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조가 있어도 차별은 여전하다
윤성희 당원
슬픔이 온 나라를 집어삼킨 것 같은 이 때 다른 종류의 슬픔을 느낀다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집니다만 일상에서 느껴지는 소소한 슬픔이 있었습니다. 아니. 분노라고 해야 할 것 같네요.
새벽이 더 바쁜 사람들
병원에서의 야간 업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 날 병동의 환자들이 복용할 하루치 약을 준비하는 겁니다. 그걸 정규약이라고 말하는데요. 정규약 조제를 해놔야 아침에 출근한 주간 약사들이 그 약을 검수해서 병동에 올릴 수 있죠.
보통 종합병원에서 약포지에 포장되는 약은 ATC라고 하는 자동조제기로 조제됩니다. 모든 환자들의 약이 기계로 조제되는 데에만 2시간은 족히 걸려요. 그리고 그 약의 내역이 적혀 있는 처방전을 출력하는 데도 그 정도 시간이 걸리죠.
새벽 4시가 되면 주치의들이 입력한 처방전이 전산으로 모아지고 출력이 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ATC로 전송이 되고 차례대로 약이 조제되지요. 병동 약국에 있는 기계들이 돌아가기 시작하면 다른 곳에 신경쓸 겨를이 없이 바빠요. 약통을 몇 개나 바꿔가며 기계에 충전을 해야 하고 반 알짜리 약들은 일일이 쪼개 DTA를 해야 하며 약포지 비닐이며 처방전이며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나옵니다.
분리수거를 할 시간이 없어서 커다란 휴지통에 쓰레기가 나오는 족족 버리지요.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지나면 서너 개 되는 휴지통은 더 이상 들어갈 공간이 없을 정도로 가득 차게 되고, 새벽 5시가 되면 청소하시는 여사님들이 출근을 하세요. 용업업체를 통해 고용된 파견노동자들인데 원내로 진입하는 시내버스 첫차를 타고 출근을 하시죠. 너무 바쁘다 보니 그 분들이 병동약국에 들어서실 때 간단한 인사만 하곤 합니다.
00병원에서 야간 약사로 일하는 윤성희당원
화장실에서 커피 마시는 사람들
얼마 전에는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흘낏 옆을 보니 청소하시는 여사님이 매우 난처한 표정으로 제 옆에 우두커니 서 계셨어요.
"무슨 일이세요?" 하고 물었죠.
아. 알고보니 제가 항암주사실 열쇠를 꺼내놔야 하는데 깜빡 하고 꺼내놓지 않은 거였어요.
"죄송해요.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네요."라고 말하고 열쇠를 서랍에서 꺼내어 건네드렸죠.
그러자 그 분은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아유. 죄송합니다. 바쁘신데 번거롭게 해서..."라고 말씀하시며 두 손으로 받으셨습니다.
순간 너무나 큰 불편함이 느껴졌어요. 제 실수인데 왜 그 분은 그렇게 연신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일을 하면서 많은 생각이 스쳤어요. 가운을 입고 있으니 뭔가 대단한 사람처럼 보였던 걸까.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의사라도 되는 줄 알았던 걸까. 내가 실수한 건데 왜 저 분이 저렇게 쩔쩔 매시는 걸까.
6시쯤 돼서 정규약 조제가 거의 끝나갈 무렵 같은 층에서 청소하시는 또 다른 여사님이 병동약국 문을 살짝 여셨어요. 그리고 저희 부서에서 일하시는 여사님을 조그맣게 부르시더군요.
"다 끝났어? 끝났으면 커피 한 잔 해."
그리고 두 분은 조심스럽게 나가셨어요.
잠시 후 잠깐 화장실에 갔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 있는데 옆 칸에서 인기척이 들렸어요.
누군가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죠. 아. 청소하시는 여사님들이셨어요.
나와서 보니 청소도구를 잔뜩 넣어둔 안 쓰는 화장실 칸에 한 분은 변기 뚜껑을 닫고 앉아 계시고 한 분은 양동이를 엎어놓고 앉아 계시더라고요.
갑자기 머리가 띵해졌습니다. 가슴 속에서 화가 복받쳤어요. 그리고 욕이 저절로 나오더군요. '전국에서 가장 강성노조라고 말하는 노조가 있는 병원에서 파견노동자들 휴게실 하나 못 만들고 화장실에서 커피를 마시게 하나. 이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정규직이 힘들다고 거부한 일
제가 입사한지 1년 10개월이 됐습니다. 약제과에는 약제과로 발령받은 정규직 직원이 3명 있어요. 사실 약제과는 일반 직원이 별 필요가 없습니다. 조제나 검수, 마약 향정 관리 등 모든 업무는 약사들이 책임을 지게 돼 있거든요. 그러다보니 일반직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시럽제를 따르는 등의 정말 단순한 업무 밖에는 없어요.
그 일반직원들은 대체로 자원해서 약제과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업무강도도 더 높고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약사들보다 급여도 훨씬 많아요. 오래 근무한 직원은 500만원이 넘는 급여를 받으니까요. 재직기간이 20년 넘은 사람도 있으니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약사들과 달리 해마다 노조의 활약으로 쟁취해낸 임금인상으로 인한 '복리 효과' 덕분이죠.
병원 일이 고되다보니 약사들의 평균 재직기간은 1년 남짓이에요. 그나마 구하기가 힘들어 어지간한 병원들은 늘 구인난에 허덕입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대체로 병원에선 편법으로 조제보조 직원을 구해요. ATC 충전이나 시럽제 조제, 산제 분포 등 시간이 많이 걸리는 단순 업무를 맡깁니다. 조제보조 직원들은 비정규직들이고 급여는 150만원 내외에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겠죠.
하지만 제가 있는 병원은 그 조제보조를 정규직 직원들이 해요. 그것도 3명이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규직 직원들이 산제(가루약) 업무를 거부해서 하는 수 없이 비정규직 조제보조 직원을 채용했습니다. 가루약은 일일이 갈아 약포지에 나눠야 하니 가루가 날리기도 하고 일하는 내내 서서 해야 해서 일 자체가 많이 힘들죠. 결국 정규직 직원들이 힘들다고 거부한 일을 맡기기 위해 비정규직을 고용한 겁니다.
비정규직에게 1/3에 불과한 임금을 주고요. 그게 제가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있었던 일이니까 이제 1년 하고도 6개월은 넘은 일이네요.
그놈의 보호법 때문에...
며칠 전 약제과장과 약사들이 모두 저녁을 먹는 자리가 있었어요. 과장이 조제보조 직원들 이야기를 꺼내더군요.
“병원 사정이 좋지 않아 더 이상 정규직 신규채용을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직원들은 계약이 만료되는 8월까지만 일하게 될 것 같다. 우리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일인데 그 분들이 좋은 직장을 구할 시간이라도 충분히 줘야 하니 지금이라도 미리 말해줘야겠다.”
누군가 묻더군요.
"그냥 계속 일하시게 하면 안 돼요? 우리도 그 분들이 정말 필요한데."
그러자 약제과장이 대답했습니다.
“그게 법에 저촉되는 거라서 안 된다고 한다. 비정규직을 보호하자는 법을 결국 악용하는 건데. 알고 보면 고학력자들이고 이런 일을 하실 분들이 아닌데 그 분들은 마음이 어떻겠느냐.”
병원 사정이 어렵대요. 하지만 현재의 정규직은 건드리지 않겠답니다. 그렇다보니 지금 있는 정규직 자리를 보전해주기 위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포기하는 겁니다. 더군다나. 그저 정규직 전환을 해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해고를 하는 거에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밥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어요.
더 화가 나는 건 일전에 부서 이동이 있었을 때 일이었어요. 순환보직을 하게 돼서 다른 부서로 이동을 해야 했는데 정규직 직원 중 하나가 약제과에 잔류를 희망하는 신청서를 작성해서 컴퓨터에 열어놓은 채로 퇴근했더군요. 그걸 본의 아니게 제가 보게 됐습니다.
그 사유라는 게 이랬어요.
'본인은 원무과에서 십 몇 년을 일하고 약제과에서 몇 년을 일했습니다.(자세한 기간은 기억이 나지 않네요.) 제가 약제과에서 하는 업무라는 것은 시럽을 따르는 등의 단순한 업무입니다. 이렇게 단순 업무만 하다보니 다른 부서로 가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잔류를 희망합니다.'
500만원이 넘는 월 급여를 받는 정규직 노동자가 업무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부서이동을 거부합니다. 게다가 그 단순한 업무 중에서도 고되고 힘든 업무는 비정규직에게 맡깁니다. 그나마 그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치는 급여를 받으면서 오래 근무할 수도 없습니다. 2년이 되기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야 해요. 왜냐면 직장에서 더 이상 정규직 충원은 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정규직들은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는 것으로 만족할지 모르지만 결국 정규직이 정년퇴직한 자리는 비정규직이 채울 거고 이제 곧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2년 만기의 시한부 고용에 고스란히 노출되겠죠.
아직도 여전히 '귀족노조'라는 말이 불편하신 분들이 계신 듯 하더군요. 귀족노조가 대체 뭐냐고, 그런 게 있기나 하냐고 항변하는 분도 계시고요.
귀족노조요? 귀족노조를 정의해 드릴까요?
같은 사업장에,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는데, 그 비정규직 노동자가 자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급여를 받으며 자신처럼 고용을 보장받지 못 하고 2년이 되기 전에 짤린다면 바로 그 사람이 '귀족'이고 그 사람이 속한 노조가 '귀족노조'입니다.
이제 정리가 되셨을까요? '귀족노조'란 말에 억울하다고 징징대지 말고 기억하세요. 이젠 노동자에게도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어요. 노동자라고 다 같은 노동자가 아닙니다. 2014년의 계급은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뉘지 않아요. 소득의 정도와 고용 안정을 기준으로 나눠집니다. 그러니 자꾸 토달지 마세요.
|
첫댓글 ㅋ ㅌ 나와요!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