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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본
히8:1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히8:2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히8: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그러므로 그도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히8:4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히8: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위대한 지도자이자 선생이었던 하나님의 종 모세의 중대한 임무를 상기시킵니다. 저는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모든 설교자 또한 이 중대한 임무를 맡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복음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이 기본적으로 부딪치는 것은 권위의 문제입니다. 서로 다른 말들이 너무 많이 들리는 탓에 교회밖에 있는 이들이 복음을 제대로 알아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복음이다"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니다"라고 합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명백히 모순되는 말을 합니다. 그러니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이 '대체 누구 말을 믿어야 하지? 어떤 사람을 믿어야 하지?"라고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현대에 발생하는 모든 혼란의 기저에는 권위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 해답은 오직 한 가지 계시 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혼란을 겪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편지를 있습니다. 1세기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어서 대체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때문에 이렇게 편지를 써서 기독교 복음과 구원의 방법에 대해 중대한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권위의 문제를 계속 강조하며, 아주 흥미로운 방식으로 이 점을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에게 그가 말하는 요지는 "위대한 민족의 영웅이자 지도자였던 모세 당시와 지금 너희 처지가 비슷한 것을 모르겠느냐?"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위대한 입법자이자 가장 위대한 선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포로생활에서 끌어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특별한 한 임무-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구원의 큰 그림 맡았던 이스라엘 역사상 독보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메시지를 어디에서 얻었을까요? 그가 이런 일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모세와 그 가르침의 특징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그는 단순한 민족주의자였을까요? 기민한 정치가였을까요? 그저 똑똑하고 유능한 인물이었을까요? 모세는 당대인들에게 연설했고 큰 대가가 따르는 일들을 명했으며, 예배와 의식 및 여러 문제에 관해 세세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 모든 일을 한 것일까요? 대체 무엇이 그 모든 일을 가능케 했을까요? 그 메시지와 권위의 원천이 어디 있었을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이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단순히 위대한 종교적 스승이 아니었습니다. 가끔 비범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천재 중 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타고난 지도자 또한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가 '제가 이 문제를 숙고한 끝에 생각해 낸 계획을 알려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정치가로서 "이것이 여러분을 위한 저의 제안입니다.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실행하며 저를 따라오겠습니까?"라고도 하지 않지 않았습니다.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되는 말과 행동을 했습니다. 모세는 목자였고, 사실상 그 일을 버리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런 인물이 된 이유는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이 그를 불러 임무를 맡기셨기 때문이었습니다(출애급기 부분을 직접 읽어 보십시오! 그는 말했습니다. "저는 연설가가 못 됩니다 제가 백성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그러나 하나님은 "가라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스스로 있는 자기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그가 주신 메시지는 이것이다"라고 말하라"라고 하셨고 모세는 떨며 애굽으로 가서 그가 명하신 일을 했습니다
후에 그는 십계명이라는 중대한 법을 비롯하여 도덕법과 의식법 및 행실과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한 법률-구약성경 첫 책들에 나오는 아주 흥미롭고 중요한 법률 - 을 제정합니다. 그 법들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모세가 그만큼 특출한 법률가였던 것일까요? 이 사람은 어떻게 그 모든 법을 생각해 냈을까요? 그 대답이 성경에 나오는데, 히브리서 기자는 해당 본문인 출애굽기 25:40 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산으로 불러 40일 밤낮 머물게 하셨습니다. 그 기간에 그가 해야 할 일과 해야 할 말을 정확히 알려 주셨습니다. 성막은 어떻게 짓고, 기구들은 어떤 것을 비치해야 하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어떤 다양한 색상과 치수의 재료를 사용해야 하는지, 어떤 다양한 종류의 목재를 사용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 분량의 금을 사용해야 하는지 알려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정확하고도 세세하게 지시해 주셨습니다. 40일에 걸쳐 임무를 맡기시고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려 주신 후, 산에서 내려가 시행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세세한 계획을 알려 주시고나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 [본]대로 할지니라”(출 25:40).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씀을 상기시키고 있으며, 우리도 이 말씀을 살
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전체적인 구상뿐 아니라 세세한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하나님이 명하신 그대로 정확히 시행케 하셨습니다. 제가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성경의 중대한 메시지 또한 그처럼 모든 부분이 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에서 우리는 무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세히 지시해 주셔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야 합니까?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당면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군내의 추격을 받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앞은 훙해가 가로막고 있고 양옆에는 산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들은 꼼짝없이 포위되었습니다. 이제야말로 모든 상황이 끝나 버린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출 14:15). 바다가 갈라저 길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그 길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광야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먹어야 합니까? 특히 하나님과 어떻게 만나고 교통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모세를 산으로 불러 40일 밤낮 세세한 양식[본]과 계획을 알려 주심으로 그 모든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이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 축복받는 단 한 가지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의 축복을 받는 길은 모세에게 알려 주신 이 방법뿐입니다. 그런데 일부가 그 방법에 반발했습니다. 개중에는 대제사장이 된 모세의 형 아론의 아들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른바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레 10:1).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라는 이스라엘의 똑똑한 귀인들도 하나님의 방법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요컨대 '왜 모세와 아론의 방법만 써야 하는가? 우리한테 더 좋은 생각이 있으니 우리 생각대로 해보자라고 했다가 아주 비참한 종말을 맞았습니다. 하나님의 본,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야 합니다.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히브리서 기자도 이 점을 상기시킵니다. 요컨대 '이것은 모세 당시에 있었던 일이다. '하늘에 있는 것의 모양과 그림자'도 이처럼 본을 따라야 했다면, 하늘에 있는 원형은 얼마나 더 본을 따라야겠느냐?"라는 것입니다. 성막과 성전을 비롯한 모든 것은 신체가 아닌 모형이요 그림자요 예표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것들도 '본'을 따라야 했다면, 중대한 본체는 무한히 더 본을 따라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내리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논쟁과 반박이 있을 수 없다. 모든 일에 항상 하나님이 산에서 보이신 본을 따라야 한다."
일반적으로 교회가 어긋난 길로 접어드는 지점이 여기입니다. 대중적 가르침은 인간의 필요와 생각에서 출발하라고 말합니다. 종교 잡지와 책들도 "현대인은 옛날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은 성장했다! 과거에는 옛날 방식이 통했지만 지금은 통하지 않는다. 현대인에게 호소하려면 현대인을 알아야 한다. 그들의 관용구를 씨야 하고 그들의 사고방식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으며, 과학과 지식을 갖춘 현대인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들어 온 말은 진리를 찾는 위대한 탐색을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기독교라고 생각하며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철학과 사변과 인간의 사고를 추앙합니다. 인간의 생각과 말을 탐색의 진입로로 삼습니다. 그러니 심한 혼란에 빠지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성경이 처음부터 밝히는 대로 이런 인간의 탐색으로는 하나님을 찾은 수 없습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고전 1:21). 이 방법을 뒤집는 우리의 사고는 전부 틀린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이 산에서 보이신 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는 이 계시의 산, 하나님의 산으로 돌아가자고 요청는 바입니다. 우리 자신의 지혜는 그만 내려놓고 하나님이 은혜로 기쁘게 주신 본을 다시 찾아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내내 선포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를 예로 들었지만,선지자들이나 이스라의 위대한 선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벧후 1:20).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묵상과 숙고의 결과물이 아니었습니다. 불현듯 떠오른 멋진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그러면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벤후 1.21). 그들은 자기 생각과 의견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통로의 역할만 했습니다. 직접 찾아서 읽어 보십시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또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이라고 밝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본과 메시지와 계시를 말하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전하고 계시를 전달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처음 만나는 설교자는 세례 요한입니다. 성경은 역사의 한 시점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라의 아들 요한에게 임했다고 말합니다(눅 3:2).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요한 스스로 어떤 결론에 도달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스스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했습니다(고전 4:1).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일꾼에 불과하다고 한 것입니다. 사도의 권위를 밝히기 위해 고린도 교인들에게 쓴 편지에서도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라고 했습니다(고전 15:13). 그들도 받았고 자신도 받았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더 명쾌하게 이 점을 밝힙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 1:11-12). 자신은 관리자요 수호자요 전령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사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사자는 자기 의견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요 자신을 임명하고 파견한 왕의 의견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이 아니요 위임받은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단에 서 있는 저의 권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가 남들보다 더 많이 알아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메시지, 하나님이 계시의 산에서 기쁘게 보이신 "본"을 그대로 전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본 이생뿐 아니라 영원한 세상의 행복을 위해 주신 본은 무엇일까요? 기독교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본을 보이신 산과 봉우리들을 통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변화산부터 살펴봅시다. 마태복음 17장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가 이 산부터 살펴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산이 신약성경의 주인공, 즉 나사렛 예수라는 복되신 분이 누구신지 명확히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사복음서 각 장에 나오는 분도 이분이요 사도들이 전파한 분도 이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분이 누구시냐?" 하는 것입니다. 이 복되신 분이 누구시냐?" 하는 것이야말로 오늘 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중대한 질문입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휘어졌더라"(마 17:1-2). 또 다른 복음서는 그의 옷이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라고 말합니다(막9:3). 그가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셨을 때 영광이 홀연히 그들을 비추었고 그들은 예수의 위엄을 보았습니다.
노인이 되어 죽음을 앞둔 베드로는 마지막 서신 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벤후 1:16-18). 그는 홀연히 변형되셨습니다. 얼굴이 해같이 빛났고 옷도 완전히 변형되었습니다 영광이 온 통 그곳을 뒤덮은 것 같았습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마 17:5). 우리는 이분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보낸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위대한 서신을 시작한 것도 놀랄 일도 아닙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1:1~3). 이것은 긴요한 요점입니다. 세상은 지금 곤경에 빠져 있습니다. 인간의 말, 즉 철학자나 정치가나 시인이나 자칭 전문가들의 말을 계속 들어 왔지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문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며, 자기 인생에서조차 실패합니다. 어떤 인간도 죽음과 무덤의 문제를 풀 수 없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질 수 없습니다. 이제 인간의 말은 그만 듣고, 그 거룩한 산에 올려 퍼졌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우리는 자기 이론과 사상을 개진하거나 새로운 도덕등을 제시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교회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나라고 선포하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변후 1:17).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과 함께 그 거룩한 산에서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 이 얼마나 긴요하면서도 핵심적인 사실인지요! 나사렛 예수는 단순히 위대한 종교적 스승이 아닙니다. 도덕 개혁가도 아닙니다 최초의 위대한 사회주의자나 평화주의자 또한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예수를 그렇게 협소하게 보면 안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늘에서 직접 내려오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입니다. 그의 위엄과 영광을 직접 본 사도들이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행4:12) 그는 유일 무이하신 분입니다. 그런 분은 세상에 없습니다 주님 자신도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요 8:12). 우리는 변화산에서 그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 하나님이 독생자를 통해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려 줄 이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참으로 알게 해줄 이도 없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오직 예수만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알려 주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영원한 세상에 대해 알려 주실 수 있습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 본문과 관련된 핵심 사실이 이것입니다. 모든 본은 오직 이 복되신 분 안에만 있습니다.
이제 산상설교(마 5-7장)를 살펴봅시다. 이것은 변화산에서 변형되신 복되신 분이 친히 전하신 설교입니다.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그의 말을 들으라"라고 하셨으니 이제부터 그의 말을 들어 봅시다. 그가 가르치신 것이 무엇입니까? 산상설교를 한번 요약해 보겠습니다.
주님이 가장 먼저 가르치신 것은 팔복입니다. 팔복은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어떤 사람들인지 묘사한 것으로서, 과거 어느 때보다 지금 세상이 알아야 할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다정하고 선량하고 우호적이면 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교리를 믿든 중요치 않다는 말, 교리를 다 부인해도 괜찮다는 말이 기독교 강단이나 베스트셀러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선량하고 친절하며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리스도인이며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친절함과 선량함과 사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실제 어떤 사람들인지 알려면 산상설교를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거기에 나오는 말은 이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3). 이 말은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긴다는 뜻이며, 자신에게 아무 소망이 없음을 안다는 뜻입니다. '애통하는 사는 복이 있나니 "(마 5:4).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탄식합니다. 항상 자기를 정당화하며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면서도 마치 자기가 좋은 사람인 양 행세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5). 현대인에게서 온유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그 모든 자신감과 확신과 허세와 과시를 생각해 보십시오. 현대인은 자신감과 확신으로 꽉 차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전 사람들을 전부 무시하며, 자신들만 경지에 이른 것처럼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시는 대조적인 모습이 또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마 5:6). 현대 세계를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고 할 수 있습니까? 왜 선량하고 깨끗하며 점잖고 도덕적인 삶을 살면서 남들은 좀 돕는다는 이유로 스스로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 년에 고작 한 번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을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고 할 수 있습니까?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마 5:7-10).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단순히 친절하고 선량하며 점잖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팔복이 완벽하게 묘사하듯 아주 영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다음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율법의 절대성입니다. 현대인은 율법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믿지 않는다. 예수는 믿어도 시내 산의 하나님은 믿지 않는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예수의 하나님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이 그 말을 들으라고 하신 분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들어 보십시오."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윤법의 일점일칙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모세에게 주신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기에 절대적이며 유효합니다. 전체가 다 중요합니다. 일부만 지키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일부를 이기면 곧 전체를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 전체를 지킬 것을 요구하시는데, 그 내용은 "내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이 사랑하리'라는 것입니다(눅 10:27).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 입니다 약간의 선량함과 진실함과 동정심만 갖추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온 존재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는 연이어 율법의 영적인 성격도 알려 주십니다. 율법은 외적인 법이 아니라 마음의 법이라고 하십니다. 살인 행위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상상으로 누군가 미워하고 죽이면 이미 살인한 것이며 "라가"라고 욕하면 이미 살인한 것입니다(마 5:22). 간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한 번도 간음한 적이 없다"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마 5:28). 하나님은 겉모습이 아닌 마음을 심판하십니다. 후에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 그는 계속해서 율법의 외적 조항만 지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는 점을 지적하십니다. 하나님은 마음 – 온 마음 –을 원하십니다.
또한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정직하라고 하십니다. 요컨대 “금식 할 때티를 내고 과시하며 존경을 받으려 하지 마라. 가서 얼굴을 씻고 내색도 하지마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라고도 하십니다.
(마6:22~23) 속까지 진실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가 계속 말씀하시는 바는 이것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리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세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1-3) 주님은 위선과 가장과 허위를 폭로하십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니 완전히 정직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은 좁다고 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다 (7:13-14). 신자는 조롱받고 정죄받을 것입니다. 박해도 받을 수 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좁은 문이요 협착한 길입니다.
주님은 심판에 대한 말씀으로 설교를 마무리하십니다. '양의 옷을 입은 이리는 스스로 아주 영리하다고 생각하지만 곧 정체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마 7:15). 그럴듯해 보이는 열매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 7:16) 마지막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주님은 똑같아 보이는 두 집,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에 대한 굉장한 비유로 설교 전체를 요약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야 무너지지 않습니다. 모래 위에 날림으로 급히 집을 짓고서도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길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붙어 그 집에 부딪지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6-27).
하나님은 변화산에서 그의 말을 들으라"라고 하셨고 산상설교는 "그의 말을 들려줍니다. 현대인은 강단에서 '예수는 오직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라고 말하며 신문이나 책에도 그렇게 쓰지만,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어긴 것을 드러내시며 모든 사람을 정죄하십니다. 우리는 다 부정한 자들입니다 위선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산상설교가 보여주는 본 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가 달려간 또 다른 산, 갈보리 언덕이 있습니다. 이 산을 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십시오 갈보리는 어떤 산보다 영광스러운 본을 보여줍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변화산에 내려와 주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습니까? 장차 예수께서 예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한새 (눅 9:31). 율법과 선지자의 위대한 대표자인 두 사람이 자신들이 가르치고 말한 모든 약속의 성취에 대해 주님과 의논한 것입니다 예수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번제와 제물을 비롯한 모든 예표의 성취요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장본인이십니다. 예컨대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라. 라는 말씀도 보십시오 (사40:1) 왜 위로하라고 하십니까? 한 위대한 인물메시야가 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횡단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사 40:3-4).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까? 메시아가 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사 40:5).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비추신 분이 바로그 메시아이십니다. 그는 가르치시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마 7:29) 완전한 삶을 사셨으며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저는 자를 걷게 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고, 폭풍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갈보리 산이 보여주는 것은 심히 연약하며 확연히 무력한 상태로 나무에 못 박힌 모습입니다. 대체 거기에서 무엇을 하시는 것입니까? 어쩌다가 나무에 달리신 것입니까? 그 대답이 누가복음 9:51에 나웁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일부 바리새인들이 '예루살렘 근처에도 가지 마십시오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작정했습니다. 하면서 만류하는데도 그는 한사코 가기를 고집하셨습니다. 체포 현장에서 한 제자가 칼을 들고 지키려 했을 때도 같을 거두어라. 피할 마음이 있다면 천사 열두 군단을 불러 곧장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다 20: 28) '모세가 광야에서 법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 그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바로 이때문이었습니다.
이 복된 산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싶고 새생명을 얻고 싶습니까? 죽음과 무덤의 공포에서 벗어나 영원한 하늘의 복을 확신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이 산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갈보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중요하게 다루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것이야말로 히브리서의 중심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큰 혼동이 있었기에 반드시 다루어야만 했습니다. 그가 말한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9:22). 물론 이것은 앞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산에서 그에게 본을 주시며 성막과 각 구역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제사장과 대제사장은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짐승은 어떻게 취해서 머리에 안수하고 잡아야 하는지, 피는 어떻게 모아서 처리한 후 사체를 태워야 하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염소와 황소와 암송아지의 재와 유월절 어린양과 상번제로 드리는 양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친히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 모든 것을 지시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죄와 함께 거하실 수 없음을 여러 곳에서 밝히셨습니다. 우주의 통치자이지 위대한 입법자로서 죄를 허용치 않으시며 죄를 지으면 벌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리셨습니다. 황소와 염소를 잡아 그 피를 뿌리도록 모세를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히브리서의 중대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 9:11-14)
히브리시 기자는 계속 이 중대한 주제를 다릅니다. 앞 장들에서 밝혔듯이 염소와 황소의 피로는 죄를 없앨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 없앨 수 없습니까? 그것들은 짐승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장차 있을 일을 예고하는 표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짐승의 주된 역할은 죄를 없애기에 충분한 피가 장차 흐를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 피가 어떤 피입니까? 신약성경에서 처음 이를 언급한 사람은 세례 요한입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위대한 선생이자 광야의 비범한 인물이었던 스승의 세상이 올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과 이야기하던 중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시는 모습을 본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하나님의 어린양!" 요한은 무슨 뜻에서 이 말을 한 것일까요? '모세와 선지자들이 가르친 모든 일이 이제 성취된 것이다. 양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임시조치에 불과했다. 양의 피로는 충분치 못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어린양이 오셨다.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양, 자신의 제물을 준비하셨다"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이 하늘에 올라가 염소와 황소의 피가 아닌 "자기의 피를 바치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물,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용서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이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한 찬송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의 피 가장 추한 자도 정케 하니
그의 피 내게도 효력이 있도다.
-찰스 웨슬리
임마누엘의 핏줄에서 흐른 피로
가득 찬 샘이 있네.
죄인들 그 아래 뛰어드니
모든 죄의 얼룩 사라지네.
-아이작 와츠
이것이 갈보리 언덕의 메시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내릴 수 밖에 없는 결론은, 오직 이것만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공평하신사랑의 하나님이 아들에게 십자가 고난-그 심한 고통과 수치, 심장의 파열, 버림받은 고통의 외침을 허용하신 것이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다른 방법으로도 우리를 구원하고 용서하며 대속하여 자신과 화목케 하신 수 있었다면 굳이 이런 고난을 아들에게 허용하셨겠습니까? 절대 허용치 않으셨을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죗값 속히 치를 수 없네.
오직 주님만 하늘 문 여시고
우리를 들여보내시네.
-세실 프랜시스 알렉산더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 3:11).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갈보리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땅에 내려와 죽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 "굳게 결심하시고(눅 9:51). 그가 이 일을 하지 않으셨다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 흘리신 피를 통해서만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를 위해 드리신 제사를 통해서만, 자기 영혼을 우리를 위한 제물로 바치신 일을 통해서만구원은 이루어집니다.
갈보리 언덕이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이토록 놀랍고 신성한 사랑!" 죄 없이 순결하고 무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어린양 되어 자원해서 도살장에 끌려가셨고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사 53:6).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현대인의 감상적인 사랑관은 진정한 사랑을 모욕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알고 싶다면 갈보리 언덕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 모든 죄의 고통과 수치와 형벌을 아들에게 지우시고"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이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십자가의 수치의 죽음에 내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여러분, 이것이 갈보리 언덕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산에서 변형되신 분, 설교하신 분이 보여주신 본에 이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이 보여주신 본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살펴볼 것은 감람산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사망의 줄을 끊고 부활하셨으며 무덤을 밟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는 40일간 세상에 계시며 택하신 제자들과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 확신을 주셨습니다. 500명이 일시에 살아계신 주님을 뵌 적도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6 에 그 증거가 나옵니다. 주님은 감람산에서 제자들을 만나 성령 세례, 능력의 세례를 주겠다는 중대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3년간 그와 함께 지냈고 그의 모든 가르침을 알며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도 성령 세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령 세례는 말씀의 확신과 능력을 줍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치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행 19-12).
원자력과 인간의 재능을 자랑하며 제 힘으로 역사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악하고 교만한 현대 세계에 이 메시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실제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인들의 자만을 보십시오. 그들은 당연히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런 태도에 대해 성경이 내놓는 대답은 이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진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다른 사실들처럼 이 또한 복음의 필수요소입니다. 싱찬상에 나아갈 때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입니다(고전 11:26) 우리는 오실 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감람산의 메시지가 그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모든 권세를 손에 쥐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히10:13)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대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오실 것입니다(히 9:28)
세상이 장차 어찌 될 것 같습니까? 점차 개선될 것 같습니까? 점점 개혁될 것 같습니까? 사람들이 많은 교육을 받고 다정해시며 선량해지고 친절해져서 전쟁을 종식시키고 다시는 싸우지 않은 같습니까? 온 세상이 점점 완벽해져서 모든 사람이 일하지 않아도 많은 돈을 가지고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행복하고도 완전무결한 시절이 올 것 같습니까? 오 그런 어리석은 믿음을 가진 자들은 눈이 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딤후 3:13). 예수께서도 "난리와 난리 소문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4:6)."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7-38), 소돔과 고모라 때도 그러했습니다. 계시록은 이상한 짐승들의 놀라운 상징을 통해 악인들이 실제로 더 악해진 것을 알려 줍니다. 세상의 큰 권력, 군사 권력과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 온 세상을 통제한 힘과 권세를 가진 짐승들이 일어나 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 받지 않은 자들을 죽이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막강한 권력이 우주를 흔들며 문명을 지배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지혜로 이런 일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잠시뿐입니다. 감람산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분이 전혀 예상치 못한 때에 하늘 구름을 타고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백마를 타고 오실 것입니다. 그렇게 오셔서 자신이 시작한 일을 마치실 것입니다. 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원수를 멸하실 것입니다. 마귀와 그 추종자들을 - 천사든 인간이든 - 멸망의 못에 던지시며,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쫓아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빛과 지식과 진리의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온 우주에서 악과 비행과 죄의 잔재를 씻어 내실 것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한 것임이니라"(사 11:9).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만유를 통치하실 것이며, 아버지께 나라를 돌려드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유가 되실 것이며, 만유 안에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감람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본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본”임을 알고 있습니까? 혹시 지금 불행하게 살고 있거나 실패감을 느끼고 있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 있습니까? 생명과 평안과 능력과 소망을 찾고 싶지만 찾지 못했습니까? 이것이 여러분의 처지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이제껏 연구한 이 "본뿐입니다. 실제로 이 본은 여러분의 필요를 다 채우고도 무한히 남을 만큼 큰 것입니다.
이제 긴요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본'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자신의 견해나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남들의 견해,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출연하거나 신문에 글을 쓰는 똑똑한 사람들의 견해, 한두 가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의지하겠습니까?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신 본을 따르든 따르지 않든 둘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이 본을 따르고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 - 성부 하나님이 보내신 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고 하신 분 - 이 친히 그려 주신 본임을 알고 있습니까? 그의 말을 듣고 있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말을 듣고 있습니까? 그의 얼굴을 보십시오. 그가 겪으신 고난과 고통을 보십시오 그의 말을 들으십시오 그는 말씀하십니다. “이것만이 너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이 일을 하려고 왔다. 내가 이렇게 죽는 것은 바로 널 위해서다. 내가 할 일은 날 믿고 내 피와 부활과 중보의 효력을 의지하는 것뿐이다.
그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을 비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본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파멸이 시작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구원받을 것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단순하게 아뢰십시오 "제 어리석음을 알고 이 본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입니다"라고 아뢰십시오 단순히 나아가 이렇게 아뢰면 받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큰 계획과 목적의 일부가 되었음을 깨달을 것이요 날마다 자신의 삶에서 그 영광스러운 계획이 실현되는 모습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그와 동행할수록 놀라움은 점점 더 커질 것이며, 마침내 그의 영광스러운 임재 안에서 영원토록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