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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줄: 맨 오른 쪽: 정 정양 선생님/ 2009/ 8. 타이완 여행 당시 고메회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최고령이신데도 열댓살 아래것(?)들과 친구 같은 모습 )
이번 초대석에는 연붕서당 동학(同學)인 정정양 학생회장님을 모셨습니다. 옛말에 ‘나이 들어갈수록 젊어진다.’는 뜻으로 곧잘 ‘노익장(老益壯)’이란 말을 썼는데 이 말에 꼭 어울리는 분이라 생각됩니다. 일흔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젊은이 못지않은 학구열과 호기심 천국의 여행광, 두주불사의 주량(酒量)에다 숨어서 칼갈기를 하시듯 비장(?)의 취미 활동까지......정말 강호에 숨어사는 고수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고메 초대석에 정선생님을 모셔서,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그 에너지의 원천과 꼭꼭 숨겨둔 취미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취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이 인터뷰는 이메일로 이뤄졌습니다.)
문 1. 정정양 선생님은 2011년 6월 현재, 연붕서당 학생회장을 세 차례나 연임 중이십니다. 본인 소개와 곁들여, 연붕서당 학생들 중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이유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절대적 지지라는 표현은 듣기가 송구하군요. 답변하기도 부끄럽고요. 단지 조금 봉사한다는 생각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오해 없었으면 하고 언제든지 훌륭한 분이 맡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문 2. 고향 이야기와 함께 어떻게 부산과 인연이 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답: 고향은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인데 옛날부터 서부경남에서는 알아 주는 古家마을이었지요. 농토가 많지 않아 협소한 편인데도 인근 고을에서 “남사들”로 불려 왔으며 지금은 예담촌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600여 년 전, 朝鮮創建으로 高麗遺臣들이 먼저 들어 오고, 朝鮮初 王子亂을 피해 太祖 駙馬 景武公께서 避亂왔다가 鄕里를 이룬 곳이기도 합니다. 주변 산에서 伽倻時代 土器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그전에도 역사는 오래 이어져 왔을 것으로 推定됩니다.
마을로 들어서는 앞뒤 쪽 입구는 산모퉁이로 가려져 있고 지리산의 줄기가 남쪽으로 내려와 마을 뒤편에서 끝나며, 산들이 전형적인 좌청룡 우백호 북현무 남주작 모양으로 마을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각성받이가 오래 같이 살면서 집안마다 書齋를 갖고 後孫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설날에는 어른 아이 모두 자기 집안뿐만 아니라 동네 어르신께도 歲拜하느라 하루 종일 바빴습니다. 歲拜를 하고 나면 그 집안에서 겨우내 준비한 음식과 祭酒가 한상 가득 나옵니다. 손님들이 계속 밀려들기 때문에 곧 바로 일어서야 하지만 가까운 집안에 가면 느긋이 앉아 깨엿도 먹고 자반도 먹고 강정도 먹곤 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물론 맑은 청주 한잔씩도 했지요. 참 아름답고 그리워지는 세속풍경이었습니다.
부산에는 제주에서 배타고 와서는 계속 부산사람이 되었습니다. 국세청 傘下 첫 발령지가 낙원 같은 제주였는데 2년 정도 살다 보니 부산으로 오고 싶어 졌습니다. 서울도 미련이 있었지만 제주에서 이미 부산사람들과 인연을 맺어 부산에 오기가 쉬웠습니다.
문 3. 공직에 오랫동안 봉직하신 걸로 압니다만 퇴직 후 어떤 유혹으로 한문서당을 찾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한문과의 인연으로 어릴 적 선친이나 집안 분위기에 대해서도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 이종우 전임회장께서 기회있을 때마다 좋은 강좌가 있다고 권유하여 친구들과 함께 등록하였는데 공부를 열심히는 못하지만 날이 갈수록 書堂에 자꾸 끌려 다닌 지 벌써 6年次가 되었습니다. 매 학기마다 한 둘씩 등록을 하여 한 때는 5-6명의 친구가 함께 수강한 적도 있었지요. 수강하면서 새삼 소시 적 생각이 떠오릅니다. 얼마든지 한문을 배울수 있는 환경이었거던요. 왜 그 때는 한문에 대하여 그렇게 무관심했을까? 이 어마어마한 경지를 무시한 건 아닐까? 하고 되물어 봤어요.
집안의 내력은 참으로 복잡합니다. 저는 해방 전해에 일본 세또에서 태어나 해방이후 주로 경남 진주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6.25사변으로 외가 곳인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로 피난 가서 그 곳이 고향이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 6.25를 겪으면서 누구나 어려워 초근목피로 살아가던 시대였습니다. 초등학교도 9살에나 들어갔으며, 25명 재학생에 내보다 3살이나 많은 학생들이 같이 다녔습니다. 그런 난리 중에 부모님께서는 맨손으로 2남 3녀를 키워 내시느라 고생 참 많이 하셨습니다. 그렇게 고생만 하셨는데 자식들이 살만할 때는 효도 한번 받아 보지 못하시고 우리 곁을 떠나셨지요. 어릴 때는 몰랐지만 지금도 부모님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짠합니다.
先親께서도 해방 전까지 일본에 계실 때는 전쟁 통이지만 소규모 초자공장을 경영하시면서 그래도 잘 나가시는 편이었습니다.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시자 그만 고국이 그리워 처자를 이끌고 외숙님 형제분과 그 가족들, 지인들과 함께 급히 귀국하셨지요. 귀국 하시자마자 지녔던 금전은 사기 당하고 그로부터 가족들과 함께 고생문에 들어섰지요.
문 4. <고전의 메아리> 카페에 ‘적덕지가’라는 아이디(ID)로 종종 글을 올리십니다. 적덕지가를 필명으로 쓰시는 숨은 내력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은 있으면서도 바쁘게 살다 보니 마음대로 안 되더군요. 생각만 해 오다가 갑작스레 이름을 짓다가 보니 잘못 올린 것 같습니다. 오히려 송구스럽게 생각해 왔는데 앞으로 다른 이름으로 바꾸려고 생각합니다. 덕을 쌓는 것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남몰래 쌓으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문 5. 정회장님은 고향이 진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선생님께서 어릴 적에 겪으셨던 6.25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선합니다. 잊지 못할 그때 이야기를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답: 6.25전쟁의 현장을 최초 목격한 것은 진주시내 서쪽 먼 하늘에 爆彈投下 場面이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한지 몇 달이 지나고, 남한 대부분을 점령한 북괴인민군을 향해 美空軍 B29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폭탄을 쏟아 붇는 장면이었습니다.
피난 후에 폭격이 계속되어 진주 시내는 거의 모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 폭격으로 인해 진주시가지는 꾸불꾸불한 도로는 사라지고 바둑판처럼 깨끗하게 건설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폭격을 목격한 후 곧 바로 11살 위 형님과 避難길에 올랐습니다. 그때까지 버스도 없을 때이므로 包裝이 안된 新作路 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코쟁이들이 탄 군용차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고 전쟁터가 가까이 있구나 싶었지요. 저녁때 쯤 도착한 곳은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外家집이었으며 온 가족이 그 곳에서 계속 살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있을 때에는 外叔님 兄弟분과 가족들이 우리집에 依支하였었고 이 때부터는 외갓집 사랑방으로 거처를 정했으니 처지가 거꾸로 되었지요.
6.25전쟁이 발발한 후 그때까지 우리국군은 한번도 보지도 못하고 곧 바로 인민군 세상으로 변했습니다. 온 세상은 암흑천지가 되었고 인민군에 적극 협조한 청년들 몇몇은 온 동네를 활개 치면서 공포분위기 조성에 앞장섰습니다. 부녀들은 따로 모아 부녀회를 조직하고 아이들은 따로 모아 군가 등을 가르치느라 열을 올렸는데 지금도 그 때 배운 노래 “장백산 줄기줄기.......” 가사가 조금 기억납니다. 철이 없을 때니까 재미있어 하지나 안했는지 모르겠네요.
후일 가장 친했던 대학친구가 자기 집안 수난사를 들려주더군요. 면장을 하시던 백부님께서 인민재판을 받고 총살된다는 소문을 접하고 자기 부친께서 현장으로 달려가서 항의하다가 같이 총살되었다고 하더군요. 남한 전체 고을마다 벌어 졌던 역사의 현장들이었지요.
추석날 아침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골목을 뛰어나가려고 하는데 어른들이 설명도 없이 못나가게 막아 매우 궁금했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인천상륙작전에 힘을 얻은 연합군의 대반격의 여파가 이 동네까지 미치게 되었지요. 새벽부터 보통 정찰기로 알려진 미공군 L19비행기가 동네에 깔려 있는 인민군을 향해 기습 機銃掃射를 하고 인민군들은 무조건 들고 뛰다가 떼죽음을 하였어요. 우리 집 골목에서도 인민군 한명이 담을 넘다가 즉사하여 길바닥에 시체로 널브러져 있었는데 아이들에게 험한 장면을 안보이려 밖을 못나가게 하였던 것이지요. 1시간쯤 적막이 흐른 후 L19機銃掃射는 또 다시 계속되었습니다. 비행기 소리가 들리면 절대로 뛰면 안 되고 가장 가까운 담장 밑이나 隱蔽物에 급히 숨어야 했습니다. 한번은 뒷간 옆 早紅감나무 밑에 13살 누나와 숨어 있어야 했는데 100여년 된 古木이라 속이 텅 비어 두 사람 숨기에 안성맞춤이었지요. 한번은 두 째 외숙모님과 인민군 한명과 큰방에 세 명이 함께 숨게 되었습니다. 외숙모와 문구멍으로 비행기를 내다 봤는데 인민군이 기겁을 하였습니다.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보일 리도 없지만 얼마나 혼쭐이 났는지 역정도 못 내고 작은 목소리로 내다보지 못하게 조용조용히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인민군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무 살 쯤으로 어려 보였는데 그도 때를 잘못 타고 나서 영문도 모르고 끌려 와서는 결국은 죽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측은한 단면이지요.
이상한 것은 기관총으로 그렇게 볶아 댔는데도 동네사람들은 희생자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지요. 인민군들만 표적으로 삼아 산으로 몰아 낸 것 같습니다. 주로 흰옷을 입은 주민들은 L19비행기에서도 구분이 가능하고 비행기 소리만 나면 주민들은 거의 움직임이 없어 그러했던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공습이 좀 뜸해지자 우리 형제는 2차 피난길에 먼저 올라야만 했습니다. 단속사지/斷俗寺址(초등학교 사회교과서에 수록된)가 있는 雲里 이모님댁으로 20리길을 출발했습니다. 그래도 난리 통에는 피붙이를 찾기 마련인가 봅니다. 얼마 걷지 않아 동네 뒤편에서 그만 눈 빠진 인민군 시체를 목격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인천상륙작전으로 戰線은 북으로 밀려가고, 허리가 동강난 인민군부대들은 일부는 전선을 뚫고 북으로 갔으나 일부는 보급이 끊긴 체 남한 곳곳에 남겨져 가까운 산악지역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들은 전국 곳곳에서 빨치산들과 뭉쳐 공비들로 돌변해 막강한 힘으로 支署, 면사무소, 차량 등을 襲擊하여 人名殺傷을 하거나 죄 없는 軍警家族, 심지어 공무원 가족까지 죽이거나 시도 때도 없이 掠奪을 恣行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전방에 전투력 유지가 급하니 후방을 돌볼 여력이 없었습니다. 자구책으로 특공대, 민병대를 조직하여 治安을 유지하려고 하였으나 훈련도 받지 못한 농민들이라 계속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낮의 치안이 점차 회복되는가 싶더니 이들은 주로 밤에만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共匪들에게 情報를 제공한 그들의 가족들이 수난을 받는 차례가 오게 됩니다. 공비들에게 관련된 가족들 역시 양민들이지만 그들로 인해 이쪽에 희생이 생겼으니 불행의 씨앗이 된 것이지요. 연루된 가족을 색출하여 죄를 묻게 되고 그 때부터 복수에 복수를 하는 동전 양면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었었지요.
거창주민학살사건, 여순반란사건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의 연속이었지만 그들 사건 뒤에는 꼭 이런 배경들이 있었지요. 이 경우와는 반대로 휴전이 될 때까지 공비 정순덕이가 가장 마지막에 잡힌 삼장면과 이에 바로 인접한 시천면에서는 인민군 및 공비들과 주민들은 몇 년간 한솥밥을 먹었어요. 토벌대가 왔을 때 처음에는 주민 모두 학살하려고 했었습니다. 지형적으로 함께 생활할 수밖에 없었고 특수지형으로 서로 보복하는 악순환이 적었다고 판단되어 한명의 피해도 없이 무마된 것은 천만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난리 중이었으니 너나 할 것 없이 마을 주민들은 모두들 피골이 상접한 상황이었습니다. 사정이 그러한 데도 수없는 약탈 납치 부역 등으로 우리 부모님들은 이중삼중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본격적으로 共匪討伐作戰이 開始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해만 떨어지면 동네 입구에서 호루라기 부는 소리가 멀리 들립니다. 30초도 안되어 사립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 와 물어 보지도 않고 마치 자기 집 물건인 양 곳간, 부엌, 여기 저기 방들, 뒷간까지 뒤져 곡물 옷가지 등 보이는 데로 가져갑니다. 가축이 보이면 당연히 약탈 1순위이지요. 먹을 것도 없지만 하도 수탈을 당하니까 꾀를 내어 봅니다. 곳간에 바닥을 파서 장독 등을 묻고 그 속에 감추기도 해 봤지만 막대기를 두드려 찾아내요. 먼 밭 담 밑에 숨기기도 하고 옷가지는 고리짝에 담아 나무에 달아매기도 하고 정말 고달픈 시절이었어요.
하루는 여느 때와 같이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군화 발자국소리가 들리더니 막아 놓은 사립문을 발로 박차고 공비 두 명이 들이 닥쳤습니다. 남자어른들은 해가 있을 때 미리 소를 몰고 10리 밖 강 건너 묵곡리로 피신을 가고 집안에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동그마니 눈을 뜨고 적막 속에 기다립니다. 집안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녔는데 수확물이 없었지요. 갑자기 한 놈은 입구 쪽 망을 보고 한 놈은 장총 총구를 큰외숙모 배에 찌르듯이 들이 밀면서 곡식을 내 놓으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나이 30쯤 되었던 외숙모는 파랗게 질려 말도 못하지요.
외할머니께서 용기를 내어 절구로 찧던 겉보리 한 됫박가량을 보이면서 우리도 이것 먹으려고 찧던 중인데 이거라도 가져가라고 사정했습니다. 물론 다 찧었다면 가져 갈 것이라 찧기 시작하자마자 그대로 둔 것이지요.
이러한 사정들을 아는지 모르는 지 태백산맥, 지리산, 남로당 등 소설에서 좌파 문인들은 약탈을 보급투쟁이라고 미화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자유대한에서 자유로이 먹고 자고 하면서 뉘우침 한번 없이 빨치산과 공비의 활동을 극도로 찬양합니다. 통탄할 일은 수많은 우리 학생들이 그런 책을 읽고 지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수렁으로 계속 빠져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들의 죄를 어떻게 물어야 할까요.
문 6. 다른 소일거리도 많은데, 하필이면 딱딱한(?) 고전공부를 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고전 중에서 선생님께서 좌우명처럼 좋아하시는 구절이 있으시면 알려 주십시오.
답: 연붕서당에 다니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옛날 어릴 때 한문을 왜 안 배웠을까 하고 후회가 되었어요. 동서고금의 불변의 진리와 철학이 여기에 다 있었는데 역시 “후회는 앞서지 않는다”는 명언을 실감합니다.
고향에 대하여 앞에 약간 언급하였지만 조금 더 부연하면 우리 고향 동네는 100호정도인데 각 성씨 집안의 書齋가 7-8개나 있으며 훌륭한 漢學者들도 많았습니다. 大儒學者 俛宇 郭鍾錫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지요. 뜻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었지만 그때 왜 그랬는지 新學問에 밀려 조금 등한히 했던 분위기 같았습니다. 어른들도 일본에 유학하였으나 일본에 핍박받고 해방이후 사회는 더욱 혼란스러워 힘을 펼 수가 없었고 종을 잡을 수 없었던 혼돈의 시대였지요. 학교선생님들도 학생들도 신학문의 분위기에 파묻혀 진학에만 신경을 썼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진학을 못한 이웃동네 친구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 와서 한문공부하고 가는 걸 몇 번이나 목격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한문은 이들 몫이라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 것이지요. 지금 나이에 공부 한다 지만 소시 적 같은 공부를 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들 지만 연붕서당에는 계속 다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좌우명이라면 특별한 것은 없구요. 어릴적 先親께서 술을 드시면 늘 말씀하시던 “情神一到 何事不成” “정신을 차리면 무슨 일이든 못 이룰 것이 없다.” 逆境의 연속이셨던 아버지께서 金科玉條로 여기시던 구절이라 지금까지 새기고 있습니다. 연붕서당에 와서 다시 깨친 구절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창시절에는 “배우고 때로 익히니 또한 즐겁지 않은가”에서 무엇이 그렇게 즐겁다는 것인 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배우고 익히고 읽어보고 또 익히고 하는 생활에서 배운 대로 행동으로 되고 있음을 보고 즐거워지는 단계 즉 그러한 생활에서 절로 즐겁다는 뜻을요. 공자께서는 늘 그러한 경지에서 살았으리라 색각해봅니다. 한문 공부에 두고두고 명심해야 할 구절이라 생각합니다.
문 7. 제가 알기론 회장님은 상당한 수준의 아마추어 화가라고 들었습니다. 그림에 빠지신 내력, 또한 최근에 그린 그림도 한 편 실물로 소개해 주시면서 그림의 세계에 대해 철학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좌측 그림: <나시족 전통춤-중국 윈난성 리장/정정양 그림/수채화 30호>
답: 옛 직장동료 한분이 바둑모임에서 그림 같이 해 보자고 수차 권유를 했습니다. 바쁘게 살아오면서 무언가 취미생활을 해 봐야지 하고 생각해 왔기에 별 주저 없이 수채화를 시작했는데 선 긋는 데에도 조작조작하면서 헤매고 있었지요. 그림을 그려본 기억이 없는 완전 초보였으니까요. 선생님을 잘 만난 것 같습니다. 권용훈 화백인데 부산에서 인물화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요.
예술가로서 특이한 점은 잘 팔리는 그림은 별로 안 그리고 주름살 많은 노인들을 소재로 자주 그리는 癖을 가지셨는데 그림에 혼을 불어 넣는 분이지요. 저는 이제 5-6년 정도 되었지만 철학을 논할 단계는 아직 요원하고 조금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좌측 그림: 이집트 나일강 석양 풍경/정정양 그림/수채화 20호>
문 8. "회장님, 밤도 깊었습니다. 제발 정량만 드십시오." 언젠가 여행길, 술 자리에서 회장님께 제게 드렸던 말씀이었지요. (*정정양 선생의 함자를 일부러 썼음.) 하지만 "어허! 이 사람아! 자넨 아직 모르네. 내 정량이 자네 예닐곱 배는 넘을 걸세!" 호탕하게 웃으시면 하시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정 회장님의 두주불사(斗酒不辭) 실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편입니다. 누구나 술을 즐기지만 회장님은 특이체질을 가지신 건지, 아니면 술을 드신 후에 특별한 비방이 있어 숙취에서 남보다 빨리 깨시는 지....... 이 기회에 조금만 공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답: 두주불사라 글쎄요. 좀 과장된 것 같은데요.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 나름대로의 주법도 있고 숙취해소 방법도 각양각색이라 들었습니다.
숙취해소는 거의 집사람의 배려로 되는 것 같습니다. 술 마신 다음날 해장국은 거의 안 빠지지요. 칡뿌리, 버섯종류, 겨우살이, 어성초, 삼백초 감나무와 뽕나무잎, 오미자, 산수유 헛개 등을 돌아 가면서 삶은 물이 거의 끊이지 않습니다. 피를 맑게 하는 데는 양파만큼 저렴하면서 좋은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무슨 국이나 찌개, 나물에 큰 것 하나 넣으면 설탕대신 조미료도 되고 순환기계통은 해결되지요. 외식을 줄이고 제철 음식을 찾아 먹는 것도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다면 단전호흡을 빼 놓을 수 없군요. 25년 전 단전호흡을 처음 접했는데 수련을 시작하고 3개월쯤 지나면서 몸으로 변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한달에 한번씩 학교동기친구들과 주로 근교 登山을 하면 늘 꼴찌에서 헤매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앞에서 2-3번째에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지요. 겨우내 달고 다니던 감기도 어느 듯 사라지고 정말 신기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국선도를 수련할 기회가 우연히 찾아 왔습니다. “仙道活法” 단전호흡과 대동소이한데 “이번에는 나도 마음먹고 해 봐야지” 하고 다짐을 했습니다. 결석을 거의 하지 않고 퇴직할 때까지 열심히 수련하였습니다. 그 덕분으로 요즈음 매일 아침 20분(바쁘면10분)가량 집에서 호흡을 하고 있는데 감기는 거의 안하는 걸 보아 효과를 보고 있다고 믿습니다. 들이 쉬고 내쉬는 1회 호흡에 30초 걸리는데 20분 동안 40회만 호흡을 하니까 스스로 생각해도 참으로 신기한 것입니다. 고수들은 손가락으로 철판도 뚫는 다고 합니다.
문 9. 짬짬이 해외여행도 즐기신다고 들었습니다. 세계 각국을 돌아보신 중에 어느 곳이 가장 좋았습니까?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이집트-룩소르신전 기둥 앞의 정정양 선생 부부>
답: 여행을 즐기려고 하는데 나이가 들고 나서 여행을 시작하니까 가볼 곳은 많고 시간은 없고 체력도 염두에 둬야 하니까 좀 초조하기도 하네요.
북구 여행에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협곡바다, 수천m의 깊이에 태초의 얼음을 간직한 피요르드, 8월인데도 1000m넘는 산들이 눈을 덮어 쓰고 있다. 깊이가 가늠되지 않아 바라보는 자체로 가슴이 시린 아름다움은 더욱 신비롭게 다가오고,
불교의 발원지 인도에서는 부처의 최초 설법 이전에 신의 세계가 있었고 그로부터 신의 세계에도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 것만 같았던 곳, 현기증이 나는 무더위 속에 몸 전체가 땀범벅인 체 택시 속에서 도시락식사를 하면서 고생했었는데도 얼마지 않아 남부인도 여행을 계획하고,
나일강의 홍수가 이집트와 세계역사를 바뀌게 한 역사흔적이 전국도처에 있고, 넘쳐 나는 유물로 미라가 발굴된 모습대로 진열되어 있고, 지금도 발굴은 계속되고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나라.
두 대륙에 이어져 있고, 실크로드의 서쪽 끝인 도시 이스탄불이 있는 나라회교국가에서 가장 미래가 밝아 보이고 미국다음 혈맹으로 우호적인 터키, 옛 도시국가 유적이 많은 곳, 카파토키아, 소금호수....
쌍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궁전 겨울궁전, 시내에서 제일 높은 곳이 몇십 미터 안팎의 전망대가 있는 대평원속의 모스크바, 이름만 들어도 오싹한 붉은광장 레닌묘 크레믈린궁 KBG건물 등등.......어느 곳도 뒤로 가라 할 수 없네요. 다 소중한 추억이 있으니까요.
10. 끝으로 사위나 며느리에게 고전을 왜 읽어야 하는 지를 설득하신다면 어떤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답: 내 자신부터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부분이라 답변이 궁해집니다. 이제야 고전에 만고의 진리가 있다고 믿게 되었는데 저들 미래에도 도움은 될 것으로 알지만 자녀들에게 쉽게 설명할 방법이 아직 안 떠오릅니다. 그리고 자녀세대는 학교에서 천자문정도도 교육받지 못해 정신적으로 준비도 안 되어 있을 테고 서두르면 더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즈음 30대는 바로 부모세대를 무조건 부정 한다잖아요. 그래서 며느리한테는 자신이 없어요. 그래도 찾아보아야 하겠지요. 하기에 우선 해박하신 분에게 물어서 방법을 찾아 볼가도 생각합니다. 내용도 없이 장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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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 선생님께서 육이오 전쟁 때 몸소 겪으셨던 귀한 체험담! 이것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인터뷰의 가치는 어마무시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사진을 보내주시지 않아 제가 갖고 있는 것 중에서 골랐습니다. 정 선생님께서 간직하고 계시는 사진 한장 늦더라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위에 올린 사진과 교체해 드리겠습니다.
정정양 선생님 항상건강하시고 사모님도 잘계시는지요?
박하선생님 내가 보지못했던 생생한 역사공부에 대한 인터뷰 감사합니다.
저희부부는 두분선생님과 사모님들의 안부가 항상궁금하답미다.
다음여행에 기회가되면 저희도 참여시켜주시면 끝까지 배알이 안하고 완주 하겠슴니다. 고맙슴니다.
파이님, 반갑습니다. 우리가 누빈 동남아에는 정선생님 부부와 파이님 부부도 거의 매번 함께 하셨네요. 여행사 확인 결과, 미얀마 7월 패키지 프로그램은 아직 상세일정이 안 나왔다고 합니다. 일정이 나오거나 변경사항이 있으면 연락 드리겟습니다. 캄샤!
와우~ 그림 실력이 대단하십니다! 정정양 선생님께서 이집트 여행시 부부 사진, 그리고 당신께서 직접 그리신 수채화 2 점의 사진을 보내주셨기에 본문에 끼워넣었습니다.
유화 그림 20호 30호가 정선생님 그림이라니 대단한 실력이군요. 이런 저런 새로운 이야기, 적덕지가님이 정선생님이라는 것 등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유화인 줄 알았는데 수채화라고 하더군요. 수채화가 유화보다 더 어렵다던데.......더욱 놀랍습니다.
해방 전 후, 6.25 당시의 영화가 따로 없네요.
소설책을 한 권 읽은 듯한 기분이 드네요. 선생님의 멋진 삶의 이야기.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 속에 배울 점이 참 많네요. 저는 단전호흡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한편의 드라마를 감상했네요,,우짜던지 즐기시고 또 즐기시기 바랍니다
정정양회장님! 6.25겪으신 말씀외 살아오신 좋은 말씀 공감이 갑니다. 부디 건안하시고 더 즐거운 삶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