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구정광다라니경'은 이렇게 발견이 되었다
출토 당시의 무구정광다라니경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1966년 10월 15일 발견되었다. 석가탑 보수 과정 중 발견된 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1200여 년 전 신라 35대 경덕왕 때 세계에서 처음으로 목판으로 인쇄된 최고의 불경임이 밝혀졌다.
무구정광다라니경 복제품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너비 약 8cm에 전체 길이 약 620cm의 한지 두루마리에 인쇄돼 있었는데, 오랜 세월을 겪었음에도 글씨가 선명하고 정교해 제작 당시의 인쇄술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발견 당시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위원장 이홍직 교수는 이 불경이 한눈에 보기에도 모필이 아닌 목판인쇄본이 분명할 뿐더러, 통일신라기에 해당하는 당의 측천무후 시대의 한자가 섞여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신라 35대 경덕왕 때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으며, 따라서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이라고 밝혔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이듬해인 1967년 9월 국보 제126호로 지정됐다.
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어떻게 해서 다시 빛을 볼 수 있었을까
불국사삼층석탑(석가탑)
750년경에 건립되어 일제강점기에도 무사했던 석가탑은 1966년에 이르러 일대 위기를 맞이했다. 일제로부터 도굴의 기법을 전수 받은 도굴범들이 불국사에 침입하여 석가탑의 사리함을 도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각종 신문의 지면을 차지했던 석가탑 도굴 관련 기사의 내용은 정영호교수에 의해 정리되어 전체적인 내용이 (<불국사삼층석탑 사리구와 문무대왕해중릉(佛國寺三層石塔 舍利具와 文武大王海中陵> 韓國精神文化硏究院,1997)에 소개된 바 있는데 이를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석가탑에 대한 도굴이 자행되었다. 비록 미수에 그친 사건이었지만, 탑내에서 수습된 유물로 보아 ‘만약 이들이 도굴범의 수중에 들어갔더라면’ 하는 상상은 우리를 몸서리치게 한다. 도굴이 성사되었다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통해 세계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했던 사실은 물론, 이를 통해 석가탑은 물론 불국사가 지닌 성격, 사리용기를 통해 당시 금속공예의 수준을 알 수 있는 자료의 확보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1966년 9월 6일 오후 2시쯤 경주 불국사 범영루 보수공사를 하고 있던 한 공사감독이 석가탑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하여 곧 경주시 교육청에 알렸다. 경주 교육청에서는 현장에 나가 확인한 결과 석가탑 2층 탑신의 서편이 사방 1자 가량 떨어져 나가고 3층 탑신에 금이 생겼으며 3층 동쪽 탑신의 모서리에 파편 조각처럼 여러 군데가 떨어져나간 것을 밝혀으나 상처가 생긴 확실한 원인을 규명하지 못하였다. 현지 교육청은 탑에 흠이 갔으나 "아직 버팀대를 괼일 단계는 아니다. 탑신과 기단석을 서로 이은 쇠로 된 쐐기가 삭아서 탑신의 중력이 기울었고 오랜 풍화작용과 300여년전 임진왜란 때 불탄 영향으로 생겼던 상처가 뒤늦게 작용한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현지 교육청은 망치로 때려 떨어진 것처럼 생긴 석가탑의 돌 조각을 불국사에 보관중이다." 라고 도교육위원회에 보고하였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도교육위원회는 7일 문교부의 감독관과 문화재위원 및 특수기술자의 파견을 긴급 요청하였다. 교육위원회 당국자는 전에는 이상이 없었던 것인데 이번에 갑자기 이 같은 이상이 생겼다고 말하면서 완전보수를 하려면 2층 이상은 해체, 복원공사를 해야 될 것 같다고 했다. 불국사 대웅전 앞에 있는 국보 제21호 석가탑(일명 무영탑)이 지난 8월 29일 밤 동해남부 일대에 있었던 미진(2도 가량)으로 흔들려 탑이 6도 가량 남쪽으로 기울어졌으며, 탑신 4개처가 떨어지고 2층갑석 하단부가 균열되었음이 8일 현지조사에서 돌아온 도교육위원회 직원에 의해 밝혀졌다. 金判永 도교육감은 현지를 답사하고 석가탑의 해체 복원을 문교부에 긴급 요청하였다.
"불국사 대웅전 오른쪽에 있는 국보 제21호 불국사 3층석탑인 석가탑이 지난 8월 29일에 있었던 지진으로 심한 균열이 생기고 약 7도 가량 서남쪽으로 기울어져 도괴직전에 있음이 6일 뒤늦게 발견되어...."
위의 내용을 보아 도굴 즉시 석가탑이 훼손된 사실이 알려졌고, 이는 지진에 의한 것이라는 미온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석탑의 훼손 사실은 알았지만, 아무도 도굴범이 석탑에 손을 댄 사실은 상상도 못하고 있다. 단순히 지진으로 인한 피해라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같은 추론은 민족의 정서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누가 민족의 보배인 석가탑을 도굴할 것이라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이내 상황은 반전된다.
다음의 기사 내용을 보자. 황교수는 이번 일이 처음부터 탑 도둑의 짓으로 여겨졌다고 말하면서 관계자들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탑도둑단인 ‘경상도파’의 짓이 아닌가 의심이 간다고 말했다. 그리고 피해상황에 비추어 사리장치가 실제로 도둑맞을 가능성은 작은 것 같다고 비쳤다.
황교수가 말하는 조사경위와 그 결과는 대략 다음과 같다. 석가탑 훼손 소식이 처음 들린 것은 7일 경주박물관의 전화를 받았을 때였다. 9일 경주로 내려온 황교수는 온전한 탑을 본지 한달 만에 상처입은 탑을 다시 보았다. 처음의 조사대상은 10여개의 파편이었다. 1층 탑신에서 3개, 2층 탑신에서 3개, 3층 탑신에서 4개가 떨어졌는데 떨어진 파편 중 큰 것은 60㎝ 길이에 두께가 3㎝였다. 이 파편에서는 풍화(風化)로 인한 자해(自解)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석재인 화강암은 풍화가 있으면 그 속의 철분 (雲母)에 녹이나 누렇게 변색하는데 파편은 새하얗다. 또 지진이 아니라는 증거는 불국사의 기왓장이 성하고 기와공사중인 자하문에서는 흙 한 점 떨어지지 않았다는 상식적인 것 말고도 각층 탑신이 다 움직였는데 2층의 기단부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잡았다.
탑을 실측하는 데만 이틀이 걸렸다. 그 결과 1층 옥개석이 남쪽으로 2.5㎝, 2층 탑신이 남쪽으로 4㎝, 3층의 옥개석은 북쪽으로 4㎝ 어긋난 사실을 확인했다. 높이 7.8㎝, 3cm까지 7m를 오르내리기에는 사다리가 필요했다. 바로 탑 앞쪽의 자하문 공사장 사다리 3개를 손쉽게 쓸 수가 있었다. 공사장에는 소형 재키도 있었다. 추리는 너무나 당연했다. 8월 29일의 미진(微震), 1개월이나 걸린 경주지방 초유의 개수 공사, 이 우연을 경상도 일대 산간의 탑 1천 3백여개를 다 뒤졌다는 실력파요 요즘에는 재키까지 들고 다닌다는 ‘경상도파’가 캐치했다면...... 탑을 들면 약간 뒤로 물러난다. 이것은 숱한 탑을 보수한 황교수가 체험으로 터득한 바이다. 그렇다면 각층이 어긋난 반대쪽에 재키를 대고 든 것이다. 그 쪽에는 재키를 대었던 것같은 흠집이 나 있다. 그리고 가장 무거운 1층 옥개석의 어긋남이 적은 것으로 보아 재키는 크지 않았으며 솜씨가 익숙했음에 틀림이 없다. 아마 선생님의 석탑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통찰력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석가탑과 그 안에 봉안되어 있던 각종 사리장치는 영영 우리의 곁을 떠났을 지도 모른다. 아울러 사리장치는 안전할 것이라는 선생님의 예측은 정확히 맞았다.
1966년 9월 30일에 개최된 피해문화재 수습대책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10월 13일에 석가탑에 대한 해체작업이 착수되었고, 이 날 도굴범이 노리던 사리장치가 2층탑신석에 마련된 사리공에서 수습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후 황수영선생님의 예측대로 석가탑을 도굴했던 일당이 검거되어 이 사건이 전모가 공표되었다. 당시 신문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일밤 서울 시경은 불국사 석가탑을 비롯 고적의 탑과 분묘를 도굴해오던 전문도굴단 주범 김준철(45세, 경주시 배반동), 윤사만(40세, 경주시 배반동), 유태웅(27세, 월성군 내남면 노곡리), 주종수(34세, 대구시 대신동) 등 일당 7명을 절도혐의로 구속하고 도굴공범 李모(30세), 申모(34세) 등 6명을 지명수배했다.
주범인 김 등은 지난 3일밤 ‘경북 여2009 ’ 택시를 대절, 불국사에 도착하여 미리 준비했던 재키로 석가탑 2번 탑신을 끌어올렸으나 보물을 발견 못해 실패 다시 5일밤에 3번 탑신을 끌어올렸으나 역시 보물이 없어
이들은 또한 3월초 경주시 남산의 절터를 도굴, 5치(寸) 짜리 순금불상등 2점을 골동품상에게 매각한 것을 비롯하여 전후 6차례에 걸쳐 월광사, 통도사 등 유명한 사찰의 고적만을 도굴, 사리, 구슬, 금?은부처 등 시가 8백여만원 어치의 유물을 도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도굴범들은 3일밤에 먼저 초층탑신을 들어올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석탑에 사리를 봉안할 때 일층탑신에 가장 집중된다는 사실에 입각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이들의 예상은 빗나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이어 5일 밤에 3층탑신을 들었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위의 기사를 보면 이들은 2층탑신에도 손을 댄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사리장치는 도굴되지 않았고, 황수영, 최순우, 진홍섭, 정영호선생에 의해 고스란히 수습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후의 상황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여기까지가 석가탑 도굴사건의 전말이다
도굴로 파손된 석가탑 보수공사 중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등 발견
도굴로 기울어진 석가탑의 해체공사(1966년)
그 후 석가탑 복원을 위한 해체 작업을 진행하던 중 1966년 10월 13일 오후 불의의 사고가 발생했다. 2개의 받침 전주 중 하나가 부러져서 도르래로 2m 높이로 들어올린 2층 옥개석이 먼저 땅에 내려 놓은 3층 탑신 위에 떨어져버린 것이다. 이 사고로 3층 탑신은 세 동강이 났고, 기단부 갑석 일부와 2층 옥개석의 받침 일부가 손바닥 크기로 조각났다. 이 사고는 복원작업을 맡은 업자가 탑신의 무게를 미리 짐작하지 못한 채 가벼운 상층 탑신을 감당한 받침 전주가 아래 탑신의 무게도 감당할 것이라고 오산, 받침 전주를 바꾸지 않고 작업한 것이 원인이었다.
사리함 출토 수습
이 사고는 의외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석가탑 2층 탑신석 윗면 가운데에 마련된 사리공(가로 세로 각각 41cm, 깊이 19cm) 중앙에서 금동제 사리 외함이 발견됐던 것이다. 사리 외함 주변에는 동경(銅鏡), 채자(釵子), 동환(銅環), 향(香), 먹, 각종 구슬, 비천상(飛天像), 목제 소탑(小塔) 등 여러 가지 공양품이 놓여 있었다.
금동제 사리 외함 위에는 비단으로 싸고 실로 감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안치돼 있었으며, 바닥에서는 역시 비단에 싼 묵서지편(보협인다라니경 및 중수문서)이 응고된 상태로 발견됐다.
출토 유물
사리함 안에는 은제 사리합을 비롯해 금동방형사리합, 은제 사리소호 등 여러 세트의 사리기가 들어 있었다. 그중 은제 사리합은 난형(卵形)으로, 외합과 내합으로 구성돼 있었으며 사리함의 가운데 연화좌 위에 올려져 있었다. 외합과 내합 모두 타출(打出)과 어자문(魚字文) 기법으로 장식돼 있었으며, 내합 안에는 초록색의 유리제 사리병이 들어 있었다. 또한 사리 외함 내 동북쪽에는 붉은 칠을 한 목제 사리병이 들어 있는 금동방형사리합이, 서북쪽에는 은제 사리합이 들어 있는 은제 사리소호가 안치돼 있었으며, 향목 등 공양품도 함께 들어 있었다.
도굴단에 의해 파손됐던 불국사 석가탑은 복원공사 4개월만인 1966년 12월 24일 마침내 옛 모습을 찾았다. 복원공사는 문화재관리국의 감독 아래 진행됐는데, 공사 중 불의의 사고로 파손됐던 옥개석과 탑신은 접착제로 부착해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 이렇게 탑신부가 해체 보수되었던 석가탑이 56년만인 2012년부터 기단부의 균열로 인하여 완전 해체하여 현재 복원공사 중이다
해체된 탑신에서 나온 사리함
해체된 석가탑의 찰주와 보주
해체된 석가탑의 노반
해체된 석가탑의 3층 옥개석 (옥개석의 윗면 가운데 찰주를 꽂는 구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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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토함산솔이파리 원문보기 글쓴이: 솔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