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두환 전 대통령의 선영중에서 그 조부 산소의 발음이 가장 컸다고 20여명의 우리 답산 일행
은 분석, 평가했다. 그의 조부 전영수 산소는 생가터의 주산인 소학산 바로 아래의 못재 인접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 생가터의 용맥을 살피는 과정에서 그 용맥과 혈처도 함께 세찰할 수 있었
다.
생가 마을인 율곡면 내천리 정상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른적이 없는 못재라는 연못이 있
다.
전국적으로 심각한 가뭄이 들어도 못재의 수량은 줄어든적이 없다고 하니, 자연의 신비함에 그
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서 인근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성역처럼 여겨지는 못재의 상단과 그 아래쪽에 완산전씨의
선영이 자리잡고 있다.
못재 바로 윗쪽 묘역이 이 지역 완산전씨의 시조격인 전인의 묘소이고 그 곳에서 불과 30m쯤
떨어진 못재 건너편에 조부인 전영수의 묘소가 있다.
우선 전씨 문중뿐만 아니라 인근 사람들에게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는 전인의 묘소를 살펴
봤다.
그 명당의 발음에 의해 자손이 크게 번창했고, 지금은 약 1천500호가 합천 일대에 살고 있다고
전해진데다 못재와 관련 지어 ‘게의 눈처럼 형국이 이뤄진 해목형’의 괴혈로 알려져 있어 우리
일행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용맥에서 혈증까지 빠짐없이 세찰한 결과, 다만 형기적으론 게의 눈을 연상케 하듯 봉분 둘레
에 정원석과 같은 자연석 테가 빙 둘러 박혀있는 것을 제외하곤 용진혈적의 요건을 찾을 수 없
어 의문점만 더 커졌다.
무엇보다 용덕산으로 부터 낙맥, 결인, 비룡의 행도를 거쳐 소학산으로 치솟아 오른 용맥의 세
찬 기상과 세력은 이내 다시 낙맥해 마을쪽으로 내달아 힘찬 진행을 이어갔을 뿐, 못재 쪽으로
는 한자락의 용맥도 낙맥되지 않아 우선 혈을 맺는 마무리맥이 전혀 노출되지 않고 그저 넓게
비탈진 산봉의 측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의아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못재 아래쪽에 새롭게 단장된 조부 전영수의 산소는 그 용맥의 행도가 증명해 주 듯 우
선룡의 교구통맥을 이뤄 형성된 진혈이었다. 이는 실측에 의해 뚜렷이 밝혀졌다.
그 산소의 주산은 언뜻 보기에는 생가터의 주산인 소학산인것 처럼 보이지만 용맥을 더듬어 측
정한 결과, 예상과는 전혀 다른 형세였다.
물론 근조산인 용덕산은 생가터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학산을 세우기 위해 크
게 낙맥한 용맥이 벌의 허리처럼 잘록하게 결인한 다음 못재 왼쪽으로 치솟아 오르는 비룡맥이
어느 한 지점에서 분지(分枝)를 이뤄, 한가닥의 큰 줄기는 소학산으로 솟구쳐 오르고, 다른 한
가닥은 못재를 끼고 우선룡으로 행도하면서 교구통맥을 이뤄 마무리단계에 이르러 진혈의 전
영수 묘소를 만들었다.
이른바 용맥의 흐름이 혈을 짓기 위한 요건중 하나인 과협이 매우 희귀한 옥지과협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즉, 못재를 왼쪽에 끼고 돌아서 용맥이 그 행도를 진행함으로써 산맥속에 실려온 지기를 혈처
에 올인할 수 있는 요건을 갖췄다는 것이다.
만약 못재가 없었다면 윗쪽 전인의 묘소를 이루는 산비탈이 이어져 내려온 산세에 지나지 않았
을 평범한 맥이었다. 하지만 못재가 있어 그 옆을 끼고 도는 용맥이 독자적인 맥의 행도를 하게
됐으니 정말 오묘한 용맥에 의한 혈증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산도에서 나타나듯이 그 맥을 오
른쪽에서 보호하며 따라오는 호종사가 백호의 몫을 빈틈없이 수행하고 있고, 집터쪽으로 내려
가던 산줄기의 한자락이 전영수의 묘소앞으로 넓은 내명당을 만들면서 백호자락이 끝나는 지
점까지 발달해 서로 교쇄를 이루니, 산의 정상 가까이에서 이토록 진혈의 제반 요건을 갖추기
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보기 드문 명혈이 아니겠는가.
오직 감탄할 뿐이었다.
지기탐지 전문가의 확인에 의해서도 전영수의 묘소는 용진혈적 그대로였음이 더욱 확연하게
입증됐다.
파(破)에 따른 산소의 좌향 또한 격에 맞게 합법으로 설정돼 있었다.
그런데 전두환 전 대통령이 대권을 거머쥐게 되는 불가사의한 진원적인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
었던 두가지 변수중에서 생가터가 군왕지지의 대지인 것과 이를 뒷받침해준 시너지 효과를 충
분히 제공하는 힘이 다름 아닌 조부 전영수의 음덕에 있었던 것이 입증됐다. 따라서 조부 묘역
이 그곳에 들어서게된 연유도 큰 관심을 끌었다.
전두환은 완산전씨이긴 하지만 전인의 직계손이 아니다. 전인의 형님 후손이 전두환가의 직계다.
400년전에 파가 갈렸다고 한다. 그런데 전인의 무덤에서 불과 몇십m 안되는 곳에 직계가 아닌
전두환의 조부 산소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었다. 거기에는 숨겨진 이야
기가 회자되고 있다.
전두환의 막내 삼촌인 전상희가 이서와 풍수에 능해 그 곳에 전영수의 산소를 썼다는데 처음에
는 밀장(몰래 평장함)을 했다고 한다.
전영수의 사망연대가 1930년대인 것으로 미뤄, 사망 10년후에 현재의 못재 부근으로 암장한
것이다.
처음에는 암장했다가 나중에 전두환이 군인으로 출세하면서 봉분을 제대로 조성했고, 지금처
럼 번듯하게 묘역을 조성한 것은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뒤의 일이였다고 한다.
비문에 적힌대로 ‘뭇산들이 두손을 모아 절을 하며 여덟개의 시내가 굽이 돌아 율곡의 명당을
형성한 곳’일 정도로 명당길지가 틀림없다.
전영수의 산소뒤에는 진손맥의 입수처에 보일락 말락한 바위가 엎드리듯 박혀있다. 흔히 술사
들이 주장하는 입수바위는 권세를 가진 후손이 배출되고 복을 가져다 준다고 해서 복바위라고
하며 귀히 여기지만 풍수이론대로라면 지기가 응결되게하는 장치이거나 지기의 흐름을 막는
혈증으로 친다. 전영수의 묘소에 대한 저간의 일로 인해 전인 후손들은 대통령자리를 빼앗아
갔다는 믿음 탓에 지금도 전두환씨에 대한 감정을 좋게 가질리 없다고 짐작할 수 있다.
시중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조부모 묘를 그의 아버지가 제왕이 날자리에 암장했으며 윤보
선 대통령의 경우도 나라에서 하사한 땅인 이순신 장군의 땅에 그의 5대조를 암장했다고 전해
지기도 한다.
정권에 도전하는 일부 사람들은 종교관이나 또다른 요인을 초월해 풍수지리에 집착했다는 사
실이 종종 드러나 세상을 놀라게 한다.
석물로 인해 흉화를 입었다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산과 그의 사후지지가 있는 율곡면 기리의
지릿재 정골은 답산하지 않기로 했다.
그 친산은 전두환이 한창 권력의 가도를 달리고 있을때 쓰여져 크게 참고할만한 뜻을 담고 있
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권력과 풍수를 다시 느끼고 되새겨본 이번 풍수기행은 잊혀지지 않을 소재가 될 것이라 믿는
다. 권력과 풍수에 대한 소재는 예나 지금이나 퇴색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와 관련, 중국 수나라 문제의 둘째 아들 이야기는 새겨 들을만 하다.
그는 어머니의 장지선정을 명풍 소길에게 은밀하게 접근, 부탁했다고 한다.
소길은 둘째 왕자가 왕통을 계승할수 있는 자리를 잡아주면서 4년후에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
언했다. 4년후인 서기 604년 수나라 문제가 죽자 과연 둘째 아들이 황제에 올랐다. 그가 바로
수 양제다.
믿기지 않은 일로 치부될지 모르지만 틀림없는 사실은 권력의 지향과 풍수는 항상 그 끈을 이
어가고 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대권에 오른 사례를 설명할 길은 아직도 풍수지리
가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을 떠나 복된 삶과 자연의 힘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면서 공존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