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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주김씨함안공파 원문보기 글쓴이: 김윤환
경순왕(?-979)은 신라 56대 왕으로 927년 후백제 견훤의 침공으로 경애왕이 승하한 뒤 견훤에 의해 옹립되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정책과 신라의 민심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쪽으로 기울었다. 935년 후백제의 잦은 침공과 각처의 군웅 할거로 국가 기능이 마비되자 김봉휴로 하여금 고려에 신라의 천년사직을 넘겨주는 국서를 전하여 재위 8년의 신라 마지막 왕이 되었다.
경순왕은 태조로부터 유화궁을 하사 받고 태조의 딸 낙랑 공주를 아내로 맞았으며 정승에 봉해지는 한편 경주를 식읍으로 받았으며 경주의 사심관으로 고려 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신라왕릉으로는 경주를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왕릉이다.백성들을 위해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 왕건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경순왕이 잠드신 능은 백학면 고랑포리에 있다. 봉분 주위에는 보호석이 둘러 있으며, 주변에 나지막하게 둘러 쌓아놓은 담이 있다. 능 앞에 '신라 경순왕지능'이라는 비석이 있으며, 그외에 장명등(長明燈)과 망주석(望柱石)이 있다.
서기 60년(신라 탈해왕(脫解王) 4년) 8월4일 새벽에 어느 사람이 월성(경주) 서리(西里)를 걸어가는데 밝은 빛이 계림(鷄林)에서 비치는 것이 보여 가서 보니 소나무 높은 가지에 금빛 찬란한 금궤가 걸려있고 아래에서 흰 수닭이 울고 있었다. 그래서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숲으로 가서 궤를 열어보니 어린 남자아이가 누어있다가 곧 일어났다. 왕이 "하늘이 내리신 아들"이라며 아이의 이름을 어린아이라는 뜻의 김알지(閼智)라고 하고 성을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김(金)이라고 했다. 왕이 좋은 날을 골라 알지를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에게 물려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알지는 김열한(熱漢)을 낳았고, 열한은 김아도(阿都)를, 아도는 김수류(首留)를, 수류는 김욱부(郁部)를, 욱부는 김구도(俱道)를, 구도는 김미추(未鄒)를 낳았다. 김알지(閼智)의 7세손인 미추가 262년 신라 13대 미추왕(味鄒王)에 올라서 신라의 김씨 왕조가 시작되었다. 신라는 총 56명의 왕중에 김씨가 38명이다.
대종인 경주 김씨는 조선시대까지 총 600여개의 본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약 270여개 본관만 남아있다.
이중에서 신라 29대 무열왕(武烈王)의 5세손인 김주원(金周元)을 시조(始祖)로하는 강릉 김씨,
신라 45대 신무왕(神武王)의 셋째아들인 김흥광(金興光)을 시조(始祖)로하는 광산 김씨,
신무왕(神武王)의 후손인 김영이(金令胎)를 시조(始祖)로하는 영산(永山, 영동) 김씨,
문성왕(文聖王)의 8세손 김선궁(金宣弓)을 시조(始祖)로 하는 선산(일선) 김씨, 문성왕(文聖王)의 5세손 김락(金樂)을 시조(始祖)로 하는 당악(唐岳) 김씨 등을 제외한
대부분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후손들이다.
경순왕(敬順王 : 김알지의 28세손)은 후백제 견훤이 경애왕을 죽게 한 뒤 왕위를 오르게 하였으나, 935년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냈다.
경순왕의 9아들중 첫째 아들 김일(鎰)과 김굉을 제외한 7아들은 낙랑공주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9아들중 마의태자(麻衣太子)로 잘 알려진 김일은 망국의 한을 품고 개골산(愷骨山 : 금강산)으로 입산(入山)하였다.
첫째 김일(鎰)은 부안 김씨,
둘째 김굉의 아들(김운발(金雲發))은 나주 김씨,
셋째 김명종(鳴鐘)은 경주 김씨 의 영분공파,
넷째 김은열(殷說)은 경주 김씨 은열공파,
다섯째 김석(錫)은 의성 김씨,
여섯째 김건,
일곱째 김선(鐥)은 언양 김씨,
여덟째 김추(錘)의 아들(김위옹)은 삼척 김씨,
아홉째 김덕지(德摯)는 울산 김씨 등이 되었다.
이 중에서도
넷째 아들 김은설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으며, 둘째 아들-구안동, 5세손 김봉기(鳳麒)의 넷째 아들-김녕, 후손인 김방경의 넷째 아들-대구, 7세손-도강, 13세손-밀양, 5세손-서흥, 후손-안악, 후손-안산, 14세손-야성(영덕), 김녕에서 분관-양근, 9세손-양주, 후손-연주, 4세손-영광, 후손-영산(靈山), 15세손-월성, 8세손-전주, 첫째 아들 김정구의 11세손-청풍, 등이다.
기타
첫째 아들 김일(鎰)은 후손은 통천,
여덟째 아들 김추의 아들 김우(金佑)는 희천,
여섯째 아들 김건의 후손은 영월, 홍주,
김알지계 김씨에서 다른 성(他姓)으로 갈려간 성씨는 김행(幸)이 안동 권씨(權氏), 김순식(順式)은 강릉 왕씨(王氏), 김궁예(弓裔)의 후손 김순백(珣白)은 광산 이씨(李氏)로, 세광은 감천 문씨(文氏), 김은열(殷說)의 13세손 김영규(永奎)는 수성 최씨(崔氏) 등으로 각각 개성(改姓)하였다.
경순왕릉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삼국사기)
경순왕<敬順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부이고, 문성대왕의 후손이며, 이찬 효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계아 태후이다. 부는 견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왕은 전 왕의 시체를 서쪽 대청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시호를 올려 경애라 하고,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케 하였다.
원년 11월, 왕의 아버지를 신흥대왕, 어머니를 왕태후로 추존하였다.
12월, 견훤이 대목군에 침입하여, 논밭에 있던 노적가리를 모두 불태웠다.
2년 봄 정월, 고려 장수 김 상이 초팔성의 도적 흥종과 싸우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여름 5월, 강주 장군 유문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6월, 지진이 있었다.
가을 8월, 견훤이 장군 관흔을 시켜 양산에 성을 쌓게 하자, 태조가 명지성의 장군 왕 충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쫓아내게 하였다. 견훤이 대야성 아래에 주둔하면서, 군사들을 보내 대목군의 벼를 베어 갔다.
겨울 10월, 견훤이 무곡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3년 여름 6월, 천축국의 삼장마후라가 고려에 왔다.
가을 7월, 견훤이 의성부성을 공격하므로, 고려 장수 홍술이 그들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순주 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태조가 이 말을 듣고 노하였으나, 원봉의 전공을 생각하여 용서하고, 다만 순주를 현으로 고쳤다.
겨울 10월, 견훤이 가은현을 포위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4년 봄 정월, 재암성 장군 선필이 고려에 투항하였다. 태조가 그를 후하게 예우하고 상보라고 불렀다. 예전에 태조가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으려 할 때 선필이 안내를 해주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그가 항복해오자 태조가 그의 공로와 연로함을 참작하여 은총을 베풀고 표창하였다. 태조는 고창군 병산 아래에서 견훤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 전투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견훤의 영향하에 있던 영안·하곡·직명·송생 등 30여 군현이 차례로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2월, 태조가 사신을 보내와 승전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왕이 보답으로 사신을 보내고 만날 것을 요청하였다.
가을 9월, 동해 주변에 있는 주와 군의 부락이 모두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5년 봄 2월, 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 근방에 와서 왕을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왕은 백관들과 함께 교외에서 영접하여 대궐로 들어 와서 마주 대하며, 진정한 예우를 극진히 하였다.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어 술이 취하자 왕이 말했다.
"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하여 점점 환란이 닥쳐오고 있다. 견훤이 불의의 행동을 자행하여 나의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어떠한 통분이 이와 같을 것인가?"
왕이 말을 마치고 눈물을 흘리자, 좌우에서 목이 메어 흐느끼지 않는 자가 없었고, 태조도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하였다. 이로부터 태조가 수십 일 체류하다가 돌아가려 하므로 왕이 혈성까지 나가서 송별하고, 종제 유렴을 볼모로 삼아 태조를 따라가게 하였다. 태조의 군사들의 규율이 엄정하여, 조금도 규율을 위반하는 일이 없었으니, 서울에 사는 남녀가 서로 기뻐하면서 "이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범이나 이리 떼를 만난 것 같았는데, 오늘 왕공이 왔을 때는 부모를 만난 것 같았다"라고 말하였다.
가을 8월, 태조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비단과 안장을 갖춘 말을 주고, 동시에 여러 관료와 장병들에게도 정도에 따라 포백을 주었다.
6년 봄 정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4월, 사신으로 집사 시랑 김 불, 부사로 사빈경 이 유를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7년, 후당 명종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책명을 주었다.
8년 가을 9월, 남극성이 나타났다.
운주 경내의 30여 군현이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9년 겨울 10월, 사방의 국토가 모두 타인의 소유로 되어, 국세가 약하고 고립되었으므로, 왕은 나라를 스스로 보존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였으나,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옳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때 왕자가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 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왕은 "고립되고 위태로운 상황이 이와 같아서는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강하지도 못하고 약하지도 않으면서, 무고한 백성들이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곧 시랑 김 봉휴로 하여금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왕자는 통곡하면서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산길을 따라 개골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 옷을 입고 풀잎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11월, 태조가 왕의 편지를 받고, 대상 왕 철 등을 보내 왕을 영접하게 하였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태조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꾼은 울타리를 두른 것 같았다. 태조가 교외에 나와서 왕을 영접하여 위로하였으며, 왕궁 동쪽의 가장 좋은 구역을 주고, 맏딸 낙랑 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12월, 왕을 정승공으로 봉하여, 태자보다 높은 지위에 두었으며, 녹봉으로 1천 석을 주고, 시종하던 관원과 장수들을 모두 등용하였다. 신라를 개칭하여 경주라 하고, 이를 공의 식읍으로 삼았다.
처음 신라가 항복하였을 때, 태조가 매우 기뻐하여 후한 예로 대우하였고, 사자를 보내 왕에게 말하기를 "이제 왕이 나에게 나라를 주었으니, 이는 위대한 선물입니다. 원컨대 저의 종실과 혼인하여, 영원히 집안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나의 백부 잡간 억렴이 지대야군사로 있는데, 그의 딸이 덕행이 훌륭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니, 이 외에는 집안을 받들 만한 자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태조가 마침내 그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 사람이 곧 현종의 아버지로서, 후에 안종으로 추봉되었다. 경종 헌화대왕 때에 이르러, 정승공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고, 정승공을 상보령으로 봉하였다. 공이 송 나라 흥국 4년 무인에 붕어하니, 호를 경순[효애라고도 한다.]이라 하였다.
신라 시조로부터 이 때에 이르기까지를 3대로 구분하니, 초대부터 진덕왕까지 28왕을 상대라 하고, 무열왕으로부터 혜공왕까지 8왕을 중대라 하고, 선덕왕으로부터 경순왕까지 20왕을 하대라고 하였다.
저자의 견해 : 신라의 박씨와 석씨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으며, 김씨는 금궤에 들어 있다가 하늘로부터 하강하였거나 혹은 금수레를 타고 왔다고 하니, 이는 더욱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세속에서는 이것이 대대로 전해 내려와 사실로 알려져 있다. 정화 연간에 우리 나라에서 상서 이 자량을 송 나라에 보내 조공할 때, 신 부식은 글 쓰는 임무를 맡아 보좌로 가게 되었다. 우리가 우신관에 이르렀을 때 마루 한 편에 선녀의 화상을 걸어 놓은 것을 보았다. 숙소에서 접대를 맡은 학사 왕 보가 "이는 귀국의 신인데 공들은 이를 아는가?"라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옛날에 어떤 제왕의 딸이 있었는데, 남편없이 잉태하자 남들에게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곧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사람이 해동의 첫임금이 되었고, 제왕의 딸은 땅의 신선이 되어, 영원히 선도산에 살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녀의 화상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또한 송 나라 사신 왕 양이 지은 동신성모제문에 "어진 사람을 낳아 나라를 창건하였다"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고, 이 동방의 신이 곧 선도산의 신성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선녀의 아들이 언제 왕 노릇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고, 이제 다만 이러한 전설이 생긴 시초를 고찰해 본 것이다.
신라에서 왕위에 오른 자들은, 자기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너그러우며, 관직은 간략히 두고, 일의 처리는 간편하게 하며,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어, 산 넘고 바다 건너 예방하는 사신이 끊이지 않았고, 항상 자제들을 보내 중국의 조정에 나아가 숙위하게 하였으며, 국학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게 하였으니, 여기에서 성현의 교화를 받았기 때문에 미개하고 거칠던 풍속을 바꾸어 예의가 있는 나라를 만들었다. 또한 신라는 중국 군사의 위세를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지역을 취하여 군현으로 만들었으니, 가히 성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불가의 법을 받들고, 그 폐해를 깨닫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마을에도 탑과 절간이 늘어서고, 백성들이 사찰로 도피하여 승려가 되었으니, 군사와 농사 지을 사람이 점점 줄어 들고, 나라는 날로 쇠퇴하게 되었으니, 어찌 나라가 문란하지 않고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겠는가? 이 때에 이르러서 경애왕은 더욱 황음하게 되어, 궁인과 근신을 데리고 포석정에 나가 놀면서 술을 마시며 연회를 하다가 견훤이 오는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문 밖에 한 금호가 온 것을 모른 것이나, 누각 위에서 장 여화를 데리고 놀다가 화를 당하였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 경순왕이 태조에게 귀순한 것은 비록 부득이한 일이기는 하지만 또한 가상한 일이었다. 그 당시에 만약 목숨을 걸고 태조의 군사와 싸워서,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하여졌다면, 필히 그의 일족은 멸망하고, 무고한 백성들에게도 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나라의 창고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하여 태조에게 귀의하였으니, 그가 고려에 세운 공로와 백성들에게 입힌 은덕이 매우 크다할 것이다. 옛날 전씨가 오와 월의 국토를 송 나라에 바친 것을 두고, 소 자첨은 그를 충신이라고 하였으니,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것이다. 우리 태조는 비빈이 많았고, 그의 자손들 역시 번창하였는데도, 현종은 신라의 외손으로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를 계승한 자들이 모두 그의 자손이었으니, 어찌 위와 같은 음덕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정자각
비 각
묘 비
(삼국유사)
김부대왕(金傅大王) 이라고도 한다.김부대왕(金傅大王)의 시호는 경순(敬順)이다. 천성(天成) 2년 정해(丁亥; 927) 9월에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범해서 고울부(高蔚府)에 이르니, 경애왕(景哀王)은 우리 고려(高麗) 태조(太祖)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는 장수에게 명령하여 강한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구하게 했으나 구원병(救援兵)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견훤은 그 해 11월에 신라 서울로 쳐들어갔다. 이때 왕은 비빈(妃嬪) 종척(宗戚)들과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열고 즐겁게 놀고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하다가 창졸간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과 비(妃)는 달아나 후궁(後宮)으로 들어가고 종척(宗戚) 및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으며, 귀천(貴賤)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땅에 엎드려 노비(奴婢)가 되기를 빌었다. 견훤은 군사를 놓아 공사간(公私間)의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王宮)에 들어가서 거처했다. 이에 좌우 사람을 시켜 왕을 찾게 하니 왕은 비첩(婢妾) 몇 사람과 후궁에 숨어 있었다. 이를 군중(軍中)으로 잡아다가 왕은 억지로 자결(自決)해 죽게 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놓아 왕의 빈첩(嬪妾)들을 모두 욕보였다. 왕의 족제(族弟)인 부(傅)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왕은 견훤이 세운 셈이 되었다. 왕위(王位)에 오르자 전왕(前王)의 시체를 서당(西堂)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했다. 이 때 우리 태조(太祖)는 사신(使臣)을 보내서 조상했다.
이듬해 무자(戊子; 928)년 봄 3월에 태조(太祖)는 50여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신라 서울에 이르니 왕은 백관(百官)과 함께 교외에서 맞아 대궐로 들어갔다. 서로 대하여 정리와 예의를 다하고 임해전(臨海殿)에서 잔치를 열었다. 술이 얼근하자 왕은 말했다. "나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해서 화란(禍亂)을 불러일으켰고, 견훤으로 하여금 불의(不義)한 짓을 마음껏 행하게 해서 우리 나라를 망쳐 놓았습니다. 이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이내 눈물을 흘리면서 우니 좌우 사람들도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태조 역시 눈물을 흘렸다. 태조는 여기에서 수십일을 머무르다가 돌아갔는데 부하 군사들은 엄숙하고 정제해서 조금도 침범하지 않으니 서울의 사녀(士女)들이 서로 경하(慶賀)해 말했다. "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王公)이 온 것은 부모를 만난 것 같다."
8월에 태조는 사자를 보내서 왕에게 금삼(錦衫)과 안장 없는 말을 주고 또 여러 관료(官僚)와 장사(將士)들에게 차등을 두어 물건을 주었다.
청태(淸泰) 2년 을미(乙未; 935) 10월에 사방 땅이 모두 남의 나라 소유가 되고 나라는 약하고 형세가 외로우니 스스로 지탱할 수가 없었으므로 여러 신하들과 함께 국토(國土)를 들어 고려 태조(太祖)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분분하여 끝나지 않는지라 왕태자(王太子)가 말했다. "나라의 존망(存亡)은 반드시 하늘의 명에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忠臣)·의사(義士)들과 함께 민심(民心)을 수습해서 힘이 다한 뒤에야 그만둘 일이지 어찌 1,000년의 사직(社稷)을 경솔하게 남에게 내주겠습니까?" 왕은 말한다. "외롭고 위태롭기가 이와 같으니 형세는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더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간뇌도지(肝腦塗地)케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시켜서 국서(國書)를 가지고 태조에게 가서 항복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태자는 울면서 왕을 하직하고 바로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서 삼베 옷을 입고 풀을 먹다가 세상을 마쳤다. 그의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華嚴宗)에 들어가 중이 되어 승명(僧名)을 범공(梵空)이라 했는데 그 뒤로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있었다 한다.
태조는 신라의 국서를 받자 태상(太相) 왕철(王鐵)을 보내서 맞게 했다. 왕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에게로 돌아가니, 향거보마(香車寶馬)가 30여 리에 뻗치고 길은 사람으로 꽉 차고, 구경꾼들이 담과 같이 늘어섰다. 태조는 교외에 나가서 영접하여 위로하고 대궐 동쪽의 한 구역(지금의 정승원正承院)을 주고, 장녀(長女) 낙랑공주(樂浪公主)를 그의 아내로 삼았다. 왕이 자기 나라를 작별하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았다 해서 이를 난조(鸞鳥)에 비유하여 공주의 칭호를 신란공주(神鸞公主)라고 고쳤으며, 시호(諡號)를 효목(孝穆)이라 했다. 왕을 봉(封)해서 정승(正承)을 삼으니 자리는 태자(太子)의 위이며 녹봉(祿俸) 1,000석을 주었다. 시종(侍從)과 관원(官員)·장수들도 모두 채용해서 쓰도록 했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 하여 이를 경순왕(敬順王)의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처음에 왕이 국토를 바치고 항복해 오자 태조는 무척 기뻐하여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사람을 시켜 말했다. "이제 왕이 내게 나라를 주시니 주시는 것이 매우 큽니다. 원컨대 왕의 종실(宗室)과 혼인을 해서 구생(舅甥)의 좋은 의(誼)를 길이 하고 싶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우리 백부(伯父) 억렴(億廉; 왕王의 아버지 효종각간孝宗角干은 추봉追封된 신흥대왕神興大王의 아우이다)에게 딸이 있는데 덕행(德行)과 용모가 모두 아름답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고는 내정(內政)을 다스릴 사람이 없습니다." 태조가 그에게 장가를 드니 이가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金氏)이다(우리 왕조王朝 등사랑登仕郞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에 이와 같은 말이 있다. "신성왕후神成王后 이씨李氏는 본래 경주慶州 대위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협주수俠州守로 있을 때 태조太祖가 그 고을에 갔다가 그를 왕비王妃로 맞았다. 그런 때문에 그를 협주군俠州君이라고도 한다 했다. 그의 원당願堂은 현화사玄化寺이며, 3월 25일이 기일忌日로, 정릉貞陵에 장사지냈다. 아들 하나를 낳으니 안종安宗이다." 이 밖에 25 비주妃主 가운에 김씨金氏의 일은 실려 있지 않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사신史臣의 의론을 봐도 역시 안종安宗을 신라의 외손外孫이라 했다. 그러니 마땅히 사전史傳을 옳다고 해야 할 것이다).
태조의 손자 경종(景宗) 주(주)는 정승공(政承公)의 딸을 맞아 왕비를 삼으니, 이가 헌승황후(憲承皇后)이다. 이에 정승공(政承公)을 봉해서 상부(尙父)를 삼았다.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 무인(戊寅; 978)에 죽으니 시호를 경순(敬順)이라 했다. 상부(尙父)로 책봉하는 고명(誥命)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칙(詔勅)을 내리노니 희주(姬周)가 나라를 처음 세울 때는 먼저 여상(呂尙)을 봉했고 유한(劉漢)이 나라를 세울 때에는 먼저 소하(蕭何)를 봉했다. 이로부터 온 천하가 평정되었고 널리 기업(基業)이 열렸다. 용도(龍圖) 30대를 세우고 섭린(섭麟)은 400년을 이으니 해와 달이 거듭 밝고 천지가 서로 조화되었다. 비록 무위(無爲)의 군주(君主)로서 시작되었으나 역시 보좌(輔佐)하는 신하로 해서 일을 이루었던 것이다.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정승 식읍팔천호 김부(觀光順化 衛國功臣 上柱國 樂浪王政承 食邑八千戶 金傅)는 대대로 계림(鷄林)에 살고 있어서 벼슬은 왕의 작위(爵位)를 받았고, 그 영특한 기상은 하늘을 업신여길 만하고 문장(文章)은 땅을 진동할 만한 재주가 있었다. 부(富)는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귀(貴)는 모토(茅土)에 거(居)했으며 육도삼략(六韜三略)은 가슴 속에 들어 있고 칠종오신(七縱五申)을 손바닥으로 잡아 쥐었다. 우리 태조는 비로소 이웃 나라와 화목하게 지내는 우호(友好)를 닦으시니 일찍부터 내려오는 풍도를 알아서 이내 부마(駙馬)의 인의(姻誼)를 맺어 안으로 큰 절의(節義)에 보답했다. 이미 나라가 통일되고 군신(君臣)이 완전히 삼한(三韓)으로 합쳤으니 아름다운 이름은 널리 퍼지고 올바른 규범(規範)은 빛나고 높았다. 상부도성령(尙父都省令)의 칭호를 더해 주고 추충신의 숭덕수절공신(推忠愼義 崇德守節功臣)의 호(號)를 주니 훈봉(勳封)은 전과 같고 식읍(食邑)은 전후를 합쳐서 1만 호(戶)가 되었다. 유사(有司)는 날을 가려서 예(禮)를 갖추어 책명(冊命)하는 것이니 일을 맡은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개보(開寶) 8년(975) 10월 일."
"대광내의령 겸 총한림 신 핵선(大匡內議令 兼 摠翰林 臣 핵宣)은 받들어 행하여 위와 같이 칙령(勅令)을 받들고 직첩(職牒)이 도착하는 대로 봉행(奉行)하라. 개보(開寶) 8년 10월 일."
"시중(侍中) 서명(署名), 내봉령(內奉令) 서명(署名), 군부령(軍部令) 서명(署名), 군부령(軍部令) 무서(無署), 병부령(兵部令) 무서(無署), 병부령(兵部令) 서명(署名), 광평시랑(廣坪(評)侍郞) 서명(署名), 광평시랑(廣坪(評)侍郞) 무서(無署), 내봉시랑(內奉侍郞) 무서(無署), 내봉시랑(內奉侍郞) 서명(署名), 군부경(軍部卿) 무서(無署), 군부경(軍部卿) 서명(署名), 병부경(兵部卿) 무서(無署), 병부경(兵部卿) 서명(署名),
추충신의 숭덕수절공신 상부도성령 상주국 낙랑군왕 식읍일만호 김부(推忠愼義 崇德守節功臣 尙父都省令 上柱國 樂浪郡王 食邑一萬戶 金傅)에게 고(告)하노니 위와 같이 칙령(勅令)을 받들고 부신(符信)이 도착하는 대로 봉행(奉行)하라.
주사(主事) 무명(無名), 낭중(郎中) 무명(無名), 서령사(書令史) 무명(無名), 공목(孔目) 무명(無名). 개보(開寶) 8년 10월 일에 내림.”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新羅)의 박씨(朴氏)와 석(昔氏)는 모두 알에서 나왔다. 김씨는 황금(黃金) 궤 속에 들어서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한다. 혹은 황금으로 된 수레를 타고 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더욱 황당해서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세속에서는 서로 전하여 사실이라고 한다. 이제 다만 그 시초를 살펴보건대 위에 있는 이는 그 몸을 위해서는 검소했고 남을 위해서는 너그러웠다. 그 관직을 설치하는 것은 간략히 했고 그 일을 행하는 것은 간소하게 했다. 성심껏 중국(中國)을 섬겨서 조빙(朝聘)하는 사신이 제항(梯航)으로 연락불절하여 항상 자제(子弟)들을 중국에 보내어 숙위(宿衛)하게 하고 국학(國學)에 들어가서 공부하게 했다. 이리하여 성현(聖賢)의 풍화를 이어받고 오랑캐의 풍속을 개혁시켜서 예의 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또 중국 군사의 위엄을 빌어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평정하고, 그 땅을 취하여 군현(郡縣)을 삼았으니 가히 장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불법(佛法)을 숭상해서 그 폐단을 알지 못하고 심지어는 마을마다 탑과 절을 즐비하게 세워 백성들은 모두 중이 되어 군대(軍隊)니 농민(農民)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나라가 날로 쇠퇴해 가니 어찌 어지러워지지 않을 것이며 또 망하지 않겠는가. 이 때에 경애왕(景哀王)은 더욱 음란하고 놀기에만 바빠 궁녀(宮女)들과 좌우 근신(近臣)들과 더불어 포석정(鮑石亭)에 나가 술자리를 베풀고 즐겨 견훤(甄萱)이 오는 것도 몰랐으니, 저 문 밖의 한금호(韓擒虎)나 누각(樓閣) 위의 장려와(張麗華)와 다를 것이 없었다. 경순왕(敬順王)이 태조(太祖)에게 귀순(歸順)한 것은 비록 할 수 없이 한 일이기는 하나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다. 만일 힘껏 싸우고 죽기로 지켜서 고려 군사에게 반항했더라면 힘은 꺾이고 기세는 다해서 반드시 그 가족을 멸망시키고 죄없는 백성들에게까지 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고명(告命)을 기다리지 않고 부고(府庫)를 봉하고 군현(郡縣)의 이름을 기록하여 귀순했으니 조정에 대해서는 공로가 있고 백성들에 대해서는 덕이 있는 것이 매우 크다 하겠다. 옛날 전씨(錢氏)가 오월(吳越)의 땅을 송(宋)나라에 바친 일을 소자첨(蘇子瞻)은 충신(忠臣)이라고 했으니, 이제 신라의 공덕(功德)은 그보다 훨씬 크다고 하겠다. 우리 태조는 비빈(妃嬪)이 많고 그 자손들도 또한 번성했다.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外孫)으로서 왕위(王位)에 올랐으며, 그 뒤에 왕통(王統)을 계승한 이는 모두 그의 자손이었다. 이것이 어찌 그 음덕(陰德)이 아니겠는가."
신라가 이미 땅을 바쳐 나라가 없어지자 아간(阿干) 신회(神會)는 외직(外職)을 내놓고 돌아왔는데 도성(都城)이 황폐한 것을 보고 서리리(黍離離)의 탄식함이 있어 이에 노래를 지었으나 그 노래는 없어져서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