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장성수 당원의 삶과 꿈
‘대책없이 낙천적인 사람
알고 지낸지도 꽤 된 것 같습니다. 재작년 종점수다방 문 연다고 후원주점 열때, 호프집 안에서 부침개 부치느라 애쓰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때 많이 힘들었죠. 케이블카 반대 산행하느라 탈핵 도보행진 하느라 당원들과 많은 시간 함께 보낸 장성수 당원이 김해로 이사 갑니다. 남산 중턱에 집을 얻고 맘에 드는 재래시장을 찾아 후암동 일대를 스쿠터로 돌아다녔던 장성수 당원이 서울을 떠나 김해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몸이 아프고 집안 일로 힘들었던 적도 있지만 건강하게 살도 찌고 주변에 사는 분들과 ‘계’를 꾸리고, 협동조합과 노동조합이 지역에서 만나는 일을 하고 싶은 장성수 당원,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인터뷰 ; 황혜원 위원장
정리 : 이효성 사무국장
인터뷰 날짜 : 2013년 6월 19일 수요일 오후5시 종점수다방
*인터뷰를 마친 21일 아침, 청천벽력 같은 장성수 당원의 사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김해로 내려가 새로운 삶을 꿈꿨던 장성수 당원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이 인터뷰가 생전의 고인의 마지막 기록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생각 끝에 장성수 당원 누님의 허락을 받아 그대로 뉴스레터에 싣기로 했습니다. 장성수 당원은 가셨지만 그의 살아온 삶과 이루고 싶은 꿈에 대해 용산당원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황혜원 : 어린 시절 이야기 좀 해주세요. 좋은 기억이든 슬픈 기억이든
장성수 : 부산 진구 당감동에서 태어났는데, 우리나라 유수의 신발공장들은 다 있었어요. 밑에는 기찻길, 위에는 공장이 있는 그런 곳이었죠. 그곳에 살다 몇 번 이사를 다녔어요. 집값 전세값 따라서 이리저리 옮겨 다녔죠.
어릴 때 바닷가에서 놀았던 기억이 나요. 바닷가에서 게도 잡고 홍합도 구워먹고, 홍합 구워먹다가 다친 상처가 아직도 있어요. 몸이 자라면서 흉터도 커졌지요. 형제는 누나 둘에 저예요. 제가 막내죠. 부모님은 각자 바쁘셔서 어렸을 때 엄마랑 논 기억이 있어도 아버지랑 같이 다닌 기억이 없어요. 아빠가 육체노동자를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제가 다대포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할 때 아버지가 와서 여기서 출근하는 사람들은 눈이 퀭해 보이니 이곳에서 살지 말라고 하셨던 적이 있어요. 아버지는 항상 있는 자의 시선으로 보셨어요. 지금은 대현동에 친가가 있어요. 바닷가에 앉아 멍하게 바라보고 그랬던 것 같아요. 뛰어난 문학가는 바닷가 출신이 아닌가 싶어요. 온갖 상상력이 바다를 보면서 발휘되죠.
황 : 서울로 언제 올라왔나요
장 : 2006년 가을 쯤 올라왔어요. 군대는 백령도에서 보냈고요. IMF때 제주도에서 1년 반 살았죠. 73,74,75년생은 저주받은 세대죠. IMF 핑계로 졸업생들 월급이 너무 적었는데, 제주에서는 물리치료사 대우를 잘해준다고 해서 거기서 1년 반 정도 있었어요. 제주가 살기는 좋은데 육지 사람들은 오래 못살아요. 차 몰고 세 시간이면 제자리에 돌아옵니다. 서른넷부터 물리치료를 시작했는데 그 땐 좋았죠. 소위 3류 학교 중에서는 최고학교였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병원의 갑인 의사들이 의료 인력들을 싸게 하기 위해서 물리치료실이 넘치도록 많이 만들었어요.
우리나라는 정상적인 재활치료를 소수의 기득권만 할 수 있고, 선배가 후배를 갈취하는 구조예요. 배타적 의료계의 못된 습성, 약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게 싫었고, 노동시간의 두 배 이상을 강요하는 우리나라의 풍토, 고용이 안정된 사람들은 아예 자기들끼리 그룹을 짜버리니까요.
황 : 물리치료는 사람을 대하는 직업인데 힘들지 않나요
장 : 무지하게 힘들었어요. 일본은 물리치료를 전문직으로 대우해 주죠. 물리치료사 한 명당 환자 몇 명 이렇게 정해져 있는데 한국은 닥치는 대로 시키죠. 물리치료라는 게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으면 못해요. 저는 모달리티라고 기계를 쓰는 사람인데 전문성을 필요로 하면서도 돈을 절반 밖에 안줘요. 물리치료를 계속 했다면 12년차인데 실제 일한 횟수는 6년 정도 됐고요. 상처치료도 2년 해봤어요. 그러다 외국에 나가 살고 싶어 30대 초반까지 영어공부도 했어요. ㅋㅋ
황 ; 물리치료 하면서 보람 있었던 일은 없나요. 그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장 : 보람이 있었다며 계속 했겠죠. 슬픈 일은 많아요. 상처 치료할 때 7살짜리가 치료 받으러 왔는데 데리고 온 사람이 엄마가 아니라 동네 아줌마였어요. 그 아이 엄마는 15일 전에 하늘나라로 떠났던 거예요. 또 어제 치료했던 사람이 다음날 하늘나라로 떠가고...
OECD 국가 중에서 물리치료사가 독립적으로 개업을 못하는 유일한 나라가 우리나라예요. 외국은 물리치료사 위상이 높은데 우리나라는 안 그렇죠. 정형외과나 신경외과 의사는 주로 물리치료로 손님을 끌어요. 규모가 작은 병원은 수술을 못하니까 물리치료사로 병원의 수익구조를 유지하죠. 만약 물리치료사가 개업할 수 있다면 병원이 돈 벌기 쉽지 않을 거예요.
예전에 어떤 한나라당 국회의원 일번 공약이 물리치료사 개업을 막겠다는 거였는데 나중에 그 의원은 의사협회 회장에다 의원까지 되었어요. 재활치료는 운동, 열, 전기 등의 물리적 요법으로 치료하는 건데 이 물리치료는 선진국으로 갈수록 비율이 높습니다. 수술을 할 수 없는 의사들은 물리치료사가 손님 끌어주는 미끼 상품인 셈이죠.
황 : 강서에서 용산으로 언제 이사온 거죠
장 : 부모님이 9년 전 쯤 남산 중턱에 재건축 아파트를 사면서 용산으로 오게 됐는데 그 놈이 속을 썪이네요. 가지고 있던 돈을 다 날리고 남산에서 제 인생의 고난 길은 다 겪은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스물다섯에 공무원이 되어 40세까지 열심히 모을 만한 많은 돈을 다 날려먹었어요. 부산 사상에 육체노동자들이 많은데 아버지가 거기에서 플라스틱 가공 공장을 했어요. 그거 말아먹고 어려웠을 때가 있었지만 그 때 제가 어려서 그게 힘든 건 몰랐는데 이번엔 정말 힘들었어요.
황 : 용산에 와서 당협활동 열심히 참여했잖아요. 혹시 섭섭했던 적은 없었나요.
장 : 그렇죠. 용산당협을 본격적으로 만난 건 공부모임을 통해서였죠. 공부모임이 젤 기억에 남아요. 전광철 선배가 모임지기고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라는 책을 읽었는데.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4~5번 쯤 나온 것 같은데 전광철 선배가 공부모임을 부드럽고 지적인 언어로 이끌어준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모임이 앞으로도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부산가도 서울의 공부모임 날짜에 맞춰 올 거예요. 용산당협에서 가장 잘하는 것이 공부모임 아니었나요. ㅋㅋ
황 : 케이블카 산행은 어땠어요
장 : 산이 좋아 가고 바다가 좋아서 가는 건데 노동이 망가지고 사회적 약자들은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산을 가는 게 맞나 싶어요. 반핵 행군 따라 갔을 때 삼척 앞바다가 너무 예뻤고, 태백산맥의 멋진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경남에서 강원도 까지 갔지요. 울산 바로 위쪽에서 영덕을 거쳐 삼척으로 3박 4일 정도 걸었어요. 발가락에 물집도 나고 그랬는데 세 번째 날인가 내가 남부군이 된 줄 알았어요. 정해진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 밤까지 걸었어요. 남달리 눈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는 김현우 위원장이 겁을 많이 주는 거예요. 잘 따라오라고. 그래서 ‘아 저 분은 독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죠 ㅎㅎ 앞으로 그 분 조심하세요^^
황 : 장성수 당원은 활동적이고 관심사가 다양한데 자기 자랑 좀 해봐요
장 : 전국의 구석구석을 나만큼 돌아다녀본 사람은 없을 거예요. 경기도는 거의 안가본데가 없고 다른 데도 그래요. 지리산 모든 길도 걸어서 다 다녀봤어요. 여행갈 때 어떤 원칙이 있는 게 아니라 걸을 땐 걷고 차를 탈 땐 타고, 제가 스무 살 때 락(ROCK) 클라이밍, 암벽 빙벽도 탔어요.
제 장점이라면 뭘 하더라도 끝까지 한다는 거죠. 그러다 아니다 싶으면 몇 년 동안 했던 일이라도 털고 더 새로운 것을 선택하는 과감함이라고나 할까요. ㅋㅋ 촛불시위 할 때도 끝까지 갔지요. 그리고 보통 사람들은 상처를 쉽게 못 잊잖아요. 저는 좀 대책 없이 낙천적인 구석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지 아무 대안 없이 긍정적으로 바라보다 힘들었던 적이 엄청 많아요.
황 : 여행 다니면 뭐가 좋아요
장 : 영암 월출산 노을 질 때, 신안군 하이도, 남해안 거제쪽 서매물도, 통영 뒤 학섬, 또 부산 몰운대 성당... 여기는 정말 좋아요. 경남에서 그런 view는 없죠. 여행을 좋아하는데 요즘은 많이 못가서 스트레스를 받아요. 여행은 혼자 가는 게 편하고 내가 사라질 때는 여행 갔다고 보면 돼요. 부산을 기점으로 위쪽은 계속 산인데, 통도산 여치산으로 해서 밀양시내까지 내려가는데 참 괜찮아요. 철원평야도 괜찮았고요. 저는 멀리가야 여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대문 근처를 나만큼 길을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저번에 조혜경 부위원장님이랑 사대문을 돌았는데, 정작 서대문-이진아도서관-안산 여기도 좋은데 여기는 잘 모르더라고요. 이런데도 정말 괜찮은 데예요...
황 : 진보정당, 노동조합, 정치활동에 대해서 관심이 많잖아요. 당은 어느 길로 가야 힐까요
장 : 진보가 노동자 계급성을 잃어버리면 그건 진보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녹색이든 뭐든 계급성이 중요하다고 보는 거죠. 참혹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체제에 대한 저항의식 없이 계급의식 없이 연대한다는 것은 이단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느끼기에는 진보신당이 상대적으로 노동계급에 대한 현장투쟁 보다는 녹색이나 이런 데 더 많이 간 것 같아요. 2009년 쌍차 투쟁 때 안으로 들어가 봤는데 진보신당 깃발이 없더라고요. 쌍차공장 뒤 쪽에 노동자 투쟁할 때 진짜 세상을 바꾸려면 이정도 각오를 해야겠구나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죠. 노동운동이 개량화되고 변질되었다고 했는데, 저는 다시 재정비해서라도 계급투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뭐든지 먹고사는 문제랑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계급성 없으면 다른 정당하고 별 차이 없잖아요. 어차피 고통 받는 노동자들과 같이 스크럼 짜고 투쟁하는 정당 아니면 우리는 살아남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황 : 당명 개정을 앞두고 있는데
장 : 당명개정은 노동당으로 했으면 좋겠어요, ‘사랑’이란 말을 남발한다고 사랑의 의미가 없어지지 않듯 원론으로 돌아가서 당이 노동당이었으면 좋겠어요. 당은 무산계급에 대한 계급의식을 확실히 하고 산별과 더불어서 지역 노동자가 연대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봐요. 직종을 떠나 그 지역의 연대체, 다시 노동단체들이 거듭나고 진보정당이 연대해서 공동대응 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당에 노동운동의 의식 있는 당원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황 : 조금 다른 질문을 드릴게요. 40대(?)독신 남으로서 삶에 대한 고민이 많죠
장 : 아직 40 아닌데요. ㅋㅋ 만으로 서른아홉입니다. 경제적으로 쫄딱 망한 지금의 경우는 결혼을 안 한다기보다 못하는 거고요. 맘이 힘들고 외로워요. 그런데 정말 불쌍한 환자 옆에는 사람이 없고, 불쌍해도 약간 껀덕지가 잇는 사람에게는 사람이 오더라고요.
황 : 곧 40세를 앞두고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자신만의 삶의 철학이 있다면
장 : 공기 좋은데 가서 건강하게 햇빛 많이 받고 동네사람들하고 어떤 사회적 위상이나 스펙 관계없이 같이 탁구치고 배드민턴도 치고 하루하루 건강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김해로 내려가 건강하게 살고 싶어요. 살도 좀 찌고 20키로 더 찌우는 게 목표예요. 몸에 힘이 다 빠지면 아무 의욕이 없어요. 그래서 건강해야해요.
황 : 커피집이나 맛집을 많이 알잖아요. 음식에 대한 철학이 있다면? 추천 맛집도 소개해줘요
장 : 서민 위주의 식당 중에서 재료를 정직하게 쓰고 음식 실력이 좋은 집을 찾는 편이에요. 저는 음식을 좋은 재료로 맛있게 주는 사람들이 좋아요. 추천해주고 싶은 맛집은 여름에는 을밀대에서 냉면을 드시기 바랍니다. 명동교자는 잘 아실 것이고 곧 여름이 다가오니까 초계탕을 드셔 보세요. 명동성당 뒤에 평래옥이라고 있는데 거기 초계탕 비싸지 않은 맛 좋아요. 을지로에는 곰국시. 서양음식을 좋아하는 여성들은 광화문의 뽀모도르, 진짜 맛집은 반드시 골목 안에 들어가 있고, 맛없는 집은 큰길가에 있어요. 인테리어비로 돈을 다 써 음식 맛내는데 큰 관심이 없어요. 보통 종업원들 표정이 안 좋으면 음식 맛이 없어요. 종업원들이 은근히 여유 있는 표정을 짓는 식당은 맛에 자신이 있다는 거예요. 부산에 진짜 맛있는 맛 집이 많아요. 완당, 밀면….
황 : 얼마 있으면 용산을 떠나는데 우리 용산당협에 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장 : 한번 생각해 보고 이번 주 안으로 연락드릴게요. 이제 짐정리 하니까 그 때 깨끗하고 효용성 있는 것으로 가져다 드릴게요.^^
첫댓글 이 글을 읽으니 장당원이 말하는것으로 들리네요..넘 젊은 나이에 새로 시작하려고 희망에 들떠 있었을텐데..맘이 아픕니다.
보고싶눼. ㅎ
기타맨님. 댓글이 적절치 않은 것 같네요.
저번 이용길대표 용산에 오셨을 때 장성수당원이랑 나란히 앉아 얘기 많이 했었는데.. 저랑 동갑인데다가 은근 공통 화제도 많았고요. 너무 슬프네요. 가슴이 먹먹하기도 하고..
마지막 술자리 오래애기 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남네요. 조문을 하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요.
산다는 것은 답이 없겠지만 저 같은 경우에 사람들에게 왜 따뜻하게 하지 못했을까, 왜 그렇게 모질게 했나 후회하는 일이 종종 생깁니다..
저와 달리 낙천적이었던 장성수 당원을 많이 기억할 것 같네요. 현재를 충실 히 사는 것 우리의 몫이겠지요.
제가 자막이 많은 영화를 볼 때 힘겨워하는 편인데(영화의 질이나 재미와 상관없이 '텍스트'를 읽다가 잠이 와버리는) 제가 옆에서 지켜본 장성수 선배는 '자막많은 영화'와 비슷했어요. 좋은 사람이었고 정직했으며 무엇보다 '선명'했기에 적나라하고 분주했어요. 우린 모두 '적당히' 하잖아요. 적당한 자들이 즐비한 세상에 살다보니 이 말 많고 자기색이 강한 사람이 불편하게 다가왔었나봐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소식을 듣고 미안한 마음이 가실 길이 없더군요. 자막이 많이 나오는 영화를 보게 될 때면 선배를 생각할게요. 모쪼록, 꿈꾸던 세상과 만나셨길 바라요. 저 세상이 그렇지 않다면 분주하게 그걸 만들고 계실 거라고 믿어요.
7월호 당원 인터뷰에 누굴 할까 망설일때 장성수 당원 하라고 부추겼잖아요. 이제와 생각해보니 인터뷰라도 했기에 장성수 당원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인터뷰 글을 읽으니 광화문 뽀모도로에서 스파게티 사주겠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요근래 자주 어울렸던터라 더 황망하기도하구요..확실한 유물론자라 좋은 곳으로 가길 바란다..이런 말조차 인정하시지 않을듯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목을 빕니다.
형...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