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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i~ 음악저널 원문보기 글쓴이: 라콘테
피아노가 막 발명된 시기에 왕성한 작곡활동을 했던 모차르트는 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대부분 자신이 지휘하고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초연했다. 따라서 지휘자를 겸한 피아니스트는 오케스트라를 바라보며 청중을 등지고 앉을 수밖에 없었고, 피아노 독주회의 경우 뚜껑을 열어젖히고 청중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연주했는데 이러한 관례는 베토벤, 슈베르트에서 쇼팽 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런데 프란츠 리스트는 유독 자신의 독주회에서 피아노의 위치를 90도 돌려서 청중과 피아노를 서로 직각이 되도록 배치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앞모습보다 더 멋있다고 생각한 자신의 옆얼굴을 청중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일까? 딱딱하고 근엄한 얼굴의 정면을 보여주는 다른 음악가와는 달리 각종 문헌에 전해지는 그의 스케치는 대부분 정면 얼굴이 아닌 측면 또는 약간 옆으로 돌려진 얼굴 일색이다.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맞아 재조명받고 있는 리스트! 그의 삐딱한 얼굴만큼이나 굴절 많은 삶은 사주팔자로 치면 ‘역마살’과 ‘도화살’을 동시에 타고 난 인생이라고나 할까?
리사이틀의 효시 리스트
피아노를 막 공부하기 시작한 학생이나 프로페셔널 피아니스트나 가릴 것 없이 연주하기 전 가장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일이 있으니 그것은 암보 즉 ‘악보를 보지 않고 외워서 연주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다. 두 시간 가까이 되는 독주회에서 연주곡 전부를 외워서 연주하는 악기는 피아노가 거의 유일하다. 피아니스트가 실내악 연주를 제외한 각종 연주, 특히 독주회에서 악보를 보지 않고 연주하게 된 것은 1830년대 말 유럽의 살롱 음악회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 최초의 인물은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프란츠 리스트라는 설과 로베르트 슈만의 부인이었던 클라라 슈만이라는 설이 양립하고 있는데, 1837년경 클라라 슈만이 베를린에서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전곡을 외워서 연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문헌상 암보의 시조는 그녀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피아노와 관련된 리스트의 업적은 다른데 있는데 그가 1840년 런던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열면서 이른바 ‘리사이틀Recital’이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유행시켰다는 것이다. 사실 리사이틀(독주회 혹은 독창회)의 어원은 불어인 ‘reciter(암송하다)’에서 나온 것으로 ‘외운다’는 의미가 들어 있으므로 리스트 역시 이 문자 본래의 뜻을 충실히 이행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리스트 이전에 피아노는 음악회에서 다른 음악과 함께 연주되거나 다른 프로그램에 섞여서 독주곡을 연주하는 악기였으나 리스트가 비로소 피아노만의 독주회 시대를 연 것이다. 2006년 6월12일 대전지방법원 민사1부는 류柳모(81)씨가 호적의 성씨 표기를 ‘유’에서 ‘류’로 정정해 달라는 호적정정신청을 기각한 원심을 깨고 허가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단순히 한글표기 통일을 위해 성씨에도 두음법칙을 적용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소수자의 사회적 인권보장 등 헌법적 이념에 반한다”며 이같이 판결했다. Franz von Liszt... '리사이틀'이란 영문 단어가 ‘L'이 아닌 ‘R'로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그 어원을 리스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믿고 있으니 그 어원이야 어쨌건 리사이틀은 ‘리스트처럼 혼자서 악보 없이 음악을 연주하는 행위’임에는 틀림없으니 이를 유럽판 두음법칙이라고 해야 할까?
오빠부대와 빠순이 그리고 연상의 여인들
지난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 대통령 후보자가 여자고등학교를 방문해 자신의 많은 나이를 의식해 세대격차를 해소하자는 취지에서 여고생들을 ‘빠순이’라고 불렀다가 호된 여론의 질책을 받았다. ‘빠순이’를 소위 ‘오빠부대’와 동의어로 잘못 알고 귀띔해준 한 참모가 빚은 실수라는데 음악가로서는 최초로 수많은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던 리스트의 팬 중에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 나오는 춘희의 실제인물이었던 마리 뒤플레시스 등 실제 ‘빠순이’ 그룹도 적지 않았다. 리스트가 피아노 연주를 하면 숙녀들은 보석을 무대에 던지기도 하고 심지어 기절하기까지 했다. 연주가 끝나면 무대로 돌진하기도 하고 리스트가 의도적으로 두고 간 장갑이며 담뱃갑을 차지하려 땅바닥을 뒹굴며 싸우기도 했다. 우리나라 오빠부대의 원조는 누구일까. 조선시대 이전의 궁중 음악가들이 그 엄격한 궁궐의 법도 아래에서 상궁이나 무수리들로부터 구애 공세를 받았을 리 만무하고 장바닥을 떠돌던 소리꾼들 또한 미천한 상민의 신분이었으니 오빠부대가 있었을 턱이 없다. 일제 강점기인 1921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애수의 소야곡> <울며 헤진(원래 제목이 그러므로 수정 않음) 부산항> <무정천리>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기고 해방 이후에 1961년 가수협회 회장을 지내다 이듬해에 작고한 故 남인수. 본명이 강남수인 그야말로 우리나라 최초의 오빠부대를 만든 장본인이다. 남인수의 공연이 끝나면 장안의 기생들이 인력거를 보내 다투어 그를 데려가려 했고 어떤 빠순이는 그의 음반을 축음기에 걸어놓고 노래를 들으며 육혈포로 자살까지 했다 하니 그의 인기는 오늘날 대중가수들의 인기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을 논외로 하면 리스트의 첫 여자는 그가 스물한 살에 사랑을 나눈 아델르 라프뤼나레드 백작부인이었고 그 다음은 그보다 6년 연상인 다구 백작부인이었다. 10년간 지속된 다구 백작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이들 중 첫딸 블랑단과 막내인 아들 다니엘은 20대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유일하게 오래 산 둘째 딸 코지마는 리스트의 제자 한스 본 푈로와 결혼했으나 이혼하고 바그너에게 재가하는데 천하의 바람둥이 리스트도 극구 반대하다가 나중에야 바그너와 화해하고 이를 인정한다. 이후 그를 잠시 스쳐간 여인들을 살펴보면 뒤마의 소설 ‘동백꽃 아가씨’의 주인공인 마리 뒤플레시스, 훗날 바바리아 국왕 루드비히 1세의 정부가 되는 롤라 몽테즈 등 소위 매춘부 그룹과 마리아 파블로브나 대공부인, 카롤리네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 등 귀족에 이르기까지 열거하기에도 벅차니 리스트와 관련된 여인들의 리스트보다 더 복잡한 리스트가 또 있을까?
끝없는 사랑의 미로, 그 속에서 빚어진 자식 같은 음악
“리스트가 있기 전에 리스트는 없었고 리스트 이후에도 리스트는 없다.”
리스트 사후에 평론가들이 그를 치켜세우며 하는 칭찬의 말이다. 리스트는 36세가 되던 1847년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을 만나는데 리스트의 생애는 그 이전의 리스트와 그 이후의 리스트로 다시 한 번 나누어진다. 폴란드 대지주의 딸(부친에게 물려받은 장원은 3천 명 이상의 농노가 딸린 막대한 재산이었다)로 러시아 왕족인 비트겐슈타인 왕자와 결혼해 딸 하나를 두었으나 성격차로 별거 중이던 그녀와의 운명적 만남은 그로 하여금 그가 즐기던 리사이틀을 완전히 포기하고 결혼허가를 받기 위해 로마로 향하게 했다. 공작부인의 남편 비트겐슈타인이 이혼에 합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로마 교황의 특별허가를 받기 위해 택한 로마행은 무려 14년 만에 교황의 윤허로 이어졌으나 막상 결혼식 당일에 갑자기 허가가 취소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에 비트겐슈타인의 사망으로 별도의 허락 없이도 결혼이 가능해졌음에도 두 사람은 결혼하지 않고 각자 수도자의 길을 걷는다. 1865년 54세가 되던 해에 리스트는 로마 가톨릭의 2급 신품을 받아 수사가 되었고 공작부인은 마치 수녀와 같은 여생을 보냈는데 리스트가 죽자 그녀 또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세상에 이보다 숭고한 사랑이 또 있을까. 다구 백작부인과의 사랑의 도피는 리스트로 하여금 그동안 몰랐던 이국의 정취를 피아노 독주곡으로 빚어내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순례의 해 Annees de Pelerinage>이다. 전 4집 총 26곡으로 구성된 이 음악은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풍경을 보고 느낌을 악보로 옮긴 것과 단테의 신곡 같은 소설을 읽고 느낀 감흥을 악보로 표현한 연작들인데 곡 하나하나가 독주곡처럼 연주되기도 하는 아름다운 곡들이다. 다구부인이라는 연상의 연인과 사랑의 도피 행각이 없었더라면 태어나지 않았을 이 곡은 어쩌면 그에게는 다구 부인과의 사이에 태어난 세 자식보다 소중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타르베르크…, 리스트와 동시대에 살지 않았더라면 또 하나의 위대한 음악가로 기록되기에 충분했던 그를 파리에서 만나 당시에 유행했던 서바이벌 게임으로 완전히 패배시킨 후 이탈리아로 향하는데 여기에서 그는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연습곡>을 완성한다. 본에 베토벤의 기념상을 건립할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시작한 연주회는 8년간 150여 개 도시를 넘었고 보수적인 런던을 빼고는 모두가 성공적이었다. 1845년 마침내 본에서 열린 베토벤 기념상 제막식에는 바바리아 국왕 루드비히 1세의 연인이 되는 롤라 몽테즈를 대동하고 나타나 물의를 일으켰으나 이 자리에서도 그는 자신이 작곡한 ‘칸타타’를 연주한다. 떠돌아다니면 떠돌아다니는 대로 머물면 머무는 대로 그에 걸맞은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타고난 음악가들의 공통된 덕목이랄까.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과의 결혼허가 취득이라는 10년이 넘는 대장정에 들어가면서 개인 리사이틀을 중단한 리스트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안정된 생활을 누리던 바이마르에 머무는 동안 <초절기교 연습곡> <헝가리 광시곡>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쏟아낸다. 초절기교 연습곡 Etude d'execution transcendantal... 모두 12곡인 이 곡은 600여 개에 달하는 리스트의 피아노 작품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갖는다. ‘초절기교’라기보다는 ‘탁월’이라는 어휘가 어울릴지 모를 이 곡에 대해 슈만은 “리스트 자신만이 재현할 수 있다”고 표현한 바 있다. 리스트 생전에 그의 연주 모습을 그린 풍자만화에도 초인적인 기교로 연주하는 그의 모습, 특히 그의 손가락은 무려 옥타브 반을 넘나들 정도로 기다랗게 묘사되고 있으며 실제로 이 곡은 손가락이 짧은 피아니스트들에게는 장벽과도 같아서 이 곡을 치기 위해 손가락 사이를 절개하는 수술까지 받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슈만의 표현이 결코 과장은 아니지 않을까?
리스트가 열여섯 살 때 사망한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여자들을 조심해”라고 유언했으나 결국 그의 인생은 평생 여자들로 인해 영욕을 거듭했다. 리스트가 함께 지냈던 수많은 여인들은 대부분 그보다 연상이었으며 연상의 여인들은 대체로 좋은 인연이 되지 못했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그가 피아노를 가르쳤던 한 살 아래 카롤린 드 생 클릭은 리스트의 첫사랑이었으나 그녀의 아버지는 리스트에게 자기 딸에게의 접근금지를 명하였고, 리스트는 실연의 후유증을 2년이나 앓게 된다. 수개월간 자리에 누워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자 한 신문은 ‘프란츠 리스트 1811년 라이닝에서 태어나 1828년 파리에서 죽다.’라고 부고 란에 싣기까지 했다. 다구 백작과 결별한 후 그는 첫사랑 그녀의 고향인 베아른 지방의 민요를 편곡해 그녀에게 헌정하는가 하면 오랜 세월이 흐른 후인 1860년 수사 신품을 받으며 작성한 유언장에서 반지 모양의 보석을 그녀에게 유산으로 남긴다. 그래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할 때 더 아름다운 것이라 했을까? 글/ 김근식 :자유기고가 , 교양음악서 <오페라가 왜?>의 저자.
첫댓글 나 -> 라, 이(전주이씨) -> 리, 도 마찬가지 이지요. / W 독일 발음은 B, 적응하는데 힘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