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1973년 사이의 태국 역사는 군사정권이 상당한 기간 권력을 잡고 주도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주요한 인물로는 독재자 빽 피분송캄(Plaek Pibulsongkram, แปลก พิบูลสงคราม: 1897-1964)[피분송크람] 총리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일본과 동맹을 맺기도 했다. 또다른 두드러진 민간인 출신 정치인으로는 삐디 파놈용(Pridi Banomyong, ปรีดี พนมยงค์, 陳嘉祥: 1900-1983)[쁘리디]이 있는데, "탐마삿 대학"(Thammasat University, มหาวิทยาลัยธรรมศาสตร์)의 설립자이기도 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잠시 동안 총리를 역임했다.
삐디 파놈용 총리가 물러난 후로는 군부출신 독재자들이 연속으로 등장했다. 먼저 빽 피분송캄이 다시 복귀했다가, 이후 살릿 타나랏(Sarit Dhanarajata 혹은 Sarit Thanarat: 1908-1963) 및 타넘 낏띠카쫀(Thanom Kittikachorn: 1911-2004) 총리로 이어졌다. 이들은 태국 전통주의에 기반을 둔 권위주의 정권으로, 미국의 영향력 하에서 근대화 및 서구화적 요소들을 더욱 결합시켜 나갔다. 이 시기의 마지막 부분은 "탐마삿 대학" 학생들이 주도한 민주화 시위가 학살로 끝나면서, 타넘이 사임하고 막을 내렸다.
1. 내부의 갈등
군부는 무혈로 성공한 "1932년 시암 혁명"(Siamese revolution of 1932: 1932-6-24)을 통해 정권을 잡고, 태국의 정체를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바꿨다. 빠차티뽁(Prajadhipok, 라마 7세: 1893-1941) 국왕은 처음에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이후 정부와 긴장관계를 형성하면서 1935년 퇴위를 했다. 라마 7세는 퇴위를 즈음하여 발표한 성명서에서 정권을 비판했다. 이 성명서는 태국의 정치발전이 더디다고 보는 비판자들이 종종 인용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포함하고 있었다.
과인은 이전에 국민들에 대해 행사했던 권력을 기꺼이 포기하고자 하노라. 하지만 과인은 지금 내놓는 권력이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독재적 의미에서,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게 돌아가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1935-3-2) |
1932년에 들어선 새로운 정부는 파야파혼 폰파유하세나(Phraya Phahon Phonphayuhasena, พระยาพหล พลพยุหเสนา, Phot Phahonyothin: 1887-1947) 및 파야 송수라뎃(Phraya Songsuradej, Deva Bandhumasena: 1891-1944)을 지도자로 하는 대령들의 그룹이 이끌었다. 이들은 12월 10일에 시암 최초의 성문 헌법을 공포했다. 이 헌법의 내용에는 절반은 임명직이고 절반은 선출직 의원인 국회의 구성도 들어 있었다. 또한 국민들 절반이 초등교육을 마치는 시점에 완전한 민주적 선거 실시도 약속했다. 그리고 이러한 총선 실시는 1940년대의 어느 시점이 될 것으로 예상됐다. 또 총리와 내각의 구성에 관한 내용도 들어 있었고, 입헌적 통치의 외관은 갖추고 있었다.
일단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고 헌법이 효력을 발휘하고 나자, 새로운 집권 동맹세력 내에서 갈등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갈등은 4개의 주요한 세력들 사이에 벌어진 권력투쟁이었다.
1. 파야 마노빠꼰 니띠타다(Phraya Manopakorn Nititada, พระยามโนปกรณ์นิติธาดา: 1884–1948)[마노]가 이끄는 원로 민간인 출신 보수파.
2. 파야파혼이 이끌던 군부의 기존 고위층 그룹.
3. 피분송캄이 이끌던 육군 및 해군의 신진파.
4. 삐디 파놈용이 이끌던 민간인 신진파. |
가장 최초의 심각한 갈등은 1933년에 발생했다. 당시 삐디 파놈용은 새로운 국가경제계획안 초고를 작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삐디가 구상한 급진적 구상에 따르면, 대규모 면적의 토지 국유화 및 급격한 정부주도형 산업화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계획은 또한 관료계급을 형성할 고등교육 이수자들을 확대시키고자 했는데, 이러한 이들로 구성된 관료조직은 왕족이나 귀족계급에 대해 완전한 독립성도 확보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정부의 모든 분파들로부터 즉각적으로 공산주의적 발상이란 공격을 받아야만 했다.
삐디의 계획은 사유재산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정부 내의 보수파가 가장 경각심을 가졌다. 그들은 마노(=마노빠꼰) 총리에게 "혁명" 정신에 반하는 정책을 수용토록 촉구했다. 그러나 파야 마노 총리가 이러한 일을 하려 하자, 피분송캄과 파야파혼은 2번째 쿠테타를 일으켜 마노 정부를 전복시켰다.
파야파혼이 새 정부의 총리가 되면서 왕당파들을 모두 정권에서 배제시켰다. 그러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몽꿋(Mongkut: 라마 4세) 국왕의 손자이자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바 있는 버워라뎃(Bovoradej, บวรเดช: 1877-1953) 왕자가 1933년 10월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버워라뎃 왕자는 각 지방의 수비대들을 동원해 방콕으로 진격하면서, 행군로를 따라 던므앙(Don Mueang, 돈무앙) 공항을 장악했다. 버워라뎃 왕자는 정부가 국왕을 존경하지 않고 공산주의도 비호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또한 정부 지도자들의 사임도 요구했다.
버워라뎃 왕자는 방콕 지역 수비대 병력들도 반군에 합류할 것을 촉구했지만, 방콕 수비대는 정부군으로 잔류했다. 한편 해군은 중립을 선언하고 남부 지방의 기지에 머물렀다. 결국 방콕 북쪽의 외곽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른 끝에 왕당파 군대는 최종적으로 패배했고, 버워라뎃 왕자는 인도차이나 지역으로 망명을 떠났다.
반군의 패배는 국왕의 특권 감소로 이어졌다. 반란이 시작된 후에 빠차티뽁 국왕은 이 분쟁과 민간인들의 동요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선언을 전보를 통해 표명했다. 당시 라마 7세의 이러한 행동이 반군에게 체포당할 두려움에 기인했던 것인지, 아니면 파야파혼과 버워라뎃 사이에서 더욱 적극적인 선택을 피하고자 했던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어떤 경우가 되었든, 갈등의 절정 국면에서 국왕 부부가 송카(Songkhla, 송클라)로 피난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승리한 측에서 볼 때, 국왕이 전쟁터에서 한 발 뺐다는 것은 의무를 저버린 것으로 해석됐다. 결국 정부군에 대해 완전한 지지를 표명하지 않음으로써 국왕은 신뢰를 잃고 말았다.
1934년 반란을 진압하고 몇달이 지나자, 국왕과 정부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국왕은 지병 치료를 받으러 해외로 외유를 떠났다. 라마 7세는 해외에 체류하면서 정부측과 의견교환을 계속했다. 그러한 사항에는 자신이 계속해서 입헌군주 지위를 유지할 기간에 대한 내용도 들어 있었다. 그는 사면권과 같은 전통적인 국왕의 특권이 계속 유지되길 바랬고, 새로운 정권이 가진 비민주적 특성의 일부도 어떤 방식으로든 완화시키길 희망했다. 하지만 정부측은 동의하지 않았고, 1935년 3월 2일 국왕은 스스로 퇴위를 선언했다.
이후 정부는 당시 스위스에 유학 중이던 아난타 마히돈(Ananda Mahidol, 라마 8세: 1925-1946) 왕자를 차기 국왕으로 선택했다. 일부에서는 아난타 마히돈 왕자가 당시 어렸고, 국내에 머물고 있지도 않다는 점이 선택 이유가 됐다고 보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이로써 시암 역사상 최초로 상주하는 국왕이 부재하는 상태가 발생했고, 이러한 상황은 이후로도 15년간이나 계속됐다.
빠차티뽁 국왕은 퇴위 성명서를 통해, 정부가 민주적 원칙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고 개인의 자유 및 정의의 원칙과도 양립불가능한 방식의 통치방법을 채택했으며, 독재적 방식을 통해 국민들이 시암의 국사에 대해 참된 목소리를 낼 수 없도록 했다고 비난했다. 라마 7세가 이상적인 민주주의자의 한 사람으로서 행한 비판에는 상당한 근거들이 존재했다. 정부의 "집행위원회"(Executive Committee)와 내각(Cabinet)은 토론을 위한 분위기 성숙이나 국회를 통한 해법 추구에 그다지 열성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1934년에 도입된 <언론법>(Press Act)에서는 공공질서 유지에 유해하다고 규정된 출판물은 그 어떠한 것이라 할지라도 발행이 금지됐고, 법 적용 또한 엄격하게 집행됐다. 게다가 모든 출판물들은 사전 심의를 받아야 했고, 모든 라디오 방송 역시 검열을 받도록 했다.
라마 7세의 퇴위에 대한 반응은 숨죽인 고요였다. 모두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발생할지 두려워했다. 정부측 역시 국왕의 퇴위 성명서에 표명된 내용들이 더 큰 논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논평을 삼가했다. 정부의 반대자들 역시 침묵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유일한 존재인 국왕으로부터 저버림을 당했다는 생각과 함께, 위협도 느끼고 있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제 군부가 궁극적인 권력의 중개자로 부상한다는 것이 어렴풋이 감지되면서, 절대군주의 자리를 군부가 주도하는 "인민당"(People's Party)이 대체한 셈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아이러니하게 되면서, 그 주창자들조차 초기의 혁명 동기를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는 집권세력 내에서 가장 이상주의자였던 삐디조차도, 서구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일당독재 국가를 자신의 최초 헌법 초안에 집어넣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일단 모든 내부적 도전들을 물리치고 나자, 이제 정부는 자신들이 권력 창출의 명분으로 삼았던 약속들을 시험하는 단계로 전환했다. 즉 신뢰를 확보하고자 몇몇 중요한 개혁조치들을 강도높게 실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정부는 금본위제 통화제도를 시작하여 교역활동이 회복되도록 했다. 교육예산도 4배로 증액하여 문자해독률이 상당한 수준까지 올라갔다. 시도 지방정부에도 선출제를 도입했고, 여전히 정당은 허용되지 않았지만 1937년에는 국회의원 직접 선거를 실시함으로써 민주주의도 진전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삐디의 주도로 "탐마삿 대학"이 개교했고, 기존에 존재하던 "쭐라롱꼰 대학"(Chulalongkorn University)의 문호도 더욱 개방되었다.
한편 군사예산도 엄청나게 증액됐는데, 이는 명백히 군부의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1934-1940년 사이의 태국의 육, 해, 공군은 그 이전 어떤 시기에도 볼 수 없었던 수준에서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2. 민족주의의 추구
국방부장관 피분송캄 소장이 이끄는 군부와 외무부장관 삐디가 이끌던 민간 정부는 이후 수년 간 조화를 이루며 일했다. 하지만 1938년 12월 피분송캄이 총리가 되면서 이러한 협력체제는 금이 갔고, 군부의 우위가 더욱 강화되었다. 피분송캄은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의 예찬자였고, 그의 정권 역시 얼마 안 있어 파시스트(전체주의)적 성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1939년 초, 왕당파 및 민주세력 중 40명에 달하는 정치적 반대자들이 체포됐고, 이후 재판에 회부된 후 18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시암 역사에서 한 세기만에 발생한 정치적 처형이었다. 또한 담롱(Damrong) 왕자와 파야 송수라뎃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은 망명길에 올라야만 했다.
피분은 화교계 상공인들에 대한 선동적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중국계 학교들과 신문들이 문을 닫았고, 화교들의 사업에 대한 세금도 인상됐다.

(사진) 빽 피분송캄 총리.
피분과 그의 이념적 대변인이었던 루웡 위찟아타깐(Luang Wichitwathakan 혹은 Wichit Wichitwathakan, หลวงวิจิตรวาทการ, วิจิตร วิจิตรวาทการ, 金良: 1898-1962)은 국가 지도자를 우상화시키기 위해,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사용하던 선전선동 기술들을 모방했다. 그들은 대중매체의 위력을 인식하고, 국민들을 정권의 지지자로 만들기 위해 모든 라디오 방송을 국유화시켰다. 정부가 내놓은 대중적 구호들은 라디오를 통해 끊임없이 방송됐고, 신문과 입간판들에도 게시되었다. 피분 총리의 사진은 태국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내걸린 반면, 독재정권에 대해 드러내놓고 비판을 해대던 전임 국왕(라마 7세)의 초상화는 금지됐다.
피분 정권은 이와 동시에 많은 수의 권위주의적 법안들도 통과시켰다. 이러한 법률들은 정부에 대해 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토록 하여, 무제한적 구속과 거의 완전한 언론검열이 가능토록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태국의 신문들은 오직 추축국 쪽에서 제공되는 좋은 뉴스들만 보도하도록 유도되었고, 내정에 관해 비꼬는 논평들은 금지당했다.
1939년 피분은 국호를 "시암"(Siam)에서 "자유의 나라"란 의미를 지닌 "프라텟 타이"(Prathet Thai), 즉 "태국"(Thailand)으로 바꿨다. 이러한 조치는 민족주의적 움직임이었다. 즉 이것은 라오족(Lao)과 샨족(Shan)을 포함하여 "따이계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의 단결의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계 사람들, 즉 화교만은 배제되었다. 피분 정권의 구호는 "타이 사람들을 위한 태국"(Thailand for the Thai)이었다.
피분이 주창한 새로운 "태국 민족주의"에서는 근대화(Modernisation) 역시 중요한 주제였다. 1939-1942년 사이에, 피분은 12건에 달하는 "문화포고령"(Cultural Mandates 혹은 State Decrees, 라타니욤, รัฐนิยม, rattha-niyom: [직역] 국가-주의)을 발령했다. 이 포고령들은 모든 태국인들이 국기에 대해 경의를 표해야하며, 국가(國歌)를 부를 줄 알아여 하며, 국어(태국어)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태국인들은 근면하게 일해야 하며, 최신 상황에 관한 정보에 귀를 기울이고, 서구식 복식을 포함하여 의복에 관한 규정들도 들어있었다.
1941년에는 민족적 관습을 증진시키려는 사람을 조롱하는 것도 불법이 되었다. 피분의 사업들에는 예술 분야도 포함됐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열렬한 민족주의 극예술과 영화들이 제작됐다. 이러한 작품들 속에서 태국의 전사들은 두려움없이 조국을 구해내기 위해 희생하면서, 영광스러운 과거를 재현했다. 학교에서도 애국주의를 가르쳤고, 노래와 무용을 통해서도 홍보됐다.
피분은 이러한 작업들과 함께 사회 곳곳에 배어있던 왕정의 영향을 제거하는 일도 엄격하게 실천했다. 왕실과 관련된 전통적인 공휴일들은 새로운 국가 공휴일로 대체됐고, "왕실 품계" 및 "귀족 칭호들"도 폐지됐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자신의 귀족적 성씨(=루웡)는 그대로 유지했다. 심지어는 불교승단(Sangha)조차 영향을 받아, 왕실이 후원했던 "탐마윳 종단"(Dhammayuttika Nikaya)의 위상이 격하되기도 했다.
한편 영화관에서는 모든 영화가 끝날 때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마치 국왕의 초상화라도 되는 것처럼 피분의 사진을 비춰야만 했다. 그리고 그때는 모든 이들이 기립하여 절을 해야만 했다. 피분에 대한 우상화는 공식적인 상징들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수탉(닭)의 해에 태어났기 때문에, 수탉이 법륜(바퀴문양)을 대체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의 길상한(길조의) 출생 색깔인 초록색이 공식적인 장식들에 사용됐다.
3. 제2차 세계대전
1940년 나찌(Nazi) 독일이 프랑스 영토의 대부분을 장악하자, 피분은 즉시로 1893년과 1904년에 프랑스에 당한 굴욕을 설욕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프랑스는 일련의 조약들을 통해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 시암의 국경선을 강압적으로 새롭게 그려놓은 상태였다.
루웡 위찟아타깐은 많은 작품들을 창작하여, 여러 종족들이 하나의 위대한 "타이"(Thai) 제국에 속한다는 찬미적 내용과 유럽의 식민주의 통치를 "악"(惡)이라며 비난하는 내용을 가진 대중적 희곡들을 발표했다. 또한 "실지 회복주의"(Irredentist, 민족통일주의)와 "반-프랑스" 기치를 내건 궐기대회들도 방콕 주변에서 끊임없이 조직됐고, 1940년에는 메콩 강 전선에서 국경충돌들도 발생했다.
1941년 1월 9일, 태국은 베트남 남부를 공격하여 일본 정부로 하여금 사이공(현 호치민시)으로 진출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1941년에 국경충돌들이 비시 프랑스(Vichy France) 정부와 태국 사이의 소규모 전쟁으로 발전했다. 태국군은 지상전과 공중전에서는 주도를 했지만, 바다에서는 꼬창(Koh Chang, เกาะช้าง) 전투에 패배하면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러자 일본이 이 전쟁의 중재에 나섰다. 결국 최종적인 해법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분쟁지역들을 태국에 넘겨주는 것이었다. 이로써 피분은 진정한 국가 지도자라는 느낌을 주면서 권위가 더욱 증대되었다. 이 승리를 축하라도 하듯이,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중장과 대장 계급을 건너 뛰면서, 스스로를 원수 계급으로 승진시켰다.
이러한 일은 미국 및 영국과의 관계를 급속도로 냉각시켰다. 1941년 4월, 미국은 태국에 대한 원유 공급을 중단했다. 그리고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태국 남부 해안과 캄보디아를 통해 침공해옴으로써, 태국의 영토적 팽창정책은 종언을 고했다.
피분 정권은 최초 약간의 저항을 한 후, 일본이 태국 영토를 통과하여 버어마와 말라야(Malaya)를 침공할 수 있도록 했다.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모습에 확신을 가진 피분은 면서 동맹국 세력이 1942년 초에 일본과 실질적인 군사동맹을 맺기로 결정했다. 일본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태국이 버어마 북부의 샨족(Shan) 국가들을 침공해 병합하는 일과, 예전 영국과의 조약을 통해 상실했던 말라야 북부의 술탄 왕국들에 대한 종주권도 인정했다.
피분은 1942년 1월 영국과 미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하지만 워싱턴 주재 태국대사인 세니 빠못(Seni Pramoj, เสนีย์ ปราโมช: 1905-1997)은 이 내용을 미 국무부에 통보하길 거부했다. 세니 대사는 그 대신 피분 정권을 불법적 정권으로 규정하고, 워싱턴에서 "자유태국 운동"(Free Thai Movement, ขบวนการเสรีไทย)을 조직했다. 그리고 태국 내에서는 명백하게 허울뿐인 "섭정"(regent) 직위에 머물고 있던 삐디가 이 저항운동을 이끌었다. 그리고 영국에 체류중이던 라마 7세의 미망인 람파이판니(Rambhai Barni, รำไพพรรณี: 1904-1984) 왕후가 이 운동의 명목상 수반이 되었다.
태국 동북부 지방의 대중정치인 띠양 시리칸(Tiang Sirikhanth)이 이끄는 병력들은 비밀 훈련소도 만들었다. 사꼰나콘(Sakon Nakhon) 도에만 12곳의 훈련소가 만들어졌다. 또한 북동부 지방에는 비밀 비행장들도 만들어져, 이곳에서 "영국 공군"(Royal Air Force)과 "미국 육군 항공대"(United States Army Air Force: USAAF) 소속 항공기들이 보급물자 공급과 "영국 특수작전국"(Special Operations Executive: SOE) 및 "미국 전략정보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OSS: CIA의 전신) 요원들, 그리고 "자유태국"(세리타이) 요원들도 실어날랐다. 또한 포로 소개작전도 동시에 펼치기도 했다. 1945년 무렵이 되면, 태국인 공군장교들이 스리랑카의 캔디(Kandy)와 인도의 캘커타(Calcutta)에 위치했던 연합군의 "동남아시아 사령부"(South East Asia Command)의 지시를 받아 연락용 비행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1944년 경에는 일본의 패색이 완연해졌고, 태국 내에서 일본의 행동 역시 더욱 더 오만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방콕은 연합국의 공습에도 시달리고 있었다. 여기다 태국이 쌀수출 시장을 상실하면서 발생한 경제적 난국이 겹치면서, 전쟁 및 피분 정권 모두 인기를 잃어갔다.
1944년 7월, 결국 피분은 "세리타이" 세력이 침투한 정부에 의해 실각했다. 국회가 재개되어 자유주의자 법조인인 쿠웡 아파이웡(Khuang Abhaiwongse, ควง อภัยวงศ์: 1902-1968)을 새로운 총리로 임명했다. 새로운 정부는 피분 정권이 점령했던 이전 영국령 영토들에서 급히 철수했고, 비밀리에 "세리타이 운동"도 지원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일본과도 우호적 태도를 유지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다. 연합군은 즉시 태국에 대한 책임을 영국에 맡겼다. 영국군은 전쟁포로들의 안전한 석방을 보장하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태국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영국군은 태국인들이 일분군에 대한 무장해제 작업을 거의 완료한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은 무수한 연합군 사상자가 발생한 데 대해 태국도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고 보았고, 태국을 패배한 적성국에 준해서 대우하고자 했다. 하지만 미국은 태국을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들과 같이 다루려는 것에 동조하지 않았고, 태국의 새로운 정부를 지원했다. 그리하여 태국은 피분 정권 시절에 수행된 전쟁에서의 역할에 대해 크게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4. 전후의 태국
1945년 세니 빠못이 총리로 취임했고, 피분의 국가주의 정권이 종식됐음을 알리는 상징적 움직임으로서 "시암"(Siam)이란 국호를 신속하게 복원시켰다. 하지만 그는 삐디 파놈용의 추종자들에 둘러싸인 내각의 수반으로서 그다지 편안한 입장은 아니었다. 북동부 지방 출신의 대중정치인 띠양 시리칸이나 방콕에서 정치적으로 벼락 성장한 송완 뚤라락(Sanguan Tularaksa, สงวน ตุลารักษ์: 1902-1995) 같은 이들은, 귀족 출신인 세니 총리가 함께 하기엔 쉽지 않은 유형의 인물들이었다. 반면 그러한 정치인들 역시 세니 총리를 태국의 정치 현장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던 엘리트주의자로 여겼다. 게다가 삐디는 쿠웡 정부 시절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배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삐디의 섭정 정치가 어렴풋이 현존하면서 정부 전반에 빛을 드리우는 일은, 강한 자부심을 가졌으면서 예민한 세니 총리로 하여금 개인적 앙심을 갖도록 만들었고, 이는 전후 태국 정치에서 독소적 역할을 했다.
1946년 1월, 민주적 총선이 실시됐다. 이는 정당들에 대한 합법화가 이뤄진 후 치뤄진 최초의 선거였고, 비디가 이끌던 "인민당"과 그 연합 정파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1946년 3월, 삐디 파놈용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최초의 총리가 되었다. 삐디 총리는 1947년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부터 1940년에 넘겨받았던 영토들을 모두 반환했다. 그 대신 "유엔"(UN) 가입, 전쟁기간 중 발생한 시암의 책임에 대한 일괄 면죄, 미국으로부터 중요한 일련의 원조들을 제공받는 일로서 그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1945년 12월, 젊은 아난타 마히돈(라마 8세) 국왕이 유럽 유학에서 귀국했다. 하지만 1946년 7월, 그는 침대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의문의 사망을 한 채 발견됐다. 라마 8세의 죽음과 관련하여, 궁정 시종 3명이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들의 유죄 여부에 대해선 상당한 의문이 남아있고, 태국에서는 현재도 이 문제가 베일에 쌓여있는 동시에, 사회적으로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기도 하다.
이어서 라마 8세의 동생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 국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8월에는 삐디 총리가 라마 8세의 죽음에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압력에 밀려 사임하게 되었다. 삐디의 지도력이 상실되자, 민간 정부는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결국 1947년 11월, 이미 1945년에 권력을 상실했던 군부가 다시 들고 일어나 정권을 장악했다. 군부는 먼저 쿠웡 아파이웡이 이끄는 과도정부를 거친 후, 1948년 4월 망명 상태에 있던 피분송캄을 귀국케하여 총리에 임명했다. 당시 피분은 떠밀려 망명길에 올라, 최종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중공: PRC)의 손님으로서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었다.
피분의 권력복귀는 마침 새롭게 판이 짜여지기 시작한 "냉전"(Cold War) 체제와 맞물렸고, 북-베트남에 공산정권이 수립되던 때였다. 피분은 곧 미국의 지원을 확보했고, 이로써 태국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군사정권의 오랜 전통이 시작되었다. 1947년 7월에는 국호도 다시 "태국"(Thailand)이라고 영구 개정했다.
다시금 정적들이 구속됐고, 재판을 받은 후 일부는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이 시기에 피분의 동조자로서 무자비한 파오 시야논(Phao Sriyanond, เผ่า ศรียานนท์: 1910-1960)이 경찰을 이끌면서 타윈 우돔(Thawin Udom), 타위 타웨티꾼(Thawi Thawethikul), 찬 분낙(Chan Bunnak), 띠양 시리칸 등 "자유태국"(세리타이) 지하운동을 주도했던 핵심인사들이 초법적 방법으로 살해되기도 했다.
피분 정권을 쓰러뜨리기 위한 쿠테타 시도들도 1948, 1949, 1951년에 발생했다. 특히 1949년의 쿠테타에서는 피분 정권이 승리하긴 했지만, 육군과 해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리고 흔히 "맨하탄 쿠테타"(Manhattan Coup)로 불리는 1951년에 해군이 시도한 쿠테타의 경우, 정부군에 가세한 공군이 그가 인질로 잡혀있던 전함에 폭격을 가해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다.
1949년 새로운 헌법이 선포되어, 형식적으로는 국왕이 임명하는 상원이 구성되었다. 하지만 상원의원들을 실제로 임명하는 것은 정부였다. 하지만 피분 정부는 1951년에 다시금 자신들이 선포한 헌법을 폐기하고 1932년 헌법으로 복귀를 선언하여, 선출직 기관인 국회를 효과적으로 붕괴시켰다. 이같은 조치는 대학들과 언론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다시금 재판과 탄압이 가중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피분 정권은 1950년대를 풍미하던 전후 호황의 효과를 단단히 보고 있었다. 이같은 현상은 주로 쌀수출과 미국의 원조에 의한 것이었다. 태국의 경제는 다각화되기 시작했고, 인구증가와 더불어 도시화도 진전되고 있었다.
1955년, 피분은 살릿 타나랏 원수 및 타넘 낏띠카쫀 대장이 이끌던 보다 젊은층의 라이벌들로 인해 육군 내에서 지도적 위치를 상실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지도력을 회복하고자 다시금 1949년 헌법을 복원시키고 새로운 총선을 실시하여, 그의 지지세력이 총선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육군은 권력을 포기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고, 1957년 9월 피분의 사임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피분이 살릿을 구속시키려 하자, 육군은 1957년 9월 17일에 무혈 쿠테타를 일으켜 피분의 시대를 종식시켰다. 그리고 일단 1959년까지 타넘이 총리를 지낸 후, 정권의 실질적 수장이었던 살릿에게 총리직을 넘겼다. 살릿은 1963년 사망할 때까지 총리직에 있었고, 이후 다시금 타넘이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살릿과 타넘 두 사람 모두 태국 내에서만 교육을 받은 최초의 지도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파시스트가 되었든 민주주의가 되었든 간에 삐디나 피분과 같은 이전의 정치인들보다는 유럽적 이념의 영향을 훨씬 적게 받은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군주의 특권 회복에 중점을 두는 태국 전통주의자들이었고, 태국 사회를 명령과 위계질서, 종교를 통해 유지시키려 했다. 따라서 그들은 군부야말로 이러한 일을 보장하는 동시에, 당시 태국의 전통적인 적이었던 베트남과 동맹을 맺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의 격퇴에도 군부야말로 최고의 수단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게다가 1950년에 태국으로 귀국했던 젊은 푸미폰 국왕도 이들의 계획에 협력했다. 푸미폰 태국 국왕이 현재 누리고 있는 숭앙받는 지위도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미국은 살릿과 타넘 정권에 대해 강력한 지원을 했다. 태국은 1954년에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 SEATO)의 회원국이 됨으로써, 공식적으로 미국의 동맹국이 된 바 있었다. 또한 태국이 공히 싫어하는 베트남과 프랑스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벌일 때는 양측 모두로부터 거리를 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인도차이나 전쟁이 미국과 베트남 공산군과의 정쟁으로 변하자, 태국은 1961년에 미국과 체결한 비밀협정을 포함하여 미국의 편에 강력하게 가담하게 되었다. 태국과 미국이 체결한 1961년의 비밀협정은 태국군 병력을 베트남 및 라오스로 파견하고, 미 공군이 "북-베트남"을 폭격할 수 있도록 태국 동부지방의 비행장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대해 베트남은 북부 및 북동부 지방을 주로 하고, 때때로 남부 지방에서도 활동하던 "태국 공산당"(Communist Party of Thailand: CPT)을 지원함으로써 보복을 가했다. 태국 남부지방의 경우, 공산반군은 불만에 차 있던 지역 무슬림들과 협력을 하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은 태국 사회의 근대화와 서구화를 촉진시켰다. 미국인들과 서구 문화의 출현은 태국 사회의 거의 모든 부문에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서구문화에 전면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에만 국한됐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은 태국 사회가 이전에 보지 못한 규모로 외부세계의 모습들을 차례차례 대면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미국 달러화는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 서비스업과 교통, 건설산업을 눈에 띄게 성장시켰다. 이에 따라 더 많은 농촌사람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동하면서, 전통적인 농촌의 가족단위도 붕괴하기 시작했다. 태국인들이 패션이나 음악, 가치와 도덕적 기준 면에서 서구적 관념들에 노출되면서 문화적 충돌들도 발생했다.
삶의 표준의 향상되자 인구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농촌 사람들은 도시로 물밀듯 몰려들기 시작했고, 그러한 사람들은 특히 방콕을 목적지로 했다. 1965년도의 태국 인구는 3,000만명 정도였지만 20세기 말에 이르러 2배가 되었다. 방콕의 인구도 1945-1970년 사이에 10배로 증가했다. 교육기회 확대와 대중매체에 익숙해지는 일도 베트남 전쟁 기간 중에 발생한 일이다. 생기발랄한 대학생들이 태국의 경제 및 정치와 관련된 내용들을 더 많이 공부하게 되자, 학생운동도 부활했다. 베트남 전쟁 기간 중에는 태국의 중산층들도 증가했다. 이들은 점차로 자신들만의 정체성과 생각들을 발전시켜나갔다.
그러나 경제발전이 분명 모든 이들에게 번영을 안겨다 준 것만은 아니었다. 1960년대의 시골지역 빈곤층들은 점차로 자신들의 사회적 조건에 대해 불만을 갖기 시작했고, 방콕의 중앙정부에 대해서도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난한 농촌을 개발하려는 태국 정부의 노력은 원하는만큼 성과를 얻지 못하기 일쑤였고, 오히려 주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처한 현실이 얼마나 열악한 것인지 자각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산반군에 가담한 사람들이 빈민 중의 빈민들만은 아니었다는 점을 주목하는 일도 흥미로운 일이다. 정부가 시골지역에서 일하는 모습을 증가시킨 것도 상황개선에 별로 도움이 되질 않았다. 부락 주민들은 오히려 증가한 군대 및 경찰의 위협과 관료들의 부정부패에 예속되기만 할 따름이었다. 또한 정부가 약속했던 사업들이 성사되지 않는 일도 빈번하여, 주민들이 배신감을 느끼는 일도 많았다.
1970년대 초 무렵에는 농촌 주민들의 불만이 자체적인 농민운동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농민운동은 공산반군들의 활동이 왕성했던 지역이 아니라, 중부 평원의 바로 북쪽에 위치한 지역들과 치앙마이(Chiang Mai) 지역에서 발생했다. 이들 지역은 쭐라롱꼰(Chulalongkorn, 라마 5세: 1868-1910 재위) 국왕 시절 중앙집권화된 시암으로 재조직되면서, 종래의 지역 귀족들에게 대규모 토지점유가 허용됐던 곳들이었다. 1960년대의 가장 마지막에 조사된 결과를 보면, 약 30% 정도의 가구들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1970년대 초에 대학생들이 지방 시위대들을 도와 이 운동이 전국적 차원으로 전화될 수 있도록 했다. 이 시위들은 토지상실, 고율의 소작료, 경찰에 부여된 막강한 권한, 관료들과 지역 기득권층의 부정부패, 열악한 기반시설, 절대적인 빈곤과 같은 논점들에 초점을 맞췄다. 이 운동의 결과로, 정부는 소작농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하는 위원회 설치에 동의했다. 이 위원회에는 단기간에 5만건 이상의 청원들이 쇄도했고, 이는 행정업무 상 처리가 불가능한 양이었다. 공무원들은 농민들의 요구가 상당수 비현실적이고 실현가능성이 없다고 평가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태국의 정치적 환경도 약간 변화했다. 타넘 총리와 그의 최고 참모였던 빠팟 짜루사티얀(Praphas Charusathien 혹은 Praphat Charusathiara, ประภาส จารุเสถียร: 1912-1997)은 권력을 단단히 틀어쥐는 작업을 지속했다. 이들 두 사람의 동맹관계는 빠팟의 딸과 타넘의 아들 나렁 낏띠카쫀(Narong Kittikachorn)이 결혼하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 태국 사회는 군사정부에 대해 더욱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분위기로 변했는데, 이는 군사정부가 점차로 국가의 현안들을 관리할 능력이 부족해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학생운동가들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재계에서도 정부의 지도력과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사진) 타넘 낏띠카쫀 총리.
푸미폰 국왕이 국회를 복원하고 새로운 헌법의 효력을 발생시킬 때라고 논평하면서, 타넘 총리에 대해 권력을 내려놓으라는 압력은 점점 더 가중되었다. 당시 상황은 1958년에 헌법을 연장하면서, 새로운 헌법을 초안할 위원회가 설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거의 10년이 지났지만 아직 작업이 완료되지 않고 있었다. 결국 정부는 1968년에 새로운 헌법을 공포하고 이듬해 총선을 실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후 군사정권이 창당한 정당이 승리하여, 타넘은 총리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당시 놀라운 점은 국회가 아직도 완전히 길들여진 상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대부분 의사나 변호사, 언론인 등으로 구성된 많은 국회의원들이 공개적으로 정부 정책 중 일부에 대해 도전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러 대형 사업들에 만연한 정부의 부정부패에 대한 증거들도 내놓았다. 1971회계년도를 위한 새로운 예산안을 심의할 때는, 군부가 요청한 추가예산이 거의 통과되지 못할 뻔하기도 했다. 타넘은 이러한 상황에서 힘겨워하기보다는, 자신의 정부에 대해 스스로 반란을 일으킨 후, 헌법을 중단시키고 의회를 해산시켜 버렸다. 태국은 다시금 절대 군정으로 회귀한 것이다.
타넘이 선택한 이러한 강경책은 과거에 피분송캄이 1938년과 1947년에 사용한 바 있고, 살릿 타나릿이 경우에는 1957-1958년 사이에 사용했지만 실패로 판명됐다. 1970년대 초의 태국 사회는 전반적인 정치적 자각도가 높아져서, 이와 같이 정당치 못한 권위주의 통치가 더 이상 수용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푸미폰 국왕은 다양한 기념일들을 대중 연설의 기회로 활용하면서, 타넘-빠팟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푸미폰 국왕은 반군들과 싸우면서 과도한 폭력을 사용한 점에 대해서도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또한 정부 내에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있다는 점도 언급하고, 쿠테타란 것은 태국 정치제도에 있어서 과거의 일이 되야만 한다는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국왕의 발언과 더불어, 군사정권은 점차로 군부 자체 내의 반대에도 직면하기 시작했다. 타넘과 빠팟은 정치적 역할을 선점당하면서, 점차로 군대를 직접 통제하는 일에서도 멀어져가고 있었다. 많은 장교들은 타넘의 아들 나렁 낏띠카쫀이 고속 승진한 데 대해 분노를 느끼고 있었고, 그러한 일은 장차 나렁이 타넘의 후계자가 될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라 믿고 있었다. 이런 장교들에게는 마치 정치적 왕국 하나가 탄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5. 1973년 민주화운동
5.1. 10월 14일의 참사
학생들의 시위는 1968년부터 시작됐고, 정치집회 금지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초에는 참가자 규모와 수도 불어났다. 1973년 6월, "람캄행 대학"(Ramkhamhaeng University) 학생 9명이 학생신문에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가 퇴학 조치를 당했다. 그 직후 수천 명의 학생들이 "민주기념탑"(Democracy Monument) 앞에서 이들 9명의 학생들이 재등록할 수 있게 하라며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대학들에 대해 휴교령을 내렸다가, 이후 얼마 안 있어 학생들의 재등록을 허락했다.
10월에는 또다른 13명의 학생들이 정부전복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됐다. 이때 발생한 학생시위에는 노동자와 비지니스맨, 그리고 여타 평범한 시민들까지 가세했다. 이 시위는 수십만 명 규모로 불어났고, 요구하는 내용도 구속된 학생들의 석방에서부터 새로운 헌법 선포와 현 정부 퇴진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10월 13일 정부는 구속된 학생들을 석방했다. 섹산 빠셋꾼(Seksan Prasertkul) 등의 시위대 지도부는 민주화운동에 대해 공개적으로 부정적 입장을 표명한 푸미폰 국왕의 바램에 따라 시위을 중단했다. 푸미폰 국왕이 한 졸업식장에서 연설하면서, 학생들은 학업에 열중하고 정치는 어른들(=군사정부)에게 맡겨 두라고 말함으로써 친-민주주의 운동을 비판했던 것이다.
다음날인 10월 14일 시위대는 해산하려 했지만, 경찰이 남쪽으로 통하는 "라차위티 거리"(Rajavithi Road, ถนนราชวิถี)를 봉쇄하여 군중들의 흐름을 통제하고자 했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다. 결국 군중들의 분노와 세력에 압도당한 경찰이 최루탄과 총격을 가했다. 군대에 대한 배치요청이 있은 후 라차담는 거리에는 전차들이 배치됐고, 헬리콥터들이 "탐마삿 대학"을 향해 공중에서 발포했다. 많은 학생들이 전차가 더 이상 밀고 내려 올 수 없도록, 버스와 소방차들을 탈취하여 바리케이트를 쳤다. 거리에서 혼돈이 발생하자, 푸미폰 국왕은 "찟라다 궁"(Chitralada Palace)의 문을 개방하여, 학생들이 왕궁으로 들어와 피신할 수 있도록 했다. 타넘 총리는 군의 진압작전 강도를 더욱 높이라고 명령했지만, 육군 사령관이었던 낏 시와라(Krit Srivara, กฤษณ์ สีวะรา: 1914-1976) 대장은 거리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푸미폰 국왕은 시위대를 조절하지 못한 정부의 무능을 책망하고, 타넘과 빠팟, 그리고 타넘의 아들 나렁으로 하여금 태국을 떠나라고 명했다. 그리고 학생들의 역할에 대해서도 특히 비난을 가했다.
오후 6시 10분, 타넘 낏띠카쫀 원수가 총리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한 시간 뒤 푸미폰 국왕이 국영 TV에 나와 국민들에게 평정을 유지할 것을 주문하고, "탐마삿 대학"의 존경받던 법학 교수인 산냐 탐마삭(Sanya Dharmasakti, สัญญา ธรรมศักดิ์: 1907-2002)을 총리에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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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시위 학생들이 10월 14일 참사에서 첫번째로 발생한 희생자의 관을 민주기념탑 꼭대기로 끌어올리고 있다. 당시 사건을 설명할 때 자주 소개되는 유명한 사진이다. [사진출처] Prisna Boonsinsukh이 번역(2003), Win Lyovarin의 소설 <Democracy, shaken & stirred>, pp.198-199 사이에서 스캔. |
5.2. 10월 15일에서 12월 31일까지
이 시기는 정치적 자유가 완전히 만개한 시기였다. 당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학생운동가들 중에는 현재 노동운동가가 된 인물들도 있고, 심지어는 농민이 된 사람도 있었다.
참고문헌
1932: Revolution in Siam by Charnvit Kasetsiri; Thammasart University Press, 2000.
The End of the Absolute Monarchy in Siam by Benjamin A. Batson; Oxford University Press, 1984.
History of the Thai Revolution by Thawatt Mokarapong; Thai Watana Panich Press, 1983.
The Free Thai Legend by Dr. Vichitvong na Pombhejara; Saengdao, 2003.
Siam becomes Thailand by Judith A. Stowe;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1.
Thailand: A Short History by David K. Wyatt; Yale University Press, 2004.
Thailand: The Politics of Despotic Paternalism by Thak Chaloemtiarana; Thammasart University Press, 1979.
Thailand's Secret War: OSS, SOE and the Free Thai Underground During World War II by E. Bruce Reynold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
첫댓글 이 태국의 노란 나찌 체제는 가만히 보니...
일단 아이러니 하게도 왕정을 제일 파괴하려 했던 피분송캄이 틀을 딱 만들어놓고..
이후 푸미폰 국왕이 살릿 타나릿과 타넘 낏티야쫀을 품에 안으면서..
기존의 피분송캄 우상화에 사용되던 테크닉과
법률 및 교육체제 등 각종 도구들을
그대로 국왕 우상화시키는 데 차용한거구만요...
하여간 <태국의 노란 나찌>..
우리가 만든 용어이긴 합니다만...
보면 볼수록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점점 더 듭니다...
일부 한국어권 정보는 특히 2차 세계대전 시기와
피분송캄 시대에 만들어진 국민의례 등
여러가지를 위대한 태국 민족의 자존심 운운하며 찬양을 해놨는데..
역시 위키피디아가 드라이하게 서술을 해놨는데
뭐가 위대한건지....
헌법 알기를 개떡으로 아는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