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42기 분포도이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습니다
㉠ 제릉(조선 제1대 왕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 한씨의 능 : 경기도 개성군 판도면 상도리)
㉡ 후릉(조선 제2대 왕 정종의 왕비 정안왕후 김씨의 능 : 경기도 개성시 판문구 영정리)
남한에 있는 40기 능이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였습니다
명성황후 생가를 찾아서~ 2부 입니다
여주시 능현동에 소재한 명성황후 생가의 위성 지도 입니다
명성황후 생가를 찾아서~
명성황후(민자영)는 아버지 민치록과 어머니 한창부부인 한산 이씨 사이에서
1851년 9월 25일 태어나서 8살 때까지 살았던 여주시 능현동 250-3번지 생가 안채 건물 입니다
명성황후가 태어난 생가는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장인이자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친정 아버지 민유중의 묘소를 지키기
위한 묘막으로 1687년 처음 지어진 집으로, 그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이 지금까지 남아 보존되고 있다가
1996년에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복원되면서 안채도 수리되었다 합니다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은 영천군수 벼슬을 끝으로 서울 안국동 감고당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8살에 아버지를 여읜 이후 명성황후는
어머니와 함께 여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안국동 감고당에서 기거하고 있었지요
그당시 감고당은 명성황후의 6대조 민유중의 집으로 당시 민치록이 소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안국동 감고당은 조선 제19대 왕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친정을 위하여 지어준 집이라 합니다.
인현왕후의 부친인 민유중(閔維重)이 살았으며, 후궁 희빈 장의 계락의 의해 인현왕후가 폐위된 후 이곳에서 5년간
거처하였으며, 이후에 대대로 민씨가 살았으며,
민자영(명성황후)은 1866년 16세가 되던 해 이곳 감고당에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의 부인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고종 비(妃)에 간택된답니다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 閔氏)는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어머니이며, 민치구의 딸로, 흥선대원군과 혼인하였으며
제19대 왕 숙종의 비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의 6대손녀이기도 하며
흥선대원군에게 명성황후를 천거하여 며느리로 간택하는데 영향을 준 명성황후와는 12촌간 입니다
항공사진으로 보는
감고당, 경기고등학교, 안동별궁 그리고 종친부 옛 건물
㉠경기고등학교(중앙 왼쪽으로 넓직하게 운동장이 크게 보이는 곳, 지금의 정독도서관)
㉡덕성여자고등학교(아파트처럼 보이는 건물) 운동장 북쪽에 기와지붕이 감고당
㉢옛 종친부(한옥 지붕)
서울 종로구 운니동 114-10번지에 소재한 운현궁은 흥선대원군 사재 입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1866년 운현궁 노락당에서 가례를 올리게 되지요
1866년(고종 3) 봄 고종과 왕비로 간택된 명성왕후가
운현궁 노락당 마당에서 가례를 올립니다
명성황후 생가 안내문
밖에서 바라본 명성황후 생가 행랑채와 대문 입니다
안쪽에서 바라본 명성황후 생가 행랑채
명성황후 생가 사랑채
명성황후 생가 사랑채(왼쪽)와 행랑채(오른쪽)
명성황후 생가 안채
안채 입니다
안채 부엌엔 무쇠 가마솥
부엌 안에는
나무 절구통, 맷돌, 대나무 광주리, 체, 디딜방아, 채반
㉠ 체 : 가루를 곱게 치거나 액체를 거르는 데 쓰는 용구 ㉡ 얼기미 : 밑바닥의 구멍이 굵고 큰 체
㉢ 똬리 : 머리에 짐을 이고 나를 때 머리와 짐 사이에 얹는, 짚이나 헝겊으로 둥글게 틀어서 만든 고리 모양의 물건
명성황후 생가의 별당
별채
明成皇后 誕降舊里
(명성황후 탄강구리)
탄강(誕降 : 임금이나 성인(聖人)이 태어남), 구리(舊 : 옛 구, 里 : 마을 리, 즉 옛 마을이란 뜻으로 고향)란
명성황후가 태어난 옛 고향 마을이란 뜻이지요
명성황후 탄강구리비(明成皇后 誕降舊里碑)는 명성황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고향집에 세운 비석이라 합니다
탄강구리비가 세원진 이 자리에 명성황후가 어린 시절에 공부하던 별당이 있었으나 1895년 동학농민혁명 때 소실되었다고 하며
이 비석은 1904년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비석 뒷면에는
광무팔년갑진오월일배수음체경서(光武八年甲辰五月日拜手飮涕敬書)
라고 새겨져 있는데, 광무팔년(1904년) 오월 어느날 손을 맞잡고 공손히 절하며 눈물을 머금고 썼다. 라는 뜻 입니다
명성황후의 아들이자 조선 제27대 임금인 순종황제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뜻 풀이
㉠ 배수(拜절 배, 手손 수) : 두 손을 맞잡고 공손히 절함.
㉡ 음체(飮마실 음, 涕눈물 체) : 눈물을 머금다
㉢ 경서(敬공경할 경, 書글 서) : 공경하면서 글을 쓴다
민유중의 신도비
민유중 선생 묘 가는길
명성황후 탄강구리비(기와 지붕)와 명성황후 생가 별당(초가지붕)
명성황후 생가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아버지이며,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인
민유중 선생의 묘 입니다
한 땐 뮤지컬로 명성황후가 공연된바 있고, 희빈 장씨는 TV 드라마로 방송되였던
조선의 여인들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와, 나인으로 입궁하여 왕비가 된 장희빈과 얽혀 벌어지는 기막힌 사연들
그 내용을 여기 옮겨 봅니다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서 만백성의 추앙을 받아 왔던 인현왕후는 민유중(閔維重)의 딸로서 1681년 숙종의 계비(繼妃)가
되었으나, 왕자를 낳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잃고 있는 와중에
장희빈에게서 왕자 이윤(李昀: 제20대 경종)이 출생하자, 숙종의 총애는 장희빈에게 더욱 쏠리게 되었다 합니다
숙종은 세자로 책봉되고 김만기(金萬基)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숙종이 왕으로 등극하자 김씨는 인경왕후(仁敬王后)가
되었던 김씨는 천연두로 20세에 사망하자
인현왕후 민씨가 숙종의 계비로 간택되었던 것이며 그녀의 나이 15세였다.
인현왕후 민씨의 집안은 서인으로 당시 조정의 실권은 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숙종은 궁녀 장옥정(張氏;희빈 장씨)을
좋아하여 인현왕후 민씨를 멀리하였다. 당시 장옥정은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에 의해 궁에서 쫓겨나
궐밖에서 살고 있었지만 숙종은 항상 장옥정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장옥정은 서인(西人)과 정치적으로 대립세력이었던 남인(南人)에 속했기 때문에 견제를 받아 후궁으로 머물수가 없었는데
1683년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제26대 왕 고종의 비 명성황후(明成皇后)와 민씨와 혼돈하지 마시기를)가 세상을 뜨자
숙종은 1686년 3년 상을 마치고 장옥정을 다시 궁으로 불러 후궁으로 삼았다.
당시 정치적으로는 서인의 영수이자 숙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던 김석주(金錫胄)가 사망하고 민씨의 아버지 민유중도 세상을
뜨자 8년간 집권했던 서인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숙종 또한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진 서인에 염증을 느끼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인을 등용하였다.
1688년 장씨가 왕자 윤(昀;뒷날의 경종)을 낳자 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왕자 윤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던 서인들은 숙청되기
시작했고 이 문제로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西人)이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나고
인현왕후도 폐위(廢位)되어 궁중에서 쫓겨나 서인(庶人)이 되어 안국동 본댁(本宅)인 感古堂에서 지내게 되었다.
1693년 무수리였던 최씨가 숙종의 아이를 잉태하자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도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국정을 운영하는 남인에 대한 실망감도 커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1694년 남인이 주도하는
역모사건이 고변되었고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 서인 소론 세력이 다시 정치적 실세로 등용되었으며 그해 4월
마침내 폐서인되었던 민씨도 왕후로 복위하였다. 1701년 사망하였는데 소생이 없었으며, 능은 경기도 고양(高陽)의 명릉(明陵)이다.
인현왕후를 주인공으로 하여 궁녀가 쓴 소설 <<인현왕후(仁顯王后傳)》이 전하는데, 인현왕후를 유교적 덕목과 인품을 갖춘
여인으로 그려내고 있다. 반면 숙종실록에는 희빈장씨가 왕자 윤을 출산하자 이로 인한 시기와 질투로
숙종과 관계가 멀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현왕후는 이렇게 희빈 장씨와 화기(和氣)를 도모하면서 덕을 베풀고 살았으나
1701년 원인모를 질병으로 3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펌)
망주석 기둥 가운데에는 세호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다람쥐로 착각할 정도로 다람귀와 너무나 닮았습니다
세호란 무엇인가
작은 호랑이랍니다
<세호>가 묘 앞 양쪽에 세워져 있어 땅의 기운이 너무 많이 올라 오면, <세호>가 아래로 기운을 눌러주고
땅의 기운이 내려가면<세호>가 기운을 끌어올려 준답니다
능 앞 좌우의 망주석을 잘 보면 기운을 아래로 내려주는 세호,
기운을 올려주는 <세호>의 방향이 위, 아래 다르게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명성황후 생가
명성황후 생가로 되돌아와 행랑채에서
사랑채 중문과 마루 넘어로 바라본 안채 입니다
사랑채 마루 넘어 안채 마루엔 명성황후 초상화 모습 입니다
여주에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처 모두 아홉 분의 왕비를 배출하였다는 안내문 입니다
명성황후 생가 앞쪽에 있는 명성황후 기념관에는 명성황후의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명성황후와 고종의 영정,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이 발생한 장소 모형,
일본의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모형품), 명성황후 어보(御寶), 고종황제의 어첩(御帖)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기념관 옆에는 2002년 개관한 161석 규모의 문예관이 있습니다. 명성황후와 관련한 행사 등을 위한 시설로 이곳에서
1시간에 걸처 <뮤지컬 명성황후>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엔 어린 나이에 임금 자리에 오르게 되면 성년(20살)이 될 때까지 수렴청정이다, 섭정이다, 세도 정치다, 하여
어린 임금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며 통치를 하게 되였지요
1800년 6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22대 왕)가 승하하자. 정조의 둘째 아들인 순조가 1800년 7월 11살 어린 나이에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왕위에 즉위하게 되지요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 英祖繼妃 慶州金氏)가 어린 임금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으로 임금을 보좌하며 나라를 다스리게 됩니다
1802년(순조 2) 10월 김조순(金祖淳)이 그의 딸을 순조의 왕비(王妃: 純元王后)로 가례를 치른 후부터약 60년에 걸친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에 의해 세도정치가 시작되지요
1834년에 순조가 승하하고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헌종의 어머니 외척인 풍양조씨(豊壤趙氏)에 의한 세도정치가
약 15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1890년 헌종에 이어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이번에는 철종의 왕비가 김문근의 딸이였기 때문에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또
15년간 계속 이어지게 되지요
안동김씨들에 의해 천년만년 이어갈 듯한 세도정치도 철종의 뒤를 이어 고종이 26대 왕으로 즉위 하면서
외척에 의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세력은 몰락하게 됩니다
안동 김씨 세도 정치를 견제하기 위해, 효명세자(추존 : 익종)의 부인이며 조선 제25대 왕 헌종의 어머니인 조대비가
흥선군과 뜻을 같이하며, 철종이 승하 하면서 1863년 흥선군의 둘째 아들 고종(이명복)이 12살로 어린 나이에
조선 제26대 왕위에 죽위하였기 때문에 조대비가 잠시 수렴청정을 하다가
흥선대원군에게 모든것을 위임하여 어린 고종이 성년이 될때까지 10년 동안 섭정으로 정권을 휘두르게 되지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소름이 끼칠정도로 염증을 느낀 흥선대원군은 1866년 봄 고종의 왕비인 며느리를 간택할려고 할 때
고종의 어머니인 여흥부대부인 민씨는 흥선대원군에게 친가의 숙항(叔行)이 되는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천거하였지요
대원군은 민치록 내외가 이미 고인이 된되다, 처남인 민승호가 민치록의 양자로 들어가 대를 잇고 있었기 때문에 외척에
대한 세도정치는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선 1866년 3월 20일 운현궁 노락당에 고종과 가례를 올립니다
10년간의 흥선대원군 섭정이 끝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흥선대원군의 예상은 빗나가 민비(閔妃)를 비롯한
민씨 척족인 외척의 세도 정치로 국가 요직을 차지한 수가 1천여 명이 넘었으며, 민비 외척이
대원군의 정적으로 발전하여 정국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럽게 하는 결과로 정치적 충돌이 있었습니다
1895년(고종32) 8월 20일(양력10월8일) 새벽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의 지휘아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미우라는 일본 공사관의 인력, 서울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 낭인패들을 섭외하고선
일본제국이 조선을 침략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로 여겨지던 명성황후 여흥 민씨를 시해하고자
왕비와 대립관계를 보이던 흥선대원군을 섭외하여 사건의 주모자로 몰아세우겠다는 계획도 세워 놓고 있었다 합니다
일본의 낭인들은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에 침입한 이들은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에 들어가 왕비를
칼로 찔른 후 능욕을 부리고는 증거말살을 위해 옥호루 옆의 숲 속으로 시체를 옮긴 후에 석유를 뿌리고 태워버렸다 합니다
경복궁 곤녕합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일본의 작전명 <여우사냥>이란 암호명으로
일본 낭인들이 칼로 명성황후를 두세 군데 찌른 후 살아 있는 상태에서 석유를 뿌리고 불태웠다고 합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의 칼 히젠도에는
(一한 일, 瞬눈 깜빡일 순, 電번개 전, 光빛 광, 刺찌를 자, 老노인 노, 狐여우 호)
일순전광자노호 :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 라고 글이 쓰여 있습니다
이 칼이 구시다 신사에 기증할 당시 봉납 기록에는
조선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더고 합니다
고종이 12살에 왕위에 오른 1863년부터 성인이되던 1871년까지
어린 임금을 보좌하며 섭정으로 쇄국정책을 펼치던
흥선대원군이 물러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는 외국 문물을 받아 들이는 문호를 개방하게 되지요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으로 일관할 때부터 동서양 제국주의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조선에 통상을 요구를 받아 왔는데
고종 친정이 이뤄지며 급격한 개국(開國)으로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게 됩니다
1876년(조곶 13) 일본은 조선 침략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강화도 조약을 체결 합니다
1881년 일본군의 도움으로 창설된 신식군대 별기군은 우대하고 구식 군대 병사들은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급료로 주는
쌀에 모래를 섞어 주는 임오군란이 1882년 일어나 명서왕후는 창경궁에서 상궁 복장으로 변장을 하고 궁을 빠저 나와
장호원과 여주를 거처 충주 피난지에서 50일을 머무르게 되지요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은 다시 복귀하여 명성황후 장례식을 치르려할 때 중전 민씨는 청나라 군대를 들여와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 텐진에 유배시키게 됩니다
1885년 청나라와 일본은 각 나라가 조선에 파병할 때는 서로 알린다는 내용의 <천진 조약>을 맺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고종은 청나라 군대를 끌어 들입니다
청나라 군대 파병 요청은 1885년 <천진 조약>에 의해 일본군 출병을 부르는 결과를 초래 합니다
1895년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제1차 청일전쟁이 벌어 집니다
청일전쟁은 일본군 승리로 끝나면서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을 하게 됩니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자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이게 됩니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에 손을 뻗친 명성황후는 일본에게 눈엣가시였습니다. 일본 제국쥐의 수뇌부는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철저하게 준비 합니다
1895년 10월 8일 경복궁 곤녕합에서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 내용을 담음 <에조 보고서>란 밀서가
현해탄을 넘어 일본으로 건너 갔습니다
<에조 보고서>는 당시 조선 정부 내부 고문관이였던 <이시즈카 에조>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실행자 <미우라 공사> 몰래
자신의 직속상관인 일본 종부 법제국 <가네즈미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입니다
여기에는 <민비 사건>의 발단부터 명분, 모의자, 실행자, 외국사신, 영향 등이 일본 고어로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보고서의 첫 문장이 <미우라 공사>에게는 배신의 극치이지만...으로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 말은 곧 이 사건을 은폐하려는 미우라 공사 몰래 보낸다는 뜻이며
따라서 어떠한 조작도 가해지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낭인들은 깊이 안으로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 칼로 두세 군데 상처를 입히고 발가벗겨 국부검서(局部檢査)를
했습니다. 우스우면서도 분노가 치밉니다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소실했는데 이 광경이 너무 참혹하여 차마 쓸 수가 없습니다
궁내대신 또한 또한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고 합니다
위의 <이시즈카 에조 보고서> 원전 내용처럼~
칼로 두세 군데 상처를 내고 발가벗긴 후 국부검사를 하고~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 기름을 붓고 행해진 끔직한 만행이라는 것입니다
다 타지 않고 남겨진 국모의 유해는 낭인들에 의해 경회루의 연못과 우물에 버려저유실됨으로서
2년 후 장례조차 빈 관을 놓고 치러졌다는 슬픈 사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외국의 정부와 사절들이 거세게 항의하자일본은 미우라 공사와 경복궁에 난입한낭인 39명 전원을 체포하여
히로시마 형무소에 가두고 재판을 열었는데 살해범들은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합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일본 정부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줄곧 대원군이 주모하였다
낭인들에 의한 우발적인 살인 사건이라며 그들은 관련자료를 철저하게 인멸하고 왜곡하고 조작하지만
이 사건은 당시 주한 외교관들의 보고서를 통해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의 현장 총 지휘로
일본 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졌음이
백일하에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일본정부의 사건 관련 부분만은 끝까지 부정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지탱하기 위해 몇 문장 바꿔치기, 낱말로 이렇게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사학자 야마베 겐타로가 쓴 <<일한병합소사>>라는 책에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일본은 언론을 통해
민비시해 사건은 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의 권력다툼에서 벌어진 일환이라고 왜곡 선전하며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1895년 10월 7일 밤부터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걸처서
대원군이 훈련대에게 호위대어 있는 동안 일본 수비대와 대륙 낭인의 무리가 칼을 빼들고
경복궁으로 밀고 들어가서 민비를 참살하고, 그 시체를 능욕한 뒤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원전과 달리 낱말이 조작하여 바뀐 부분 입니다
㉠ 일본 낭인 ㅡ> 대륙 낭인
㉡ 칼로 민비를 두세 군데 상처를 입히고(민비가 살아 있는 상태) ㅡ> 민비를 참살(참혹하게 죽임)
㉢ 발가벗겨 국부검사(민비가 살아 있는 상태) ㅡ> 시체를 능욕
㉣ 원전에는 민비가 살아 있는 때 불을 질렀다는데 ㅡ> 여기에는 시체에 불을 질렀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드러내고 있으며, 이에 대한 우리 민족의 끈질긴 저항 등이 담겨져 있습니다.
과장된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갑오경장 이후 사실에 대해서도
편년체로 기록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황현 자신이 직접 보고들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 기술된 부분도 있다 합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모의의 발단
◆ 박영효가 일본으로 도주하다. 개화 이후 밖에서는 왜인이 괴롭히고 안에서는 정부가 멋대로 움직이는 바람에 상감은 한 가지
일도 자기 뜻대로 가부를 결정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왕후가 이를 분하게 여기고 왕권 회복을 도모하고자 은밀히 <러시아>와
친교를 맺으려 하니 '영효'는 걱정한 나머지 왕후의 권모와 지략은 시해가 아니고서는 근절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드디어 기일을
정하여 왜인에게 청병을 하였고, 유길준과는 매우 친밀한 사이임으로 그 뜻을 알렸더니, '길준은 이를 급히 위에 고변해 버렸다.
"영효"는 일이 누설된 것을 알고 양복으로 변장하고 왜인의 호위로 성을 빠저나가
용산에 이르러 기선을 타고 도주하고, 그와 한패인
신융희, 이규완 등이 그를 따라갔다
당시 시중에는 왜인 히지(日出雄)가 우리나라 사람 한재익(韓在益)에게 영효의 음모를 말하니 재익은 심상훈(沈相薰)에게 고하고
상훈이 위에 알렸다는 소문이 많았고, 혹은 서광범(徐光範)이 고변했다고도 했는데 모두가 잘못된 것이다.
얼마가 지난 다음 을사년에 우리나라 사람 이기(李沂)가 영효를 일본 땅 에도(江戶)에서 만났는데 영효가 위와 같이 말하고 인하여
길준! 이간악한 적당이 나랏일을 그르쳐 오늘에 이르렀다고 분개하더라는 말을 내가 직접 이기에게 들었다.
명성황후 시해 : 1895년 8월 20일(음력) 무자일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범궐하여 왕후 민씨를 시해하다.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대대장 홍계훈(洪啓薰)이 적도들에 대항하여 싸우다 죽다. 왕후는 오랜 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어 정치에 간여하지 못했으므로
<이노우에>에게 후한 뇌물을 주어 상감에게 정권을 돌려주게 하고 자신은 전처럼 중간에서 간여 할 수 있기를 바랐다. 박영효가
이를 시기한 것이 5월의 모의를 하게 된 까닭이며, <미우라>는 박영효의 모의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이때 왕후는 조금씩 권세를 펴기 시작하면서 매일 밤 연회를 열어 풍악을 즐겼는데, 왜인 <고무라>의 딸이 총명하여 그 아이를
귀여워하고 자주 불러보았다. <미우라>는 그 아이를 광대들 틈에 섞어 굿을 보게 하고 몰래 왕후의 초상 수십 장을 그리게 하여
이를 소장 하였다.기일을 정해 거사하면서도 남의 나라 국모를 시해하여 죄를 얻을까 두려워, 드디어 대원군에게 모의를 알라고,
거사 당일 밤에는 공덕리(孔德里) 별장에 가서 대원군을 가마에 태워 앞세우고 여러 왜인들은 각각 초상화을 들고 뒤따르며
<고무라>의 딸이 그들을 인도했다
곤녕전(坤寧閤)에 이르니 불이 대낮같아 개미를 새어볼 정도로 밝았다. 이경직을 만나 왕후의 소재를 물으니, <경직>은
모른다.대답하고 양팔을 들어 왜인들의 진입을 막았지만 팔을 모두 절단 당하여 죽고 말았다.
벽장의 옷 속에 숨은 왕후를 왜인들은 머리채를 잡아 끌어내고 <고무라>의 딸이 확인하여, 목숨을 구걸하는 왕후를 여러
왜놈이 칼을 들어 내리쳤다. 검은 자루에 담아 석유를 붓고 녹산 아래 숲에서 불태우고 잔해 몇 조각을 주어서 소각한
장소에 매장 해버렸다. 왕후는 총명하고 기민하여 권력을 즐겼고 이십 년 동안 자주 정치에 간여하여 망국의
길을 걷다가, 드디어 천고에 없는 변을 당하게 된 것이다.
외인들이 입궁을 시작할 때 <홍계훈>이 꾸짖었다. 칙령으로 외부 병력을 부른 것이냐? 힐문 하였으나, 말을 마치기도 전에
탄환에 맞아 쓰러지고, 들것에 실려 나온 지 수일 만에 죽었다. <계훈>은 졸병에서 시작하여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근신하여 사대부를 대할 때에도 예절을 잃는 일이 없었으며, 당시의 아첨하는 무리들과는 달랐다.
그의 모친은 항상 진충보국(盡忠報國)하라 경계했다 한다.
매천야록(梅泉野錄)은 구한말 학자이자, 재야문인 황현이 1864년부터 1910년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쓴 기록물이다.
그 16일 동안의 사항은 고용주(高墉柱,1865~1930)가 기록했다. '매천'은 황현의 호이다
갑오개혁을 전후한 시점부터 1919까지는 편년체로 상세히 기록돼 있다.
기존의 유교적 사관에 크게 얽매이지 않은 문체임이 특징이다.
사관을 보여주고 있다. 기존 실록이나 사서, 외국 자료 등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내용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구한말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로 활용 및 인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