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학생이 나간 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문간으로 나가 그 여학생의 뒷모습을 훔쳐봤다.
뒷모습도 예뻤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위해 계속 심호흡을 하며
사람들 틈에서 그 여학생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점점 멀어져가는 그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 여학생이 멀어질수록 심장의 박동도 점차 정상으로 돌아왔다.
마침내 그 여학생은 사람들 틈새로 사라지고 내 심장도, 내 얼굴색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황동규 시집을 펼쳤다.
그 여학생의 모습이 아른거려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시를 읽는 둥 마는 둥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렇게 페이지가 다 넘어갔지만 머릿속에는 단 한 구절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그 여학생이 보였다.
눈을 떴다.
그 여학생이 서서 책을 고르던 서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벌떡 일어나 그 서가 쪽으로 갔다.
그 여학생이 사 간 책을 나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던 것이다.
그 여학생이 몇 권의 학습 참고서와 함께 사 간 책은 바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란 소설집이었다.
나는 그 책을 꺼내 자리로 와서 읽기 시작했다.
음....... 사실 별 재미는 없었다.
뭔가 알 듯 말 듯 하면서 머리가 지끈거리는 책이었다.
나는 억지로 읽다가 그냥 덮어버렸다.
공부 생각에 장래 생각에 안 그래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이런 책을 읽는 그 여학생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형과 형수가 돌아왔다.
나도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형과 함께 주말에 영어와 수학 공부할 시간을 정하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서가에 도로 꽂아 놓으려고 집어 들었다.
형이 그 책을 보더니 놀람 반 웃음 반으로 환하게 말했다.
“영빈아, 너 그 책 읽었니? 어이구, 대견해라. 그래, 뭔가 좀 느껴지는 게 없었니?”
“아, 글쎄요....... 아직 몇 페이지 안 읽어서요.......”
난 형이 내가 그 책을 읽는 것에 대해 왜 그렇게 반가워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전날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내 고등학생 시절의 마지막 봄 소풍을 위해 엄청난 장을 봐오셨고
나는 공부하러 갈 때보다 더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학교에 갔다.
나는 가자마자 정호에게 화해를 청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너무 심하게 반응했던 것 같았다.
미안하다고 말하기는 쑥스러웠지만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막상 정호를 만나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괜히 정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정호도 마찬가지로 그런 내 곁으로 오려고 하지 않았다.
남수와 호진이만 우리 가운데서 왔다 갔다 하며 분위기를 띄우려고 분주했다.
“이놈들, 절대 술 마시면 안 돼! 술 마시다 걸리면 바로 퇴학이다, 알겠나?”
목적지에 도착해서 자유 시간을 주면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소리쳤고
우리는 우렁차게 “예!”라고 대답함으로써 선생님들의 기대에 호응해주었다.
하지만 몇몇은 분명 술을 마실 것이다.
그 학생들을 모범생과 문제 학생, 공부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 등의 이분법으로 구분할 수는 없었다.
시골에서는 제사다 뭐다 집안 행사가 있을 때 우리 또래에게도 음복을 권하며 술을 허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시골에서 우리 학교에 오는 아이들은 이미 집안에서 어른 대접을 받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이미 술을 아는 것은 물론 주량도 제법인 아이들도 많았다.
게다가 우리는 고3인 것이다.
고달픈 입시 준비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찌들은 고3이
꽃이 만발한 봄 동산에서 술 한잔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면,
그래서 대학 입시에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면 선생님들이 못 본 척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도가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선생님들의 감시는 학교에 있을 때보다 훨씬 느슨했고
그 틈을 타 막걸리나 소주를 서로 돌려가며 한 모금씩 마시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른 점심을 먹은 우리는 누군가가 가져온 야외 전축의 음악에 몸을 맡겨 신나게 춤을 추었다.
Dizzy. I`m so dizzy my head is spinnin`.......(5)
우리는 정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몸을 흔들어댔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우르르 모여들어 단체로 사진을 찍었고
누군가가 기타를 치기 시작하면 어울려 같이 노래를 불렀다.
누구는 씨름을 하고 누구는 권투를 했으며 어떤 애들은 경사진 산비탈에서 기어코 축구를 하겠다고 법석을 떨었다.
나는 시끄럽고 복잡한 본진에서 벗어나 한적한 언덕의 풀밭에 드러누웠다.
정호에게 사과를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한나절이 다 지나가도록 사과는커녕 말 한 마디 나눠보질 못했다.
처음에는 정호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생각이 시작되었지만 생각이 거듭될수록 정호에 대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기가 먼저 말을 걸어올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왜 내가 먼저 말을 걸고 사과를 해야 한단 말인가.
결국 풀어지려던 마음이 다시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나는 풀밭에 누운 채로 흘러가는 구름을 보았다.
문득 그 여학생의 모습이 구름 사이로 떠올랐다.
가슴에 바람이 들어가면서 몸이 둥둥 뜨는 것 같았다.
그 여학생과 마주쳤던 두 번의 장면이 눈앞을 스쳐갔다.
또 볼 수 있겠지 하는 기대와 못 보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내 머릿속에서 서로 엎치락뒤치락 자리싸움을 했다.
다음에 만나면 어떻게든지 말을 붙여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혼자 생각만 하다가는 영영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 말을 붙여보자. 근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자니 가슴은 더 세차게 뛰기 시작했고 얼굴에까지 열이 올라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 여학생의 뒷모습을 보고 그랬던 것처럼 심호흡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누군가가 언덕으로 올라와 내 옆에 누웠다.
고개를 돌려 힐끗 보니 정호였다.
정호는 아무 말 없이 팔베개를 하고 누워 하늘을 쳐다보았다.
나도 다시 고개를 바로하고 하늘을 쳐다봤다.
우리는 그렇게 천천히 모양을 바꾸며 흘러가는 구름과 그 구름 너머의 하늘만 쳐다봤다.
“난, 난 그냥, 네가 요즘 많이 힘들어하기에.......”
정호가 하늘을 쳐다보는 채로 말했다.
“근데 어제는 모처럼 밝은 네 모습 보니 기분 좋아서 그랬다....... 정말 다른 뜻은 없었고.......”
알지, 내가 왜 모르겠는가.
“미안하다, 요즘 내가 너무 예민해져 있는 거 같아.......”
“하여튼, 기분 풀고 이따 2차 가서 스트레스 확 날려버리자.”
정호는 다시 본진 쪽으로 내려갔다.
정호에 대한 분노가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어제 오늘 그렇게 고민하고 생각했던 것이 단 5분도 안 걸려 해결된 것이었다.
역시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직접 부딪쳐 해결하는 것이 훨씬 빠른 길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내가 망설이는 동안 먼저 용기를 내어 내게 말 걸어준 정호가 고마웠고 나보다 낫다 싶었다.
하늘이 훨씬 더 파랗게 보였고 5월의 봄바람은 한없이 부드럽고 따사롭게 내 얼굴을 휘감았다.
***
모든 공식 일정이 끝나고 선생님, 친구들과 헤어지자마자
우리 한심회 4명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고 있던 교련복 상의와 모자를 벗어 가방에 쑤셔 넣었다.
약속대로 모두 똑같은 티셔츠를 입은 우리는 버스를 타고 바닷가로 갔다.
우리는 사람들이 놀러오는 유원지를 지나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 한적한 바닷가 숲 속 공터에 짐을 풀었다.
우리끼리 놀러 왔지만 특별히 놀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호가 기타를 치면 같이 맞춰 노래를 부르고 쓸데없는 이야기로 소리 지르고 깔깔거리며
과자와 음료를 먹고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정호네 하숙방에서 늘 하던 일들이었다.
하지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은 붕 떠있었고 가슴은 뻥 뚫려 시원했다.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웃고 떠들며 고래고래 노래를 불렀다.
(5) Dizzy - Tommy Roe(1967)
첫댓글 한동안 둘어오지 못해 한꺼번에 세 편을 읽었네요.
선호씨의 글로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던
내 고 2의 겨울이 눈 앞에 와 아른거리기도 하구요.
다음편을 또 기다리고 있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