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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기도로 열고 기도로 닫으라
2002년 8월 23일 여름안거 해제
(좀 길지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올립니다. 꼭 끝까지 읽어보셔요)
아침에 산을 나오면서 ‘내가 언제까지 이 일을 할 것인가.’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중으로 사는 동안 공밥을 먹을 수는 없고, 무슨 일이든 해야만 합니다.
인연이라는 것은 이렇듯 보이지 않는 끈입니다. 저는 길상사라는 절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여기에 오는데 차가 막히지 않으면 네 시간 남짓 걸립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것을 하게 될까?’ 오는 동안 문득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법회에 오면 이렇게 서로 만나는 고마움과 기쁨이 있습니다.
한 세상, 한 시대를 살면서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다 스치고 지나갑니다. 이 도량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만나 이야기하고 듣는 인연을 맺습니다.
그것이 소중해서 저도 이렇게 나오는 것 같습니다.
또 여러분들이 저를 끌어당기는 인력, 그 힘이 제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보통 90일 안거인데 올해는 윤달이 들어서 120일이나 걸렸습니다.
지난 안거 결젯날 제가 몇 가지 당부를 했습니다. 먼저 각자 원을 세우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원을 세워야 합니다. 원이 없으면 사는 일 자체가 개운치 않습니다.
또 원이 없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일정한 원을 세우면 그 원을 이루기 위해, 원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정진합니다.
또 하나는, 우리는 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혼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와 이 사회, 하다못해 병원 의사, 간호사 등 많은 사람들의 은혜 속에서 세상에 태어납니다. 또 살아가는 동안 많은 이들의 은혜를 입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위한 배려, 이웃을 위한 배려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최소한 한 시간만이라도 이웃을 위해 사는 것이 사람의 도리입니다. 오늘 헤젯날, 내가 세운 원을 얼마만큼 실행하고 이루었는가 스스로 점검하는 기호로 삼으십시오.
오늘은 기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중이 막 되어서 가장 오래 산 절이 해인사입니다. 그곳에서 12년을 살았는데, 말하자면 해인사에서 중으로서 잔뼈가 굵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방에서 정진도 하고 강원(절 안에 넓은 강당을 만들고 경전을 가르친 데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공부하는 승려를 학인이라 하며, 4년의 일정한 교과과정이 있다.)에 내려가서 경도 배웠습니다. 처음 2, 3년 동안은 완전한 풋중 시절이어서 지금 생각해도 겉도는 시절이었습니다. 여럿이 모여서 웅성거리며 그렇게 살았던 시절입니다. 두세 해가 지나니까 중노릇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서서히 들었습니다. 119쪽
해인사 시절에 지금도 가장 고맙게 생각하고 기억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법당에서 대중과 함께 아침저녁 예불을 한 다음에는 팔만대장경이 모셔진 장경각 안에 있는 법보전이라는 법당에서 혼자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홀로 기도했던 일이 제 생애에서 여러 가지로 좋은 덕을 베풀었습니다.
그 영향은 영암 스님에게서 받았습니다. 당시 자운 스님이 주지였고, 영암스님이 총무였습니다.
나중에 영암스님이 주지도 하고 그랬습니다.
제가 해인사에서 12년 있는 동안 주지가 네 사람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운 스님, 그 다음이 청담스님이었고, 다시 자운스님이 오셨다가, 그 다음에 금당스님이 오셨습니다.
영암스님은 절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꼭 기도를 했습니다. 늘 장경각에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 나도 기도를 해야 되겠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큰 법당에서 대중과 함께 예불을 하고 나서 장경각에 올라가면 영암 스님이 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 사이 저는 장경각 뒤에서 포행(布行 좌선 중 졸음이나 피로한 심신을 풀기 위해 선방 밖 일정한 장소에서 산책하듯 느린 걸음으로 거니는 일)을 돌면서 한 30분 있다가 스님이 나오시고 나면 들어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해인사에 있는 동안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는 습관을 들였습니다. 그렇게 정진을 했습니다. 그때의 정진이 제가 중노릇하는 데 큰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대충 쉽게 지냈을 텐데, 장경각에서 아침저녁 기도한 공덕으로 여러 가지로 중노릇 하는데 크게 벗어나지 않고 제 길을 걸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마음부터 깨끗이 닦아내야 합니다.
자기 정화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자기 정화는 참회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금생도 금생이지만 전생에 어떤 몸으로 어떤 삶을 일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이 몸을 가지고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허물이 없을 수 없습니다.
불교의식 가운데 한문으로 괸 참회의 구절이 있는데, 번역을 해보면 이렇습니다.
“제가 어리석은 탓으로 무량겁을 두고
한량없는 허물을 지어 왔습니다.
이제 뉘우쳐 참회하오니 다시는 허물을 짓지 않고
언제까지나 깨달음을 추구하고 자비를 실천하게 하소서.“
기도에는 목소리가 아니라 간절한 마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소원은 울림이 없습니다.
무엇이든 진심으로 하면 천지신명까지도 감동하게 됩니다. 기
도에는 어떤 요구보다도 간절한 마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몸에 음식이 필요하듯이 우리의 영혼에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어느 일본 수녀님이 쓴 책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한밤중에 방글라데시 앞바다를 항해 중이던 한국 선박에서 선원 한 사람이 파도에 휩쓸려 칠흑 같은 바다로 떨어집니다. 한밤중이기 때문에 배에서는 전혀 그런 사실을 모릅니다. 이 선원은 무슨 일로 밖에 나왔다가 아마도 파도에 휩쓸렸던 모양입니다.
그 선원은 어떻게든 살아나려고 붙잡을 것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몇 시간을 헤엄칩니다. 그러다 기진맥진해져서 기절하기 직전까지 갑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도 모르게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큰 거북이 등에 자기가 올라타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여섯 시간이나 거북이는 물에 잠기지 않고 선원을 등에 태우고 떠 있습니다.
아침 점호 시간에 배에서는 선원 한 사람이 없어진 것을 알고 난리가 납니다. 어제저녁까지 같이 있던 동료가 없어졌기 때문에 발칵 뒤집혀서, 틀림없이 파도에 휩쓸렸을 것으로 생각하고 항해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갑니다. 몇 시간을 되돌아가도 그는 보이지 않습니다. 망망대해를 여섯 시간을 항해해서 되돌아가니, 그 책에서 묘사하기를, 해는 중천에 떠 있고 멀리서 무언가 사람 형체가 보였다고 합니다. 가보니 거북이 등에 앉아있는 실종된 선원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반가워서 거북이와 같이 인양을 합니다. 그리고 뱅골 만으로 귀향을 합니다.
그 거북이가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거북이가 술을 마시는지, 그 책에는 술과 바나나를 잔뜩 주어서 치하를 하고 다시 바다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뒷이야기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선원의 홀어머니가 그 외동아들을 위해 늘 지극하게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홀로 살면서 늘 기도를 하고, 아들 이름으로 선행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우연한 일은 없습니다.
세상에 그냥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공것은 없습니다.
내가 공을 들인 만큼 나 자신과 이웃에게 그렇게 메아리가 됩니다.
또 기도에는 침묵이 뒤따라야 합니다. 침묵이 받쳐 주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말이 없어야 합니다.
낙산사 홍련암, 강화 보문사, 남해 보리암 등 좋은 기도처라고 해서 많은 불자들이 기도하러 갑니다. 그곳에 가서 보면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법당에서 기도하고 나와서는 뒷방에 모여 반찬이 어떻다는 등 떠드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하고 집에 돌아가서도 될 수 있으면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수다를 떨고 이런저런 무의미한 말들을 늘어놓으면 모처럼 기도해서 생긴 고요한 정기가 새어 나가기 때문입니다.
기도 기간에는 될 수 있으면 말이 적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 마음속에서 깊어지기를 바란다면,
우리의 기도가 마음속에서 깊어지기를 바란다면,
결코 그것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됩니다.
흔히 기도하는 사람들은 아무개는 좋은 꿈을 꾸어서 관세음보살이 꿈에서 청심환 같은 약을 주더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꿈 자체가 허망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것 자체가 큰 꿈 아닙니까? 꿈속에서 꿈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허망한 짓입니다. 우리가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인데, 왜 또 꿈을 바랍니까?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꿈이 없습니다. 잠든 사람에게만 꿈이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어떤 영적인 체험이 내 안에서 일어날지라도
그것에 대해서 발설하지 마십시오. 기도 경험자들이 하는 공통적인 충고입니다.
묵언과 침묵으로 일관할 때 비로소 어떤 진리의 소리가 내 안에서 울려 나옵니다.
될 수 있으면 기도할 때 말소리를 작게 하십시오.
또 기도의 장소를 가리지 마십시오.
고요하고 맑고 청정한 도량이면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번거롭고 분주한 곳에서는 오히려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이름난 기도 장소에 가 보십시오.
사람이 지나치게 많아 남의 엉덩이에 대고 절해야 하고 부처님한테 절할 여백이 없습니다. 서쪽에만 극락세계가 있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흰구름이 걷히면 어디나 청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십년을 하루같이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 영험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중단하지 않고 꾸준히 계속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주에 문득 부의 허망한 실체를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아, 내가 잘산다는 것, 떵떵거리고 산다는 것, 이것이 다 허망한 짓이구나. 내 분수 밖의 짓이구나. 공연히 내가 내 그릇을 모르고 엉뚱한 것을 원했구나.’
스스로 기도 중에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재벌이 되었다고 해서 하루에 다섯 끼 여섯 끼 먹을 것도 아니고, 여전히 지붕 밑에서 잠잘 텐데, 공연히 내가 내 분수를 모르고 허황되고 큰 것을 원했구나.’
이렇게 돌이키고 그 길로 깊은 산속에 들어가 수행자가 됩니다. 하루는 참선을 하는데 선정에 들어 눈을 떠 보니, 그 앞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한 부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깜짝 놀라서 “당신은 누구시기에 여기 계십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그대가 10년 동안 그토록 찾았던 관세음보살이다. 이제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러 왔노라.”
10년 동안의 기도 끝에 부의 허망함을 느끼고, 다시 마음의 평안을 찾고 착실하게 기도하며 지내고 있는데, 이렇게 뒤늦게 관세음보살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관세음보살에게 말합니다.
“오, 관세음보살님! 이제 저는 선정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고, 한때 부자가 되고 싶었던 욕망을 버렸습니다. 마음의 평안 이상 더 바랄 것이 없기 때문에 당신은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어째서 10년이나 미루다가 이제야 오셨습니까?”
그러자 관세음보살이 답합니다.
“명심하라. 그대가 그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10년을 한결 같이 정성을 다해 기도한 공으로 본다면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대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그것을 오늘까지 미루어 온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진정으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가장 최고 가는 행복이 무엇인가입니다.
이런 응답이 기도의 공덕입니다. 내가 뿌린 씨앗은 헛되이 소멸되지 않습니다.
눈앞에 현상이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소원했던 일이 곧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 공덕은 어디로 가지 않습니다.
내가 간절히 기도한 만큼 어디엔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절인연을 통해서 다시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125쪽
기도는 법당이나 성당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생활 속에 용해되어야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말 한 마디마다 기도가 배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법당에서 하는 것은 지극히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기도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집에서 하는 것입니다.
내 집과 방이 법당이고 성당입니다. 간절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은 그가 하는 말과 생각과 행동이 곧 기도로 이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와도 맞서지 마십시오. 맞서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설령 앞서야 할 경우가 생기더라도 생각을 돌이켜서 물러서야 합니다.
마음속에 벽을 쌓아 두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동안 내가 온 존재를 다해 기도했기 때문에, 전 같으면 다투고 맞설 일도 기도한 공덕으로 누구와도 맞서지 않게 됩니다.
건강할 때 맑은 업을 닦아야 합니다. 병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루하루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이 어려운 고비를 무난히 넘길 수가 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신앙의 꽃이 피고 깨달음의 열매가 맺습니다. 126쪽
법정스님 법문집 2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사람을>
읽는 중인데 이 부분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아서 좀 길지만 올려드립니다.
부디 일상생활 자체가 기도하는 그런 나날들이 되시길...
하루하루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셔서 이 어려운 고비를 무사히 넘기시기를....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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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늘 날마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그리고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다투지 말고 모두 행복했음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모두 성불하여서 이 지구가 그리고 지옥이 텅텅 비었음 좋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합장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예 감사합니다 예전에는 출가사문은 기본이 기도이였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감사합니다.기도의 울림으로 오늘을 보내고 항상 그렇게 보낼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_()()()_
기도하는 마음의 자세에 대한 법문 새기고 갑니다.
dalma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진정한 기도를 깨닫게 해주셔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_()_
기도는 불보살의 공덕을 빌어서 하는것이 좋읍니다
살기 힘들면 관세음보살을 염 합니다 죽어서 극락가기를 원하면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합니다 둘 다 원하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염불하세요
이것만하시면 기도는
다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