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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사람사는세상연구소, 해운대발전연구소" 카페
"제임스좌"님의 글을 옮겨온 것 입니다.
1910년대 해운대포구 1930년대 해운대해수욕장
1960년대 해운대해수욕장 1960년 해운대
1960년대 해운대달맞이 1960년대 운촌마을
1980년 해운대 해수욕장 2000년대 해운대 해수욕장
해운대의 변천 이야기
해운대는 많은 역사와 유적과 사연을 갖고 있는 도시입니다. 그 중에서도 해운대의 사진과 나의 기억을 통하여 변천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910년대의 해운대포구입니다. 제가 해운대 해수욕장이라고 하지 않고 해운대포구라고 한 것은 해수욕장이 시작된 것은 일제시대입니다. 그전(대한제국)까지만 해도 우리민족은 해수욕을 몰랐던 민족이었습니다. 단지 강이나 바다에서 멱을 감을 정도였지요. 그러나 바닷물에서는 잘 멱을 감지 않았습니다. 소금끼 때문이지요? 그런데 일제시대가 되면서 해수욕장이 만들어졌습니다.(일제도 서양의 문문을 받아들이면서 해수욕장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일제는 독일과 영국의 모델로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이것은 부산스토리 책에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수욕장은 바로 부산의 송도해수욕장입니다.
세 그루의 소나무 밑(앞의 소나무는 지금의 조선비취호텔자리입니다.) 바로 앞에 바위들이 보이네요, 지금도 바위들이 있지요, 그리고 넓은 해수욕장이보이고, 큰 어선 두 척이 보입니다.(바로 뒤의 초가집과 비교하면 제법 큰 어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진은 사진사가 동백섬 꼭대기에서-지금의 최치원동상 있는 곳-찍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소나무의 높이와 멀리 장산밑자락이 보인다는 것은 -당시의 사진기가 넓고 멀리 찍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원근감이 잘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배와 초가집사이가 제법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백사장의 폭이 넓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사장 앞쪽에 언덕들이 있고 그 뒤가 지금의 송림지역(방풍림임, 지금의 송림공원)이 보입니다. 자세히 보면 송림지역이 매우 길게까지 뻗어있습니다. 지금의 바다경찰서 까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또 뒤쪽에 송림지역이 보이고 또 색상이 다소 희게 보이는 송림지역이 그 뒤에 보입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초가집들이 6~7채가 보입니다. 그리고 사진 오른쪽 끝이 미포 쪽인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앞의 산이 달맞이 언덕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것이 오산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첫 송림지역과 두 번째 송림지역사이에 무슨 길 같은 것이 미포 쪽으로 쭉 보입니다. 아마 이 길이 일본인들이 만든 ‘신작로’(지금 해운대역 앞으로 이어지는 해운대의 메인도로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만든 길이라고 저희 할머니께서 말씀을 하셨고 이 길은 ‘신작로’라고 하셨습니다. 참고로 동해남부선 철길은 1935년 부산에서 포항까지 2차 개통이 됩니다.)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해운대각과 은하장 모습, 중앙에 극동호텔 건립중입니다.1964년 4월, 비포장 자갈길 이네요
해운대 소문난 갈비집,이름난 갈비집 '60년대
그리고 2차 방풍림 좌측으로 제법 크고 긴 건물이 보입니다. 지금의 온천지역 같은 데 아마 ‘해운대온천각’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본인들이 해운대온천이 좋다는 것은 신라 때부터 알고 왜구들이나 어부들이 이곳에서 온천욕을 하고 돌아갔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동래와 해운대의 온천을 적극적으로 개발합니다. 그 중에 하나인 바로 해운대온천각입니다. 아마 이곳이 온천의 노천온천의 원정(기록에 해운대에 노천온천이 있었다고 합니다.)이 있는 자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예전의 할매탕이 있었던 지금의 해운대관광센터(해운대구청앞)의 자리로 추정됩니다.(이 기록은 일본인이 쓴 ‘조선의 온천’이라는 책에 나옵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쭉 보면 제법 좋은 일본식건물들이 보이는데 고급술집(해운대암소갈비지역)들이나 일제의 관공서와 별장과 집들로 보입니다. 이곳을 통하여 일제가 해운대의 농수산물을 수탈했을 것이라는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부산지사(지금은 근대박물관)를 통해서 부산항과 관부연락선을 통해 일본으로 갔겠지요?
그 건물들 뒤로 농토와 못들이 보입니다. 지금의 좌동 신시가지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신시가지가 들어서기 전에 논과 미나리밭 그리고 탄약 창이었던 곳입니다. 우리의 친구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입니다. 아직은 동해남부선(1935년 개통)과 해운대초등학교(1937년 개교)가 생기기전입니다.
이 사진이 해운대의 개발되기 전의 원형입니다.참 아늑하고 아름다운 1910년대의 해운대 지역입니다.
1930년대의 해운대 해수욕장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아시겠지만 전부 일본인들입니다. 사진 앞에 머리에 수건을 쓴 것 형태도 전형적인 일본이 스타일이고, 기모노와 하카마를 한 여자와 남자를 보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보트도 일본식으로 보입니다. 수영복과 우끼(당시에 자동차 튜브를 사용)가 보입니다. 당시 우리 땅 우리지역인 해운대 해수욕장은 일본인만의 최고의 휴양지였습니다. 마음이 찹찹합니다. 담배한대를 해야겠습니다. 우측이 미포지역인 듯 하며, 달맞이지역(와우산)이 보이질 않습니다. 엇, 분명히 사진에는 1930년대 해운대 사진이라는 문구가 있었는데...그러면 사진 설명이 잘못된 것인지...아니면 사진이 지워졌는지(이때 사진은 필름인화라 오래되면 사진이 부셔짐)는 정확히 알 수 가 없네요...
위의 사진과 비교하면 1910년 위 사진 오른쪽과 1930년 사진 왼쪽위에 시멘트로 만든 네모난 건축물이 보이는데 동일한 건축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해운대가 맞는 것 같은 데...해운대사진이 맞는다면 미포지역에 많은 부산사람들의 초가집들이 보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던 조선의 부산사람들은 생사를 걸고 갖은 고초를 당하며 바다와 싸우는 어부로 생계를 겨우 이어갔겠지요...이런 부산사람들의 눈에 저런 일본인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또 지금의 해운대 바다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토박이들이 센텀시티와 대우마리나 지역을 보면서, 또 신나게 외지에서 와서 노는 여름해수욕장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요? 찹찹하고 마음이 찡합니다. 더 이상 이사진에서의 글을 접겠습니다.
다시 담배 한 대 피고 이 사진을 봅니다. 1960년대의 해운대입니다. 미국에 의해 해방된 부산에도 미군들이 들어옵니다. 특히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군은 해운대지역을 군사비행장과 군사시설지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바로 수영비행장(지금의 센텀시티)이 그랬고 동백섬(지금의 동백섬주차장은 미군부대였고, 그 앞의 부두시설은 미군물자수송을 위해 그때 미군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한국군대가 주둔했고 1990년대에 완전히 개방되었다.)이 그랬고, 송림공원(미군이 주둔하다 한국군이 주둔하였음이 그랬으며, 미포 앞의 극동호텔과 뒤(이곳은 지금 118층의 해운대관광리조트가 들어온다)가 그랬다.
그리고 슬픈 사실 하나는 지금의 609는 그때 미군을 상대로 한 양공주들의 지역이었다, 소위 미아리처럼 말이다. 즉 해운대의 미아리였던 것이다. 이 지역은 해운대온천(각)과 해수욕장이 들어서고 일본인들의 고급술집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의 성문화인 유각(여자들이 돈 받고 몸을 파는 곳)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이곳 609에 들어오게 되었고, 일본인들이 철수하자 미군을 상대로 영업을 하였으며, 한국군들이 들어오자 한국 군인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였다. 지금은 일반인을 상대로 여전하니 가슴 아픈 현실이다. 우리 해운대의 아픈 역사이고 현실입니다.
다시 사진으로 돌아오면, 1960년대 사진이다. 더 넓은 해운대백사장에 축대가 보이고, 극동호텔이 보이고 전망대가 보이고 장산의 줄기와 와우산이 보인다. 우선 백사장의 폭이 엄청 넓다. 어른들이 말씀하신 폭이 100m미터쯤 된다고 했는데 사실이다. 우리가 어릴적만해도 넓었다고 기억하는데 이 사진을 보니 정말 100m은 족히 되겠다. 촬영자는 지금의 조선비취호텔 앞에서 백사장을 향해서 10~15도 아래로 보며 찍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축대가 보인다. 1910년대 사진과 비교하면 송림을 일부 밀어버리고, 또 모래언덕을 완전히 밀어버려서 평평하게 만들었고, 축대를 쌓아버렸다. 그래서 길과 모래사장을 분리시켰다. 지금의 해운대해수욕장의 토대가 군사정부시절인 이때 만들어졌다. 또 3개의 전망대가 보인다. 이곳에서 부산MBC FM라디오방송(부산MBC는 우리나라 최초로 상업방송을 한곳이기도 하다.)을 하기도 했다. 내가 어릴 때까지 듣고 자랐다. 그리고 박정희의 휴양지인 극동호텔이 들어서있다. 내 어릴 때 기역을 되돌리면, 나는 지금의 그랜드호텔 앞에 살았다 이곳은 기계공고(당시에는 ‘한독기계공고’ 이곳은 1950~60년대 독일에 파견된 산업역군들 ‘간호사와 광부가 대표적’의 공로로 독일에서 지어준 학교로 그래서 한독이란 이름을 섰으며, 국립학교였다.
전국적으로 매우 인기가 좋아서 시골의 우수인 학생들이 이곳으로 기술을 배우로 왔다. 당시에 우리 집에서 이들 학생들을 자취를 하기도 했다.)앞의 메인도로에서 100M 거리였었다. 그래서 박정희대통령이 밤에 이 길을 지나가면 우리 집은 등화관제를 해야 하는 일을 당했다. 그때 통장과 반장이 큰소리로 ‘등화관제’라고 외치면 다녔다. 그리고 등화관제를 하지 않으면 경찰서로 가서 조사를 받고 벌금도 받았다. 참...지금생각하면...그때 그 시절...
그리고 제법 높은 건물들이 보인다. 그리고 극동호텔 옆의 와우산 자락이 골프장으로 변해 잔디가 보인다. 또 가운데 건물들 뒤로 오산이 보인다. 지금의 해운대 해수욕장의 기본골격이 만들어진 것이 바로 1960년 박정희군사정부 시절입니다.
1960년대의 해운대입니다. 항공촬영을 한 것 같습니다. 이 시대에 항공촬영을 했다는 것은 개인적인 것보다는 군사적이거나 행정용도로 촬영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사진은 동백섬을 기준으로 해운대 전체를 찍은 것 같습니다. 나의 기억을 되돌려 우선 동백섬을 보겠습니다. 지금의 최치원 동상이 있는 동백섬 정상에 공원 같은 시설물이 보입니다. 최치원동상은 1971년에 동상이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이곳이 공원으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자세히 조사를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밑으로 동백섬 둘레길이 보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동백섬의 길은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1990년 중반까지도 자동차가 다녔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쪽은 국립수산연구소입니다. 지금은 기장에 가 있지만 이때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나중에 수산대학연구소로 바뀝니다. 지금은 누리마루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 고아원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의 고아들과 버려진 아이들을 이곳에서 키웠습니다. 다시 기억을 되돌립니다. 어린 시절 나는 이곳에서 매일 놀았습니다.
낚시도하고 게와 고동도 잡고 또 수영도 여기서 했습니다. 백사장에서 하는 것은 좀 유치했지요~뭐랄까 어릴때부터 놀면서 뭔가를 획득해야 경제적이라는 생각? 물론 백사장에서도 많이 놀았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나의 친구가 이곳 고아원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이 친구와 그렇게 친하지 않았는데요? 그것은 그 시절 고아원=나쁜아이 라는 등식의 획일적인 교육(학교교육보다는 부모나 이웃들로부터 받는 사회분위기교육 이랄까? 뭐 요즈음 같으면 사회적교육과 사회적책임 정도겠지요?)을 받은 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의연중에 멀리하게 되고, 친구 역시 멀리하게 되어서 서로가 아주 친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백섬에 놀러가면 함께 전쟁놀이와 수영을 하면서 놀았습니다. 또 어떨 때는 같은 고아원아이들끼리 편을 갈라 싸우기도 햇는데 이때 나는 이 친구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아주 먼 이야기라 지금은 기역도 잘 안나고 이름도 기억은 안납니다만 그래도 친구 얼굴은 어렴풋이 생각은 남니다. 그리고 고아원에 우물이 있었고, 담은 돌담이 었다는 것...그리고 중학때인가? 고등학교 때인가? 그 고아원이 거제리로 이전 했다고 들었고 영영 친구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꼭 죽기 전에 한번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은 군부대 지역이었습니다. 다시 기억을 되돌리면 군부대가 있었고 수산과학원이 있었고, 고아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초가집의 가게가 있었는데 그 할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아드님이 군인이셨고 그래서 그곳에서 장사를 할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그곳에 군인들과 일반인을 상대로 여러 가지 물품을 파셨고 나에게 사탕이랑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저를 무척 귀여워 하셨습니다만 이제는 영영소식을 모르고 기억속에서도 희미해지네요...이 사진과 글을 쓰면서 다시금 되새김을 하게 됩니다. 참 고마운 분이 였다고 기억합니다. 그리고 군부대의 휴양 막사가 있었습니다.
나의 유연의 아픔이 있는 곳이지요, 지금도 나의 왼쪽 눈 위에 미세한 흉터가 있는 그 어릴 적 사고로 난 흔적입니다. 군부대의 휴양지는 태풍으로 인해 버려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통나무 뼈대와 놀기 좋게 판자들이 넓게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낚시를 하거나 술을 먹곤 했는데 이곳에서 저는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하면서 놀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곳 휴양지로 가는 길들을 해안가 바위위에 만들었는데 그 길과 휴양지가 시작되는 곳이 끊어져 있었습니다.
보통 때는 아래 바위로 건너갔는데 문제는 이날 술래잡기를 하였다는 것이다. 순례에게 안 잡히려고 멀리 숨기로 한 나는 그 곳을 뛰어넘기로 순간 생각했지요, 그리고 마음속으로 황금박쥐를 외치면 뛰었는데...깨어나니 해운대시장 병원이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해운대 시장 안에 병원이 있었습니다. 그 흔적인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미군들이 만든 부두가 보이고 그 옆이 모래체취장입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모래를 여전히 채취한 곳입니다. 그래서 해운대의 모래 유실이 엄청났지요. 그리고 춘천과 해운포의 기수지역 생태계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어릴 때 이곳에서 수영도, 조개도, 꼬시래기도 잡으면서 놀았습니다. 그때는 환경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시면 모래채취장 옆에 작은 모래사장이 보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동백교가 있고요, 지금의 동백교가 만들어졌는데 예전의 기억으로 동백교는 통나무다리였습니다. 이때는 민간인 출입금지였고 군사지역으로 군인들이 들어가는 다리였습니다. 그리고 송림공원이 보입니다. 이곳은 이때 한국군의 주둔지 이었습니다. 그리고 춘천이 복개되지 않았네요(사람사는세상 길동무들에서도 일부 이야기를 했습니다.) 또 송림공원앞에 평지에 유일하게 건물이 하나 보이는데요.
이건물이 바로 공군회관입니다. 공군들의 휴양지였는데요 지금은 여러 번 재건축되어 호텔이 들어셨지요? 여전히 공군소속입니다. 대학 때 이 공군회관에서 친구들이랑 맥주를 많이 먹었습니다. 가격이 PX가로 판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가장 현대적인 건물이기도 하였고요..
다시 춘천(천)을 보면 세 갈래의 실개천이 보이는데요. 역시 메인은 오산에서 내려오는 제1개천이고요, 이것이 바로 장산에서 내려오는 천과 좌동에서 내려오는 천이 합쳐집니다. 두 번째는 공군회관 옆으로 오는 개천인데 즉 이 천이 지금의 31번 버스정류장 앞(지금은 쇠고기국밥집들)으로 이어지고 제일교회 옆으로 이어 지집니다. 세 번째 천이 지금의 그랜트호텔 오른쪽으로 복개된 하천입니다 이 하천은 지금의 해운대여고와 해운대여중으로 이어 집니다. 그리고 지금의 해운대도서관은 큰 연못이었습니다. 해운대도서관 입구에 큰 소나무가 있는데 그 때의 흔적입니다. 또 뒤쪽에 큰 은행나무도 있습니다.
그리고 동해남부선도 보이고 오산(오산 앞에는 삼성 이병철의 별장도 있었고, 김지미의 집도 있었다고 합니다. 친구 중에 한 친구는 그때 지금 회장이 된 어린 삼성가의 사람들도 보았다고 합니다, 그때 잘했으면...ㅎㅎㅎ)도 분명히 보입니다. 또 와우산의 골프장도 보이고, 개발을 하려는지 산이 마구 깎아져 있습니다. 그리고 춘천본류 왼쪽과 오산 아래에 넓은 건물이 하나 보입니다. 바로 해운대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일제식명)가 보입니다. 우리들의 어릴 적 추억이 간직된 곳입니다.
해운대초등학교는 1937년 일제 때 개교하였으며, 1970년대까지도 학교 정면 오른쪽 건물이 일제 때의 건물로 남아있었습니다. 지금은 강당이 들어섰지만 어릴 때 기억으로 강당을 지으면서 일제의 건물을 남겨두어야 한다는 선배들과 지역주민들의 의견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 남아 있었다면 훌륭한 근대역사유적이 되어 해운대초등학교가 유명한 곳이 되었을 텐데...다시 고민을 해봅니다.
그때 만약에(역사에는 만약이 없지만) 소수의 선경지명의 의견들이 받아졌다면...그 시대는 개발의 시대였고 학교 강당의 첨단 시설이 들어온다면 그것은 거의 누구나 찬성하는 건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수들의 의해서 선견지명을 가진 소수를 이길 수 있었겠지요...이것이 바로 주민들의 생각의 힘입니다. 다수의견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에서 소수의 의견은 역시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소수의 의견을 깊게 생각하고 미래를 보는 힘이 있어야 하겠지요...그래서 다수가 아니지만 미래를 바라보는 선견지명의 소수의 의견을 존중해야겠지요...문제는 이런 좋은 뜻을 어떻게 사람(지역민과 시민)들과 함께 설득하고 소통하고 공감을 갖게 하는가? 입니다. 이것은 사람사는연구소가 고민해야 할 못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좌1,2,3,4동 신시가지가 된 더 넓은 좌동이 보입니다. 친구들끼리 소주한잔 마시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아~그때 소주 안 먹고 땅이나 사둘 걸...?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1960년대의 칼라사진입니다. 그 당시 대단히 귀했을 칼라사진입니다(아니면 흑백을 칼라로 입힌 것인 가요?). 지금의 와우산 달맞이 고개에 있는 골프장이네요, 이곳은 일제 때 일본인들이 경마장으로 사용한 곳 입니다. 그것은 박정희정부가 골프장으로 만들었고 박정희대통령이 해운대에 오면 극동호텔과 골프장 또 동백섬의 휴양지를 다녀갔다고 합니다. 1960년대 골프를 칠정도면 이들이 누구인지는 다들 짐작하실 것이다. 동백섬이 시원하게 보입니다. 조선비취호텔(1978년)이 들어서지 않았습니다.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해운대로 들어오는 형상이 맞습니다. 거북은 우리민족의 수호신입니다. 고구려의 4신도의 현무이지요? 현무는 물을 다스리는 힘을 가지고 있는 신령스러운 우리민족의 4신중에 하나입니다. 또한 오래 사는 장수동물의 상징입니다. 그 상징 같은 거북섬(동백섬)은 또 경주의 천성산으로 부터 시작이 되어 그 기운이 금정산과 장산으로 이어지고 간비오산(봉수대가 있는 산, 사진에서 오른쪽 산입니다.)을 거쳐 동백섬으로 뻗쳐있습니다. 그러니 풍수지리학적으로 동백섬은 해운대에서 시작과 끝이 되는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바다로부터는 바다의 기운이 들어오고, 대륙으로부터는 기가 끝나는 지점입니다. 그런 곳이 바로 동백섬입니다.
조선비취호텔은 서울 조선호텔의 부산직영호텔입니다. 군사정부의 숨겨진 많은 사연이 있습니다. 박정희에 의해서 허가가 나고 1978년에 완공됩니다. 그리고 전두환군사정부시절에 전두환이 몰래 가로 채어 갔습니다. 전두환은 부산에서 박정희가 한 일을 그대로 답습합니다. 박정희는 동명목재를 세무사찰을 무기로 압수해버립니다. 그리고 극동호텔을 짓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정수장학회를 만들어버립니다. 전두환은 부산의 국제그룹을 역시 세무사찰 형태로 공중 분해시키면서 빼앗아버립니다.
그리고 조선비취호텔을 손에 넣고 일해재단을 만들어 버립니다. 박정희 때나 전두환 때나 부산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야당의 도시였고 부마항쟁(부마항쟁으로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암살을 당합니다. 그리고 이후 부마민주항쟁은 광주민주항쟁으로 이어집니다)의 불꽃을 만든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당들의 도시라고 탄압을 했던 결과입니다.
조선비취호텔은 1978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이제 22년이 지났습니다. 보통 30년정도가 되면 그 수명이 다하는데, 조선비취호텔은 재건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사진에서보고 또 저가 기술하였듯이 해운대 사람들이 번영을 위해서는 반드시 거북의 목에서 조선비취호텔은 멀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해운대를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반드시 해운대 시민들에 의해 세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해운포(수영강과 광안리 사이의 만)와 황령산과 민락동 그리고 백산이 보입니다. 지금 MBC방송국이 있는 자리이고 그 끝에 조그마한 산이 보입니다. 지금은 이곳이 바로 민락동 위락공원이 들어서 있는 곳입니다. 나머지 앞은 다 매립되었다는 것을 이사진은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용호동과 이기대가 보입니다.
아마 이사진은 해운대해수욕장에 파라솔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여름에 촬영되었다고 보입니다. 그리고 골프장 바로 아래에 미군부대와 미군부대의 물탱크가 보입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시면 간비오산 옆에 개발을 하려고 땅을 파 해쳤습니다. 아마 한독기계공고(기계공고)를 지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1960년대의 운촌입니다. 이 사진을 만났을 때 개인적으로 보물을 찾은듯이 기뻤습니다. 바로 저가 태어
난 곳,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신 곳, 부모님이 사신 곳, 제가 살았고 놀았던 나의 유연시절이 가득
한 운촌마을입니다. 물론 저는 운촌마을에서 태어나서 3살 때 그랜드호텔 쪽으로 이사를 갔지만 그래도
나의 청소년시절 이곳은 나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곳입니다.
우선 큰추깡(경상도말로 방파제를 이렇게 불렸다)과 작은 추깡이 모두 보입니다. 일제 때 작은 추깡이 만들어졌다가 이후 큰추깡으로 만들어진 곳입니다. 이곳은 운촌항은 1960년 당시 전국에서도 그 규모가 큰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멸치잡이와 오징어잡이, 장어잡이, 고등어 및 모든 수산물을 잡았습니다. 또 미역양식도 그 규모가 엄청나게 크게 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기억을 더듬어 놀라운 사실은 고래잡이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큰추깡에 고래잡이 포경선이 몇 척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고래를 해체하는 것도 기억이 납니다. 물론 상어도 잡았습니다. 지금은 운촌항과 어촌계는 수영강 하구 수영다리 요트경기장 끝에 조그맣게 자라잡고 있습니다. 화려한 과거는 가고 지금은 초라하게 생계를 꾸려가는 배들만이 있습니다. 물론 보상은 많이 받았습니다만 그 보상이라는 것이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독이 될 수가 있습니다. 수많은 기억들이 머리를 스쳐갑니다. 우선 보상은 이곳뿐만이 아니라 그랜드호텔과 오션타워들이 들어서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대학까지 살았던 동네가 바로 그랜드호텔이 있는 곳인데요? 이곳에도 어김없이 개발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 개발의 바람으로 6가구가 모여 있는 우리집주변(사실 이 땅은 일제가 패전하면서 버리고 간 적산토지였던 것을 불라 받아서 6가구가 똑 같이 나누었다)은 다 친한 이웃들이었고 정말로 누구 집 정지(부엌의 경상도 사투리)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알았다. 이곳에 나의 친구 넷이 살았다. 한 친구는 나보다 나이는 한 살 많지만 학교는 같이 들어갔다(사실 나는 66년 1월생이다. 그래서 7살에 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고 한 3개월 있다가 ‘재생불량빈열병’이라는 죽음의 병을 얻게 된다. 이것은 지금도 50%정도만 살아남는 희귀병이다. 그래서 학교를 그만 다니고 부산대학병원에 1년간 입원했었다. 이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설 한권이다. 언제가 나는 나의 제3의 삶은 어부와 작가가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4대째 살고 있는 해운대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면서 작가로 나의 생을 마무리 할 것이다. 이때 이런 저런 이야기를 글로 쓸 것이다. 그때를 기억하시라???ㅎㅎㅎ 그리고 싱싱한 고기를 잡아서 친구들과 지인들을 불려서 소주에 회 한 점 하면서 사람들과 그렇게 정겹게 이곳 해운대서 생을 마무리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친구도 여전히 친구가 되었고, 병이 낫고 1년 뒤 다시 학교에 입학을 한다. 그래서 지금의 초등학교친구들과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친구는 나의 한 학년 위다. 이 문제는 나의 삶에 계속 따라 다녔다. 여전히 진행형이다. 예를 들어보자 고등학교는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이곳은 엄격하게 선후배의 서열이 있다. 그러면 이 친구는 나보다 1년선배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같이 친구로 지냈고 또 학교도 같이 들어갔다. 문제는 이 친구와 내가 아니라 이 친구의 친구와 내다 우리는 친구인데 이친구의 친구 중에 같은 고등학교 선배가 있다.
그러면 이 친구를 만날 때 같은 고등학교의 선배는 선배가 되어서 매우 끌 그럽다. 이런 것으로 하여 이 친구와 나는 제일 친한 친구인데 정말로 코흘리개 꼬치친구데 그 만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면서 또 이 지역을 떠나면서 멀어졌다. 그러나 지금도 가끔 연락을 하지만, 같은 부산에 살지만 자주 만나지는 못한다. 현재도 모 방송국에 갑장 친구가 있다 그런데 이 친구의 선배가 내 친구이다. 그래도 어떻게하겠는가? 한국의 위계질서는 내하고 만날 때는 친구, 동문회가면 선배해라 ㅎㅎㅎ 그러나 결국 이 세 명이 한자리에 만나서 즐겁게 소주는 못 먹는다...아직은 우리사회가 이런 것에 너무 경직된 것은 아닌지? 그러나 나이가 40대중반인 지금은 뭐 크게 그런 것들의 의미가 그다지 중요한가? 그래도...
아~계속이어 가면 이때 당연히 4명이 함께 절대로 어울릴 수는 없었다. 나는 따로 따로 만나야 했다. 이 친구가 보고 싶다. 지금 광주건설현장에 소장으로 있다. 이 친구와 가족들의 이야기도 무궁무진하다. 다음기회에...어찌되었던 무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갑자기 큰돈은 가족 간에, 부모 자식 간에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다. 물론 안 그런 곳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았다.
마치 로또를 걸린 사람이 당첨되기보다 더 못살고 있다는 통계를 보면서 준비 안 된 돈은 약보다는 독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돈의 힘과 폭력도 알게 되었다. 아직도 돈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깨달음은 돈은 인생에서 필요조건이지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이 이야기는 다음에 작가로 삶을 살 때 꼭 써야 될 화두이다.
이 사진의 마을이 운촌마을이다. 이 마을은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정확하게는 언제 생겼는지는 모르나 대략 1000년 정도는 되었다고 생각한다. 최치원의 해운대라는 석각도 그렇고, 또 최치운이 해운포 사람이라는 설도 그렇고, 또 구름 운자를 넣어 운촌이라고 명한 것도 그렇고 그렇다면 최치원의 신라 말 정도만 잡아도 1000년은 넘는 것이다. 운촌마을 끝에 송림이 보인다. 이곳이 솔밭이다.
이곳은 을사 5적 박영효의 별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앞에 마을을 가르는 도로가 있는데 이곳이 신작로(위의 큰 도로)에서 바닷가로 가는 길이다 이곳이 바로 운촌시장이 있었다. 이 운촌시장에서 우리 할머니는 살의셨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제주도에서 태어나 젊을 때 이곳 운촌에 오셨다. 가난을 벗어나고자 제주도를 떠났지만, 무일푼으로 결국은 가장 가난한 동내 해운대로 오게 되고 어촌동네인 운 마을에 정착을 한다. 이 당시 운촌마을에는 50%정도가 제주도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자갈치시장에 가셨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북해도 홋카이도로 징용을 끌려간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찾아 할머니도 일본 북해도 훗가이도로 간다. 그리고 일본에서 네 아들과 두 딸을 낳지만 추위와 굶주림으로 두 딸과 한아들은 죽는다. 그리고 해방되어 제주도에 사시다고 제주 4.3사건으로 다시 해운대로 온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나고 다시 제주도로 간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운촌마을에 다시 오신다. 그리고 1988년 87에 돌아가신다. 할아버지는 이보다 20여년 앞에 돌아가신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묘는 지금 간비오산 아래 양지 마른 곳에 있다. 우리 가족사는 소설보다도 더 소설 같은 가족사가 있다. 사실, 더 구구절절한 많은 이야기가 있다...그 시절 어느 가족, 어느 누구의 삶이 구구절절하지 않겠는가? 우리 근현대사의 공통된 아품 속에서 잉태되었기 때문이다. 제2의 삶이 끝나고 제3의 삶을 살 때 그때 반듯이 쓰겠다.
지금 이 큰추강 작은 추강은 매립되었고 매립되는 과정을 기억하고 있음, 지금의 큰 추깡은 이번에 불이 난 로얄스윗트오피스텔 앞길쯤 밑에 있고, 작은 추깡은 현대타워 밑에 있다. 그리고 동백섬 길은 예전에는 조선비취호텔 옆으로 길이 이어져서 차가 다녔다. 이것을 1990년대 후반에 지금의 그랜드호텔쪽의 땅을 매입하고 또 복개를 하여서 길을 만들어 지금의 그랜드호텔쪽으로 차가 다니게 되었다.
또한 큰추깡 앞에 길이 구부러지는 곳은 지금의 솔밭과 분수조형물이 있는 삼거리지역이다. 이곳은 보시는 것과 같이 해안 절벽으로 암반들이 있는 곳이고, 지금 삼거리의 솔밭은 그때 어르신들이 앉아서 바다를 보면서 담배를 피우고, 휴식을 취한 곳이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지금 조형물이 들어선 곳이 내가 태어난 곳이다.
그리고 위의 큰길은 바로 일제가 만든 신작로 이며, 바로 위는 동해남부선이다. 그리고 큰 길 앞에 비막이가 있는 건축물은 버스정류소이다. 그리고 이 사진에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왼쪽 맨 아래지역을 보면 동백교 안쪽으로 배들이 정박하고 있다. 바로 이곳이 운촌의 내항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배를 만들고 바다관련 큰 창고도 있었다. 이곳에도 친구들이 있어서 많이 놀았던 곳이다. 지금은 오션타워가 들어섰고 또 다른 건물이 올라 갈 예정이다. 그리고 작은추깡과 동백교 사이에는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다.
그리고 송림공원 앞부분에 신당과 신당나무가 있었다. 지금은 그 흔적이 완전히 없어져 공사장이 되었다. 2010년 지금 운촌마을은 솔밭입구에 운촌마을이라는 비석이하나 있고, 마을은 흔적도 없어져 버렸다. 큰 글 위편에 산 아래 자락에 남아있는 것이 전부이다. 다른 글에서 자세히 적었지만 지인들이 힘을 모아 작은 운촌박물관을 하나 지어야 할 것 같다.
1960년대 미포입니다. 미포라는 지명은 와우산의 소의 끝자리이라고 하여 꼬리 미자와 포구를 합쳐서 미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미포는 저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외할머니가 살고 개신 곳이었습니다. 1998년에 돌아가셨지만, 나를 무척 사랑하신 분입니다. 외할머니의 삶도 참 기구한 삶을 사셨습니다. 구구절절 어찌 달 말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은 조금만 말하면 삼촌 셋에 모친과 이모를 합쳐 다섯 분이시고 전체로는 여덟 분의 자녀를 가졌습니다. 나의 모친이 미포로 먼저 오시고 다음에 제주도에서 이곳 홀로 자식 일곱을 데리고 아무런 기반도 없는 이곳 미포로 오셨습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해녀를 하셨고, 그 기반으로 나머지 이모와 삼촌은 성장을 하였으나, 역시 가난을 이기질 못하여 교회에 가면 밀가루를 받을 수 있어서 교회를 나가셨다 사실 외할머니는 글을 모르신다. 성경도 읽어주어야 듣지 보고 읽으 실수가 없으시다. 할머니는 그렇게 글을 모르시고 돌아가시기까지 해운대제일교회를 40년 이상을 다니셨다.
사진에 보이는 경북식당자리는 지금 해운대리조트가 생기면서 없어졌지만 얼마 전까지 이곳은 미포의 회센터가 있는 곳이었다. 또한 해안도로가 만들어 지면서 해수욕장의 폭은 대폭 줄어들었고, 백사장의 끝 쪽이 큰 우물이 있었다. 그리고 위 고개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지금은 이 자리가 회센터 뒤로 횟집들이 들어섰고, 이곳의 우물터는 지금도 남아 있다. 얼마 전에 확인하기도 했다. 그리고 왼쪽 끝이 미포 방파제이고, 지금도 이 자리에 방파제가 있다. 뒤에 하얗게 보이는 기다란 길이 부산에서 포항까지 가는 동해남부선이다.
이 시절 우리 친구들은 비가 오는 날이면 백사장엘 간다. 왤까? 그것은 용돈을 벌기위해서이다. 용돈을 벌기위해 비오는 날 백사장엘 간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
지금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수수께끼보다 더 어려워한다. 그러다가 답을 가려춰 주면 ‘예~~~와~~~짱이다’라고 한다. 이제 눈치를 채셨나요? 바로 동전을 주우러 가는 겁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탈의실이 없어서 옷을 그냥 바닷가 한쪽에 두기도 하였고, 또 수영복이 없어서 그냥 옷을 입고 바다에 들어갔고, 자연스럽게 동전들이 모래속에 묻히게 된다. 또 시계나 반지등도 잃어버리는 일이 부지기수로, 지금 기억을 정리해보면 신혼여행 와서 반지를 모래에 잊어버리거나 수영을 하다가 바다 속에 잃어버려 신부와 신랑이 싸우고, 울고불고 하는 일들을 보기도 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동전을 줍느냐고요?
우선 비가 오면 모래들이 빗방울에 바혜쳐 집니다. 그러면 당연히 동전은 위로 나타나지요? 그럼 줍기만 하면 됩니다. 다만 눈이 좋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은 집에 있는 소쿠리(?)를 들고 간다. 그리고 소쿠리를 모래 위를 훑어서 소쿠리를 흔들면 동전은 남고 모래는 빠져나간다. 이렇게 해서 모친께 혼이 많이 나기도 하였다. 어떤 어른은 금속탐지기를 가지고와서 동전을 주었는데 그 금액이 당시에 10만원을 넘었다고 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그 때 10만원이면 지금도 100만원이 넘는다. 또 한 가지 기억은 가난한 아이들이 백사장에 외국인들(대부분 미군들)이 지나가면 '기브미 초콜릿‘을 외치며 외국인들 따라다녔다. 나는 어렸지만 자존심 때문에 참아 그 짓은 안했다. 지금도 그 때 일들이 기억이 납니다.
1980년대의 해운대입니다. 지금 촬영자는 조선비취호텔앞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우선 해운대의 사진이 칼라로 바뀐 것이 눈이 뛰고요, 파라솔과 사람들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선 와우산에 AID아파트가 보입니다. 그리고 빌라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달맞이가 막 개발되려고 하는 시점인 것 같습니다. 달맞이가 지금처럼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90년대 말부터입니다. 80년대 중반부터 해외여행이 자율화되고 많은 기업들이 외국에 다녀보고 또 외국인들의 입을 통해서 달맞이가 최고의 위치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본격적인 투기와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미포에 기억이 희미합니다만 관광호텔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이곳이 회센터가 들어서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콘도가 보입니다만 지금은 헐리고 없습니다. 그리고 왼쪽에 맨션이 보입니다. 이 건물은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고 현재는 메리어트호텔 앞에 있는 건물입니다. 당시에는 호텔이 없어서 바로 보입니다. 당시에는 최고급아파트로 이름도 ㅇㅇ맨션으로 불렸습니다. 지금의 기억으로 초등학교 여자 친구가 이집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한번인가 두 번인가 놀러 갔는데 이때 엘리베이터를 처음 타보았습니다. 이때가 아마 1973~1978년 사이로 이 당시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는 것은 최고급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타워팰리스나 해운대의 주상복합과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어서 일부러 그 여자친구집근처를 배외한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에 경비가 있어서 엄격히 지키고 있어서...
이 시기 대한민국의 땅과 주택투기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부산도 예외가 아니어서 역시 해운대지역은 그때나 지금이나 부산의 투기1번지입니다. 저는 이때부터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수영을 하지 않았습니다. 벌써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수영을 안 한지가 20년이 넘었습니다...머 우리 집 앞에서 수영하면 촌스럽다고 생각할까요...ㅎㅎㅎ
2000년의 해운대 야경입니다. 지금은 이런 조명이 다 없어졌지만 2000년도에는 야경에 조명칼라를 넣어서 알룩달룩하게 만들었습니다. 꼭 해운대해수욕장을 나이트클럽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때 참 수치스럽고 한심했습니다. 디자인을 아는 한 사람으로 행정이 아름다운 자연 그대로의 자연을 돈을 들여서 망쳐버렸으니까요...
자연 대로의 자연을 사람들은 좋아하고 감탄합니다. 인공물이 들어간 자연은 이미 자연으로써의 가치를 상실하지요? 이제야 개발논리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 시작하나 봅니다. 그러나 여전히 개발논리가 앞서 있습니다. 해운대도 예외는 아닙니다. 118층의 해운대관광리조트나 수영만 매립지나 또 해운대지역내에도 이런 논리가 먼저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먼저이고 그 사람을 위한 개발과 발전이 필요하고 그리고 자연을 될 수 있으면 해치지 않고 조화롭게 개발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삶의 질이 중요합니다. 문제는 삶의 질을 돈으로 물질로만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면 가진 자만이 삶이 풍요해지고 대중들의 삶, 보편적인 사람들의 삶은 뒤처집니다. 그러면 양극화가 극히 벌어지죠? 그래서 사회공공시설을 많이 설치하고 자연과 환경이 주는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바로 평범한 사람의 삶의 질, 보편적인 복지를 이야기 해야 합니다. 즉 해운대해수욕장과 동백섬, 달맞이, 그리고 미포와 해운대 해안 길은 우리 모두(해운대 주민과 부산시민과 대한민국 국민과 인류의 자산입니다.)의 자신이고 다 함께 누릴 권한이 있습니다.
이것은 공공의 자산이므로 어떤 돈 많은 자의 개인 소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공공정책, 시회정책으로 개발되고 발전되어야 합니다. 즉 해안선과 스카이라인과 쾌적한 공기 이런 모든 것이 바로 가진 자든지 가지지 못한 누구나 다 함께 누려야 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해운대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그리고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것입니다. 역시 우리가 살고 다시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아름다운 자연유산입니다. 단지 우리는 잠시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슴에 깊게 새겨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찾고 싶고, 살고 싶고, 감동을 받는 것은 바로 자연, 그 자체에서 입니다.
해운대는 많은 고민을 갖고 있습니다. 여름한철이 아닌 4계절의 관광도시가 되어야 하고, 또 난 개발화 되는 것을 막아야 하고, 그래서 지금의 자연을 유지하여야 하고, 사람들이 찾고 싶은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익을 지역으로 환원해야 합니다. 많은 고민들과 생각을 하게 합니다. ‘사람사는세상연구소’가 다양한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하여 고민 해야 할 일들입니다.
이글은 책, 해운대스토리를 만드는 기초가 될 것입니다. 해운대스토리 책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들 것입니다. 사람사는세상 사람 누구든지 참여하여 함께 만들었으면 합니다. 해운대시민 누구든지 함께 만드는 해운대스토리 책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하겠습니다. 두서없이 감성적으로 갈겼습니다. 용서를...
우리 지역 해운대를 사랑합시다!
※ 해운대에 대한 토박이 분의 실제 체험담 그리고 고향 해운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담긴 소중한 글
잘 읽었습니다. 무단으로 글과 사진 가져온 점 사과드리면서 위글 내용 중에 와우산 달맞이고개 골프장 부분에서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추신 합니다.
달맞이고개 골프장(부산컨트리)을 박정희정부가 만들었다.->1956.10.24개장.이승만정부 시절입니다
부산컨트리클럽 홈페이지에서 확인 (1956.10.24 해운대 개장 -->1971.7.3 노포동 이전 개장)
일제 때 일본인들이 경마장으로 사용한 곳 입니다.-->확인 안됨 : 아래사진 참조
1952년 미군이 촬영한 사진, 와우산 달맞이 고개 모습은 자연그대로 입니다. 인공의 흔적이 없음.
경마장의 흔적은 확인이 안됩니다.
ㅇ 해운대 지역 추가 사진
60년대 해운대 전경
'80년대 초반 좌동 즁동 지역
2018년 구글어스 해운대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