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숭록대부 품계와 안산 군수에 임명된
산청의 神醫 유이태(劉以泰)는 누구인가?
산청의 神醫 유이태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가계
유이태는 묘금도 유씨로 본관은 거창이고, 1652년 산청군 생초면 신연에서 태어나서 1715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정유재란에 안의 황석산성에서 의병장으로 순절한 증직 감찰 유명개 현손이고, 효자로서 나라로부터 복호를 받은 증직 지중추부사 유유도 손자, 부친은 호군을 지내 유윤기의 장남으로, 모친은 합천이씨, 외증조부는 증직 병조판서이며 경상좌수사를 지낸 이의립, 외조부는 봉상시 판관을 지낸 이광훈입니다.
(2) 행적
유이태는 일생동안 정도(正道), 효도(孝道), 시도(施道), 의도(醫道), 수도(壽道) 등 5道를 실천하였고, 요즈음의 코로나와 같은 조선 시대의 코로나 <홍역> 치료 태두로서, 홍역치료서 『마진편』을 최초로 저술하여 조선의 홍역 치료의 문(門)을 열었습니다. 또한, 전해지는 저서는 『마진편』을 포함 3권과 1940년대 화재로 소실된 2권 - 『침술서』와 『부인방』 -, 1975년 잃어버린 『저서 2권』이 있습니다.
(3) 업적
유이태는 유의(儒醫)로서
① 위민(爲民)⦁애민(愛民)정신으로
백성들을 치료하였으며,
② 전염병 홍역이 창궐하자 홍역 퇴치에
공헌하였고,
③ 홍역치료서 『마진편』을 최초로 저술하여
조선의 홍역 치료의 문(門)을 열었습니다.
④ 의학발전과 예방으로 질병 없는 세상을
꿈꾸었고,
⑤ 환자 치료에 대하여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여
한국 유의(儒醫)의 전범(典範)을
제시하였으며,
⑥ 참된 의사로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의술의 윤리 도덕을 확립한 인물입니다.
유이태의 홍역 치료로 조선의 홍역학 태두 유이태가 태어나서 위민(爲民)⦁애민(愛民)의 인술을 펼친 곳이며, 산청군 생초는 조선 시대에 2대 전염병(홍역, 두창)의 하나인 <홍역치료발상지>가 되었습니다.
조선의 홍역학 태두 유이태는
① 정도(正道), 효도(孝道), 시도(施道),
의도(醫道), 수도(壽道) 등 5도(道)를
실천하였고,
② 백성을 위하는 위민(爲民)정신과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愛民)정신의 인술을 펼치면서
③ 굶주림에 있는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의창(義倉)을 설치한 후 곡식을 나누어 주어
사람들을 살렸고,
④ 두 번이나 임금의 부름을 받아 대궐에 가서
어의(御醫)가 되어, 임금 숙종을 치료한
공로로 안산군수에 제수되었으나,
향리 산청으로 돌아와 백성들과 함께하면서
환자를 치료했습니다.
(4) 산청군수와 담당 공무원이 없애려는 신의 유이태(劉以泰)
산청에서 5도(道)를 실천하고, 위민(爲民)⦁애민(愛民)정신을 펼쳤으며, 『마진편』외 6권 저서를 남긴 신의 유이태를 없앴습니다. 산청의 신의 유이태의 사적을 없앤 산청군수들은 권순영, 권철현과 이재근입니다. 특히, 산청군수 이재근은 신의 유이태를 없애려고 2009년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여 유이태의 모든 사적을 류의태 사적으로 바꾸어 책으로 간행했었을 뿐만아니라, 유이태 전설이 전해오는 유적지를 류의태 유적지로 바꾸었습니다.
가짜 류의태와 산청과 관련 없는 허준보다는 홍역 치료 태두이며, 5도(道)를 실천한 산청 출신 의학 인물이 한방성지 <동의보감촌>의 상징 인물이 되는 것이 산청인과 출향(出鄕) 산청인들에게는 더 긍지가 있지 않을까요?
(5) 『영남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에 56인에 선정된 산청의 신의 유이태
대구사학회에서 영남인으로 한국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대한민국에 영향을 끼친 인물들을 56인을 선정하여 그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을 간행하였습니다.
그 책 이름은 『영남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로
그 책에는
신라의 이차돈, 선덕여왕, 김유신, 원효, 최치원,..
고려의 이의민, 일연, 신돈,...
조선의 정도전, 이황, 조식, 유성룡, 곽재우,
사명당 대사, 정구, 정인홍, 유이태,
정희량,...
일제강점기의 이상화, 이육사. 최익현, 김창숙,...
현대의 박정희, 이병철,... 등 56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청군청에서 화타보다 더 위대하며, 허준의 살신성인 스승이라고 자랑하는 류의태는 이 책에 등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민선 4,5,7기 군수 이재근을 비롯한 前 문화관광과장 김동환과 항노화과장 강채호와 산림녹지과장 정오근 과장이 사적을 없앴던 유이태(劉以泰)는 산청인으로 남명 조식과 함께 대구사학회 간행 『영남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에 56인의 1인에 선정된 영남을 빛낸 인물이며,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의원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영남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에 56인의 1인에 선정된 유이태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수록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내용을 보겠습니다.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등재된 산청의 神醫 유이태
산청군수와 문화관광과장, 항노화과장이 자랑하는 류의태와 민선 4,5,7기 군수 이재근이 책을 간행하여 없애려 했었던 유이태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어떤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는지 조사했습니다,
산청군수, 문화관광과장과 항노화과장이 화타보다 위대하다며 자랑하는 류의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았고, 민선 4,5,7기 군수 이재근이 책을 간행하여 없애려 했었던 유이태는 의학사 문헌, 해외 도서관 도서목록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등재되어 있으며, 그 설명문 내용을 보겠습니다.
정의
1652(효종 3)∼1715(숙종 41). 조선 후기의 의관·어의.
개설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백원(伯源)이고, 호는 신연당(新淵堂)·인서(麟西)·원학산인(猿鶴山人) 등이다. 정유재란 때 함양의 황석산성에서 순절한 의병장 유명개(劉名盖)의 현손이고, 나라로부터 복호를 받은 효자 유유도(劉有道)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호군을 지낸 유윤기(劉潤祺)이고, 어머니는 경상좌수사를 지낸 이의립(李義立)의 손녀 강양 이씨이다. 가문과 왕실 기록에는 劉以泰, 저서에는 劉爾泰로 기록되어 있다.
40여년 동안 향의(鄕醫)로 백성들을 치료하고 어의로도 활동하였다. 조선을 대표하는 유의(儒醫)로 우리나라 최초의 홍역치료서 『마진편(麻疹篇)』을 저술하였다. 『소설 동의보감』과 드라마 「허준」에서 허준의 스승으로 묘사된 유의태(류의태·柳義泰)의 모델이 된 인물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소년기(1652∼1670)에는 학문을 배우며 부모에게 극진한 효행을 실천하였다. 어릴 때부터 앓고 있던 자신의 병을 스스로 고친 후 의학에 입문하여 3년 만에 의술을 터득하여 의원이 되었다.
청년기(1671∼1690)에는 의술이 널리 알려져 영호남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술을 펼쳤고,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의창(義倉)을 주관하여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하였다.
장년기(1691~1709)인 1680년과 1692년에 대홍역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홍역치료서 『마진편』(1696)을 저술하였다. 그밖에도 경험방 『인서문견록(麟西聞見錄)』(1709), 『실험단방(實驗單方)』(1709), 1940년대 초반 화재로 소실된 침구방과 부인방, 1975년 분실된 의서 2권 등을 저술하였다.
노년기(1710∼1715)에는 한양에서 의술활동을 하다가, 1710년과 1713년 의약에 동참하여 어의가 되었다. 어의로 숙종의 병을 고친 후 숭록대부 안산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향리인 산청으로 돌아왔다.
유이태는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경전과 역사에 관한 소양을 충실히 쌓아 사회에 헌신하는 길을 걸었다. 바른 길을 걷는 정도(正道), 부모를 공경히 모시는 효도(孝道),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시도(施道), 병의 근원을 탐구해 증세에 따라 처방하고 마음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의도(醫道), 절제를 통해 건강을 관리하는 수도(壽道) 등을 실천했다.
“계절에 따라 음식을 섭생하여 몸을 튼튼하게 하며 소식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하라. 병을 예방하되 발병 초기에 신속히 치료하고 완쾌한 이후에는 철저하게 건강을 관리하라. 마음을 다스리고 노여움을 경계하라. 약의 오남용을 경계하고 의원의 처방에 따라 약을 복용하며, 기존 처방에만 따르지 말고 환자의 상태에 따라 처방하라.”는 건강관리법을 백성들과 의원들에게 주창했다.
일생동안 백성들의 삶의 애환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기에 중국의 화타, 편작과 함께 「강강술래」에 채록되어 있으며, 치험 사례들은 「유이태탕」, 「순산비방」 등과 같은 명의설화가 되었다.
의학사상
유이태의 의학사상을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인생관은
‘사친지의(事親知醫), 제중인심(濟衆仁心)’으로 요약되는데, 이는 어버이를 공경하기 위해 반드시 의학을 알아야 하며, 자손들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먼저 돌보아 질병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둘째, 정신관은
‘무귀무천(無貴無賤), 무친무소(無親無踈)’로 요약되는데, 이는 남녀노소·귀천·친소·민관·빈부를 차별하지 않고 모든 백성들을 보살피며 사랑하는 위민(爲民)·애민(愛民) 정신을 펼치는 것이었다.
셋째, 수기관은
‘존양천리(存養践履), 성실불구(誠實不苟)’로 요약되며, 이는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다른 사람들을 존경하여 편안하게 하고 본심을 잃지 않고 의로운 일을 변함없이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이었다.
넷째, 학문관은
‘공리후세(功利後世), 보상일신(補償日新)’으로 집약되는데, 이는 후세에 공(功)과 혜택을 넘기고 후학들이 새로운 치법을 만들어 의학이 날마다 발전하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다섯째, 치병관은
‘미병절선(未病節宣), 선조후치(先調後治)’로 집약되는데,이는 건강할 때 절제하는 생활로 병을 예방하고, 발병하면 근원을 찾아서 신속히 치료하며, 완치 후에는 철저히 건강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끝으로, 의약관은
‘향정비약(鄕井備藥), 단방수록(單方隨錄)’으로 요약되며, 이는 자연환경에서 구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향약재를 이용한 치료법을 개발·채록하고, 치험 사례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함으로써 전통적인 향약의학의 성격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의의와 평가
유이태는 전염병 홍역이 창궐하자 퇴치에 공헌하였으며, 홍역치료서 『마진편』을 최초로 저술하여 조선의 홍역 치료의 문(門)을 열었다. 의학 발전과 예방으로 질병 없는 세상을 꿈꾸고 환자 치료에 대한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여 한국 유의의 전범(典範)을 제시하였고, 참된 의사로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의술의 윤리도덕을 확립한 인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이태 [劉爾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산청의 神醫 유이태는 전염병 홍역이 창궐하자 퇴치에 공헌하였으며, 홍역치료서 『마진편』을 최초로 저술하여 조선의 홍역 치료의 문(門)을 열었다. 의학발전과 예방으로 질병 없는 세상을 꿈꾸고 환자 치료에 대한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여 한국 유의(儒醫)의 전범(典範)을 제시하였고, 참된 의사로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의술의 윤리 도덕을 확립한 유이태는 백성을 위하여 어떤 건강 관리법을 남겼을까요?
(7) 백성을 위하여 건강관리법을 남긴 산청의 神醫 유이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등재된 神醫 유이태는 질병 없는 세상을 꿈꾸었으며 환자 치료에 대하여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여 한국 유의의 전범(典範)을 제시하였고, 참된 의사로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의술의 윤리 도덕을 확립하였으며, 백성들, 의원들, 후학 그리고 가문의 후손들에게 건강관리법을 남겼습니다. 그가 남긴 건강관리법을 보겠습니다.
살아생전 역사적 업적을 남겼고, 헐벗고 병마(病魔)의 공포 속에 살아가는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였던 산청의 神醫 유이태가 1715년 세상을 떠난 후 284년이 지난 1999년부터 그가 인술을 펼쳤던 향리 산청군청의 관리들로부터 어떠한 평가와 대우를 받았을까요?
산청군청에서 역사를 왜곡한 것을 알게 된 필자가 역사 왜곡 바로잡기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