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2(토).
선으로 악을 이긴 다윗
[본문] 삼상 26:1-12
사울은 다윗을 잡으러 군대 3천명을 거느리고 나섰습니다. 하루는 하길라 산 길가에 진 치고 누워 잤습니다. 그들이 깊이 잠들었을 때에 다윗이 아비새와 함께 내려가서 그 진 가운데에 이르렀으나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아비새가 다윗에게, 사울을 창으로 찔러 죽이자고 하였으나, 다윗은 금하여 말하기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면서 단지 그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왔습니다.
I. 본문의 핵심
1.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아니함(6-12절)
다윗은 사울을 능히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벌써 두 번째입니다(cf. 삼상 24장). 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원수를 죽이지 않았을까요? 불쌍히 여겨서? 동정심 때문에? 아닙니다. 하나님이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9절)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11절) 다윗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금하셨기 때문에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하여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을 죽이는 대신에 사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왔습니다.
2. 사울이 단념하고 돌아감(17-25절)
사울이 나중에 깨어서 이 일이 있은 줄을 알고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말합니다.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21절) 이것을 보면 사울은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사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조금은 있었다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울은 너무 오랫동안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섰습니다. 자신의 잘못됨만 크게 깨달은 채 발길을 돌렸습니다.
다윗의 오랜 인내와 선행이 마침내 결실을 거두는 순간입니다. 다윗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많이 넘겼지만 그래도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고 참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하였으나 다윗은 사울의 생명을 귀하게 여겨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악행을 다윗은 선행으로 갚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마침내 사울의 마음을 돌이키시고 단념하고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악행은 너무나 오랫 동안 계속되어서 결국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고 맙니다. 사울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들도 죽고 맙니다. 하나님이 치신 것입니다. 다윗도 혹 이렇게 되기를 바란 점도 있습니다. "...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10절) 다윗은 사울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어쨌든 자기 손으로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사울 바울도 이와 같이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 12:19)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20절) 그래서 바울의 결론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21절). 다윗은 선으로 악을 이긴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다윗은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자기 손으로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였더니, 마침내 사울은 죽고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II. 오늘날의 교훈
1.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갈 때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돈 버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돈에 너무 집착하고 매달립니다. 그러다가 결국 건강을 잃고 가족을 잃고 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의 공부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녀 성적을 위해서라면 주일도 안 지키고 예배도 빼 먹고 학원에 달려 가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그저 공부에 인생을 걸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아야 합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요즘 대형교회의 예배는 찬양을 잘하고 유명 가수를 초청하여 노래하고 목사가 설교를 잘하고 ... 이런 것을 유튜브를 통해 방송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유튜브 시청을 합니다. 그리고선 예배 잘 드렸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잘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한 것은 예배를 시청한 것뿐입니다. TV 보듯이 구경한 것입니다. 그저 수동적으로 좋은 예배 실황을 구경한 것에 불과합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은 하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산에 있든지 광야에 있든지, 동굴 속에 있든지 바위 위에 있든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은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2.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악한 사람에 대해 악으로 갚으면 안 됩니다. 도리어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상대방이 나를 욕하면 나는 그 사람을 축복하고, 상대방이 나를 해치려 달려 들면 나는 그에게 좋은 것을 주고 ... 이렇게 선으로 갚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잘해 주면 더 악하게 굴어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악으로 악을 갚으면 안 됩니다. 계속해서 선을 베풀고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해결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억울할 때마다, 답답할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마음을 쏟아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때가 되면 마침내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언제까지 참아야 한다는 말인가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은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고 합니다(약 5:7). 이 세상 끝날까지, 세상의 종말이 오기까지 길이 참아야 합니다. 즉, 참는 데에는 한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때와 기한은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고 우리는 길이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마 5:44).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사랑과 기도입니다.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인내와 사랑과 기도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해결하실 것입니다. 악한 상대방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제일 좋고, 이것이 우리의 간절히 바라는 바이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으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사울은 결국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엎드려져 죽었습니다. 자기만 아니라 자기 아들들도 죽고 결국 사울 왕조가 끝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고 다윗에게는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경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경영하십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치 않도록 주의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선 상대방을 위한 것이지만 또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성도에게 적용하며,
근원적으로 왜 그러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성도가 스스로의 힘으로 이길 수 있습니까?
이김의 근원을 설명해야 이해가 잘 되지 않을까요?
신약성경을 가르치면서는 분명하게 말하는데,
왜 구약성경을 말하면서는 분명하지 않을까요?
이런 문제는 어느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 전반에 걸쳐 일어난다고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