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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운명 / 임문석
그땐 분명히 내 기억엔 그렇게 살았었던 것 같다.
마을의 이장에다가 면사무소 5급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막내로 태어나 자라온 유년은 적어도 행복 했었다.
위로 터울이 많은 두 형은 6,25전쟁에 참가하였다가 견디지 못하고 탈영하였기에 매일 우리 집은 형사 아니면 헌병들의 발길이 끈길 날이 없었다.
큰 형은 제주도 훈련소에서 훈련받고 당시 8사단에 복무하였으며 작은 형은 25사단에 복무하였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서기 1952년 당시 우리 집은 그 마을에선 유지급 측에 들어서 아들의 고생을 덜어 주려고 부모가 가정 사유를 붙여 각 부대에 휴가 요청을 해서 같은 시기에 청원 휴가를 받았던 것이다.
당시 판문점에서는 한참 휴전 협상을하고 있을 때 이었다
그런데 두 형제가 상의해서 탈영하기로 약속하고 귀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인제 양구 사이의 전투에서 8사단 전멸이란 신문보도에 부모도 두려웠는지 동의를 했던 걸로 알고 있다.
8사단은 큰 형이 복무하던 사단인데 형으로선 운이 좋아 휴가 기간에 그런 일이 일어났었다.
아버진 그런 두 형제 보호하려 아까운 전답을 농협에 저당 잡혀가며 요즘 말하는 뇌물로 형들을 보호해 갔다.
어렸던 내가 목격하고 지금껏 기억하고 있는 것도 두 번이나 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세수하다가 큰형이 형사에게 붙잡혔다.
그 형사는 아버지 체면을 봐 주려고 세수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며 꽁무니를 따라다니니까 느닷없이 형사의 불알을 걷어차서 실신시켜버렸다.
그 바람에 아버지는 더 많은 뇌물을 주어야 했고 잡혀가는 도중에 일부러 도망가게 해 주도록 형사에게 당부까지 했다.
큰 형은 당시 결혼해서 장손까지 낳아 키운 관계로 장남인데도 광주시내로 암암리에 살림을 분가시켜버렸다.
그러면서 연구한 끝에 마을에서 전쟁중에 행방불명인 사람의 호적을 이용해 아버지가 위조 도민증을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가짜 도민증(주민증)을 가지고도 광주에서 사진사로 충분히 활동하며 살림을 잘 꾸릴 수 있었다.
또 작은 형님은 휴가 나오면서 자신이 자대 인사계의 보직에 있던 관계로 가짜 휴가증을 많이 만들어 나와서 날짜만 변경하며 지내고 있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헌병들에 쫓겨 뒷담을 몰래 넘다 잡혀버렸다.
아버지는 또 농협에서 돈을 빌려다가 헌병에게 뇌물을 주고 헌병이 쏜 권총의 공포를 받으며 남들 알아차리지 못하게 산으로 무사히 도망가게 해주었다.
그 후로는 집에 꼭 틀어박혀 연극 각본 쓰는데 정렬을 다하고 책을 읽는 게 낙이었는데 가끔은 형이 다녔던 정광고등학교 동창들과 어울려 연극을 꾸며서 호남지방을 돌며 공연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현몽을 꾸었다며 현장 답사를 하셨단다.
내용은 며칠 전 밤 꿈속에서 할머님이 나타나셔서 우리 마을에서도 가장 높은 산 중턱에 까마귀 모양의 바위 위에 있는 밤나무를 꺾어 놓았으니 그곳에 이장해달라고 하셨단다.
아버지는 당시 공무원이었기에 일요일을 이용해 그 장소를 가보니 꿈에서 본 듯이 까마귀가 날아가는 형상의 바위로 시작해서 이어지는 산 중턱에 밤나무가 꺾여 놓여있어 아버지는 확실한 명당이라고 마음을 정하게 되였단다.
그런데 그곳은 우리 문중 산의 경계에서 100m 정도 타인의 산 쪽에 있어서 마음대로 이장할 수 없어 밤중에 몰래 人夫를 얻어 이장하기로 했는데 그 당시는 호롱불밖에 없어서 험악한 바위 위에 땅을 파기가 너무 어렵고 힘들어 人夫들이 못하겠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삽 길이로 한자를 재어 옮겨 묘를 써도 된다고 해 그러기로 했단다.
그런데 그 장소는 너무나 부드러운 황토 흙이어서 다행히 손 쉽게 이장을 할 수 있었단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인근 100 여리 안팎에 소문이 퍼져 나갔다.
가 막 뫼 사는 林씨 가문이 오묘한 자리에 명당을 발견하여 묘를 썼다고 하는 소문들은 풍수장이들은 하나 둘 다녀갔다. 아버지는 궁금해서 묏자리에 대해 물어보면 그들은 삼 년 안에 묏자리 효력이 나타난다고만 말하고 돌아갔다.
그러고 다음해 1월에 작은 형이 결혼했는데 하자마자 형수는 금방 임신을 했다.
뱃속에 아이가 8개월쯤 될 때 내 나이 12살 되든 해 초등학교 5학년 초여름인 (음)5월 지병인 폐결핵으로 돌아가셨다.
연극 각본(유작 진주 목걸이)을 남기고
그러나 고등 교육받은 두 형 덕택에 우리 집은 남의 집엔 없는 축음기도 있었고 진공관 달린 라디오도 있어서 신식 유행가 노래를 많이 배우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두 형이 탈영하여 날려버린 많은 재산은 나의 배움의 앞길을 완전히 막아 내 운명을 바꾸고 평생 하급 인생을 살게 한 원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때의 배운 노래 실력만큼은 아직도 남아있어 지금도 옛노래는 어느 정도 자신 있게 부른다.
대개 들어주는 분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받는 편이다.
아버지가 그때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나도 좀 더 고등 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내 안에 잠재되어있는 능력을 조금은 더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작은 형이 죽은 그 해는 학생들이 일으킨 4,19혁명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었고 그 이듬해엔 또다시 군인들로 인해 5,16 군사반란을 일으켜 나라는 다시 술렁여 아버지도 결국 18년의 공직 생활을 접으시게 되었고 농사일을 거들고 계셨는데 모내기하던 날 일요일 오후 논두렁에서 급성 복막염이 발병했다.
시골이라 지금처럼 도시로 나가는 교통편이 없는데다 일요일 인지라 병원 문턱도 가보지도 못한 채 결국 만 24시간 만에 돌아가시게 되었다. 그때 당신의 나이 불과 51세였다.
그때가 (음)5월 이었으니 작은형이 죽고 꼭 일 년 만의 일이다.
나라도 혼란한 가운데 우리 집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엉망진창이 되어 혼란이 찾아들고 가족은 풍비박산 흩어지게 되었다.
갑자기 집안에 과부가 둘이나 생겨 버렸다.
집안의 액운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엔 일 년 지나서 귀신에게 홀린 것인지 큰형이 고아출신 노총각이라고 속이고 부잣집 여대생과 위장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여자 측이 사진관을 차려준다는 유혹에 넘어가서
우리 가족까지 감쪽같이 속이고 결혼식까지 올려 버렸지만,
결국 신부인 여대생이 첫날밤에 알아차리고 들통이 나게 되어서 신부 측에서 고발하여 구속까지 되고 말았다.
그땐 큰형에게는 벌어 먹여야 할 처자가 건강한 형수와 3남매의 어린 자녀가 있었다
그런데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결혼식까지 치르게 되었는지!
지금까지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결국, 지방신문에 사진까지 실린 커다란 기사가 난 걸 이웃의 당숙이 보시고 신문을 들고 달려와 보여 주어서 나와 어머니도 알게 되었다.
형님은 구속되고 나서 자신이 탈영병이라는 걸 경찰에 털어놓았다.
그 바람에 혼인빙자 간음죄인 사기죄는 사라지고 군법이 적용되어 군사 형무소인 대구에 이송되어 버렸다.
우리 어머니는 원래 갑부 집의 딸이었다.
당시 외가는 면 유지 집안이고 외삼촌은 군내의 유명 인사였으며 정미소와 酒造 場을 운영하고 계셨고 농사도 약 일만 이천여 평에 달했다.
외삼촌은 지식인들과의 유대 관계가 상당히 넓으셔서 어머니에겐 자랑스레 의지할 만한 유일한 오빠였다,
그래서 외삼촌의 도움으로 간신히 남아있는 금쪽같은 畓 서 마지기마저 팔아 몽땅 털어 넣고 난 후에야 형님은 완전히 제대증까지 받아 정상인으로 돌아왔다.
형무소를 나오고 나서 할머니 묏자리가 행운의 명당이 아니고 액운을 가져 온다고 우리 가족은 느끼게 되었다.
할머니 묘를 이장하고 일 년 만에 작은형이 죽고 다음해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또 일 년 만에 큰형이 형무소까지 들어가는 우리 가정을 파괴해버린 원인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곧바로 이장을 하였는데 人夫들의 말로는 지난번 이장할 땐 하얗던 뼈가 구들장에 들어갔다 나온 듯 새까맣게 변해 있었단다.
분명히 그곳 흙은 누런 황토였는데 왜 검게 그을렸을까!
의구심이 풀리지 않는 대목이다.
이젠 우리 집엔 작은 형수도 젊은 과부요 어머니도 과부가 되어 일명 과붓집이 되었다.
게다가 큰형의 뜻 하지 않은 실수로 큰 형수와 냉전이 벌어졌고 덩달아 고부간 갈등을 일으켜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거기다 모든 재산은 빚쟁이들이 몰려 갈기갈기 찢어가 버리고 겨우 남은 집은 농협에 저당 잡혀 있어 독촉장이 계속 날아들었다.
작은 형수는 어려운 가사를 돕는다는 핑계로 보따리 행상을 시작하더니 만 자신이 낳은 아들(유복자)이 막 돌이 지났는데 버리고 새 짝을 찾아 남몰래 밤 봇짐을 싸서 사라져버렸고 누나들은 저마다 서울로 돈 벌러 떠나갔다.
아버지가 농협에 빌린 빚 독촉에 5칸 겹집인 살던 집을 헐값에 넘겨서 우리 식구는 남의 집에 셋방살이를 시작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젠 식구라곤 나와 어머님 둘이 남아서 조금 남은 방 천 터진 땅 부쳐서 어떻게든 연명하며 살아가야 했다.
난 아버지 돌아가시고 중단했던 초등학교 6학년을 다시 다니며 집안일을 도우며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결국은 우리 대 가족은 두 형의 탈영으로 말미암아 부유했던 가산이 탕진된데다가 뜻밖에 4.19_ 5.16에 의해 공직을 잃고 집에 머무르고 계시던 아버지의 급작스런 병사로 최 극빈 가정으로 하락하고 말았다.
우리 집의 기둥인 아버지 살아 계실 적엔 나의 힘은 대단히 막강했었는데. 우리 형제 중 내가 키도 작고 콧물도 유난히 많이 흘린 못난이 꼬맹이였지만 막내의 권한은 당당하여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었다.
6,25전쟁이 막 끝난 당시 어려운 국민을 위해 매월 미국의 원조로 보급품이 나왔었다.
헌 옷가지며 씨 레이션 (미군 비상식량) 아량 米 (유엔의 보급품 쌀 일명 월남 米) 거기다 유 안 비료 질소 비료 등이 나왔었는데 아버지가 우리 마을 이장이라서 우리 집 마당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었다.
덕분에 미군 씨 레이션을 먹어 보았으며 작은 형은 깡통을 흔들어 담배 들은 것을 찾으려고 이것저것 들고 흔들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당시는 보릿고개에 먹지 못해 부황들어 죽은 사람도 있었기에 누구든 무슨 일이라도 해서 밥값을 해야 했다.
그래서 나의 또래 친구들은 모두가 소를 먹인 다던가 아니면 꼴을 벤다든가 하며 가사 일을 돕는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고 또 머슴이 있어 집안일의 모든 걸 다 해주어 시간 보내기가 심심할 정도였다.
그래서 매일 혼자서 산과 들 그리고 강에서 노는 것이 일과였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필요도 없다.
그저 건강히 자라면 되었는데도 나는 이상히 키는 자라지 않았다
당시 고향 마을의 가구 수는 60여 호되는 아담한 마을인데 나는 아무 집이나 개구멍을 뚫고 돌아다니며 과일이란 과일은 몽땅 따 먹고 다녔다
그러다 붙들려도 야단을 치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다들 눈치만 볼뿐이었고 우리 집에서도 누구 하나 그런 일에 말하기보다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들어가서도 공부하라는 말은커녕 학교에 안 가도 말하지 않았었다.
의무적으로 가야 할 학교 가고 싶으면 가고 싫으면 안 가도 말이 없지만 학교 가면 친구들이 많아서 스스로 다녔다.
게다가 바로 위 누님은 세 살 터울인데 나에게 꼼짝도 못했고 큰 누나는 나를 많이 미워해 매일 싸움을 했다
대담하게 대들어 육박전까지 되면 어머니께 큰누난 실 것 야단을 맞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 말씀은 막냇동생이니 무조건 저주라는 것이다.
친구들과 놀다가도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나는 열외이고 친구들이 야단맞고 혼이 났었다.
왜 그랬는진 모르지만!
그래서 친구들은 나와는 놀아 주지 않으려 했었다.
늘 혼자 놀고 혼자 공부하고 그렇지만 놀면서 엉뚱한 짓을 저질러도 괜한 친구들 이름을 들먹이며 그 녀석과 어울려 놀다가 물 든 것 같다 했다.
정말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이야기지만 그땐 그런가 보다 했으며 그러려니 하고 지내왔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주위의 모든 게 달라져서 문밖에도 안 나가고 공부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믿고 있던 아버지의 보호막을 잃었으니 기가 죽은 탓도 있지만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언제나 집에 오면 숙제는커녕 책도 들여다보지 않고 책보를 팽개쳐 두었다가 다음날 그대로 학교에 가지고 가던 놈이었다.
한 번도 개근상은 고사하고 정근상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고 시험 보면 60점도 받아 본 적이 없던 놈이었다.
새롭게 6학년을 다니면서는 공부를 제법 했으며 선생님의 칭찬을 받을 정도로 반에서 일 이등을 다투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정신이 든 것일까!
시험 볼 적마다 90점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었으며 일제고사 시험을 볼 적마다 상장을 탔다.
결국엔 우등생으로 졸업까지 하는 영광을 얻었다.
그때는 중학교도 시험을 치르는 시기였다.
그래서 내 고향의 시골 중학이지만 시험을 치렀고 당당히 일등으로 합격한 것이다.
그리고 담임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으니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가정 형편상 진학은 포기해야 했다.
당시 군정이 들어서서 처음으로 전국이 동일 문제지로 시험을 치렀던 것인데 내가 받은 점수는 광주에서는 최상위 학교인 서중학교를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점수였지만 나에겐 이미 집안이 기우러 서중이 아니라 시골 중학도 진학할 형편이 못되었다.
일등으로 합격하면 보내 준다던 큰형의 말도 물거품이 되어서 농사만 짓고 있다가 권태를 느껴서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어머님 혼자 두고 몰래 밤 봇짐을 쌓고 말았다.
고향 사람이 자리 잡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대전으로 찾아가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남보다 왜소한 체구로 친구 따라왔지만 보는 사람마다 너무 어리다고 누가 일자리를 선뜻 주지 않아 처음엔 끼니를 거르는 고생도 많이 했었다.
굶주림도 참아내고 힘에 부치는 일도 마다치않고 무모하게 달려들어 힘보단 두뇌의 회전과 요령으로 극복해 낸듯하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것들을 이겨내고 아직 살아있음에 하느님에게 감사하며 지금도 그런 정신으로 사는 것 같다.
지나온 과거 유년시절 나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욕을 먹었던 이미 저승 사람이 된 누나들과 몇 명의 죽마고우 그리고 지금쯤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을 죽마고우들 가리 늦게 반성하여 그리운 맘 가득 않고 글로나마 사죄하고 싶다.
아직 저승에 가지 않은 죽마고우여!
혹여! 만날 기회가 된다면 마음이 후련하도록 너털 웃음과 함께 마음을 시원히 털고 싶다.
그러나 서둘러 저승에 간 분들이 너무 많으니 그분들께는 마음의 빚 이승에서 갑지 못하고 저승까지 지고 가야 할 것 같다.
두 분 누님과 젊어서 떠난 죽마고우 두 친구여! 저승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면 용서하고 비록 못난 놈이었지만 나의 남은 인생 불쌍히 여겨 하늘에서 나를 지켜주었으면 하고 욕심을 부려 본다네.
우리나라는 문명의 혜택으로 장수 국가라서 나도 이리 오래도록 살아가는데 우리 형제들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서둘러 저승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젠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서 고아 아닌 고아되어 인척이 무엇인지 망각해 가는 인간이 되는 것이 아쉽고 안타깝다.
2008.3.1.
황 학 시인 임문석
첫댓글 일제시대로부터 6.25를 거친 우리 윗세대들은 정말 제일 고통받은 산증인들이죠.저도 어려서 엄마 무릎 베고 피난이야기를 들었지만,..나이 들수록 그 분들이 존경스럽고, 그만큼 죄송스럽고 감사할 뿐입니다. 기실 앞서 가신 분들의 밑바침 위에 선생님이 서계신 게 아닌가 싶네요. 임문석님도 그 생생한 아픈 기억들을 잘 묵히고 삭혀 좋은 글로써 빚갚음을 하시길 빕니다. 생생하게 잘 읽었습니다. ^*^
김금용 선생님의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