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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간조선 [2293호] 2014.02.10
한반도와 유라시아 동해안 500년사 (2)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백 년간의 분열 끝낸 오다 노부나가가 실현했다
(원문위치: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8&nNewsNumb=002293100006)
16세기 후기 일본, 분열에서 통일로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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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태종의 본거지가 있는 히에이산(比叡山)을 공격하여 불태우는 오다 노부나가의 병력들. 이미지는 ‘에혼 다이코기(絵本太閤記)’ 2편 권6. 개인소장 |
일본열도의 세력은 유라시아 동해안에서 한반도 국가의 존속에 가장 위협이 되는 존재였다. 일본열도의 세력은 한반도의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도 한반도와 중국의 동해안에 군사적 개입을 시도했으나 좌절되었다. 조선시대 중기인 16세기 말, 일본열도의 세력은 세 번째로 한반도와 중국 지역에 대한 군사적 움직임을 시도하였다. 이때 한반도의 국가는 처음으로 일본 세력에 의해 오늘날의 서울·개성·평양 등 상징적인 도시들이 모두 점령당하는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위기 상황이 초래된 원인에 대해 류성룡은 전후에 집필한 ‘징비록’에서 두 가지를 든다. 한 가지는 일본과의 안정적 관계를 유지하라는 ‘해동제국기’의 저자 신숙주의 유지를 계승하지 못한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일본에서 정변이 여러 차례 일어났지만 조선 측이 정보 수집을 게을리했다는 것이다. 조선 측이 일본과의 관계를 긴밀히 가지면서 일본의 정치·군사적 동향을 파악했어야 한다는 반성이다. 그렇다면 역사상 최초로 한반도 통일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고 한반도의 분단을 꾀하였으며 중국의 정권으로 하여금 총력전을 벌이게 만든 16세기 일본의 상황은 과연 어떠했는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의 백 년간, 오늘날 오키나와와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열도는 이른바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불리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야마나(山名)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이라는 15세기 일본의 양대 무사 집안이 1467~1477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충돌한 오닌의 난(應仁の亂)이 그 발단이었다. 호소카와는 1993년에 자민당의 장기집권을 끝낸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전 총리의 가문이다. 전국의 무사 가문들이 각기 야마나 혹은 호소카와 가문을 편들며 일제히 둘로 쪼개지자 일본 내의 종교적 지도자인 덴노(天皇)에 대하여 무사들의 수장으로서 정치·군사를 관장한 아시카가(足利) 가문의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는 일본 내에서 통제권을 상실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덴노 가문이 종교적 권위로써 일본을 통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한편 오늘날의 선입관과는 달리 이 시기의 대다수 장군들은 일본열도를 통일한다는 야심을 품고 있지 않았다. ‘열심히’라는 뜻을 가진 ‘잇쇼켄메이(一所懸命)’라는 일본어가 있다. 이 단어는 ‘무사가 자신의 땅을 목숨 걸고 지킨다’는 뜻의 ‘잇쇼켄메이(一所懸命)’에서 왔다. 이처럼 일본 역사에서 무사는 기본적으로 자기 땅을 지키는 데 혈안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오늘날 일본의 전국시대라고 하면 연상되는 ‘천하통일을 꿈꾸는 장군들’이라는 이미지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라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567년 오다는 중부 일본의 ‘이노구치(井ノ口)’라는 곳의 이름을 ‘기후(岐阜)’라고 바꾼다. 이는 고대 중국의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 중국 산시성(陝西省)의 기산(岐山)에 도읍을 두고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이때부터 오다는 ‘천하에 무를 펼친다(天下布武)’는 인장을 써서 일본열도 통일의 뜻을 분명히 한다.
오다의 이러한 태도는 역사상 이질적인 것이었다.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이라는 전국시대의 유명한 장군은, 오다에 앞서 일본열도 통일의 뜻을 드러냈다고도 하는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 일본열도의 안정 상태를 깨고자 하는 사악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다케다 신겐이 다른 장군의 영지를 침범할 때마다 우에스기 겐신은 자신의 이익과 무관하게 군대를 보내 침범받은 지역을 도와주었다.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다케다 신겐조차도 스스로를 불교도라고 생각하여 ‘부처의 제자’라고 서명한 편지를 오다에게 보냈고, 이 편지에 대한 답신에 오다는 ‘제육천마왕(第六天魔王)’이라고 서명하였다고 전한다. 제육천마왕은 불교에서 불법 수행을 방해하는 악신(惡神)이다.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불교국가이기 때문에 오다의 이러한 태도는 이질적인 것일 뿐 아니라 이단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오다가 이렇듯 반(反)불교적 인물임을 자처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일본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고만고만한 장군들이 일본열도를 잘게 쪼개서 군웅할거하던 전국시대에, 불교는 열렬한 신앙심에 기반한 전국적 조직으로서 정치세력화되어 있었다. 특히 정토진종(淨土眞宗)이라는 불교 종파는 프로테스탄트와도 상통하는 원리주의적 교리와 전국적 조직망에 기반하여 각지에서 ‘잇키(一揆)’라 불리는 반란을 일으켰다. 오늘날의 이시카와현(石川) 남부에 해당하는 가가(加賀) 지역에서는 여러 장군들의 세력 다툼에 지친 정토진종 신도들이 이들 무사 세력을 몰아내고 15세기 말기부터 16세기 말기까지 100년 가까이 종교 자치령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오사카 지역에 자리한 정토진종의 본산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세력은 오다 노부나가의 일본 통일 전쟁을 저지하기 위해 반(反)오다 포위망을 주도적으로 형성하였다. 또한 교토 북동쪽의 히에이산(比叡山)과 일본 산악 신앙의 거점인 고야산(高野山)에서는 고대부터 이어져 온 밀교 계열의 천태종(天台宗)과 진언종(言宗) 세력이 마찬가지로 자치적 종교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사진) 고문서에 날인된 오다 노부나가의 ‘천하포무(天下布武·천하에 무를 펼친다)’인 이미지. 시가현립 아즈치성 고고박물관이 재현한 것이다.
한편 오늘날의 오사카(大阪) 남부에 자리한 사카이(堺)와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에서는 상인들이 협의체를 형성하여 자치를 실현하였다. 이들은 주변 지역의 장군들이 무력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시 밖에 견고한 해자(垓字)를 파는 등, 북유럽에서 도시의 상인조합이 한자동맹(Hanse)을 결성하여 독자적인 군사·정치력을 행사한 것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당시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전개하던 예수회 신부들은 사카이를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같은 부강한 도시국가라고 평하였다. 예수회 세력 역시 가톨릭으로 개종한 장군 바르톨로메오 오무라 스미타다(Bartolomeo 大村純忠)로부터 규슈 나가사키(長崎) 항구 일대를 기증받아 예수회 직할령으로 삼고 있었다. 훗날 규슈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나가사키의 예수회 직할령을 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대항해시대’의 제국주의 유럽 세력이 일본열도에 발을 뻗친 사실에 위기감을 느끼고 기독교 탄압을 본격화하게 된다.
이처럼 전국시대의 일본은 고대부터 정교일체(政敎一體) 세력으로 존재해온 덴노, 무사 계급의 상징적인 수장인 쇼군(將軍), 각지에 할거하여 영지를 지니고 있던 이른바 전국 다이묘(戰國大名), 정토진종·천태종·진언종 등의 불교 세력, 가톨릭 다이묘 및 예수회 세력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양상을 보였다. 이는 같은 시기 이탈리아반도의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을 연상케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탈리아를 통일하여 인민들에게 평화를 가져올 군주를 꿈꾸며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 Machiavelli·1469~1527)가 ‘군주론(Il Principe)’에서 펼치는 주장은 동시기의 일본열도에도 적용되는 부분이 많다.
물론 일본과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이탈리아가 반도 내부의 복잡한 정세와 더불어 프랑스·이탈리아·오스만(터키) 등과의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 휘말려 있던 데 반하여, 일본열도는 강력한 외부 세력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원과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4~15세기에 한반도 세력이 왜구 세력 소탕을 위해 시도한 쓰시마 공격은 일본열도에 대한 직접적 지배를 꾀한 것이 아니었다. 한편 예수회가 나가사키의 일부를 직할령으로 하는 데 그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 역시 남아메리카나 남아시아·동남아시아에서와 같은 직접 지배를 일본열도에서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와 달리 일본에서는 분열에서 통일에 이르는 과정이 완결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마키아벨리가 꿈꾸던 정치적 미래는 일본에서 실현되었으며 그 주인공이 오다 노부나가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염두에 둔 사람은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1475~1507)라는 야심가였다. 정치가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보르자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마키아벨리는 그에게서 이탈리아 통일의 희망을 보았다. 그리고 보르자의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죽음에 이어 병약한 그가 요절하였음을 한탄하였다. 마키아벨리는 보르자가 자신의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종교까지도 종속적인 요소로 치부하였으며, 무력행사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에는 도덕적 가르침에 구애되지 않고 잔인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통일 이탈리아를 이루어낼 가능성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판단하였다. 동시기 일본열도에서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군주상에 가장 걸맞은 사람이 바로 오다 노부나가였다.
오다가 일본 통일이라는 목표를 내걸자, 오다의 영지 주위에 존재하던 거의 모든 세력이 반(反)오다 전선을 결성하였다. 오다는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는 권력에의 의지를 가지고 이들을 하나씩 과감하게 제거해 나갔다. 그는 특히 종교적 신념으로 움직이던 불교 세력을 위험시하였다. 이들 불교 세력이 일종의 성전(聖戰) 개념을 도입하여 신도들의 전투 행위를 정당화하고 사후 세계에서의 보상을 내세워 신도들의 전의를 북돋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아프가니스탄·이라크·체첸·신장위구르(동투르키스탄) 등지에서 종교적 근본주의 세력의 저항 활동에 대하여 각국 정부가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는 것처럼, 일본 통일을 꾀하는 오다의 가장 큰 적 역시 종교 세력이었다. 당시 일본열도에서 위협적인 종교 세력은 불교와 가톨릭이었는데, 가톨릭 세력은 조총·군함 등 유럽의 군사 정보를 제공하며 오다와 우호적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대항 세력인 불교를 억제하려 하였기 때문에 오다와 이해관계가 일치하였다. 그리하여 오다는 고도로 정치화된 불교 세력을 진압하고자 히에이산을 포위하고 불을 질러 수천 명을 태워 죽이고 고야산에서도 1000여명을 살해하는 등 일대 전쟁을 전개하였다. 그가 스스로를 불법의 훼방자 ‘제육천마왕’으로 칭한 이유가 이것이다.
이처럼 오다는 종교적 권위까지 뛰어넘을 수 있는 명확한 정치적 의지로 통일 전쟁을 수행해 나갔다. 그리하여 역사상 일본의 정치적 중심지인 교토와 그 일대를 장악한 뒤 서부 일본으로 정복 활동을 확장하던 1582년 6월 진군 도중에 교토의 혼노지(本能寺)에 머물던 그는 측근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기습을 받아 어이없이 사망하였다. 혼노지에서 일어난 이 사건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아케치 미쓰히데가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이유에 대해 수백 년간 많은 설이 제기되어 왔다. 여기서 그 이론들을 일일이 검증할 여유는 없으나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제시한 군주의 해야 할 바 가운데 하나를 끌어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사진) ‘군주론’ 1550년판 책 이미지.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제8장에서 군주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악행을 피할 수는 없으며 또 피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행하지 않을 수 없는 모든 악행을 심사숙고해야 하며, 악행을 행해야 할 경우에는 한 번에 몰아서 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악행을 되풀이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만약 “머뭇거린다거나 잔인함을 잘못 이용하는 사람은 손에서 피 묻은 칼이 떠날 날이 없으며” “백성들은 그를 신뢰할 수가 없을 것”이라 경고한다.(신복룡 역, 을유문화사 75쪽)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통찰처럼 오다는 통일 과정에서 너무 많은 피를, 너무 자주 흘렸기 때문에 유교적 도덕관에 철저한 아케치 미쓰히데가 주군을 제거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역사적으로는 증명하기 어려운 설이지만, 전국시대 이후 들어선 에도시대에 널리 유포된 설이기도 하다. 그만큼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는 방증일 터이다.
국가든 사업이든 기반을 굳건히 다지는 과정에서는 많은 희생이 따른다. 도덕적 이유로 그러한 희생을 피할 경우 창업에 성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역사에서 수없이 증명된다. 그러나 그러한 희생으로 인해 창업주는 도덕적 비난을 피할 수 없으며 때로는 창업의 결실을 맛보기 전에 제거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상 통일 사업을 수행한 왕조나 왕은 종종 빠른 몰락을 경험하며 그 뒤를 잇는 왕조나 왕이 그 결실을 손쉽게 얻고는 했다. 사람들은 새로운 통일 세력의 찬란함을 보고 싶어 하지만 그 뒤에 흐르는 피는 외면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신화학자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은 영웅신화의 주인공은 폭군이 되어 살해되거나 순교한다고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창업 과정에서 흘린 피는 성화(聖化)되고, 사람들은 그 창업주가 만들어낸 결과물을 죄의식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전국시대 일본의 경우 오다 노부나가가 일으킨 사업의 결실을 맛본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그러나 히데요시 역시 비슷한 이유로 일본사회에서 비난을 받고 몰락하였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뒤에 그의 아들들에게 아버지의 권력을 계승케 하는 대신에 오다 노부나가의 손자를 옹립하고 스스로 섭정을 하면서 결과적으로 권력을 찬탈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주나라를 건국한 무왕(武王)이 죽은 뒤에 그의 어린 아들인 성왕(成王)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다가, 성왕이 장성하자 주나라를 되돌려주고 자신은 제후의 위치로 돌아간 주의 문공(文公)과 같이 행동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도중에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계략으로 몰락함으로써 도요토미 가문이 2대로 단절되자 일본인들은 이를 하늘(天道)의 뜻이라고 평하였다. 주군을 배신하였고 통일 전쟁의 마무리에 역시 피를 많이 흘렸으며 외국으로 군대를 보내 자국민과 외국민을 모두 괴롭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2주 뒤에 계속된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고문헌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 중.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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