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대군
세종과 소헌왕후의 다섯 째 아들로 이름은 여, 자는 환지이다. 1432년 광평대군으로 봉해지고 1436년에 신자수 의 딸과 결혼했으며, 그 해에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광평은 '효경', '소학', '사서삼경', '좌전' 등에 능통하였고 이백, 두보, 구양수, 소식 등의 문집을 읽고 국어 , 음률, 산수에도 밝았다. 1437년 태조의 일곱 째 아들이자 신덕왕후 강씨의 첫번 째 소생인 방번에게 봉사손으로 입양, 아버지 세종과는 오촌지간이 되어 왕가의 종실이 되었다. 이듬 해에 새로 개척한 북방 육진의 국방 강화 및 풍속 교화를 위하여 한 양에 경재소를 두고 종친으로 하여금 주관하도록 할 때 종성을 맡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총명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서예와 격구에도 능했지만 아깝게도 2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금성대군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섯 째 아들로 이름은 유이다. 1433년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참찬 최사강의 딸과 혼인했 으며, 그 해 태조의 여덟 째 아들이자 신덕왕후 강씨의 두번째 소생인 방석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과 함께 사정전으로 불려가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왕을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 하였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탈취하자 이에 반발하여 삭녕에 유배당했다. 이 후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당하자 자신의 유배지였던 순흥에서 부사 이보흠과 함께 모의하여 단종 복 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관노의 고발로 실패로 돌아가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32세였다. 1791년(정조15년)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을 편정할 때에 육종영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평원대군
세종과 소헌왕후의 일곱 째 아들로 이름은 임, 자는 진지이다. 1434년 8세에 평원대군으로 봉군되고 1437년 종학 에 입학, 호군 홍이용의 딸과 결혼했다. 이 후 학문에 진력하다가 1445년 1월 두창(천연두)으로 죽었다. 광평대군 이 죽은 이듬해 닥친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세종을 무척 고통스럽게 했으며, 세종의 신병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 기도 했다. 또한 세종은 아들의 죽음을 경험한 후 불교를 숭상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한동안 조선의 억불정책은누그러지는 경향을 보였다.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예종의 둘 째 아들인 제안대군 현이 그의 뒤를 잇게 되었다.
영응대군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덟 째 아들이며 이름은 염이다. 1441년 영흥대군에 봉해지고 1443년 역양대군, 1447년에 영 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세종의 총애가 지극하여 1450년 세종은 영응대군의 저택인 동별궁에서 별세하였다. 1463년 '명황계감'의 가사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글씨와 그림에 능했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