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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을 깎으며
손 중 하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자장가 대신 젖가슴을 내 주던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눈이 오면 눈 맞을 세라 비가 오면 비 젖을 새라
험한 세상 넘어 질 새라 사랑땜에 울먹일 새라
그리워진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 나훈아「홍시」
가을 감나무에 매달린 홍시를 보면 누군가가 생각 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이, 어떤 사람은 자식이, 또 어떤 사람은 친구가, 또 어떤 사람은 까치나 까마귀가 ……
일찍이 감은 다른 과일과는 달리 잘 사는 집이나 못 사는 집이나 감나무 한 두 주씩은 울안에 있어서 추석이 되면 대추와 함께 차례상에 오르곤 했다. 가을이 깊어지면 곶감을 깎아 양지 바른 처마 밑에 매달아 잘 말려 숙성이 되면 잘 보관 하였다가 제사상에 올리기도 하고 간식으로 먹기도 하였다. 간식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에는 말리는 동안 그 맛 때문에 애나 어른이나 하나씩 빼 먹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곶감 빼 먹기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감은 곶감을 말리고 일부는 홍시로 잘 보관 하였다가 눈 쌓인 겨울에 먹던 그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나는 해마다 감을 홍시로 만들어 두기 보다는 주로 감의 껍질을 벗겨 곶감을 만든다. 11월은 상강이 지나 날씨가 서늘해지면 감의 색깔도 곱게 물들 뿐 아니라 당도도 높아져 곶감 깎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내가 곶감을 만드는 이유는 곶감을 먹는 맛도 맛이려니와 감을 깎아 양지 바른 처마 밑에 걸어두고 바라보는 곶감의 눈 맛은 먹는 입맛보다 훨씬 풍미가 있다. 먹는 맛은 순간이지만 바라보는 맛은 두어 달 간다. 가을을 가지 못하게 매달아 두고 즐기는 기분이다.
곶감이 숙성 되어 갈 무렵이면 H교수가 생각이 난다. 학창 시절 그가 우리 집에 오면 아버지가 매달아 둔 곶감, 아무도 손대지 못했던 곶감을 몰래 하나 씩 빼 먹곤 했다. 그 무렵 아버지께서는 해마다 곶감을 잘 숙성 시켜 독에 잘 간수하였다가 주로 제사상에 올리는 제사용의 곶감이었기 때문에 우리 형제들은 아무리 먹고 싶어도 거기에 손대는 형제는 없었다. 그런데 그 친구만 왔다 가면 군데군데 곶감이 비어 있곤 했다. 그 친구가 가고 나면 우리 형제들은 혼쭐이 났다. 설마 그 얌전한 친구가 곶감을 빼 먹으리라고는 아버지께서는 상상도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 친구는 우리 집에 오면 부엌에 들어가 설거지를 비롯하여 온갖 잡일을 마다하지 않고 해 주곤 했다. 정이 참 많은 친구였다. 여자가 하는 일, 남자가 하는 일 가리지 않고 했다. 손님처럼 대접 받지 않았다. 심지어는 들깨 기름을 짜기 위해 들깨 손질을 하고 있으면 들깨를 물에 씻어 조리로 이는 일까지 하는가하면 장독에 가서 일일이 장독 뚜껑까지 열어 보고 장맛까지 보고는 장이 쓰네, 다네를 간섭하는 친구였다. 눈물도 많은 친구였다. 특히 자연의 아름다움에 민감하여 아름다운 경치를 보아도 눈시울을 적셨고 음식점을 고를 때도 음식의 맛 보다는 음식점 분위기를 보고 찾아갔다. 내 아들이 대학에 들어갔을 때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그런 친구다. 그럴 때는 그는 남자 DNA보다 여자 DNA를 더 많이 타고 났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 친구는 노래를 좋아하여 운전을 할 때도 노래를 불러 주었는데, 그는 노래 소리에 박자를 발로 맞추는 바람에 페달에 박자가 들어가 차의 속도가 고르지 못했다. 그런 친구였는데 고희를 맞이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2월의 마지막 일요일, 지인들과 테니스를 하고 있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암 진단을 받고 서울 S대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빨리 올라오라는 전화였다. 2월의 마지막 날에는 그 친구와 음악회에 가기로 약속 되어 있었다. 믿기지 않아 그가 근무하는 H대에 전화를 해서 알아보니 아무도 입원을 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평소 그와 절친하게 지냈던 몇 분에게 연락하여 같이 서울에 올라가니 그는 무릎과 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폐암이 전이 되어 무릎과 목까지 퍼지기까지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어이없어 위로의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는 태연하게도 우리들에게 가곡 ‘금강산’을 불러 주었다. 지금 이 시간이 아니면 들려줄 시간이 없을 거란다. 속으로는 어떤지 모르지만 그는 죽음 앞에 초연하였다. 그 후 그는 몇 년을 더 버티고 사는 동안 우리는 많은 긴 시간 이별 연습을 하였다. 때로는 음악회로, 때로는 서로의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나누며 이별 연습을 하였다. 애써 감추어 빨리 회복하라는 말 대신, 나는 그에게 “잘 가라”고 하였고 그는 나에게 “잘 있어라”라고 말했다. 그편이 우리 서로를 참으로 편하게 만들었다. 가끔씩 잠 안 오는 밤에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그는 나에게 전화를 했고, 나는 자다 말고 그의 말이 끝날 때까지 말 상대가 되어 주곤 했다. 우리들의 얘기는 서로의 마음이 무겁게 꿈이나 희망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꿈이나 희망보다. 애써 다른 이야기들로 껄껄 웃기도 하였다. 주로 과거 학창 시절의 얘기와 그의 사후에 대한 얘기를 하였지만, 그도 나도 슬퍼하지 않았다. 그의 말도 그의 가슴처럼 따뜻했고 유머스런 얘기로 몇 날을 보내기도 하였고 내가 작사한 글로 그는 작곡하여 같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강노을 곱게 물들 때
백사장 거닐며 우린 꿈꾸었지
새롭게 맞이할 찬란한 꿈을
아~ 아~그대 만나 이룬 흔적들
돌이켜 생각하니 행복이었네
세월아 그 추억 가리지 마라
파도야 그 자욱 지우지 마라
내 그대 만나 쌓은 흔적들
돌이켜 생각하니 행복이었네
행복이었네.
와병 중에도 그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가끔씩은 김치찌개나 칼국수를 시키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맛있지?” 하고 음식 맛을 확인하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즐겼다.
한번은 집으로 오라고 하더니 자기 무덤 앞에 새겨질 글을 보아 달랜다. 우리는 서로의 고집을 부려가며 이건 되고 이것은 안 되고 하며 글귀 하나하나를 고쳐가며 그의 무덤의 비에 새겨질 글을 다듬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묻혀있는 곳은 어느 글귀도 없다. 그는 마지막에는 무덤에 어느 글도 쓰지 않기를 원했다. 시신도 어느 대학 병원에 기증하여 의학용으로 쓰게 했고, 그 후에 화장하여 봉분도 없이 그의 정원에 그가 평소 아끼던 조각돌 옆에 꽃잔디로 덮혀 있다.
며칠 전에는 그가 가꾸던 정원에 잔디를 깎아 주고 왔다. 아직도 그의 정원에는 평소 그가 하던 운동기구며 골프공이 그대로 남아 있어 여행지에서 곧 돌아올 것 같은 느낌이다.
여행 떠나듯 가볍게 떠났던 그 친구, 노래를 자주 불러 주던 친구, 실버 보디빌더가 꿈이었던 그 친구는 내가 불러도 오지 않고 이제 내가 찾아가야만 만날 수 있는 친구가 되어 버렸다.
오늘 감을 깎아 매달며 누군가가 그때의 그 친구처럼 곶감 빼어 먹을 친구 하나 있었으면 싶다.
유자향기에 젖다
권 예 자
성 야고보 축일이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우리 성당 주임신부로 계시며, 진한 유자향기를 남기고 떠나신 K야고보 신부님의 은경축일이기도 하다. 많은 신자가 ‘진산성지’를 찾아 경축연에 참석했지만, 나는 가지 못했다.
지금도 대사동 성당에서는 유자향기가 난다. 제대 위 십자고상에서도 나고, 뜰 한쪽에 고즈넉이 서 있는 성모상에서도 난다. 오다가다 스치는 신자들의 마음자락에서도 향기가 난다. 이 유자향기는 야고보 신부님이 남겨주신 것이다.
신부님이 부임해 오셔서, 비가 새고 누전이 잦은 낡은 성당을 멋지고 유용한 건물로 재건축했다.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하자, 그에 따른 연관 공사가 자꾸 늘어나면서 예산의 몇 배가 되는 지출이 생겼다. 예상치 않은 큰 빚을 떠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친환경 수제 유자청 만들기였다.
의견을 처음 내신 분은 신부님이셨다. 신자들은 반신반의했다. 유자청을 만드는 일도 그렇지만, 그 유자를 어떻게 누구에게 판매할지도 걱정이었다. 더구나 그 당시 우리 성당은 사제와 신자 간의 보이지 않는 간격으로 외부에서 볼 때 우려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신부님의 추진력은 대단했다. 전국의 유자밭을 돌아다니며 최상품의 유자를 찾아내고, 신자들에게 협조를 당부했다. 무슨 일이든 지도자가 발 벗고 나서면 따르는 이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던 신자들이 첫 해에 작은 성과를 내자, 둘째 해부터는 스스로 참여하게 되었다. 지하 다목적실의 보수가 끝났으므로 그곳에 번듯한 유자작업장도 만들었다.
바닥 전체에 두꺼운 비닐을 깔고, 탁자를 두 개씩 맞대어 세 쌍의 넓고 긴 작업대를 만들었다. 작업모, 비닐장갑, 포크, 도마, 칼, 쟁반 등등 필요한 물품도 준비했다. 성당 차고 옆에는 커다란 고무통, 호수, 플라스틱 과일상자, 운반 장비도 갖추었다.
트럭이 도착하여 뜰에 유자를 산더미 같이 부려놓으면, 첫 라인의 형제들이 세척을 시작한다. 다섯 번의 세척작업이 끝나면 과일상자에 차곡차곡 담아 지하 일층 유자작업장으로 운반한다.
둘째 라인인 지하작업장엔 몇 개의 팀이 있다. 꼭지를 도려내고 상처 입은 거뭇한 부분을 잘라내는 팀, 그것을 받아 유자를 가로로 반을 자르는 팀, 포크로 씨를 빼는 팀과 유자를 채 썰거나 설탕에 버무리는 팀이다.
이 중, 씨를 빼는 팀은 인원이 가장 많이 필요한데, 언뜻 보면 쉬워보여도 살 속 깊숙이 박힌 씨를 남김없이 빼는 일은 쉽지 않다. 유자 한 개에 서른 개가 훌쩍 넘는 통통한 씨가 들어 있어 포크를 깊숙이 찔러 속속들이 빼지 않으면, 다음 팀에서 채를 썰 때 손을 다치기 때문이다. 또 잘못하여 흘린 씨는 어찌 미끈거리는지 밟으면 넘어지기 쉬우므로 조심해야 한다.
채를 써는 일도 유자청의 맛과 맵시를 내는 일이라 퍽 중요하다. 자매들은 집에서 손에 익은 도마와 칼을 가져와서 사용하는 분들이 많았다. 채가 예쁘게 썰어지면 정확하게 무게를 달아서 설탕에 버무려 순서대로 커다란 스테인리스 통에 담는다. 번호를 적는 것은 물론 윗면에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기록해 둔다. 그리고 고른 숙성을 위하여 두세 시간마다 저어야 한다. 통에 든 유자를 젓는 일과 한 팀에서 다음 팀으로 유자쟁반을 옮기는 일은 힘이 많이 들어서, 보좌신부님과 신학생을 비롯한 젊은 형제들이 주로 하셨다. 그중에는 이 일을 위해 근력운동을 하는 분까지 계셨다. 유자가 숙성되는 기간에는 그것을 담을 병을 닦고, 성당 로고를 붙이고, 2통씩 또는 6통씩 들어갈 상자도 접어둔다.
유자청을 담는 셋째 라인도 만만치 않다. 숙성된 유자를 고루 섞는 사람, 깔때기를 대고 병에 담는 사람, 병에서 덜어내거나 더 넣어서 양을 조절하는 사람, 윗부분과 병 표면에 묻은 즙을 닦아내거나 뚜껑을 단단히 덮는 사람, 두 개씩 또는 6개씩 포장하는 사람, 보관 장소로 옮기는 사람…….
이렇게 만들어진 완성품은 판매 라인을 통해 대전은 물론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 팔려나갔다. 차에 가득 유자를 싣고 외지 성당으로 팔러 가시는 신부님과 신자들을 보면, 가슴에 작은 이슬이 맺혔다.
“누구를 위해서……”
서울에서 밤 미사 후에 물건을 팔고 새벽에 대전에 도착하는 일이 허다했다. ‘율 브리너’를 닮은 신부님은 강론도 아주 잘하셔서 가는 곳마다 인기가 높았다. 100% 수제에 사랑을 버무린 품질도 소문이 나서 둘째 해부터는 선주문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3차 연도에 빚을 청산한 후 마지막 해에는, 우리 자신과 이웃을 위해 유자청을 만들었다. 성당 신축이나 보수공사로 어려움을 겪는 여러 성당에 건축헌금을 지원하고 가까이 있는 불우이웃도 도왔다.
그해 가을, 우리는 기차를 통째로 빌려서 제천의 배론성지를 순례하고, 이듬해 봄에는 제주도 이시돌목장으로 피정도 다녀왔다. 모든 신자가 참여한 행사였다. 그동안 빚을 갚는 물질적인 일로 혹여 가벼워질 수도 있었던 내면의 믿음을 다독인 것이다.
네 살 아기에서 구십 노인까지 한마음이 되었던 노란 유자작업장, 아침부터 밤늦도록 일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환한 얼굴들, 생에 몇 번 있을까 말까한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었고, 함께하는 손길에 은총이 가득했다. 더불어 일하는 기쁨과 그것을 나누는 방법을 배운 청량한 날들이었다. 새콤달콤한 유자향기에 촉촉이 젖어있는.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
그녀의 남편은 2013년 12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는 2015년 초에 아들을 낳았다. 남편이 없는데 수태된 아이, 누구라도 한 번쯤은 의심의 눈초리로 아이엄마를 보았을 상황이다. 관할구청에서도 그랬다. 출생신고를 하러 간 엄마에게 남편을 아이의 친부로 등록하는 것을 거부했다. 아빠의 사망일자는 아이의 수태일보다 빨랐으므로.
아내는 포기하지 않고 가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부부는 2009년 결혼했지만 불임 판정을 받고 2년 후 시험관 시술을 통해 첫째를 출산했다. 그러나 원하던 둘째를 가지지 못한 채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둘째를 갖고 싶어 한 남편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 주려고 아내는 병원에 보관 중인 남편의 정자로 다시 둘째를 낳은 것이다.
“남편 숨진 뒤 냉동 정자(精子)로 낳은 아이도 친자(親子)이다.”
상황증거와 유전자 검사를 통해 2015년 7월 3일, 서울가정법원 K판사가 내린 판결내용의 골자다. 이렇게 아내는 아이를 남편의 아들로 출생 신고했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다.
남편도 없이 혼자 두 아이를 키우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알면서도, 어려운 시험관 시술을 거쳐 둘째를 낳은 아내의 모습이 참 대견하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행동으로 보여준 그녀의 남편 사랑에 여러 사람이 감동의 글을 올렸다.
그녀는 말했다. 정자를 보관하던 당시, 남편의 간절한 마음이 잊히지 않아, 그냥 폐기하면 평생 한을 가지고 살 것 같았다고. 하지만 아이가 자라며 느낄 감정의 혼란에 대하여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어찌되었던 나는 그 아이가 엄마의 마음을 이해해서 따뜻하고 착한 인재로 자라길 바라며 속으로 박수를 쳤다.
우리는 가족을 중시해온 민족이다. 한 집안에 삼대의 가족이 모여 사는 것은 보통이었다. 시대가 바뀌어 핵가족화 되었어도 좋은 날에는 부모와 함께하는 전통이 지금도 이어진다. 또 자식을 잘 키우기 위해서는 어떤 고통도 참아내고 심지어는 목숨도 버릴 수 있는 맹목적인 내리사랑을 해온 것이 부모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도 조금씩 가족의 틀이 허물어지고 있다. 자식이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것은 예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어린 자식을 살해하고도 버젓이 일상생활을 해온 부모도 있다. 계모와 친부가 7살 어린 아들을 한 평짜리 화장실에 감금, 한겨울에 매트 한 장에 밥과 반찬을 섞어 한 끼를 먹이다가, 아이 몸에 락스를 들이붓고 찬물을 뿌려 사망하게 한 원영이사건도 있다. 내리사랑마저도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유산을 미리 물려받고 돌보지 않는 자식을 상대로 부모가 재산 환수 소송을 제기하기도 한다. 한심하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물들어가는 것이 인간이니 머지않아 그 나름의 합당한 질서가 생기리라 믿는다.
“할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아침에 손자, 손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큰아들이 해외로 발령을 받아 미국에 살고 있는 중이다. 생일축하는 지난 주말에 작은아들네 세 식구와 이미 했기 때문에 잊고 있었는데, 예쁘고 밝은 목소리로 나를 기쁘게 해준다. 아마도 자상한 제 어미가 날짜를 기억해서 아이들에게 알려준 모양이다. 이어서 작은며느리의 축하문자가 휴대전화기에 뜬다. 막내 손녀가 용돈을 모아서 샀다는 빨간 등산배낭이 배시시 웃고 있다. 모두 고맙다.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어도 자식들은 늘 부모의 마음속에서 산다. 기도를 해도 아이들을 위한 것이고, 나를 위한 기도는 하지 않는다. 맛있는 것을 먹어도 좋은 것을 보아도 생각나는 것이 자식들이다. 좋은 일에는 먼저 알리면서 어려운 일은 우리끼리 해결해 나가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자식들 또한 그러한지 작은아이가 괜찮은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도 우리는 반년이나 모르고 지냈다. 그 반 년 동안에 집안 행사도 있었지만 내색도 않은 그 마음을 우리는 안다. 부모가 염려하지 않도록 저희끼리 극복해 온 것을.
어렵게 낳아 쉽지 않은 절차를 거쳐 아빠의 진정한 자식이 된, 그 귀한 아기는 이제 첫돌이 지났을 것이다. 앞니가 서너 개쯤 났을까? 제 엄마를 알아보고 그 음성을 알아들을 것이다. 혼자 걷기도 하겠다. 엄마의 그 큰 사랑은 아직 몰라도 눈이 마주치면 방긋방긋 웃으며 그 품에 안기겠지. 귀여운 목소리로 엄마, 엄마를 부르면서.
나는 그 아기가 누구보다 착하고 밝게 자랄 것을 믿는다. 사랑 많고 용기 있는 좋은 어머니를 가졌으므로.
관리 부재
김 기 태
“국민안전처
안전안내. 7일, 31일 11시
폭염경보, 12∼17시
노약자는 야외활동을 자제하고 물을 자주 마시기 바랍니다.”
국가에서 65세 이상 된 국민들에게 폭염을 조심하라고 보내주는 문자 내용이다. 갑작스런 사고에 대한 예방이고 재난에 대한 사전 준비를 하라는 경고일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시스템에 의해 관리되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관리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관리에 대해서는 교육의 우선순위에서 항상 뒤로 밀려 있었다.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했지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을 개고, 방 청소를 하고, 신발을 정리하고, 책상정리를 하라고 기본적인 생활교육을 받은 일도 없고, 옷을 벗을 때도 입을 때를 생각해서 순서대로 벗어 차곡차곡 정리하는 것에 대한 교육이 소홀하여 결혼 후 양말을 벗는 남편에게 아내는 뒤집어 벗지 말라고 성화를 해야만 했다. 비단 개인적인 문제에 국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만이 유독 관리에 대한 교육과 실행이 미비한 민족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세월호 사건도 사고 발생 이후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 배의 운항 체계나 승선 조건들이 변한 것이 있는지 아리송하다. 또 메르스가 유행하여 의사와 간호사들이 목숨을 걸고 진료했지만, 그 이후 병원의 시설이나 관리체계가 변한 것이 있는지 묻고 싶다. 사람들은 이런 경우 안전 불감증이라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의 고질적인 관리부재가 생활을 지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성수대교 사건을 부실공사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부실공사가 아니고 관리 부재에서 일어난 사고였다. 성수대교를 만들 때는 당시 시방 규정에 의해서 다리를 완성시켰다. 그 이후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 차량의 무게가 변해 통과하중이 증가하는데 그 다리는 영구 구조물로 생각하여 보안과 보강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는 90년의 역사를 가진 세계에서 제일 우아한 교량 중의 하나이다. 눈에 보이는 모습만 보고 우리는 금문교를 좋아하지만 그러나 금문교를 유지, 관리하는 부서에는 120명의 보수 요원이 상주하여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구조물을 점검하여 점검결과에 의해 훼손된 부분이 발생할 때는 이를 보완하고 보강하는 것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교량하부에 내려가 점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다. 성수대교 사고 이후 모든 교량에는 많은 돈을 들여 안전통로가 개설되었지만 일 년에 몇 번이나 내려가 확인하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며칠 전에도 고속도로에서 대형 사고가 있었다. 관광버스 운전기사가 졸음 운전하다가 앞 차를 덮친 것이다. 이와 관련된 경우 가해자를 처벌하는 법도 미흡하지만, 있어도 핑계를 대고 이행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뉴질랜드의 관광버스는 시속 80km 이상을 달릴 수가 없다. 앞에 가는 관광버스가 80km로 달려도 뒤에 따라오는 차들이 경적을 울린다거나 추월하려는 차들이 안 보였다. 스페인에 가보면 관광버스 기사가 3시간을 운전하면 30분은 꼭 쉬어야 한다. 그들은 누가 보지 않아도 법을 지키고 있었다. 선진국 문화시민은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공중도덕을 더 지키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지적을 하면 변명과 핑계가 먼저 나온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묘한 점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발전된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한 몫을 한 사람으로서 말하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대형 지하구조물인 서울지하철 1호선 중에서 서울역과 청량리 구간이 있다. 74년에 준공, 개통 되었으니 42년이 지났다. 그렇다면 지금쯤 지하구간의 구조물을 점검하고 훼손된 곳에서는 보강도 하고 이러한 시스템에 의한 관리가 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지하 구조물 벽에는 먼지가 뒤 덮인 케이블이 얼기설기 매달려 있을 것이고 시공이 부실한 구간이나 연결부위에서는 누수가 일어나고 그곳에 노출된 철근에서는 부식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생각 없이 방치하다가 어느 날 지하철 구조물이 갑자기 붕괴 될까 아찔한 생각이 든다.
세금문제도 그렇다. 세무서 직원들에 눈을 피한 사각지대에서는 아직도 많은 문제들이 있다. 간간이 들춰내는 기업가의 탈세는 수사에 의해서만 발췌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일반 서민이 구매하는 것 중에서 카드나 현금영수증을 요구하면 부가세를 별도로 지불해야 하는 곳이 많다. 식당에서 현금으로 식대를 계산하며 14%를 할인해 달라고 요구하는 손님도 있다 한다. 부가가치세 10%와 카드할인료 4% 금액인 것이다.
정부는 졸업하는 학생들의 취업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것이 젊은 층에서 직장을 구하는 것이 늦어지니, 결혼연령도 늦어지고 출산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거기에도 관리의 허점이 보인다. 국가에서 발행하는 자격증에는 대여가 금지 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은 대여가 빈번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큰 회사에서는 인재가 많아 어려움이 적지만 작은 회사에서는 자격증을 임대하여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부실공사와 안전사고까지 연결되는 문제다. 경력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는 일 년에 300만원을 주기도 하고 자격증의 희소가치가 있는 곳에서는 2∼3천만원까지 지불하고 있다.
자격증 대여만 관리를 잘 해도 우리나라 젊은이 100만 명에게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 될 것이다. 자격증 임대하는 곳에서는 회사에 근무하는 것처럼 서류를 만들어 놓고 일 년에 한 번도 회사에 출근하지 않으면서 보수를 지불한다. 나이에 관계없이 살아만 있다면 요양원에 들어가 있어도 대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이런 제도가 보안이 되어 관리가 잘 이루어진다면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취업문은 활짝 열릴 것으로 생각된다.
원칙을 중시하지 않는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다. 관리되지 않는 성장은 부실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이제부터라도 어린 아이에게 관리의 중요성을 교육시키고 사회도 국가도 관리의 메뉴얼을 만들어 확실하게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해 본다.
아오모리
인천공항에서 두 시간 반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면 도착하는 곳이 ‘아오모리’ 공항이다. 공항이 아담하다.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조그만 공항이다. 크기는 교실 4칸 정도로 된 2층 구조의 청사이고 면세점도 아오모리 사과를 가지고 만든 과자류가 전부다. 한가한 어느 간이역을 방문한 느낌이 들 정도다.
아오모리는 한문으로 청삼(靑森)으로 위도 상 우리나라의 백두산과 비슷한 위치에 있으며, 년 간 기후 차가 큰 지역으로 계절 색이 뚜렷하다. 여름에는 차가운 편서풍이 불어와 다른 지역보다 기온이 낮은 편이고,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아오모리하면 후지와 함께 사과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분들이 많은데. 이곳은 일본 100대 명산인 핫코다 산과 시라카미 산지, 오이라세계류 등 아름다운 풍경으로도 유명하다. 시원한 계류를 따라 걷는 계류 트레킹에서부터 네부타 축제, 온천 등의 즐길 거리도 풍부한 일본 아오모리는 서울보다 4도 정도 기온이 낮고 원시림이 많이 분포되어 상큼하고 즐거운 여행을 할 수가 있는 곳이었다.
아오모리 여행에서 필수 코스인 오이라세계류이다. 이곳은 천 년이 넘는 수령을 가진 너도밤나무 원시림과 오이라세계류가 있는데. '계류'는 산처럼 올라가는 것이 아닌 강처럼 평평하게 흐르는 숲 속의 계곡을 뜻한다.
길이 편도 일차선이고 선형이 구불구불하여 길 따라 걷기는 위험하지만 이곳은 무성하게 숲이 우거진 오이라세계류를 따라 14km 정도 산책로가 이어지며, 계곡을 따라 9개의 크고 작은 폭포를 만날 수가 있는데, 끝없이 펼쳐지는 나무들 사이로 흐르는 계곡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답답한 마음이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는 것 같다. 또, 건강에 좋은 피톤치드까지 한가득 느낄 수 있으니 힐링 여행 코스로 제격이었다.
아오모리현은 일본의 변방으로 욕심 많은 역대 지배자들의 안중에서 비껴 있었던 지역 같았다. 전란으로 휩쓸린 경우가 적어 아름다운 산야를 유지할 수 있어 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재할 수 있는 자연을 갖게 되었나 보다. 그 중심에 오이라세계류 호텔이 있다. 목조건물로 지어진 제법 큰 규모의 호텔로 시설도 좋고 음식도 깔끔하고 맛깔스러워 여행으로 지친 여행객에게 또 다른 기쁨을 안겨주었다. 이곳은 눈이 많이 와서 11월 중순부터 3월까지는 휴업을 한다는데 호텔 운영에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이 호텔을 지은 주인이 일본에서는 제법 성공한 은행가여서 아오모리현에 18개의 호텔과 휴양 시설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 오이라세계류호텔의 4∼5월은 눈이 녹아 흐르는 계곡물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이곳 호텔을 말할 때 온천수를 빼고 말할 수는 없다. 수질이 유향성분을 포함한 알카리성 온천수였다. 온천탕의 특징은 우리와 비슷한데 냉탕의 규모는 두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작아 보였다, 야외 온천탕은 제법 운치가 있었다, 탕 주변에 연못을 만들어 온천수가 넘치면 자연히 연못으로 들어가도록 시설이 되었다.
목욕탕에서는 때를 미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곳의 목욕문화인지 모르지만 타올에 삼푸를 담아 문지르는 수준이었다. 이곳은 남탕과 여탕, 그리고 좀 떨어진 곳에 남녀혼탕이 있었다. 남탕과 여탕이 매일 바뀌는 것도 색다른 풍경이었다. 정신없이 어제 찾아간 목욕탕으로 들어가면 욕탕이 바뀌었음을 알 수가 있다. 목욕탕을 관리하는 종업원이 여자인데 스스럼없이 탕에 들어오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있는데 여자가 걸레를 들고 와서 바닥을 닦고 있다. 표정은 무표정했지만 우리나라 남자 화장실에 소변보는 남자 가랑이 사이로 여 종업원이 걸레질하는 것과 같은 풍경이었다. 그런데 탕까지 들어와 수온을 체크하고 나가는 것이다.
내가 알몸으로 여 종업원에게 펜 서비스하는 기분이었다. 형제부부가 함께 간 여행이라서 남녀 혼탕은 가보지 못했지만 이곳의 온천 목욕은 기억 속에 여운을 남기는 여행이었다.
이곳에서는 식사도 일품이었다. 정갈하고 맛있는 것은 내가 여행을 해 본 곳 중에서 가장 맛깔스러운 식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번 패키지여행 중에서 점심은 제외되어 있어 여행객이 스스로 정해 해결해야 했다. 가이드도 없는 여행이라서 좀 어설펐지만 익숙했던 여행에서 벗어나 더듬거리며 찾아다니는 것도 좋았다. 이곳은 수산물도 좋고 초밥의 고장이라서 점심은 초밥집으로 정했다. 찾아간 초밥집이 제법 크다. 회전식 초밥집인데 대기하는 손님이 많다. 20분을 기다리다 단체 손님 석으로 자리를 잡고 지나가는 초밥을 선택하여 먹으면 되는 일인데 접시 색깔이 제각각이다. 접시 색에 따라 가격이 달랐다. 싼 것은 한 접시에 100엔, 비싼 것은 800엔이었다. 이번 여행은 남자가 6명, 여자가 5명인데 직장에 다니는 형제들을 빼고 간 11명이었다.
남자 6명이 비운 접시가 49개이다. 접시에 바코드가 있는지 검색기로 스윽 스치니 먹은 금액이 나온다. 26,150엔이었다.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28만 원 정도지만 11명으로 나누면 가격은 우리와 비슷한 것 같다. 일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물가체감이 우리나라 돈으로 26,150원과 같다고 한다. 전체적인 화폐가치 기준으로 보면 이해하기 쉬운데 먹을거리 자체가 우리나라보다 높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일본사람들의 특징은 깔끔함이다. 어디를 가도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는 모습이 한없이 부러울 뿐이다. 시골이나 도시나 깨끗한 분위기였다.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적응력이 대단하다. 2박 3일을 돌아다녀 봐도 도로가 편도 일차선이다. 그것도 선형이 너무 구불구불하여 시속 30km 이상은 속력을 낼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도로시설을 이용하며 산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지역을 홀대하고 있다고 엄청난 불만을 표출할 것 같은데 이곳은 그러하지 않은가 보다. 농사를 짓지 않는 휴경지도 많이 보였지만 공장은 보이지 않았다. 브라질의 아마존 강이 세계의 허파라고 말하지만, 이곳 아오모리는 일본의 허파와 같았다. 산에도 동네에도 한결같이 서 있는 나무는 수종에 관계없이 아름드리 나무였다. 다시 더 오고 싶은 곳이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바가지요금도 없어 보이고 10년 만에 만나는 내 친족보다 더 친절한 종업원들의 얼굴에서 내 얼굴도 웃고 있었다.
이번 여행은 남다른 것이 있다. 우리 형제는 장인과 장모 사이에 8남매가 있다. 물려준 유산은 없지만 형제들의 우애는 다른 집과 다르다. 형제들이 학교를 다닐 때 풍족하게 다녀 본 사람이 없다. 장인, 장모님이 남기고 가신 것은 지금 시골에 남은 집 한 채가 전부다. 시골 빈집 냉장고에는 항상 먹을거리가 차여 있다. 언제든지 형제들이 다녀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다녀간 형제가 먹고 간 빈자리는 또 채워 놓고 가기도 한다.
이번 여행 경비는 15년 전에 돌아가신 장인어른이 남겨 놓은 돈 중에 장례비용과 유언을 받들고 남은 돈이 있었다. 혹시 형제가 살아가다 어려움이 닥치면 합의하여 도와주기로 했는데 아직 그 돈에 욕심을 낸 형제가 없어 남은 돈 일부를 은행에서 찾아 여행을 간 것이다. 어느 집은 장례를 치루고 난 후 형제끼리 부모가 남긴 재산 때문에 다툼이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15년을 은행에 맡기고 형제애를 존속시킬 수 있었다는 것에 장인어른께 감사함을 느낀다. 장인어른이 보여준 교육의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참 즐거운 여행이었다.
지주목을 세우다
김 순 길
살포시 내려쬐는 봄볕이 마음속으로 파고든다. 나는 걸음을 재촉하여 자주 드나드는 채소가게로 향했다. 가게 안에는 제철을 맞은 상추, 케일, 카베츠, 토마토, 가지, 고추모 등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주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맞이한다. 고추모 몇 개를 건네주면서 유기농 공법으로 귀하게 싹틔운 것이니 잘 키워보란다. 마치 갓난이를 포대기에 싸서 건네받은 양, 행여 어디가 상처 날까봐 조심스레 받아들고 집으로 가져왔다.
흙과 걸음으로 배양토를 만들었다. 약간 크고 둥근 원형 화분에는 모종이 제멋대로 자랄 수 있도록 충분한 간격을 띠워 세 포기를 심었다. 나머지 일자로 된 두 화분에는 각각 두 포기씩 심었다. 전에 베란다에서 고추를 키워보니 햇볕이 부족해서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이번에는 아예 아파트 뒤뜰에 내놓았다.
날이 밝자마자 먼저 입양된 고추모 식구들을 둘러본다. 밤새 별 일 없었는지 상태를 살핀다. 그리고 외출하고 돌아오는 때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전, 고추모를 먼저 살펴본 후 집에 들어서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삼복더위가 찜통처럼 푹푹 내려쬐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 날도 평일과 같이 고추모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사정없이 내뿜는 뙤약볕에 고추모가 갈증이 난 듯, 잎이 시들시들 생기를 잃고 있지 않은가? “아차, 이걸 어쩌나!”, 마치 새로 입양된 어린 생명을 게으름 피우다가 물을 굶겼구나 싶었다. 허겁지겁 서둘러 화분에 물을 흠뻑 주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서 시들하던 고추모는 차츰 고갈을 해소하고 처진 잎이 수분을 먹고 올라오기 시작한다. 늘 관심을 갖고, 오며 가며 틈나는 대로 오직 일심초사 보살핀 덕분에 고추모는 제법 크고 튼실하게 자랐다. 제법 몸통이 커서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기도 한다. 이제는 옆에서 붙잡아 줄 지주목이 필요하다. 고추모의 양 옆에 튼실한 막대를 꽂고 끈으로 묶어 주었다. 심한 비바람이 몰아쳐도 뿌리까지도 끄떡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지주목을 세워주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고추모는 밥풀만한 하얀 작은 꽃을 피우더니, 열매가 열어 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린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정성들인 그 이상으로 풍성한 열매가 달린다. 마치 귀한 보물이라도 얻은 양 마음이 뿌듯하다. 날로 싱그러움과 풋기를 더하며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고추는 고이 아꼈다가 아들이 오면 주련다. 어머니가 손수 기른 지금 금방 따온 고추를 아들에게 먹이고 싶은 어머니의 심정이다.
입동이 지나고 겨울날씨가 추워지는 어느 날 저녁이었다. 전화벨이 울린다. 듬직한 아들의 목소리다. “어머니, 날이 추워지니 보일라 켜세요. 노인들 추운 방에서 차게 자면 큰일 나요.” 근심어린 어조이다. “음, 알았어요!” 이런 것마저 멀리 있는 아들에게 걱정을 주면 안 될 듯싶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얼른 보일러를 틀고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되어 일어나보니 방안 공기가 냉랭하다. 분명 보일러를 틀고 잤는데…… 거실로 나와 전기 스위치를 확인해보니 난방을 켜야 하는데, 온수에 고정된 스위치를 그대로 놓고 보일러를 켠 것이다. 저녁 내내 난방을 하는 대신 온수를 데운 것이다. 이제 나이가 여든을 넘다보니 이 같은 실수가 부지기수다. 2대 독자 외아들을 키우면서, 어린 것을 혼자 떼어놓고 직장을 나가야되는 엄마로서의 심정은 늘 편하지 않았다. 무사히 잘 자라주기를 바랄뿐이었다. 장년이 되면서 부터는 그저 저만 잘 살아주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요사이 기력이 없어지고 외톨이로 살다보니 옆에서 바람을 막아 줄 지주목이 필요하다. 고추모에 지주목을 세워 붙잡아 메어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듯이, 나에게는 노년을 붙잡아 줄 지팡이가 필요하다. 넘어지려면 붙잡아 줄 받힘목이 필요하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줄 따스한 말 한마디가 필요하다. 이래서 노년에는 자녀가 필요한가 보다.
나는 오늘 내 옆에 굳건히 늠름하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지주목이 있어 감사하다. 어떠한 어려움도 함께 나누면 남은 생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오래된 기억
이 흥 종
벌써 지난해 가을의 일이다.
군산의 근대 문화유산을 둘러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차창으로 보이는 들녘은 가을로 접어들어 황금빛이다. 화사한 코스모스가 아침햇살을 받아 멋스럽게 늘어뜨린 여인네의 스카프처럼 한껏 도로를 꾸미고 있었다.
군산을 방문한 기억이 아득하다. 어렴풋한 추억이 중학교 2학년 수학 여행길을 떠올린다. 자갈길 흙먼지를 날리며 버스길을 달려 장항선 기차를 타고 갔던 동화 같은 길이었다. 긴 시간의 공백을 넘어 새롭게 찾아가는 군산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보여줄 것만 같다.
군산에 도착하면서 근대 문화유산 거리를 둘러보기 전 채만식 문학관을 찾았다.
문학관에 들어서자 작가의 생애와 함께 문학 활동의 안내 글이 나를 맞아준다. 1924년 단편소설「새길로」로 문단에 데뷔한 이후 300편에 가까운 소설과 희곡, 수필 등을 쓴 작가의 문학관을 돌아보며 작가 생전에 몸소 겪은 일제 강점기의 시대적 아픔이 가슴으로 다가온다.
작가 채만식의 문학과 의미 있는 작가의 삶이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설 쯤 문학관을 뒤로하고 근대 문화유 산 마을로 향했다. 한 때, 잘사는 나라를 만들자고 조국의 근대화를 재촉했던 ‘근대화’와 지금 군산이 보여주고 있는 근대 문화유산 이라고 하는 ‘근대’의 용어적 의미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시대적 상황과 추구하는 지향점에서 아마도 상당한 거리가 있으리라는 용어적 혼동을 정리하지 못한 채 근대 문화유산 마을에 접어들었다.
벌써부터 찾아온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는 근대 문화마을로 들어서며 준비한 안내지도가 당시의 삶을 살아간 생활공간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우선, 군산의 근대 문화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근대 역사박물관을 방문했다. 역사박물관은 군산이 갖고 있는 근대 역사의 아픔과 군산다운 모습을 만나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제 강점기 물류 유통의 중심이었기에 전통적인 객주 문화가 생겨났고, 한강이남 최초의 화교 학교가 터를 잡은 곳임을 안내하였다. 이 때문에 자연스레 자리 잡은 화교 문화와 함께 전쟁으로 유입된 미국문화와 피난민 문화가 뒤섞인 공간임을 소개하였다. 사람과 물자가 모이고 흩어지는 교류의 중심에 있었던 항구도시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된다.
이곳 군산의 근대 역사박물관을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몸으로 직접 겪지 못한 우리의 젊은 세대들에게 일제의 수탈과 강압 그리고 우리가 감내해야 했을 역사의 무게를 가늠케 하였다.
차례로 (구)군산세관 본관 및 군산 근대 건축관을 둘러보았다. 몇몇 상징적 근대 문화마을의 공간을 둘러보면서 적산 가옥이라고 불리는 일본식 건물이 밀집한 곳에 위치한 사찰 ‘동국사’를 찾았다. 에도시대 건축 양식으로 1913년에 세워져 이 땅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본식 사찰로 36년 동안 일본인 승려가 운영했다고 한다. 사찰 ‘동국사’를 관람하면서 생각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일본인의 문화적 이질감과 이 땅에 터를 잡으며 그들의 생각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이곳 군산의 근대 유산 문화마을은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뼈아픈 역사의 현장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몇 년 전 이었든가 일본 오사카, 나라, 쿄토 지역을 여행하면서 그곳의 사찰을 방문 했을 때 느꼈던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일본의 사찰을 보는 순간, 단아하지도 편안하지도 않으며 무엇인지 모를 건축물이 만들어내는 날카로운 각도에서 위압감을 느꼈다. 같은 불교의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생각의 다름으로 표현된 건축 공간의 선과 사찰의 배치가 우리 것과는 사뭇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이곳 군산이 갖고 있는 근대문화유산 마을은 1899년 개항된 이래 일제 강점기의 침략과 수탈을 온몸으로 오롯이 견디고, 이제 살아 숨 쉬어 아픈 역사의 증거이자 유산이 되었다. 아프고 부끄러운 역사의 흔적을 굳이 지워내려 하지 않고, 곳곳에 남아 있어 길을 걷다 문득 만나게 되는 일본식 가옥과 근대의 건물들은 생경하다가도 마음을 아리게 한다. 잊어서는 안 될 역사가 있고, 일제의 침략과 수탈의 상징이자 우리의 것을 빼앗긴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팠던 세월이 내려앉아 이야기가 되고, 한편의 시가 되고, 기억속의 역사를 몸으로 체험하는 문화유산 마을 거리가 되었다.
발길을 돌려 한 때는 해상 물류 유통의 중심지였던 군산 내항을 찾았다. 일제 강점기 화교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중국 요리 전문점이 위치하고, 항구를 오가며 허기를 달랬을 콩나물 국밥집도 자리하고 있었다. 70년대 말 외항이 개발 되면서 사람의 발길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남아 군산 근대 문화유산 마을의 현재를 잇는 끈이 되어주고 있었다.
오래된 기억을 뒤로하고 지금 군산의 거리는 모두가 활기찬 발걸음이다. 돌아오는 길을 서두르며 잠시 무거웠던 마음이 밝아졌다. 바쁜 일정으로 둘러본 군산의 근대 문화유산 마을과 함께 학창시절 한 차례의 방문으로 추억되는 지금은 내항이라고 불리는 항구의 표정이 오버랩 된다. 아마 기억 속에 멈추어진 시간도 가을이었나 보다. 촌스런 항구에는 꽤 크다고 생각되는 배 두 세척이 정박해 있었고 작은 목선들은 파도에 몸을 맡긴 채 부두에 묶여 있었다. 붉게 익은 홍시를 파는 아낙들은 참 많기도 하였다.
아득히 먼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며 생각은 잠시 잊어야 할 일과 잊지 말아야 할 역사가 있음을 헤아리는 데 집으로 향하는 차는 벌써 속도를 높이며 노을빛과 함께 코스모스 피어있는 들녘을 질주하고 있었다.
꼬마 사냥꾼
오 월 석
얼마 전에 동생이 새그물을 사왔다. 새그물을 두 개의 대나무에 양쪽으로 나누어 묶은 다음, 앞산 가시덤불을 위아래로 가로질러 꽂아 놓았다. 대나무의 길이는 대략 3m 정도 되었다. 동생의 사냥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가을에 참새가 우리의 쌀을 노획했기 때문이었다. 또 참새는 텃새라서 다른 곳으로 가지도 않는다. ‘짹짹’이며 날아다니는 무리가 수 백 마리나 되어 내년에는 더 큰 피해가 우려된다. 동생은 최대한 참새의 숫자를 줄여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놈의 참새는 벼가 다 영글기 전, 볏모가지에 앉아 액체 상태인 벼알갱이를 작고 야무진 부리로 쪽쪽 빨아 먹는다. 비록 참새가 덩치가 작다고는 하지만 워낙 많은 숫자가 기동력 있게 날아다니며 먹어대니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물론 적정량의 참새는 필요하다.
1950년대 중국에서 모택동 주석이 정권을 잡은 후 식량을 축내는 참새를 모조리 없애라는 말에 농민들이 농약, 덫 등으로 참새의 씨를 말리다시피 했는데 이듬해에 메뚜기가 창궐하여 농산물을 먹어치워 기근으로 죽은 사람이 엄청났다는 사건은 유명하다.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면 엄청난 재앙이 찾아올 수 있음을 알려주는 예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일주일이 지나도 참새는 그물에 걸리지 않았다. 어설픈 사냥꾼을 비웃듯 참새는 새그물을 농락하며 요리조리 피하며 잘도 날아다녔다. 사실 전문사냥꾼은 따로 있었다. 이미 30년도 더 지나 공소시효도 지났으니 꼬마사냥꾼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사냥은 겨울에 이루어진다. 나뭇잎이 울창한 여름과 가을은 사냥하기에 좋은 조건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먹이가 풍부할 때는 동물들이 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거리를 두고 깊은 산 속에 산다. 산 속에 먹을 것이 부족하니 위험을 무릅쓰고 마을 근처까지 내려오는 것이다. 특히 눈이 많이 내리면 사냥은 더욱 쉬워진다. 하얀 눈이 동물들의 먹이를 다 감춰버려 더욱 굶주리게 된 동물들은 인가까지 접근한다. 또 동물들의 발자국을 통해서 이동경로를 파악할 수 있다.
우리들의 사냥은 겨울방학을 시작함과 동시에 이루어 졌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우리 집에서 두 집 건너에 살고 계신 말 못하시는 아저씨가 양손에 산토끼를 들고 오시는 모습을 목격했다. 우리 형제들은 그 아저씨가 너무 부러웠다.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나 잡으시다니, 사실 그 아저씨는 동네에서 유명한 사냥꾼이시다. 아저씨는 어려서 약을 잘못 먹어서 말을 못하게 되셨단다.
우리 집에는 진돗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정말 똑똑했다. 동생이 이름을 ‘진돌이’라고 지었다. 동생이 자기가 먹을 과자를 아껴 훈련을 시켰는데 웬만한 동작은 다할 수 있었다. 진돌이는 ‘앉아’, ‘일어서’, ‘엎드려’, ‘먹지마’, ‘앞발’ 정도는 다 알아듣고 행동했다. 무엇보다도 묶어 놓지 않아도 닭이나 염소, 오리 등 가축은 해치지 않았는데 쥐, 까치, 꿩 등에게는 추상(秋霜)같았다. 아무리 멀리서도 우리들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쏜살처럼 달려왔다. 진돌이는 험한 산속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든든한 보디 가드였다. 우리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산토끼사냥을 시작했다. 산토끼를 잡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었다. 물론 총으로 잡는 방법까지 네 가지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첫 번째 방법은 산토끼가 다니는 길목에 큰 돌을 비스듬하게 45도로 기울여서 칡넝쿨로 묶어 두면 배고픈 산토끼가 칡을 갉아 먹다가 압사하게 해서 잡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철물점에서 덫을 사서 산토끼가 다니는 길에 놓아 발목을 채이게 해서 잡는 것이다. 마지막 방법은 산토끼가 다니는 비교적 넓은 공간을 나뭇가지를 세워 꽂아서 막고, 좁은 길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동그랗게 토끼 머리가 들어갈 정도의 올가미를 만들어 설치하는 것이다. 올가미 재료는 예전에 동네 방송을 하기 위해 설치했던 고물 삐삐선을 사용했다. 이 방법은 산토끼가 전진만 하고 후진을 못하는 특성을 이용한 것이다. 삐삐선 한 쪽 끝을 큰 나무뭉치에 묶어 놓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냥 첫날,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방법으로 여러 군데에 올가미를 설치하고 돌아오던 중 동생이 죽은 산토끼가 있다고 아버지께 알리자 아버지께서는 신속히 달려가서 잡으셨다. 알고 보니 햇볕이 따뜻한 곳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산토끼를 잡은 것이다. 묵직한 산토끼를 들고서 우리는 쾌재를 부르며 어깨가 으쓱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도 늘 이용하는 도로가 있듯, 산토끼도 자기가 다니는 길이 있어서 사냥꾼들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들은 산에서 산토끼, 고라니, 너구리, 멧돼지 등 야생동물의 배설물을 많이 보았고, 혹시 잡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하며 산을 헤매고 돌아다녔다. 대부분의 야생동물은 인간들을 피해서 돌아다니다 보니 야행성이 된 것 같다. 우리들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올가미를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우리도 자주 다니다보니, 보는 눈이 생겨서 겨울방학 동안 네 마리를 잡는 성과를 거두었다.
할아버지께서 새그물을 사주셨고 손자인 우리 두 사람은 사냥꾼이 되었다. 새그물은 그 당시 3칸짜리는 500원, 4칸짜리는 1,000원이었다. 집 뒤에서 자라는 굵은 대나무를 잘라서 새그물을 묶고서 둘이 한 쪽씩 들고 덤불을 찾아 다녔다. 우리는 새그물을 3개 정도 운영했다. 처음에는 대나무를 돌로 받쳐서 놓았는데 바람이 세게 불면 가시덤불로 넘어져 그물을 버려야 하기도 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최종적으로 진화한 방법은 쇠철장으로 땅을 찍어 40cm 깊이로 구멍을 파서 대나무 기둥을 꽂아 넣는 것이었다. 새는 일반적으로 아침과 저녁에 많이 활동을 한다. 새들은 가시덤불을 좋아하는데 아마도 내 생각으로는 다른 포식자로부터 작은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우리는 날아가는 새보다는 가시덤불로 날아오는 새들을 공략하였다. 날아가다 그물에 걸린 새는 발버둥을 치다가 더 엉켜서 못 움직이게 된다. 낮게 날다가 걸린 새를 고양이나 너구리가 가져가기도 한다. 그래서 적당한 높이로 그물을 설치하는 것이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찢어지지 않게 새를 빼내지 않으면 새그물을 망치고 만다. 처음에는 새가 그물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모양을 보면 어떻게 빼나 한숨이 나왔었는데 여러 번 하다 보니 그것도 익숙해졌다. 우리들은 한 해에 40마리 정도를 잡아서 할아버지께 바친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뱀과 악연이 있다. 수년 간 뱀을 잡으며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일을 여러 번 겪었다. 한국에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동물은 많지 않다. 봄에 멧돼지를 만나서 생명을 잃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매우 드물다. 지네도 독이 있긴 하지만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을 정도는 아니다. 뱀에 물리면 혈관을 통해서 심장으로 독이 전달되어 마비증상이 일어나 죽음에 까지 이른다. 물론 뱀독이 수술할 때 마취용으로 쓰여 사람에게 유용하게 쓰이기도 한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낫으로 풀을 베다가 엄지손가락을 독사에게 물린 적이 있다고 하셨다. 동네 아저씨들도 여러 명 독사에 물렸다는 소식을 간혹 들었다. 나는 어떤 이유로든 뱀에게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보는 즉시 잡아버리곤 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집에서 학교까지 4km 가량을 걸어 다녔는데 중간 지점에 집 한 채가 있었다. 벽에는 빨간 글씨로 크게 ‘뱀탕’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당시에는 할아버지께서는 몸에 보신이 된다고 해서 독사를 잡으면 약탕기에 푹 끓여서 드셨다. 나는 뱀을 잡으며 내게 초능력이 있는 것을 실제로 경험했다.
우리가 농사짓는 밤나무산 중턱에 아버지께서 향어와 잉어를 키우셨는데 어장 깊이는 내 명치정도 닿았다. 우리 형제는 물고기 사료를 주려고 갔는데 독사가 스르륵 어장을 헤엄쳐 산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나는 나뭇가지로 못 도망가게 하면서 동생에게 집에 가서 물고기 잡는 그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동생이 그물을 가지러 달려간 사이 독사와 난 계속해서 실랑이를 했다. 독사는 매우 큰 놈이었다. 뱀이 도망가려는 것을 나는 나뭇가지로 계속해서 물에서 못 벗어나게 했다. 그런데 어장의 가장자리에 서있던 나는 순간 진흙에 미끄러져 풍덩 어장에 빠져 누워버리고 말았다. 물위에 떠있는 독사를 보니 당황스러웠고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니 짧은 순간 수 만 가지 상념이 스쳐지나갔다. 어장 바닥은 진흙이었고 나는 목이 긴 장화를 신고 그곳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미 장화에는 물이 한 가득 차있었다. 그런데 순간 나의 몸은 솟구쳐 올랐다. 도저히 이론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온 몸이 젖어 떨며 독사를 저지하고 있는 나를 본 동생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물을 받아들고 독사를 포획하고서야 동생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동생과 나는 한참을 웃었다.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이 아주 선명하게 떠오른다. 독사를 생포해서 1.5m 큰 철통에 넣고 시험 삼아 나뭇가지를 가져다대니 순식간에 열 번을 물어댔다. “이래서 독사가 무섭구나.” 라고 생각했다. 또 한 번은 유혈목이라는 뱀을 발견해서 뱀 보다 앞서 뛰어가서 서로 바라보는 형국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유혈목이가 내 얼굴에 독을 쏘는 것이었다. 그 독은 내 왼쪽 눈에 제대로 명중했다. 나는 왼쪽 눈을 감고 발로 뱀의 목 부위를 밟아서 포획했다. 뱀술을 담거나 뱀탕을 끓이더라도 상처가 나면 상품가치가 없다고 한다. 유혈목이는 초록색에 머리 부분에 빨간 줄과 검은 줄무늬가 있다. 하지만 다행히 독이 약해서 물려도 죽지 않는다고 하나 일본에서는 한 명이 유혈목이 독으로 죽었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나는 수돗물로 계속 씻었으나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실명이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약국에 가서 약사에게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니 약사 20년을 했지만 나 같은 환자는 처음이라며 항생제를 처방해 주었고 다행히 며칠 지나자 괜찮아졌다. 이번 경험을 통해서 뱀을 정면으로 마주보면 안 되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유혈목이가 아닌 독사였으면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뱀은 대가리를 공격해야 한다. 생포하려면 대가리 부분을 장화를 신고 밟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가을에 밤을 줍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시냇가에서 동물의 다급한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가 보니 누런 능구렁이가 큰 쥐의 온 몸을 둘둘 감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감았는지 쥐의 몸이 울퉁불퉁한 모양이 마치 미니 자동차 타이어를 몇 개 감아 놓은 것 같았다. 뱀은 먹이에 집착하여 내가 가까이 접근해도 도망가지 않았고 결국 나에게 포획되었다. 나는 뱀과 쥐를 함께 집게로 데구르르 굴려서 비료포대에 넣었다. 항아리에 그대로 넣어 두었더니 뱀의 배가 불룩하게 불러 있었다. 뱀을 잡는 일은 스릴은 만점인데 이제는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으련다. 밤을 줍는 집게로 뱀을 잡으면 손쉽게 생포할 수도 있다. 요즘은 독사는 잡고 유혈목이는 잡지 않는다. 특히 집근처에서 출몰하는 독사가 아이들을 물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서 불쌍하지만 살려둘 수는 없다. 어머니께서 밤을 고르고 계시다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독사에 놀라셨던 경험과 장독대에서 두 마리 독사가 씩씩 소리를 내며 어머니를 공격하려 했던 일도 있었다. 참 아찔했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한 번 뱀탕을 마셔봤는데 삼계탕 국물 맛과 비슷했다. 그날은 매번 팔씨름을 하면 막상막하였던 친구에게 팔씨름을 해보자고 했고 쉽게 이겼다. 뱀탕이 정말 효과가 있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아마도 심리적인 효과일 것이다. 나는 뱀 사냥의 고수라고 건방은 떨지만 요즘도 뱀과 마주치면 겁나고 긴장된다.
시골에서 자라고 보니 자연과 접하며 많은 동물들을 사냥했다. 냇물에서는 여러 종류의 물고기를, 들판에서는 새와 개구리를, 산에서는 너구리, 산토끼, 꿩, 삵까지 잡았었다. 그리고 가을밤에는 겨울옷을 여러 겹 껴입고, 고무장갑을 끼고 왕벌 집, 땅벌 집을 따다가 삶아 먹기도 했다. 벌집 끓인 물은 한약물을 달인 맛과 비슷했다. 아직 벌이 되지 않은 벌 유충을 프라이팬에 볶아 먹기도 했다. 돌무더기가 많은 산에 항아리를 넣어 놓고 닭 뼈를 넣어서 지네를 잡아보려고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다지 성과는 없었다. 나는 호기심이 충만하였고 사냥함에 편식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일들은 이미 과거의 뒤안길로 사라진 꼬마사냥꾼의 이야기이다. 꼬마사냥꾼도 나름 원칙이 있었는데 장난삼아 살생하지는 않았다.
나는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자연이 살아 숨 쉬는 몽골이나 북극 등의 땅에서 벌어지는 사람과 동물들의 치열한 삶 속에서 사냥꾼들의 삶은 나의 오감을 자극한다. 나는 이런 종류의 다큐멘터리를 넋을 놓고 보곤 한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꼬마사냥꾼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일까?
낯선 손님
낯선 사람과의 만남은 긴장감을 준다. 그리고 일정 시간 상대방을 파악하며 어색한 시간을 보내는데, 그 짧은 시간을 못 견뎌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낯선 만남에서 짜릿한 느낌을 받는다. 주위에서 매일 만나는 사람들은 헤어스타일이나 새로 산 옷 등으로 신선함을 주지만, 새로 만나는 사람은 나의 오감에 맑은 산소를 공급해 준다. 내가 보기에 일반적인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기의 영역을 좁히며 안정적인 만남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
왕년에 대인관계가 좋아서 이틀이 멀다하고 술을 마시던 형님들도 중년에 이르러서 가정에 충실하고 심지어 집에서 통 나가려 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영역을 좁혀 가정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나이가 들면서 현명해지다 보니 제일 중요한 식구들에게 자신의 에너지를 쓰겠다는 생각은 옳다고 본다.
나는 성격이 비교적 밝은 편이라서 남녀노소 누구를 만나도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다 똑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가 누구든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한국어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에 거리낌이 없다. 그런데 일부분 사람들은 한국어를 잘 구사하면서도 낯선 사람과의 만남을 꺼리고,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낮아 자기와 거리가 있다는 핑계로 만남을 피한다.
나는 도전정신이 강한 편이다. 대학교 다닐 때는 학과생활 외에도 취미생활을 해야겠다 싶어서 서예동아리를 찾아갔다. 서예동아리는 동적인 세상에 정적인 모임을 하고 있어, 나와 좀 괴리감이 있었으나 어색한 만남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서예를 하고 또 서예를 인연으로 만났던 사람들과 20년 가까이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대학시절에는 학우들이 시골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단련된 나의 몸을 보고 사람들이 ‘근육맨’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지금은 그 근육들이 만유인력에 이끌려 계속 쳐지고 있다.
나는 대학 다닐 때 2박 3일을 걸어서 해발 1,917m나 되는 지리산 천왕봉에 네 번 올랐다. 정상에서는 아무리 ‘야호’ 소리를 질러도 메아리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이는 농담으로 2시간 뒤에 한라산에 부딪쳐 돌아온다고 하는데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다. 천왕봉은 소리를 무한정 먹어 치우는 블랙홀 같은 산이다. 나는 지인들에게 조금이라도 젊어서 천왕봉에 오르라고 추천한다.
1999년 떠난 중국유학생활도 도전정신이 한 몫 하였고 농사일을 하시는 부모님의 경제형편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어렸었던 모양이다. 16년이나 지난 지금도 1년 농사를 지어 보았자 남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감당하셨는지 부모님의 노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2016년 봄에 작고하신 고(故) 신영복 선생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하늘의 비행기가 속력에 의하여 떠 있음을 알 수 있듯이, 생활의 지향과 속력이 없으면 생활의 제(諸) 측면이 일관되게 정돈 될 수가 없음은 물론, 자신의 역량마저 풍화되어 무력해지는 법입니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가슴에 ‘찡’ 하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왜냐하면 내가 인생을 재밌게 살려고 도전했던 일련의 모든 일이 이 문장과 맥을 같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영복 선생은 감사하게도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주신 것이었다. 나는 삶의 동력을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찾아보려고 했다. 그래서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을 구상했고, 그들과의 의사소통은 모국어인 한국어도 아니고, 전공분야인 중국어도 아닌 영어를 구사하는 학생들과의 만남에 도전하였다. 유학생을 관리하는 부서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연스럽게 외국 유학생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유학생들에게는 한국의 가정을 방문하여 한국문화를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고, 두 아들들과 시골에 계신 부모님들과 식구들에게는 외국인과 만날 수 있는 장(場)을 마련하였다. 처음에 부모님께서는 낯선 사람을 집에 들이는 것을 무척 부담스러워 하셨다. 대전의 작은 아파트에서 유학생들에게 새로운 한국문화를 알려주는 것은 무의미하였다. 그래서 나는 한국농촌생활을 경험할 수 있는 인프라가 확실하게 갖추어져 있는 시골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나의 도전은 2014년 봄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키가 1m 86cm 정도 되는 미국인 크리스에게 어설픈 영어로 말을 걸었다. 한국농촌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지, 1박 2일로 가고 싶은 지를 물었는데 의외로 이 친구는 흔쾌히 가겠다고 답했다. 미국인 또한 나만큼이나 호기심이 많은 것 같았다.
금요일 저녁에 먼저 아이들이 태권도를 배우는 도장에 갔다. 태권도가 한국인의 무술을 대표하기에 보여주고자 했다. 태권도장에서 많은 어린이들이 엄청난 덩치에 흑인을 보고 신기해하며 쳐다보는 것이다. 두 아들들은 외국 삼촌과 인사하며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 같았다. 슈퍼마켓에서 삼겹살과 술을 사서 시골로 출발했다. 고향집에 도착해보니 아버지께서는 이미 마당에 참나무 숯불을 피워놓고 계셨다. 부모님은 낯선 손님과의 어색한 만남을 뒤로 한 채, 이내 평정심을 찾으시고 숯불에 돼지고기를 구우며 술을 권하시는 등 자연스럽게 행동해 주셨다. 아이들도 외국 삼촌과 손을 잡고 놀기도 하고, 고기도 먹으면서 분위기는 금세 자연스러워졌다. 아버지께서는 지나가는 동네 아저씨들도 불러 들이셔서 술을 권하시며 서로 말보다는 웃음을 ‘허허’ 지으시며 술을 드셨다. 한참 술을 마시던 중, 어두운 하늘에 도깨비불이 한 개, 두 개 떠올랐다. 모두들 신기해했다. 혹시 유성일까 생각해 보았지만 속도가 너무 느렸다. 모두들 궁금증을 간직한 채 핸드폰 사진을 눌러댔다.
크리스에게는 아궁이에 불을 태워 난방을 하는 온돌방을 내주었다. 다음날은 동네에 같이 살고 있는 이종사촌형네 집에 못자리를 도우러 갔다. 농촌 경험은 몸으로 해야 기억에 오래 남는다고 생각하고 크리스와 같이 갔다. 모두들 낯선 흑인 유학생과의 만남을 어색해 했지만 키도 크고 성실하게 일하는 크리스에게 친근한 미소를 계속 날려주었다. 새참 시간에 봉고차를 타고 공주에 있는 청주해장국집에 가서 국밥 안주에 소주를 마셨는데 크리스도 세 잔 받아 마셨다. 크리스는 씁쓸한 소주를 받아 마시긴 했지만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 한국인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외국 친구가 농촌 생활에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고 흐뭇했다.
나와 크리스는 식구들과의 단체사진을 끝으로 1박 2일의 농촌체험을 끝내고 대전으로 향했다. 한 가지 좀 아쉬운 것은 크리스가 미국으로 돌아가기까지 거의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난 마음속으로 이 친구가 나에게 서운했었나 하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친구가 대농민인 이종사촌형네서 하루에 5천판이나 되는 못자리판을 나르며 무척 힘들어 했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사람이 같이 했지만 농사일에 경험이 많은 나도 온 몸이 뻐근했는데, 처음 경험한 친구가 오죽했겠나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귀국하기 전에 사무실에 들렀는데 내가 사무실에 없었다.
2015년에는 새로운 친구들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봄이 되자 앞산에 울긋불긋 진달래꽃이 피어서 농촌의 운치를 더했다. 나의 검은색 쏘렌토에서 내린 외국 친구 5명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교환학생이었다. 눈이 크고, 피부가 하얗고, 키가 큰 금발머리 인디라, 청순가련형의 얼굴에 갈색머리를 하고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질로라, 구렛나루가 헐리우드 배우 같은 노덜존, 한국의 40대 후반 아저씨풍이 느껴지는 자혼기르, 마지막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이국적인 느낌이 가장 강한 바크홈이 내 고향 공주에 온 것이다. 이 친구들은 우즈베키스탄 전통 도자기 접시를 부모님께 선물로 드리며 초청에 대해 감사함을 표했다. 먼저 학생들에게 동네를 한 바퀴 투어를 시켰다. 한국의 가옥, 농기구, 한국의 맛을 이끌어내는 장항아리를 구경하며 신기해했다. 유학생들은 건축학과 전공이라서 집의 모양을 호기심을 갖고 보는 것 같았다.
우리들이 동네를 둘러보는 사이, 호기심 많은 한 무리의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나타나서 낯선 외국인들을 맞이했다. 아버지께서는 마당에 장작불을 피워 놓으셨고 큰 동생은 대전 농수산물 시장에서 닭꼬치를 비롯하여 구워 먹을 것을 준비했다. 요리 솜씨가 좋은 작은 동생은 샤브샤브 육수를 직접 만들고, 갖가지 야채에 얇게 썬 쇠고기까지 준비했다. 나의 35년 지기 친구는 마실 것을 사왔다. 모두들 외국 친구들과 맥주와 소주를 마시며 깜깜한 밤 화려한 가든파티를 상상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슬람교를 믿는 학생들의 문화를 존중하여 돼지고기는 삼갔다. 그런데 우리 식구들의 예상이 빗나가기 시작했다. 우즈베키스탄 학생들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고 자혼기르라는 학생은 서쪽이 어딘가를 묻더니 사랑방에 들어가서 기도를 시작했다. 유난히 종교적인 믿음이 강한 친구였다. 서쪽을 향해 절하는 모습이 유리창에 희미하게 비쳤고 그의 기도는 30분 이상 계속되었다. 설마 대학생이 술을 안마시겠냐고 생각했던 동생들과 친구는 진짜 술은 입에 대지 않는 학생들을 보고 실망하는 눈치였다. 학생의 기도가 길어질수록 실망은 더 커지고 있었다. 오히려 학생들은 어린 내 아들들과 더 어린 조카들과 어울려 방에서 게임을 하며 즐거워했다. 서로 부어라 마셔라 하며 알코올을 통해서 국제교류를 꽃피워 보려는 동생들과 친구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미 수차례 중국 유학생들과 농사일도 같이하고 즐겁게 어울려 본 동생들이었기에 기대가 이번 우즈베키스탄 학생들과의 만남도 그럴 것이라 예상했던 모양이다. 사실 나도 처음이라 그들의 문화를 몰랐다. 어찌되었든 내가 우리식구들의 국제화에 한 몫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부모님께서는 비록 영어는 못하시지만 행동 언어로 학생들과 의사소통을 하셨고 아이들도 몸짓으로 자기의 뜻을 피력하였다. 그 어색한 몸짓들이 나를 흐믓하게 했다. 여학생 두 명은 안쪽 방에서, 남학생 세 명은 밖의 사랑방에서 비교적 일찍 취침했다. 외국 손님들은 모두 일찌감치 꿈나라에 갔고, 우리는 서로 히히덕거리며 웃고 마시며 술 나라에 들어갔다.
내가 한 번은 외암민속마을에 갔을 때 치자로 천연염색을 한 노란손수건을 두 개 사서 자가용 운전석 오른쪽 팔걸이 서랍에 넣어 놓았다. 질로라와 인디라에게 주려고 사 놓은 작은 선물이었다. 그런데 2015년 6월 중순, 메르스가 창궐하던 시기에 3주간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결국 만나지 못하고 선물을 전달하지 못한 채, 아직도 넣어 놓고 다닌다. 사무실 최 선생이 우즈베키스탄에 출장을 갔을 때, 다섯 명 모두 2시간 이상 떨어진 곳에서 달려와 식사를 대접했다고 한다.
2016년 가을, 나는 두 명의 가나 출신 유학생을 초대했다. 공주지역은 온 산이 밤나무로 뒤덮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학생 축구대회를 치루며 알게 된 가나 학생은 자기도 농촌 출신인데 한국 농촌을 가보고 싶다고 했다. 자기 고향에서는 옥수수를 재배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알밤 줍기 체험을 할 생각으로 1박 2일 일정으로 공주에 갔다. 2년 전에 흑인 유학생을 만나본 적이 있으신 부모님께서는 이전보다 더 자연스럽게 유학생을 맞이하셨다. 이미 여러 번 유학생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국제화가 되신 모양이다. 아버지께서는 가나 학생들에게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지 형제자매는 몇 명인지 물으셨고, 난 어설픈 영어실력으로 통역사가 되었다. 학생들은 빨갛게 양념된 김치를 너무 잘 먹었다. 매운 것을 좋아 한다고 계속해서 김치를 먹었다. 밥보다 김치를 더 많이 먹는 것 같았다. 학생들은 한국에서 먹어본 김치 중에 가장 맛있다고 수차례 얘기했고, 듣고 계시던 어머니께서는 미소를 지으셨다. 둘째 날, 산에 밥을 담을 비료포대와 집게를 들고 장갑을 낀 후 산에 올랐다. 발갛게 떨어진 밥을 주우며 신기해하는 학생들을 보았다. 이번에는 너무 어렵게 일을 하지 말고 체험하는 수준에서 일을 하려고 했는데 주울 밤이 너무 많았다. 학생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밤을 주웠다. 밤을 줍는 일은 단순노동이라서 집게로 밤을 주워 포대에 담기만 하면 되는데, 처음 30분 정도는 재밌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면 허리와 무릎에 통증이 느껴진다. 처음 줍는 사람들은 빨간 밤의 유혹에 이끌려 두세 시간을 줍고 나서 다음날 몸살이 나기 일쑤다. 온몸이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아픈 경험을 하고서야 농민들의 노고를 알게 되는 것이다. 세 시간 이상을 주웠다. 내가 힘들지 않느냐고 몇 번 물어 보았는데 재미있다고만 한다. 아프리카 농촌에서 하는 일에 비하면 쉬운 일인가? 하여간 너무도 성실하게 줍는 모습을 보고 새삼 놀랐다.
점심식사 때도 가나 친구들의 김치사랑은 식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개밥을 주러 가시는데 큰 아들이 외국 삼촌들을 데리고 갔다. 개밥을 다 주고 돌아오신 아버지의 얼굴에 화색이 만연했다. 손자가 영어 학원을 다니더니 할아버지 통역을 해 주셨다고 너무 뿌듯하시다는 것이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유학생들에게는 한국 농촌체험이 자신의 경험을 쌓는데 도움이 될 것이고 부모님과 아들들에게는 글로벌한 세상을 만나게 되니 굳이 이해득실을 따지라면 얻는 것이 훨씬 많다고 볼 수 있다.
나의 도전정신은 항상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향해 있다. 나의 가치관 중 한 가지는 살면서 조금은 귀찮더라도 가슴 뛰는 일을 찾아서 경험해 보자는 것이다. 동생들과 친구 넷이서 10만원씩 갹출하여 구입한 빔 프로젝트로 사랑방 영화관을 만들어 우리들의 삶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고, 또 한 여름이면 집 마당에 한 달 정도 개장하는 가로 2m, 세로 4m, 수심 1m의 수영장은 지하 100m 지하수를 끌어 올려 채운다. 너무 차가워서 아무리 더운 여름에도 오랫동안 들어가 있을 수 없다. 우리 집 마당 수영장에서는 여름의 무더위가 존재할 수 없다. 낮에는 아이들이 놀고 밤에는 어른들이 들어가서 더위를 식힌다.
내가 욕심이 너무 많은 걸까? 올해 한 가지 마지막 계획을 세우고 있다. 어머니께서는 나의 도전을 걱정하시지만 평범한 시민이 누리기에는 호사스런 일을 한 번 해보고 싶다. 물론 금전적인 투자가 필요하지만 나의 마음은 지난봄부터 한 곳을 향해 있었다. 바로 ‘미니골프장’을 만드는 것이다. 시냇물을 가로질러 철관을 걸쳐야 하고, 여섯 개의 기둥을 세우고, 용접 전문가 초빙, 원목 인테리어 전문가 초빙, 사촌형의 포클레인 지원, 선배님과 친구의 골프채 지원, 골프공은 고모부 동생께서 이미 두 박스를 주셨다. 나는 지인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유토피아를 만들고 있다. 나의 최대 조력자는 아버지이시다. 내가 얼핏 말씀드렸는데 이미 동네 아저씨와 철기둥, 각종 부품, 골프망의 가격과 구입 장소를 물색하고 다니셨다. 내가 나의 아들들에게 이렇게 잘해 줄 수 있을까 생각하니 아버지께 더욱 감사한 생각이 든다. 요즘은 방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어떻게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낼까라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는다. 나의 이러한 행동이 남들이 보기에 집착일지라도 나는 도전정신이라 생각하고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은 또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같으니 나는 삶을 일관성 있게 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 유학생들은 수차례 우리 집에 와서 물고기도 잡아서 매운탕을 끓여 먹고, 논에 냄새나는 닭똥도 뿌리기도 하고, 알밤을 줍기도 하고, 더운 여름에는 집 앞에 있는 정자에서 모기장을 설치하고 잠을 자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중국, 미국, 우즈베키스탄, 가나 학생들이 우리 집에서 한국의 김치 맛을 경험했다.
10월에는 공주교대에 재학 중인 외국인들을 데리고 한국초등교육 현장을 체험한 적이 있다. 인도네시아 교환학생 6명이 참가했고 나는 또 어설픈 영어로 그들에게 말을 건넸다. 한국 농촌을 경험하고 싶느냐고.
살빼기
대전시 월평동에는 맥주 맛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있다. 바이젠하우스는 독일식 맥주를 직접 가게에서 생산한다. 가게는 지하 1층에 자리하고 있으며, 200명 까지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나는 처음 이 가게에 들어섰을 때 웅장한 맥주제조 설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카운터 뒤쪽에는 은색이 반짝이는 스테인레스 맥주 탱크들이 여러 개 버티고 서 있었다. 맥주제조 탱크는 칡넝쿨처럼 수많은 파이프들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맥주 탱크 앞쪽에는 수도꼭지처럼 맥주꼭지가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맥주 이름이 독특해서 외우기가 번거로웠다. 독일식 맥주는 바이스, 둥글레스, 헬레스, 페어에일 이렇게 네 종류가 있었고, 낯익은 국내산도 세 종류나 있었다. 가격은 1인당 12,000원이며 저녁 6시에서 10시까지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다. 맥주 매니아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첫 잔은 종업원이 가져다주고 두 번째 잔부터는 직접 가져다 마셔야 한다. 안주는 단품으로 취향에 맞춰 시켜서 먹는 시스템이다. 탁자와 의자가 원목으로 꾸며져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백열등 불빛이 탁자 바로 윗 쪽에서 은은하게 쏟아져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인들끼리 옹기종기 모여서 얘기하기 좋게 만들어 놓았다. 전체적인 내부 인테리어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약속 시간인 7시가 되자 ‘락희세븐’ 회원들이 하나 둘 씩 모이기 시작했다. 관광가이드계의 베테랑으로 세계 수 십여 개국을 옆집 드나들 듯 하는 친구와 중국 남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대학 강의를 하고 있는 동생, 일본에서 미용기술을 갈고 닦아서 자격증을 취득하고 돌아와 노은동에서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는 동생, 작은 체구지만 택배회사를 운영하며 주도면밀하게 자기 꿈을 펼쳐가고 있는 동생, 회사일 하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주경야독하는 묵직한 바위 같은 동생, 그리고 내가 모였다. 대학교 동문 총 6명이 만든 모임이지만 우리들의 정신적인 지주이신 이 교수님을 포함해 총 7명이다. 이 교수님은 우리가 모임을 만들어 놓고 고문으로 초빙한 것이다. 우리가 모임의 취지를 말씀드렸고 교수님도 무언의 답으로 응하셨다. 처음에 모임 이름을 만들며 우여곡절이 있었다. 회원들의 갖가지 의견 중 ‘희노애락(喜怒哀樂)’도 있었으나 여러 명의 의견을 조합하여 ‘즐겁고 기쁘다’의 ‘락희(樂喜)’를 취했다. ‘락희’는 영어로 ‘LUCKY'라는 행운의 의미를 품고 있다. 거기에 총 7명이니 ‘세븐’을 넣으면 ‘7’ 또한 행운의 숫자이니 돈을 주고 작명해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2016년 8월 15일 밤은 교수님을 제외한 6명이 한 자리에 모여 더위를 씁쓰름한 맥주로 식히기에 좋은 날씨였다. 맥주를 수차례 갖다 마시면서 베테랑 친구와 나는 서로의 배를 바라보며 장난기가 생겨 뱃살빼기 내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어느새 40대 초반 아저씨가 된 우리는 서로의 몸매를 다시 추스릴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올해 12월 30일까지 10킬로그램씩 빼자고 했고, 이기는 사람에게 푸짐한 저녁을 대접하기로 했다. 택배사장인 동생은 한 수 더 떠서 형들이 둘 다 10킬로그램씩 빼면 자기가 한 턱 쏜다고 한다. 갑자기 둘이 연합 전선을 펼칠 수도 있는 좋은 장이 되었다. 둘 다 열심히 빼서 좋은 결과를 만들자고 다짐했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밤이 ‘즐겁고 기쁘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지나갔다. 우리들의 경쟁은 장난처럼 시작되었다.
나는 운동하기 좋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얼마 전에 구입한 조깅용 운동화를 신었다. 볼록 나온 뱃살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부터 너무 무리하면 지친다는 생각에 천천히 걷기부터 시작했다. 4개월간의 긴 여정을 100미터 달리기로 시작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반석천을 길게 원형으로 둘러놓은 산책길은 운동하기에 최적의 장소라 생각되었다. 반석천 둘레길이 총 6.7킬로미터라고 하는데 우리 집에서 바라볼 때 어두운 왼쪽 노선보다는 가로등이 밝은 오른쪽을 선택했다. 그 길은 집에서 걸어서 2분이면 닿을 수 있고 자동차 소리와 매연이 없어서 좋았다. 매일 저녁 30분 정도 운동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나는 수차례 급하게 서두르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친구와의 경쟁보다는 건강한 몸을 만들고 싶었다. 나는 수년간 사촌동생들에게 마음만 먹으면 뱃살 금방 뺀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동생들은 “형이 또 허풍떨고 있네” 정도로 받아 들였었다. 이번을 친구와의 살빼기를 계기로 동생들에게 신뢰도를 회복할 있는 기회로 삼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매일 저녁 즐거운 마음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3킬로미터를 속보로 걸으면 30분 정도 걸린다. 반석천을 걷다보면 운동효과 외에 덤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수풀에서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와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귀를 씻어준다. 나는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운동하는 분들에게 자연이 선사한 바람소리, 풀벌레의 합주를 들으라고 권하고 싶다. 시냇물 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송사리와 가끔씩 나타나는 청둥오리 한 쌍이 눈의 피로를 풀어준다. 수풀이 우거진 길을 지날 때면 뱀이 나타날까 조심하며 걸었다. 몇 년 전에 산책하다가 뱀에 물린 아주머니가 있다는 말이 반석동에 회자되기도 하였고 나와 뱀은 악연이 있어서 특히 조심한다. 혼자서 고독의 워킹을 하다보면 외롭다는 생각이 문득 들곤 한다. 식구들과 같이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큰 아들들을 데리고 가기도 했는데 운동효과가 떨어지는데다가 작은 아들은 힘들다고 업어달라고 한다. 물론 아이들과 하는 운동도 나름의 재미가 있으나 너무 늦은 시간에 하다보니,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었다. 운동하는 사람의 80%가 여성이었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은 둘 이상씩 짝지어서 운동과 수다를 병행했다. 남성들보다 수명이 긴 이유가 있었다. 내가 빠르게 걷다보니 그들을 추월하게 되는데 곁을 지날 때는 소리가 들렸다가 이내 작아져 안 들렸다. 반석천에서 운동하며 지인들에게 반석동으로 이사를 오라는 말을 많이 했다. 대전시에는 150만 명이 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지만 시골의 맛을 느낄 수 있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을 산책하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 나는 운동에 재미를 더하기 위해서 몇 가지 규칙을 정했다. 신호등을 만나면 허리운동을 하고 일부 구간은 가볍게 뛰고, 또 집에서 가까운 직선구간에서는 전력질주를 한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는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운동하는 것이다.
살빼기는 밖에서 뿐만 아니라 집안에서도 계속되었다. ‘일석삼조’를 누리는 나의 방법을 소개하면 이불을 깔고 반드시 누워서 양다리를 45도 정도 든다. 군대에서 단체 기압을 받을 때 자주 했던 자세다. 핸드폰을 켜고 ‘유투브’에서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공연을 본다. 수백억 건 조회를 한 공연을 보며 신기한 세계를 접하는데 배우는 게 많다. 돈을 주고 봐야할 것 같은 공연도 많다. 나는 미국이나 영국의 공연을 자주 보는데 왜냐하면 영어회화능력을 키우고 싶어서이다. 50살까지 목표가 외국인과 간단히 의사소통할 수 있는 수준의 영어회화를 구사하는 것이다. 운동하고, 좋은 공연도 보고, 영어회화를 공부하면 ‘일석삼조’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나의 즐거운 노력은 11월 말 현재 체중계를 5킬로그램을 감량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아직도 5킬로그램이 남았다. 뱃살은 쏙 들어가서 허리띠가 두 칸 줄어들었지만 지속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살빼기를 방해하는 복병이 두 가지가 있었다. 평소 보다 얼굴이 야윈 아들을 본 부모님이 합의하셔서 보약을 해주신다는 것을 말렸다. 대신 주말에 집에 가면 몸보신용 갖가지 음식들을 준비해 주신다. 그리고 비교적 자주 가는 중국출장에서 나의 몸무게는 1킬로그램 이상씩 상승곡선을 탄다. 중국 내몽고자치구에 갔을 때는 호텔방에 있는 저울이 한국보다 1킬로그램 이상 덜 나가서 3킬로그램만 더 빼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었다. 하지만 귀국해서 몸무게를 재어 보니 원래대로였다. ‘네이버 박사님’께 알아보니 해발고도가 높으면 중력의 영향을 덜 받아서 몸무게가 덜 나간다고 한다. 혹시나 했는데 실망하고 말았다.
며칠 전 오랜만에 다시 반석천 둘레길을 돌았다. 그런데 너무 조용했다. 날씨가 춥고 서리까지 내려 풀벌레 합창단이 모조리 운명하신 모양이다. 벌레들은 겨울을 모르고 죽는다고 생각하니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겨울 찬바람이 손과 얼굴에 닿자 통증이 밀려왔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겠다. 아무튼 1개월 남짓 남은 친구와의 살빼기 경쟁은 재미에 또 재미를 더하며 절찬 진행 중이다.
희망 행진곡
가 원 호
한국에 큰 꿈을 갖고 온 지 어느덧 6년이 지나갔다. 나의 젊은 시간의 대부분을 이곳 대전에서 보낸 셈이다.
중국 하북성 당산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나는 한국으로 유학을 왔다. 그때는 한국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가졌었고, 한국을 알기 위해 한국어연수생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언어연수생 시절이 한참 지나갔지만, 지금까지도 나는 많은 것들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우리 중국유학생을 담임선생님들이 엄격하게 관리하셨다. 수업은 물론 학생으로서의 올바른 몸가짐과 언행, 숙식, 그리고 교우관계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관리를 해 주셨다. 선생님들이 우리 유학생들을 위한다고는 했지만, 나는 너무 엄격한 선생님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처음 부모님을 떠났고, 한국에서 좀 더 자유롭게 생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국 유학생활은 생각보다 힘들고 외로웠다. 중국에 계시는 부모님께서는 나한테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아무것도 시키지 않으셨다. 나는 음식 만드는 것, 세탁하는 것 등등 집안일을 할 줄 몰랐다. 그래서 혼자 살아야 하는 생활이 어려웠다. 제일 힘들 때는 눈물이 났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유학생들의 어려운 점을 알고 잘 챙겨 주셨고, 반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셨다. 그리고 같은 반 친구들과 모여서 회식을 하면서 많은 위로를 해 주셨다. 선생님 덕분에 같은 반 친구들과 점점 친해졌고 점점 외롭지 않게 되었다.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같이 운동을 했다. 나는 모든 운동을 다 좋아한다. 특히 스트레스가 많이 쌓일 때마다 친구들과 오랫동안 같이 농구를 하며 땀을 흘렸다. 나는 농구를 통해서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서 뛰어갈 수 있다.”는 교훈도 얻었다. 어떤 일이든지 땀을 흘리고 열심히 노력하면 못해 낼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는 앞으로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어떤 일이라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동안 많은 어려움을 이겨냈고 문제들을 잘 해결해왔다.
나는 지금 대학원에서 금융부동산학을 전공하고 있다. 대학원을 졸업하면 한국에서 3년 정도 직장을 찾아서 일을 하고 나서 중국에 돌아갈 계획이다. 나는 대학원에 처음 진학했을 때, 미래의 학계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인재가 되기 위해 나의 관심사를 반영하여 아래와 같은 계획을 세웠다. 우선, 나는 실용이나 응용의 기초는 이론지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원 1학년 때까지는 더 많은 논문과 전공 관련 도서를 통해 이론을 중심으로 기초를 쌓고, 국제무역과 관련된 이론지식을 완전히 소화 할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공부하여, 학부시절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수한 논문을 완성하기 위해서 2학년 1학기부터 논문 주제를 정하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직 국제무역 연구에 대해 깊이 있는 지식이 없지만 나 자신이 지니고 있는 관심분야를 고려하여 중국과 한국의 무역거래에 대한 연구를 한 번 해보고 싶다.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석사과정을 마치고 상황을 봐서 필요하다면 박사과정에 진학할 생각도 하고 있다. 나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모국의 발전에 하나의 작은 힘이 되고, 나 자신의 가치를 창출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무엇보다 내가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 잘 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이유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잘 알고 있고, 이에 따른 인생의 장기적인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계획한대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면서 최종 목표를 실현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국제무역 분야에 대한 전문가가 되는 것이 나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
나는 한국 유학생활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특히 한국으로 유학을 와서 이곳에서 결혼하고 살 여자 친구도 만났다. 내가 한국에서 석사학위를 받아서 좋은 직장을 얻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 사람이 좋고, 한국문화가 좋게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여자 친구를 만난 것이 한국에 와서 맞이한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나 보다 나이는 한 살 더 많지만 지금까지 6년 동안 교제해왔다. 그리고 양가 부모님께서도 서로 인사를 나누셨다. 우리 둘은 같은 경험이 있고 같은 생각을 많이 공유하고 있어 즐거운 미래의 동반자가 되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그 희망이 내 가슴속에 있어 나는 지금 행복하다. 그러기에 나는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한국에서 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남은 유학생활을 더욱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고 싶다.
소중한 시간
백 한 경(Bai Hanqing)
2009년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한국에 왔다. 지금까지 벌써 7년이 지났다. 지난 7년 동안의 생활을 생각하면 정말 어제의 일인 것만 같다. 이제 석사과정의 논문심사를 통과하였고 중국에 돌아가기 전에 나의 한국생활을 글로 추억하고자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나는 바로 한국에 왔다. 한국에 와서 처음 알게 된 도시는 바로 7년 동안 생활을 했던 ‘대전’이다. 한밭대학교의 언어 연수과정에서 1년 동안 한국어를 배웠고, 기계공학과에 입학을 했다. 입학하기 전 전공을 선택해야 할 때에는 나는 특별하게 고민하지 않고 바로 기계공학과를 선택했다. 몰론 나는 고등학교 시절 문과 출신이기 때문에 기계공학과에서 공부했을 때 여러 가지의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자동차를 좋아했기 때문에 기계공학과를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인생은 선택이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기계공학과를 선택하면서 이 길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눈물을 흘리더라도 끝까지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오늘 노력하지 않으면 내일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4년 동안 열심히 공부를 하여 2015년 2월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3월에 같은 학과의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의 생활은 학부생활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취직을 위해서 이 길을 선택했다. 2년의 대학원 생활 중에 설날과 일요일 밖에 쉬지 않고 매일 9시부터 12시까지 공부와 연구를 하였는데 몸과 마음이 정말 힘들었다. 교수님과 같이 연구를 했는데 연구결과가 잘 안 나올 때는 스트레스가 정말 많았고, 밤에 잠도 안 왔다. 가끔씩 이런 생활을 포기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였는데,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에 지도교수께서 말씀해 주신 “대학원은 너의 인생 중에서 넘어야 할 산이다.”라는 말을 되새겼다. 힘들 때 마다 지도교수의 이 말씀을 생각하고 공부와 연구를 계속 진행하였다. 이제 석사논문의 심사도 잘 통과 되었다. 정말 지도교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느낀다.
대학원에서 2년 동안의 공부와 연구를 통해서 가장 많이 배운 것은 지식뿐만 아니라 일하는 자세를 배웠다. 데이터의 수집, 정리에서부터 논문작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은 최소 3번 이상 꼼꼼하게 확인을 해야 했다. 정리한 내용 중에서 실수한 내용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식도 중요하지만, 일하는 자세를 배운 것은 나중에 사회에 진출하여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실험실 생활을 통해 책임의식도 양성하였다. 나는 담당하는 연구과제뿐만 아니라 실험실에서 팀원으로서 실험실의 모든 일을 다 책임져야 한다. 실험실에서 양성된 책임감을 나중에 회사생활 뿐만 아니라 나의 인생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유학생활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나의 한국생활을 이렇게 간단하게 글로 남긴다. 10년, 20년 후에 다시 이 글을 보게 되면 어떠한 생각이 날 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유학한 시간은 나의 인생 중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타향의 눈
유 자 함
한국생활을 시작한지도 벌써 7년째, 매년 겨울마다 눈이 내릴 때면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눈이 내리는 것은 중국에서는 설날이 다가온다는 의미로 “每逢佳节倍思亲(명절 때가 되면 더욱 가족을 그리게 된다.)”를 떠올리게 한다. 학업 또는 업무와 같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명절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요즘 시대에선 흔하게 만날 수 있다.
대전에는 벌써 올해의 첫눈이 내렸다. 낮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창밖으로 눈이 내린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지만, 겨울이 벌써 이렇게나 성큼 다가왔음에 놀라움을 느꼈다. 시간은 의식할 틈을 주지 않고 흘러가기 때문에 항상 그 흐름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할 수가 없다. 마음의 준비 없이 시간을 쫓아 다음, 그 다음으로 가다보면 시간의 빠름에 대한 감탄으로 가득 차게 된다. 오롯이 겨울을 느끼고 싶어 얇은 코트를 입고 생각 없이 문을 나선다.
거리에 나오니 눈꽃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커다란 눈송이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우산을 쓰고 있자면 세상과 단절된 기분이 들기 때문에 나는 우산 없이 거리로 나섰다. 우산을 들고 코트를 여미고, 바닥을 보며 빠르게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눈이 내리는 주말에는 추위를 피하고자 집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카페에서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수다의 장을 꽃피우기도 한다. 혹자는 추위를 잊고자 따뜻한 음식과 술로 몸을 데우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비록 내 몸은 차갑지만 마음 한켠에선 따뜻한 온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작년 겨울까지만 해도 나에게 눈이란 고향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예약하라는 신호로 내게 빨리 돌아갈 준비를 하라고 독촉하는 존재였다.
올 겨울에는 학업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여유가 없었다. 이 겨울을 가족과 함께 나누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이 소매 젖듯이 마음에 스며들어 왔다. 그래서인지, 본래는 아름다웠을 한국의 겨울을 여유롭게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대전에 갑자기 들이닥친 한 차례의 첫눈은 한 치의 틈도 없이 가로막혀 있던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익숙했던 본국의 겨울과는 또 다른 미색으로 다가와 내 마음은 눈처럼 차갑게, 눈처럼 포근하게 천천히 안정되어 갔다.
반복되는 삶 속에서, 우리는 크고 작은 무언의 압박을 받으며 살고 있다. 꽉 틀어 막힌 일과 속에서, 매 순간을 초조함과 불안함으로 안정적인 하루를 보내기보다 도전의 연속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러한 삶에 대해 불만만을 토로해 왔던 우리는 ‘不以物喜,不以己悲(호불호나 득실에 의해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마음속에 새겨두고, 이를 통해 이해득실에 따른 결과만을 고려하는 잡념을 없애고 잔잔한 수면처럼 요동치지 않는 안정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고향의 겨울도 좋고 타향의 겨울도 좋다. 모두가 아름답다. 다른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