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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 의식≫ 신인상(1984), 한국문인협회 대전시지회장(1996), 대전문인총연합회장(2005), 대전시문화상(1995), 호서문학상(1998), 한국예총문화대상(2002), 한성기문학상(2003), 시집 그림자를 위한 향연, 풀빛바람 곁에서, 우리는 절망을 탄핵할 수 없다, 사랑은 별빛이다, 창밖을 보다가 등 |
빈 잔
변 재 열
빈 잔은
외롭고 쓸쓸합니다.
한 때
어울림에 힘 받아
여유도 즐겼습니다.
시간으로 도금된 잔은
추락을 거듭합니다.
부모님이 떠나실 때도
잘 몰랐습니다.
지금 형님 빈자리는
일상 무게조차
가늠하기 싫습니다.
얼떨결에
떠안은 짐이지만
생전에 처음 일인 양
낯설고 무겁기만 합니다.
난 이제
벼랑 끝에 매달린 한 그루 나무
아스라이 남은 빈잔입니다.
삶
바다를 고향 삼아
낯익혀 살다가
어느 날 만난 해일
그 파도 겁나
울렁병 시달린 멍게
꽃을 잃다.
나이로 도배한 세월
무일푼 땡전에
입맛은 불변 고급
상마다 이맛살
보는 이 스트레스
어지러운 우리 일상.
* 충남 공주 출생, 호-海峰/巢鶴, ≪현대문학≫(1981)에 시로 등단, 시집으로 겨울바다, 보이지 않는 江, 멀리서 가까이서, 바람꽃 향기, 빈 잔의 메아리, 만리포 바람소리, 진홍빛 꽃잎, 「가슴 비우기 혹은 채우기」, 충남도문화상, 대전문학상, 한성기문학상 황조근정훈장 수상, 현재 대전시인협회장, 대전지방검찰청형사조정위원, 국제PEN클럽한국본부남북교류위원. |
멍게꽃
이 형 자
남해 바닷가 빨강 너 또한 그러하였다
봄 물결 푸른 파도 출렁이면
활활 불을 뿜어대는 봄 색시
염기서열 몇 번째인가
다시마 그물망에 다닥다닥 심지 세워
푸-푸우 불꽃으로 활활 타고 있다
이 빼빼 마른 봄판
너를 건져 초밥 고추장에 비비면
새큼달큼 입속까지 환하게 술렁거린다
남도 바닷가 오돌토돌 상큼한 멍게꽃
별꽃
꽃이 되고픈 별이 내려와
꽃이 되어 별꽃이라 했다고 한다하얀 꽃잎, 크기나 한가
풋보리 싹 입덧하는 소리 들었는지
들판 검불 사이
먼 밤하늘 별들처럼 돋아 피었다
때를 알고 고개 하얗게 처 들고
풍기는 둥 마는 둥 코티분 향기
쑥 캐던 발길 무심코 밟았다
놀란 휘파람새 눈치 빠르게
휘휘휫 나뭇가지 흔들며 난다
꽃눈 어우르며 달래는 햇살
뒤적뒤적 한참이나 찬찬히 바라보다
문득, “참 잘 했어요”
별꽃도장을 받아 든
초등학교 일학년 삼반 아이들
까르륵 까륵 웃음꽃을 피운다
* 충남 강경 출생, ≪창조문학≫(1998) 등단, 시집으로 숨쉬는 닥나무, 미용실의 봄, 에덴의 물방울』, 공저 옥빛 고운 자리 등. ≪꿈과 두레박≫ 문학회장, 대전여성문학회장, top-leehj@hanmail.net |
소나기
김 명 동
하늘이 심술을 부리려나
검은 구름으로 차일을 치고
내 관절 속을 들쑤시며
저린 신호를 보낸다
리듬을 읽어버린 면역성
버려진 늙은 영혼이 울고 있다
삶속에서 저주받은 것들이
내게 아픔을 만들며
날을 세운 창칼로 온몸을 쑤석거리고 있다
누가
세상 어느 응달진 곳에서
나 때문에 기다림에 지쳐 아파하고
슬퍼하고 있는가
개울 갈대숲을 헤집으며
쏟아지는 거친 소나기가
뼛속을 저리게 하고 있다
길 위에 서면
길옆에 또 길이 있다
누구도 가지 않는
나만의 길이 휘어져있다
그 위에 잔걸음 굵은 걸음으로
내가 가고 있다
스스로 길이 되고
계절을 바꾸어가며 가는 사람이 있다
개울물은 흐르다가
소리 없이 사라져 어디쯤 멈추고
새들의 지저귐도 귓가에서 지워지면
하얀 꽃잎들 하늘가로 날아 사라진다.
사랑하는 이여
사라지지 않는 사람이 되어
그 길을 함께 걸어갑시다.
여름 숲
푸른 발자국이 칠월의 숲으로 숨어든다
새벽을 알리며 울던
새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 마중합니다.
남정네 사정한 비릿한 밤꽃향기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콧속으로 먼저 날아옵니다.
기다림으로 채워진 모습은 보이지 않고
꽃들의 향기보다 앞질러
서성이는 그대 내음
눈부신 여름의 향연처럼
향기로 태어나 다가온다면
여름의 숲은 더욱 활기찰 텐데
* 경북 상주 출생, 시집 어느 바보의 작은 가슴(1990), 고향은 저만치(1992), 꿈속에 별 달(1993), 그대를 사랑하는 이유(2002), 그리움의 마당에는 당신이 주인입니다(2006), 사랑춤(2015), 동구문화상, 예총회장상, 인터넷문학상 등 수상, 대전동구문학회장, 현 글빛문학회장, kimydo812@hanmail.net |
뚱딴지처럼
이 영 순
장롱 깊숙한 곳에서
불쑥 만져진 낡은 사진기
고구마처럼 딸려 나오는 기억들
반세기 전
너를 둘러메고
무작정 타고 본 부산행 비들기호
자갈치 시장 미끌미끌한 비린내 밟으며
풋내기 샛바람에 몰려다닐 때
찰칵 찰칵 나를 찍어 주던 카메라 셔터
입을 꽉 다문 그 까닭을 알 길 없어
고개 갸웃거리며 만지작거리던 중, 딸칵
돌아와서야 알았다
그 가슴으로 딱 두 번 나를 담아내고
까맣게 타버린 그 속을
서툴게 서둘렀던 그 시절
빛바랜 필름 돌려보다가 툭 튀어나와
고백하고 말았다
아날로그 사랑을
늘 낯설어 잔뜩 주눅 드는
디지털혁명 앞에서
* 대전 출생, 월간 《문학세계》신인문학상(2001), 《꿈과 두레박》, 《백지》 동인, 《꿈과 두레박》 회장, ly1103@hanmail.net |
그대에게 가는 길
박 헌 영
천천히 가라.
사랑이 보인다.
오래오래 가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보인다.
그대에게 가며
세상의 모든 일생을 만난다.
세상의 모든 일생이
그대에게 간다.
돈 베개
사내자식, 호주머니에 돈 없으면 기 떨어진다고
베개 속에 30만원 감춰두고
큰아들 오면 언제든 꺼내 쓰라고,
대전 오면, 옛날 친구들 만나면
펑펑 술 사라고.
부실한 내 허벅지일지언정
베개로 내드리고 싶지만
20년도 더 전 화장한
당신 뼛가루에 잠이 드셨다.
저기 야트막한 앞산 능선에
무게가 있는 듯 없는 듯
하늘이 누워 있다.
아버지
아버지
그 꽃
맨날 걷던 길에서 넘어져
보았다
냉이꽃
* 전북 부안 출생, 시집 나 사는 집, 하늘빛 숨, 아이와 함께 가며, 그대 없이 그대를 사랑합니다, 저 나무 내게 동행하자 한다, 철이네 엄마아빠, 거품의 힘 ,붉은 꽃잎에 쓰다, 한 사람에게만 흐르기에도 강물은 부족하다, 시 선집 「즐거워라, 죽으러 가는 저 물소리」등, parnee@hanmail.net |
낡은 벽시계
권 예 자
가진 것은
열두 개의 숫자와 바늘 두 개
째깍째깍 소리죽여 박자 맞춘다
뚜벅뚜벅 걷는 긴 다리는
촘촘히 걷는 짧은 다리를 돌보지 못한다
어쩌다 한자리에 마주쳐도
짧은 해후는 긴 이별로 이어졌다
쉬지 않고 걸어도 매양 제집 안마당
문밖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가
오지랖은 넓어 명령은 잘도 했다
아침이야 일어나
약속시간 늦어 서둘러
늦었다 어서 자
재촉하는 일로 평생을 살았다
젊어서는 밥만 먹으면 일도 잘하더니
나이 들수록 태만하고
까딱하면 드러누워 파업이 일상이다
누가 말을 걸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지만
경로효친 네 글자로 대접 받기만 바라는
고집 센 저 어르신
분재 연구논문
-인분 교수1)
스승이 말했다
내 손길이 닿으면 너는
가장 아름다운 몸을 갖게 될 거다
조율은 다정하게 시작됐다
스승은 분재에 관한 연구논문을 쓰는 중
체력을 무시한 노동에 나무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40회씩 쏟아진 야구방망이 찜질은
몸피에 어떤 형태의 상처를 남기는가
꾸역꾸역 목구멍을 넘어간 인분 포도주는
인체에서 어떻게 분해되는가
특히 스승의 것이 하사되는 경우에
용상2)으로 들어 올린 A4용지의 무게와
자존심의 함수관계는
억대를 넘는 빚의 족쇄로 굴절시킨 발목뼈로
어디까지 달아날 수 있는가
얼굴에 비닐을 씌우고 스프레이를 뿌리면
어떤 호흡법에서 가장 고통스러운가
분재로 다듬어진 몇 해
뒤틀린 척추 너덜너덜한 살갗
휘고 꺾이고 뒤틀린 형상으로
그는 가장 경이로운 인간분재가 되었네
세상 어떤 분재전시회서도 견줄 나무가 없는
1) 2012.2.~2015.5.까지 제자를 감금하고 노예로 부린 교수, 자신의 인분까지 먹였다 함. 2015.12. 징역 12년 선고.
2) 역도에서 어깨까지 들어 올려 멈췄다가 위로 올리는 기술
* 대전 출생, 수필《창작수필》, 시《문학저널》로 등단, 시집 숲이 나를 보고, 비밀일기장, 수필집 내안의 피에타, 봄비, 꽃잠 깨다 등. 예술문화상, 창작수필 동인문학상, 옥로문학상 수상, bombi42@hanmail.net |
어느 상흔
김 창 유
‘손두부 뜰 안채’
꿈꾸고 잠 설치며
설레이던 개업
하지만 두 해도 못 버티고
접고 만 피멍 가슴
차라리 멀리 떠나자
훌쩍 떠난 이국땅엔
행여나 무슨 일 생길까봐
뉴스에 가슴 조이며 살아온 세월
어느 날 문득 들려본 지난날의 그 집
간판도 안내판도 예전 그대론데
반겨 맞던 어린 가족
잘 살아보겠다던 밝은 웃음은 아련하고
황량한 솔바람만 낯설게 인사한다.
모진 세월 모퉁이를 되돌아 왔어도
아직도 그대로 멈춘 아픈 흔적들
여전히 저렇게 기다리니
희망의 돛단배
만선의 기쁨으로 돌아오겠지.
시상(詩想)
무엇에 홀렸나
잠자다 말고 일어나
머리맡 메모지를 더듬는다.
곤히 잠든 아내가 깰까 봐
어둠 속에 부스럭대며
한석봉 글씨 쓰듯
놓칠까봐 서둘러 갈겨댄다.
지금 써 놓지 않으면
햇빛에 안개 걷히듯
되잡을 수 없는 시상들
뭐 그리
나만 유난을 떠는 건지……
시 간
영원한 시간 속에 한 순간 인생살이
그 시간 허송하다 아쉬움만 심지 말고
더불어 서로 세우고 나누면서 사십시다.
한 시도 쉬지 않고 달음질치는 시간
누구는 많이 주고 누구는 적게 주나
아끼고 감사하며 후회 없이 사십시다.
* 충남 서천 출생, 한국 공무원문학협회 회원, 서양화가, kcy42@hanmir.com |
가시꽃
송 은 애
잘려나간 가시나무 사이로
산까치 몰려와 줄서고 있다
아이들 재잘거림에도
질서가 깨지고
자동차 소음에는
분열이 일어난다.
하늘빛 가끔 심통 나
구름으로 모이고
그림자 드리운 햇살 찾아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는
세상사가 여기 전깃줄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앵두나무꽃
긴 동면을 깨고 일어난
그대는 왼쪽 가슴을 비워두세요
꽃샘바람을 맞이하는 나는
온 가슴 모두를 비울테니
넓은 정원 뒤로하고 이사 온
도시근교 비좁은 수돗가에
자리 잡은 앵두나무
그 꽃그늘 기다리다
마을처녀 도심으로 도심으로
마음은 날아가는데
그대는 왼쪽 가슴을 비워두세요.
산자고
날카로운 꽃잎은 제 마음이 아닙니다.
꽃 수술에 달린 꽃가루도 바람 탓하지 않고
깊은 숲속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피어나
결코
긴 여운으로 그대 마음에 자리 잡고 싶어
제 몸은 뾰족 지붕을 닮아갔나 봅니다.
뱀꼬리풀꽃
발길 잡는 고혹한 자태는
벌 나비 부르다
외면한 모습으로 하늘로 치솟고 있다.
가슴이 서늘해
그림자 잡고 있는
그대는 긴 혜성의 무리를 닮았다.
은하수 그 무리들을 빼닮았다.
용담꽃
하늘색 닮아 하늘 꽃
신의 계시를 받아 바다를 품더니
산길 칼바람도 품었다
당신이 슬플 때 사랑을 한다는
슬픈 시름의 형체는
꽃잎갈래 조각사이
청롱한 가을 하늘빛을
무수히도 담았다.
천상초
구름 위에 하늘이 있나
하늘이 구름을 먹었나
알 수 없는 기류가 저기압으로 흐를 때
꽃은 하나의 줄기로 피어나
지면을 감싸고 그 알 수 없는 미로에서
서성이다 구름을 타고
하늘 위로 달아났을까?
의문의 시작이다
* 茶軒, 시집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이름 없는 들꽃 이야기, 다래순 먹는 여자, 관저동 연가, 술 예찬 꽃 예찬하면서 茶 한 잔, 인연, sea5610@hanmail.net |
사랑다툼
조 영 숙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과 행복하려 만났는데
삐쳐 돌아서면 상처가
더 깊어
가까운 사람에게
받아들여지지 못 한다고 느낄 때
좌절을 경험하지
늪에 빠진 듯
어느새 흥미를 잃네
유행 지난 옷처럼
이전에는 모든 것
경이로웠는데
봄의 새싹처럼
오늘 처음 만난 사람처럼
오래 된 사이라도
아가의 고사리 손 보듯
낯설게, 새롭게 다가서 보리라
설레는 마음으로 손 잡아보리라
새벽길을 나서면
새벽길을 나서면
신문 배달원을
엘리베이터에서
새벽길을 나서면
환경 미화원을
대로변에서
새벽길을 나서면
택배, 고속버스
어둠 속에서 빛을 만난다
새벽길을 나서면
부지런한 사람들 사이에서
마음 밝아진다.
꽃밭
어른들은
꽃밭에서 꽃을 찾지만
아이들은
하늘에서 꽃을 발견한다.
아직 추운 겨울인데
계절을 모르는 듯
따뜻한 시선이 비추자
꽃이 피어 오른다.
선생님의 요청 따라
자신을 꽃으로 소개하자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꽃들이 피어나고
닫힌 가슴 열리고
꽃내음이 춤을 춘다
금새 꽃밭이 되었다
어른들은
꽃밭에서 꽃을 보지만
아이들은
마음에서 꽃을 피운다.
* 강원도 강릉 출생,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대학원 수료, <글샘회> 동인, 양평문협회원, ysc1951@naver.com |
그리워 울다가
백 경 화
얼굴도 모르고
이름 한번 불러보지 못했던 아버지
어느 해, 추운 겨울날
눈보라 속에 갑자기 나타나셨다
며칠간 안아주고 업어주고
사랑을 듬뿍 쏟아 주시더니
언제 또 오신다는 말도 없이
잠잘 때 훌쩍 떠나셨다
처음 느꼈던 아버지만의 체취
포근하고 아늑했던 아버지의 등
꿈속에 나타나실까
밤이 되면 또 오실까
바람소리에 놀라고
삐걱거리는 대문 소리에
가슴이 덜컹했던 어린 소녀
지친 가슴 이리저리 뒤척이면
엄니는 팔베개 해주며 토닥토닥
그리워
그리워
울다가
얼굴조차 잊어버렸던 아버지
옹이
나무도 뜨거운 가슴이 있고
아픔을 아는가
소나무에 꽉 박힌 커다란 옹이
어미를 튼실하게 키우기 위해
새끼를 잘라 생긴 상처다
수십 년 수백 년 지났건만
그 아픔 아물지 못해
아직도 줄줄이 흘리는 하얀 눈물
놀란 가슴 병이 되어 생긴 응어리던가
평생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가슴앓이다
사람 아닌 나무도 이렇거늘
제 몸 하나 편히 살겠다고
자식을 내치는 무서운 인간들
그 가슴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옹이 하나쯤 박혀있지 않았을까
황홀한 저녁노을
시커멓던 하늘이
벌겋게 물들더니
금세 활활 타고 있다
“갑자기
누가 지른 불길인가”
불타던 하늘
감촉같이 사라지고
불길 닮은 구름뿐
“잠시 헛것을 보았는가”
수상하다 아무래도
내일은
단비라도 오시려나
* 충남 부여 출생, ≪문학세계≫(2001) 시 등단, 수필집 산의 향기를 찾아서, 시집 술래잡기, 대전문인협회 회원, 대전국제펜문학 회원, ≪꿈과 두레박≫ 회원, (사)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 bak0799@hanmail.net |
별이 타는 밤
김 근 수
오늘밤
산란히 흐르는 저 달빛
외로운 시인의
서정이 비어 있는 걸 알까
적막에도
내 그리움은
스스로 빛깔이 되고
그윽한 향기로 일어선다
오르가즘을 낳으려
한 바탕 질펀한
어둠의 과일은 침묵을 먹고 있지
풀꽃향기 사이로
보이는 별들은
어쩌면
저렇게도 가까이 다가와
또, 불타고 있을까
비오는 날에
숙경아! 너는 아니?
비 내리는 날에
쓰는 문자는
반은 비가 쓴다는 거
메마른 베고니아가
그리움의 신음으로
야릇한 푸른빛에 젖어
비를 느끼는 나도 심쿵해
나의 시선으로
어루만지는 너의 얼굴은
빗물에 새겨지며
너와 나의 영혼이
결합하는 한 줄기 꿈이야
못 잊을 그리움들이
이 빗물에
하염없이 부풀어
너의 가슴에 젖어들어
오늘 밤 나를 찾지 않을까
쓸쓸한 연가
날마다
하얀 햇살로 내려와
내 옷깃에 물들어
살갗 깊숙이 머무는
달맞이꽃 당신
그 겨울
가슴에 착착 접었던
아스라한 욕망이
여린 나무의 떨림처럼
아직 당신을
깊숙이 껴안아 본다
꽃향기 술렁이는
연한 초록빛 강가에서
너의 이름 부르며
나는 더 울어야 하는가
* 계간 문학세상 신인상, 금강축제 금강문학상, 한국농촌문학상 대상, <한국문학신문> 대전광역시 본부장, 문화체육관광부 ‘책 읽기 캠페인’ 초청 작가, 시집 유천동 블루스, 오월의 연가 등, powerg@choi.com. |
목련꽃
김 정 례
여명의 찬 공기 밀려나
정오의 햇살이 따사롭네
나도 한결 가벼워진 옷차림으로 창가에 서 있네
밖의 정경에 눈길이 머무네
오롯이 서있는 목련 두 그루
다정한 부부의 모습 같아 눈길을 끄네
바지저고리 치마 깃을 단아하게 말아 올린 듯
하얀 꽃 보랏빛 꽃망울이 곱게 열렸네
여전히 날씨는 오락가락 하는데
서둘러 재촉하며 외출하는 부부의 마음처럼
목련꽃도 어지간히 봄을 기다리나 보네
어느덧 나도 그의 곁에 가 있네
* 한밭대 문학창작과정 수강 |
애비와 새끼
김 택 중
대를 이을 생각이 없습니다
당신의 할 일은 다 했고
눈물도 그만하면 됐습니다
폭력이란 폭력 다 동원해도
제압할 수 없는 페니스의 힘
복종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
이제 여기서 끊고
시간의 무게에 젖어 갈 뿐입니다
전에 핏줄끼리 먹이고 키워
이십대에 이르러
페니스끼리 한판 붙어보자고
심각하게 청년이 된 새끼에게
엽총을 대가리에 겨누고
싸움을 시작하는
그렇게 산탄이 그 혈통을
이어가게 할 수 없습니다.
종자가 봉인된 채
그런대로 숲을 뛰어 다니던
사냥꾼의 기질로 돌아가
미련한 곰처럼 몸에 마늘을 심고
꽃을 묻어 통마늘에 분열하는
육쪽마늘을 갖고
동굴 속으로 다시 기어들어
내가 알고 기억하는
삼대의 종자를 개량 해야겠습니다
다시 거듭나야 하기에
족보를 끊고 암흑으로 캄캄합니다.
관동리 참외
어쩌려고 땅꼬마로 기면서
푸른 들이 건네주는
봄 견디며 익을 대로 익은
시, 이를 어째
오랜 적산가옥이나
소금창고거나
다들 거기서서 좀먹고 있는데
알 듯 모를 듯 출렁거리는
본모양이 그러하니
비틀거리며 돌아올밖에
노랗게 꽃피어 노랗게 익은
사타구니 살냄새
그 부끄러운 언저리에 푹 파묻혀
칭얼대며 잘도 걸었다
네 향기는 위험한 현기증으로
노랗게 일었다 사라졌다.
가임기(可姙期)
벽에 기대어
넘치는 끼로 부르고 있어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가가
목 놓아주는 저녁이었습니다
나는 듯이 달려 나가
있어야 할 곳마다
오줌을 지리고 발로 차며
침범 할 수 없는
종족의 법에 따라
수렵구역을 표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진실한 짐승입니다
그런데 어제는
마당을 비우고
어디를 달아나고 있나
분명 새벽을 비우고
샛서방이라도 만나
새파랗게 뜨거워져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짐승이 되려고 합니다
새울 만들어 떠나려는지
불러도 선택과 질문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 충남 논산 출생. 계간 다층(2007) 등단. 저서 현대소설의 문학지형과 공간성 연구, 현대시의 논리와 그 해석, 문학의 창조적 대화 등 현재, 우송대학교 한국언어문화전공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