으니 작은 성과가 아니었다. 부모님은 자식들과 떨어져서 서문통에서 장사를 했다. 집안의 맏이인 큰오빠와 언니가 어린 동생들을 돌봐 주었고 형제끼리 서로 도와가며 그 속에서 자립심을 배웠다. 9남매를 키우기 위해 성실하게 일을 하시는 모습이 자식들에게 삶의 귀감이 되어 주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아버지는 교육에 대한 열의가 남다르셨다. 그 시절에는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경제 사정이 좋은 집이라도 대학에 보내지 않았다. 큰언니를 대학에 보내게 되어서 딸 다섯 모두 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딸에게도 아들과 똑같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아버지는 “재산은 다 쓰면 없어져 버리지만 머릿속에 든 지식은 평생을 쓸 수 있다.” 9남매 모두 대학공부를 시키기 위해 고생을 마다하시지 않았다.
연달아 이어져 있는 방에서 세 번째 끝 방은 미로처럼 깊숙이 안쪽에 들어가 있었다. 그 방은 나만의 비밀 장소로 상상의 나래 속에서 책을 읽었던 곳이었다. 새벽까지 책을 다 읽고 나서 희미하게 날이 밝아오는 것을 바라보며 마음이 설레었다. 새벽하늘이 나에게 희망의 빛을 선사해주는 것 같았다. 오빠와 언니가 있어서 일찍 책과 팝송에 눈을 뜨게 되었다. 어깨 너머로 주어 들었던 것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며 혼자 우쭐했던 적도 많이 있었다. 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영시에서 ‘4월은 잔인한 달’ 이라는 글을 읽으며 시의 매력에 빠져 영어를 재미있게 공부했다. 새로운 전자제품인 전축이 집에 있었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오빠들이 여름방학동안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그 때 들었던 노래가 팝송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사이먼 가펑클이 부른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라는 노래를 좋아했다. 내가 다녔던 신성여고에서 영화를 단체 관람하게 되었다. 영화를 보기로 한 중앙극장이 집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이구동성으로 “너 네 집에 책가방 맡기고 영화 보러 가자.”고 하며 친구들이 집으로 우르르 떼로 몰려왔다. 여고시절의 즐거웠던 추억이 되었다. 아직도 초가집이 그 자리에 있냐고 물어보는 친구도 있다. 추억을 더듬으면 꿈속에서도 초가집을 그리워한다. 그 뒤에 이사를 갔지만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9남매 형제가 살았던 추억이 있는 초가집과 비교할 수 없었다. 형제들이 성장해서 가정을 이루고 조카들까지 결혼하게 되었다. 부모님이 슬하에 46명 자손을 보셨다. 6남매는 서울에 있고, 제주에는 부모님과 3남매가 살고 있다.
큰 오빠가 마스터가 되어 가족끼리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홈페이지 이름이 ‘초가집’ 이다. 그렇게 이름을 붙인 이유는 초가집의 추억을 떠올리며 쉬어 갈 수 있는 따뜻한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초가집은 가족의 따뜻한 정을 느꼈던 내 마음의 고향이다.
(2011.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