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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문화의 원류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환웅과 신농의 비밀"(최종철)
-임혜상의 몽고리아(蒙古利亞) 종의 발원지-세석기 문화부족의 바이칼
-삼국유사에 등장하는.....삼위산은 어디를 가르키는 것인가?
삼위산은 동북아 전체를 놓고 중국의 서쪽 감숙성의 삼위 산 한 곳 밖에 없다. 이 삼위 산의 가까운 곳에는 돈황
석굴이 있는데 일명 막고 굴이라 한다. [장자]에 의하면 막고야라는 신령스러운 인물이 있었다.
막고야의 야는 노인에 대한 존칭어이다. 그 내용을 참조하면 이러하다.
"막고야 산에 신인이 있어 살 빛깔은 눈과 같이 희고 단아하기는 처녀와 같은데 곡식을 먹지 않고 바람을 호흡
하고 이슬을 마시며 구름 위에서 나르는 용을 타고 4 해 밖으로 놀러 다닌다. 그의 정신이 모아지면 온갖 사물에서
어지러움이 사라지고 오곡을 풍성하게 결실 할 수 있다."한다.
이 막고는 우리나라 민간신앙의 삼신할미인 마고 할미의 한문 식 표현이다. 삼신 마고 할미는 출산을 주관하는
여인임에 일치하는 것이다. 박제상의 부도지에 의하면 인류 역사의 시작과 한민족의 시원은 마고성과 마고라는
여인에 의해서 출발한다. 마고 시대에서 출발한 역사는 황궁 .유인. 환인. 환웅에 이른다. 그 내용에 의하면 마고
또는 막고 굴이 있는 삼위 산과 환웅은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삼국유사」의 환웅에 대한 기록에서 막고 굴이 있는 삼위 산을 언급한 것은 함부로 넘겨 버릴 수 없는
앞으로 우리 민족의 근원을 찾는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삼위 산의 서북쪽엔 천산 산맥이 있으며 우랄
알타이 어족의 근거지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삼위 산에서 감숙 성 동남쪽 끝으로 내려오면 섬서 성 서쪽
끝에 태백산이 있다. 3,767m의 산이다.
이 태백산 바로 북쪽 위에 오늘날 보계 시라는 곳이 있다. 이 보계는 중국민족이 조상으로 생각하는 염제 신농씨의
무덤이 있으며 염제 신농씨의 고향이라고 알려져 있다. 중국인들은 그들을 염황 자손 즉 염제 신농씨와 황제헌원의
자손임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왜 「삼국유사」에서 말한 삼위태백을 찾아 나가는 길에 환웅과 비슷한 시기에
중국인들의 조상인 염제 신농의 무덤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바이칼의 두 계절
이에 대하여 중국 사학자 서량지 교수는 이렇게 답변한다."세석기 문화부족(구석기와 신석기인의 중간시대로서
중석기인)이 최초로 거주한 곳은 지금의 바이칼 호수 부근이었다. 이들이 중국 전설 가운데 나오는 염제 신농씨의
본 민족이다. " 진순신의 「중국고고학」에 의하면 중국 황하 일대에서는 세석기가 황하의 홍수에 휩쓸려 다 떠
내려 가 버린 탓인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홍수에 다 휩쓸려 버린 것이 아니라 바이칼 호수 일대의 세석기인들이 요녕성 일대를 거쳐 황하 일대로
옮겨오는 동안 세석기 시대를 지났기 때문이 아닐까? 서량지 교수의 말대로 염제 신농씨가 바이칼 호수에서 황하
일대로 이주해 왔다면 어디를 통해서 왔을까?
최무장 저 「중국고고학」에 의하면 우리 민족 또한 홍적세 말기에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부근에 살던 세석기
문화인들의 한줄기는 송화강 유역에 정착하여 숙신과 말갈이 되었다고 한다. 실지로 길림성 장춘 일대의 서단산
에서는 많은 세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 중 한줄기 사람들은 지금의 만주 요녕성의 동북평원에 정착하였
으며 그 중의 일부는 황하 유역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고학의 내용에 의하면 환웅과 염제 신농씨가 바이칼 호수 일대에서 홍적세 말기에 만주
요녕성 일대에 내려 왔다가 황하 일대의 태백산과 보계라는 이웃한 곳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환웅과 염제 신농은 어떠한 관련이 있는 것일까?
1958년 이 보계의 북수령이란 곳에서 약 5천년 전 내지 7천년 전의 신석기 시대 유물과 함께 30여 구의 유골들이
옹관 속에 단독장 혹은 합장으로 출토되었다. 또 사방으로 반듯한 집터가 있으며 화덕 터와 항아리 ,농사용 석기,
어구 ,도자기들이 함께 발견된다.
사마정의 「보사기」에 의하면 "염제 신농이 비로소 나무를 다듬어 호미와 쟁기를 만들어 밭갈고 밭매는 일을
가르쳤으며 처음으로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를 신농(神農)이라 하였다.그는 풀뿌리를 헤치고 다니면서
백가지 풀들을 맛보아 약을 찾아내고 또 다섯 줄의 비파를 만들었으며 낮에 시장을 열어 각자 필요한 물건을 교환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태호 복희의 8괘를 고쳐 64효로 만들었다."
이 내용을 보면 이는 하나의 문화 혁명이었다. 단순히 한 인물의 창의력에서 나온 변혁이라고 보기보다 민족 생활의
근본이 뒤바뀐 것이다. 지금까지 태호 복희로부터 내려오는 유목민을 위주한 생활에서 요하 일대를 거쳐서 새롭게
이주한 농경민인 염제 신농의 시대로 바뀐 것이다.
그 지역은 「삼국유사」에서 말한 태백산 일대였다. 그렇다면 풍백, 운사, 우사와 더불어 곡식과 인간의 수명에
관한 일 , 즉 농업과 의학에 관한 일과 인간사 360 가지를 살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잘 살게 한 환웅의 역사적
사실과 신농에 대한 기록이 무엇이 다른가?
이 보계에서 서쪽으로 가면 천수라는 곳에 이르는데 중국사람들이 인류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태호 복희씨의
고향이다. 천수시 한복판에 명나라 홍치 3년 즉 서기 1490년에 세워진 복희 묘가 있다. 「역대신선통감」에 의하면
이 천수에서 태호 복희씨 이전에 수인씨라는 인물이 나왔는데 그는 하늘의 별들을 28숙으로 나누고 1년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로 나누었다. 또 한 달을 30일로 정했다. 그는 또 나무를 마찰시켜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알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나무로 만든 그릇과 시루, 사발 등의 토기를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한다.
수인씨가 죽고 8대를 전하다가 용성씨,사황씨,백황씨,속륙씨,곤련씨,갈천씨,축융씨,호영씨,무회씨로 이어져
무회씨가 죽고 난 후 태호 복湊쒼�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환웅의 자취를 따르다 왜 중국인들의
조상이라는 염제 신농과 태호 복희와 만나게 되는가?
이에 대하여 「역대신선통감」에 의해서 확인해 보면,
"천왕의 5세손에 무상천존 혁천씨가 도읍을 동악에 세웠는데 또 천손은 천왕의 후손이라 한다. 천왕가는 마음을
닦는 법을 전했는데 홀로 동북 장백산 아래에서 오래 도를 닦아 공을 이루었다. 태호 복희씨 때는 동왕공 태화진인
이라 했다. 진인은 하늘나라 신선을 부르는 여섯 가지 서적을 가지고 있었다. 염제 신농 때에는 많은 량의 기록을
한 공으로 태화진인에게 천부도관이란 칭호를 내렸다."하였다.
天王五世 無上天尊赫天氏 都於東嶽 一曰天孫謂天王之孫也 數傳之金虹氏古歲 得天王家傳心法 獨修於 東北 長白
山下 日久功成 太昊時 方諸東王公太華眞人 台掌天仙六籍 炎帝時 多枚量記錄之功 太華眞人似號 天符都官
동북 장백산은 백두산을 말하는데 일명 태백산이 되며 천부도관이란 말과 환인이 환웅에게 준 천부인 3개와 통
하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환웅과 관계 있는 천왕이나 태화진인이 또한 중국의 태호 복희씨, 염제 신농씨와 관계
있다고 중국의 「역대신선통감」은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태백산 신단수 아래 홍익 인간세계 이화세계를
펼친 환웅과 태호 복희 ,염제 신농은 역사 속에서 분명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보사기」에 의하면 복희씨는 백성들에게 그물 만들기와 고기잡이를 가르침으로 복희(伏犧)라 하고 또 소, 양,
돼지 등 가축 기르는 법을 가르쳐 포희(包犧)라고도 했다 한다. 이 내용을 보면 복희 때의 부족들은 어로와 목축에
의존하여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복희의 어로와 유목을 위주로 하던 부족과 염제 신농씨의 농경 부족의 갈등은
없었는가?
「운급칠참」에 의하면
"해가 하늘 가운데 있을 때 시장을 열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통용하게 하여 백성들의 편의를 살폈다.
이때 제후 숙사씨가 반란을 일으켜 명령을 어겼다. 기문동이 그를 죽였다. 신농씨가 덕을 닦으니 숙사씨의 백성
으로 스스로 그 임금을 공격하여 신농씨에게 돌아 온 것이다."하였다.
그 갈등의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신농이 황하 일대를 다스리기 전 싸움이 있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으며 그로 하여
어로와 유목민 위주의 생활에서 농경을 위주로 하는 생활로 바뀐 것은 틀림없다. 신농씨가 시장을 열었다고 한다.
그런데 환웅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시 神市를 열었다고 했다. 이 신시의 모습은 어떠했으며 신농씨가 열었다는
시장� 어떻게 다른가?
환웅의 신시를 환인하기 위해 박제상의 「부도지」에서 환인과 단군이 열었던 신시의 모습을 비교해 보자.
"이에 황궁씨의 후손 6 만을 이주하여 지키게 하였다. 나무를 베어 뗏목 8 만을 만들어서 신부9 신용을 나타내는
표적)를 새겨 천지의 물에 흘려보내 사해의 모든 족속들을 초청하였다. 모든 족속이 그 신부가 새겨진 뗏목을
얻어서 보고 차례로 모여들어 박달나무숲에 신시를 크게 열고 마음을 닦고 수련하여 천상을 살핀 후 마고할미의
계보(계통을 나타내는 족보)를 닦아 그 족속을 밝히고 천부의 음에 준하여 그 어음(말)을 정리하였다.
또 북극성 과 북두칠성의 위치를 정하여 반석의 위에서 속죄의 희생물을 구워 제사를 올리고 모여서 노래하며
천웅의 음악을 연주하였다, 모든 족속이 방장산 방호의 굴에서 칠보의 옥을 채굴하여 천부(신용의 표적)를 새기고
그것을 방장 해인이라 하여 일곱 가지 어지러움을 없애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매 십 년마다 반드시 신시를 여니
이에 말과 글이 같아지고 천하가 하나가 되어 인세가 크게 화평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바닷가에 성황을 지어
천부에게 제사를 올리고 모든 부족으로 하여금 머물러 집을 지어 살게 하니 그 뒤로 천년 사이에 성황이 전역에
널리 퍼졌다.
또 서로 교차하는 중심지에 시장을 설치하고 여덟 군데 큰못에 바다 시장을 열어 매년 10월에 조제를 행하니
사해의 모든 족속이 모두 지방 토산물을 바쳤다. 산악의 모든 족속들은 사슴과 양을 바치고 해양 제 족은 물고기와
조개를 바쳐 송축하기를 "고기와 양을 희생으로 조제에 공진하니 오미의 피를 신선하게 하여 창생의 재앙을 그치게
하네 ."하였다. 이를 가리켜 조선제(朝鮮祭)라 하였다.
이 때에 산악과 해양의 제 족이 물고기와 육 고기를 많이 먹으니 교역하는 물건이 거의 저린 해산물과 조개와
가죽 류이기 때문에 곧 희생 제를 행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반성하고 공에 보답하게 하였다.
언제나 이 때가 되면 물건과 화폐가 폭주하므로 사진과 사포에 바다 시장을 열고 몸을 깨끗하게 하여 지리를
거울삼아 교역의 법을 시행하여 그 값과 분량을 정하여 물건의 성질과 근본을 분별하여 이용하는 법을 밝혔다."
한다.
이 내용을 보면 환웅의 신시와 염제 신농이 열었다는 시장과의 관계를 짐작케 한다. 섬서 성의 태백산에서 황하의
물줄기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서안시가 나오고 서안시의 근교 반파라는 곳에서 대규모의 신석기 유적이 발견
되었다. 섬서 성의 반파 유적은 방사선 측정치에 의하면 6080년(+-110)에서 5600년(+-105) 전으로 되어 있다.
「환단고기」에서 환웅의 신시 개천을 단군 개천 4330년 보다 1565년 앞선다고 하니 약 5900년 전으로 비슷한
연대였다고 생각된다. 반파는 서안 동남쪽 황하로 빠지는 위수의 지류인 산하 동쪽 기슭에서 있다. 강으로부터
약 8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며 강바닥으로부터 9미터 위쪽의 언덕이다. 약 7만 평방미터의 유적 터에 주거지는
3 만 평방미터 전성기에는 약 200채의 주거지가 있었고 약 5 백 명에서 6 백 명으로 추정되는 인구가 살고
있었다. 이들은 여성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농업을 했으며 어업과 사냥도 병행했다.
이 반파에서 발굴된 61구의 신석기 앙소 시대 인골을 조사해 본 결과 현재 섬서 성에 살고 있는 화북 사람 보다
화남의 한족(漢族)에 가까운 체질이라 한다. 이 인종과 태백산이 있는 보계의 북수령은 동일 문화와 인종이다.
하지만 복원된 반파 인의 두상에 의하면 한국인 남자 얼굴과 다를 바 없이 보인다.
그들은 화남에서 북상하여 북방민족과 혼혈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6개의 남성 대퇴골의 길이를
가지고 추정해 본 결과 그들의 키가 72.48Cm-165.24Cm로 평균169.45Cm로서 화남지방 사람들의 신장과 비교
해 볼 때 이례적으로 큰 키였다. 이 내용을 볼 때 이때는 이미 북방민족과의 혼혈이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인다.
화남인과 혼혈한 북방 인은 누구인가?
환웅은 지금의 만주 요녕 성 일대에서 반파와 보계 인들이 살았던 태백산으로 옮겨 가 그 당시 모계 사회의 남방
민족 유웅 족 웅녀와 결혼하였으니 이 남방민족이 화남지방에서 북상한 반파 인들이 아니었다고 부정 할 수 있을
근거는 없는 것이다. 반파 인들의 생활은 남성 위주의 일부일처제가 아니라 여성 위주의 모계사회 생활이었다.
아버지의 혈통은 알 수 없었고 사유재산과 상속이 없었던 사회였다. 이 모계사회에 대한 내용을 보면 고사변 제7
책에 "태고의 사람들은 그 수명이 길었다. 처음에 3남 3 녀가 있었는데 겨울엔 모여 살고 여름엔 흩어져 살았다.
그들은 새, 짐승, 곤충, 물고기, 초목의 열매를 먹고살았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여 아이를 낳았으나 여자의 성을
따랐다. 처음 세 우두머리가 있었는데 이를 합웅기라 한다."하였다.
여성 중심의 모계 사회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옛 글이라 생각한다.
옛날 여와나 웅녀가 살았던 약 6천년 전에는 지금처럼 일부 일처제의 결혼 제도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처 다부제의 형태, 즉 한 여자에 애인인 남성이 둘 이상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아이의 어머니는
알 수 있지만 아버지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거나 모르는 형태였다.
여성 중심의 모계 사회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옛 글이라 생각한다. 이 글에 의하면 새, 곤충, 물고기를 많이 먹고
살았다 했는데 반파 인들이 사용했던 토기에는 물고기 그림이 많다. 그 다음에는 새와 곤충의 그림이 많다.
그들의 의, 식, 주생활을 알게 하는 일면을 볼 수 있다. 환웅이 섬서 성의 태백산으로 갔다면 그 때는 이러한 시대
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은 산동성 역성현 용산진을 중심 한 용산 문화는 채문 토기와는 다른 회도나 흑도를 사용한다.
이들이 생활 중심은 남성 중심이며 농업을 주로 하고 돼지, 개, 양의 작은 동물에서 소나 말 등 큰 동물을
대규모로 기르기 시작한다. 결혼제도도 일부일처나 권력자에 의한 일부다처제로 변했다. 중국의 사학자 부사년은
이하동서설이란 설로서 중국문화는 이夷와 하夏 두 계통이 있다 하고 채도는 하 민족의 문화 흑도는 동이 족의
문화라고 규정했다. 이 흑도 문화와 동이 족의 환웅과는 어떠한 관련이 있을까?
농사나 농업을 가리키는 농 農에는 진 辰이란 글씨를 포함하고 있다. 이 진이란 글씨는 태호복희씨의 내용에서
보았듯이 용을 나타내며 동시에 진 震과 같이 동북방을 가리킨다. 그것은 동북방에서 농업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의 남북 만주 일대에서 발견되는 신석기 유적에 의하면 지금부터 7-8천년 전에 이미 농사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에는 뚜지개 농사라 하여 땅을 지팡이 등으로 파고 씨를 뿌리는 원시농사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의하면 보식신이란 인물이 죽으면서 그 머리에서 말과 소가 나오고 이마에는 조, 눈썹
에서는 누에, 눈에서 뉘(벼와 같이 자라는 피의 일종)가 나오고 배에서 벼, 음부에는 보리와 크고 작은 콩이 났다고
한다. 이 말은 농사가 한민족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머리와 말, 눈과 뉘, 눈썹과 누에, 배에는 벼, 여자의 음부(보지)와 보리 등 우리말이 아니면 해석되지 않는 언어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의 사고도 마찬가지였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에 의하면 "이 夷는 저 低
이니 만물이 그 땅에서 뿌리박고 난다."했다. 이 말 중 저 라는 말은 나무 뿌리라는 말이며 이 말은 농업이 동이 족
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염제 신농 또한 동이족인 환웅의 농업을 받아 들여 널리 펼친 것이다.-
<통곡하는 민족혼> 사이트(http://cafe.daum.net/jemin1942/)
앙소문화 유적지 반파 유적지와 강채문화
참고로 모권제 사회인 반파 유적지와 강채 유적지에 대에 대해 필자가 탐사한 결과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반파유적지&모계씨족사회였음을 상징하는 여체 모형의 파빌리언
반파 유적지는 앞에서 설명했으니 생략한다. 다만 반파유적지는 풍부한 소장품과 독특한 품격의 진열을 한 중국
유일의 신석기 시대 유적지(약 6천년전) 박물관으로 전 세계 학자들을 포함 년 1백만의 관광객이 찾아드는 명소다.
30년 전 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던 이곳 반포촌은 화려한 선사시대 유적이 밝혀지면서 세상
사람에게 널리 유명해졌다.
앙소문화 유적지 중의 하나로 모계 씨족 사회여서 그것을 나타낸 사진이 아래의 여체 사진이다. 일단 사진을 모두
올린 뒤 관계있는 것끼리 합해 놓을까 한다.
반파인의 복원도를 뒤에 다시 올리겠지만 현대인과 거의 비슷하다. 해석상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우리 한국인과도
거의 비슷하다. 반파인의 인종문제를 말하면 체질인류학자들의 견해를 빌리면,
반파인의 총체적인 특징은 남부아시아 인종과 비교적 밀접한 관계가 있는 가운데 남방 몽고인종에 속하며, 화남인
(남부 지나인)의 체질특징과 비교적 접근한다고 구체적으로 말한다.
그런데 대륙 남방 즉 양자강 중하류 남방은 춘추전국시대까지도 동이 9려족이 석권하고 있던 곳으로 진시황의
개산위민 정책(동이겨레를 모두 흩어 평민으로 흡수한다는 정책)으로 인해 그 이후 한반도와 인도차이나 지방으로
밀려 내려 갔다. 지금 홍콩, 마카오 왼쪽을 보면 산동성보다 큰 장족 자치지구가 있는데 이들은 바로 양자강 하류에
있던 월족(동이족 월나라 족)이 진시황이래 밀려나 모여살고 있는 곳으로 우리 한국인과 모든 생활 습속이 똑같은
곳이다.
바로 양자강 남부 사람인 동이족과 반파인이 같다는 것이다.
(태국의 치앙마이에도 우리와 언어, 문화습속까지도 같은 족이 살고 있음을 김병호씨가 증언해 화제를 일으킨
바도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곳의 문화전통과 생활습관상의 전통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한가지 결론상의
과학성만은 회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문화전통상 약간 다른 면모를 보일지라도 과학적 고고학상의 분석에
따르면 일치한다는 것이다.
화남인과 화북인의 차이의 특징은 약간 있다. 반파인의 특징은 화남인(남부 중국인및 인도차이나반도인)에 접근
하고 있으며 몇몇 특징은 화북인에 접근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지나족과 일본인의 인종특성이라 말하는데, 일본인이 본시 대륙의 양자강 이남 동이족가운데 속하여
상고사학에서 일인은 동이족의 일부라는 측면을 고려하면 반파인의 특성과 현재의 지나족 그리고 일인의 특성을
가진 반파인의 특성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아울러 이 연구에 막상 한국인의 체질특성 연구가 빠진 점을 고려하면
반파인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반파유적지가 태호 복희 시절에 근접한 문화권이므로 이들 다양한 하이브리드화 된 지나족의
특성과 역시 반도 동이족의 잡종 하이브리드인 일본인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고고학자들은 반파인과 지나인 일인의 인종특성은 기본상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들의 인종특성이 기본상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존재에서는 차이가 확실히 나는데 고고학계는 이러한
이유를 3가지 본다. 한가지 정황은 중원지구의 인종 가운데 한 지맥이 남방으로 내려왔을 정황이다.
그리하여 뒤에 북방에서 온놈과 서로 섞여서 변이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하나다. 고고학자들은 남방은 인종천도의
파급이 적어 원래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다 한다.
둘째는, 중원에 살고 있던 거주민이다. 그 다음 민족이 이주해 오자, 이들은 남방으로 밀려가, 중원에 거주하던
거주민과 북방에서 밀려온 인종이 혼합하여 피차의 차이를 형성한 경우다.
세째는, 황하유역과 화남 평원에서 온 고대 거주민의 체질이 서로 크게 일치하는데, 뒤에 북방에서 밀려내려온
원시 거주민과 융합하여 변이가 발생했을 가능성인데 이로 인해 남방의 거주민과 서로 다른 차이를 만들었을
가능성이다. 고고학자들은 역사의 실제가능성을 놓고 보면 이들 세가지 모두 가능하다고 한다. 역사상 인종의
천도와 혼합은 사실이다.혼합으로 말미암아 체질적인 변화가 발생했는데 이는 가히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고학자들은 반파인과 남아시아인의 상호관계 속에서 공통된 문화요소가 있음을 말한다. 반파인의 장례습속
중에는 머리를 서쪽으로 향하게 하고 2차매장이 성행했는데 대륙에도 현재 복건성, 대만, 광동성 및 현대 동남아
일대 거주민이 이러한 습속을 유지하고 있다.(섬서성? 혹은 감숙성의 모 박물관 자료에서 필자는 이것이 감숙성
의 태호복희 시절의 고향회귀적 문화적 습성이라는 글을 접한 바 있는데 아쉽게도 이 자료는 입수를 못했는데
현재 수거해 온 자료에도 있는지 검색중이며 혹시 그런 대목이 나오면 추후 첨가해 설명코자 한다)
만일 이들 의식형태의 표현과 인종특징을 연계해 본즉 원인은 없지 않다. 이로 볼 것 같으면, 멀리 6천년 전
대륙의 원시 거주민과 인도차이나 일부 씨족부락의 접촉은 이미 개시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그 구체적
과정은 아직 자세히 알 수 없다.
* 앙소문화 전기 강채(姜寨)촌락의 분포도
* 조어문(鳥魚紋) 가는 목 병(細頸甁):강채(姜寨)에서 출토된 도기는 다양한 물고기 장식 문양이 있어, 강채인이 물고기를
숭배했음을 반영하고 있다.
강채 유적지는 지금의 섬서성 서안(西安) 임동구(臨潼區)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화청지가 있고 유방이
잡혀가 노역을 치르다 탈출한 리산(驪山:우리 발음으로는 려산)에 의지하고 북으로 위하(渭河:강태공이 낚시한
위수로 감숙성에서부터 흘러나온다)가 흐르는 강가이다. 강채인은 산을 등지고 곁에 강을 끼고 있으며, 멀리
밖으로는 삼림이 무성하여 푸른 풀이 무더기로 군집을 이루어, 환경이 아름다운 곳에서 생활했다.
이 곳의 자원은 부유 충만하여 숲에서는 가히 야생과일을 딸 수 있고, 들에서는 들짐승을 가히 잡을 수 있었으며,
부근의 강에서는 다시 물고기와 새우를 잡을 수 있었다. 촌락은 도랑이 띠처럼 두르고 있어, 도랑 안의 거주지구
에는 도자기를 굽는 요(窯)가 촌락 서쪽에 위치하여, 근처에는 하안변(河岸邊)에 기대고 있었으며, 묘지는 촌락
동북의 도랑 밖의 공터에 위치했다.
강채 유적지를 재구성해 그린 그림
거주지구의 중심은 광장으로, 집회 등 대형 공공 활동을 거행하는 장소였다. 네 주위에 분포된 방은 5개의 종류로
모든 방은 중심을 향해 에워싼 도랑을 등지고 있다. 매 가옥은 한결같이 큰 방 하나로부터, 두 개의 중형 방과
약간의 작은 방으로 구성되어, 주위에는 움혈( 穴)과 아동 옹관장(瓮棺葬)이 흩어져 있어, 모계 대가족을 구성
하고 있다.
강채 촌락은 5개의 가족으로 이루어진 모계씨족 사회다. 강채인의 수공업은 주로 도자기를 만드는 것으로, 거주지
주위에는 전문적인 도자기 터가 있어, 유적지에서 대량의 도기가 출토된 바, 특별히 채도가 발달되어 그 문양
장식이 물고기, 개구리, 사람 얼굴문양 등 아주 유별나며, 필법이 단순하고 소박해 원시예술의 진귀한 품격을
보여준다.
그 중에는 적지 아니 물고기와 관련된 채도 도안이 있는데, 심지어 종족의 휘장으로 사람얼굴의 물고기를 채용
하기도 했으니, 이는 모두 강채인(姜寨人) 이 물고기를 숭배한 것을 반영하는 것이며, 어렵 경제를 설명하는
것임과 동시에 거듭 이는 강채인(姜寨人)의 중요 경제자원임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 부연설명을 가해, 서량지의 「중국사전사화」를 보면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복희에서 신농으로 이어지는
세석기 문화 부족은 최초의 거주지인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貝加爾湖) 부근이었다.
(細石器文化部族 最初乃居住今西伯利亞的貝加爾湖附近 他們乃中國傳說中的炎帝神農氏的本族)
중국인 학자의 시각으로 본 것이긴 하지만 다시 이들 우리 조상이 갈라져 분화해 우공(禹貢)의 도이(島夷), 우이
( 夷), 래이(萊夷), 회이(淮夷), 석지(析支), 직피(織皮), 복사(卜辭)의 이방(夷方), 토방(土方:산서서북-섬서동북,
북부-하투(河套)동북, 설방(舌方:산서 서북-섬서 동북부-하투(河套:오르도스) 가운데와 남부 일대로 은도(殷都)
서북), 귀방(鬼方:지금의 섬서와 병롱( )사이), 강방(羌方:강수는 지금의 白江이니 감숙 임담현(臨潭縣) 남서
경산(傾山))이 되었으며 주(周) 대의 이적(夷狄), 험윤( )이 되었고, 진한(秦漢) 시대의 호족(胡族), 맥족( 族),
흉노족(匈奴族)이 되었으며, 위진(魏晉) 시대에는 오환(烏桓), 선비(鮮卑)의 원 씨족이 되었다.
이상의 강역 만 찾아보아도 우리 조상의 활동 영역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갑골문에서 4위(圍)의 나라를 길방(吉方), 토방(土方), 인방(人方), 귀방(鬼方)이라 하고 동이족이 사는
산동성을 인방(人方)이라 하고 동이족인 은나라가 같은 동족인 귀방(鬼方)을 정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대국적인 대륙사를 모르면 상고대륙사를 수없이 공부해도 말짱 도루묵이다. 아와 비아의 구분도 안될 뿐
아니라 어디서 어디까지가 동족이고 이족(異族)인지 전혀 감조차 잡을 수 없게 됨은 당연한 것이다.
게다가 식민사학의 구렁텅이에 빠진 조국의 현실과 공자, 사마천이래 지나족 위주로 견강부회된 한족(漢族) 위주의
레미콘 사관으로 한번 빨려 들어가 휩싸이게 되면 그야말로 오리무중의 역사 속으로 끌려 들어가 눈뜬장님이 되고
마는 것이다.
(갑골문에서 4위(圍)의 나라를 길방(吉方), 토방(土方), 인방(人方), 귀방(鬼方))
한글의 원형으로 보이는 문자가 규칙적으로 중앙에 불로 지진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견갑골은 상(商:殷)
나라 때의 것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눈에는 잘 보이지 않으나 사진 오른쪽에 갑골문으로 해석을 달았는데,
'상대(商代)의 왕족이 돼지, 개등을 조상에게 바치고 제사지냈다'는 내용이 새겨져있다.상의 전조(前朝) 하(夏)
나라가 멸망할 때, 상나라 성탕을 도와준 상나라의 재상 이윤(伊尹)은 왕조가 다 할 때까지 최고의 권력자로서
제사를 주관했다. 이윤은 고조선의 대학자 유위자(有爲者)의 제자로 곧 동이 출신이라는게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다.상, 즉 은나라는 거북의 등껍데기와 동물의 뼈 등에 새긴 갑골문으로 인해 그 유적지가 발굴됐는데,
이는 은나라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단군세기〉등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특히 갑골문은 주변의 다른 나라를 길방(吉方)·토방(土方)·인방(人方)·귀방(鬼方)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인방은 조선을 가리킨다. 그것은 중국에서 발행한 《역사지도집》에서 고조선의 핵심 강역이었던
산동성을 인방으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갑골문은 "은나라가 귀방을 정벌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후한서》뿐 아니라 〈단군 세기〉에도 기록되어 있어 두 문화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뒷받침
하고 있다.
은나라에서 사용한 갑골문은 한자의 모태어이다. 따라서 한자 역시 동이족에 의해서 만들어진 문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갑골문을 연구한 중국의 학자들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중국학자 필장복은 《중국인종북래설》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문자가 만들어진 것은 필시 중국 중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계통은
멀리 추운 북방에서 시작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中國文字之制作 必非始于中國中原 而係遠始于寒冷的北方)
중국의 권위 있는 학자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도 한국의 학자들은 아직도 우리 역사와 문자의 뿌리를 모조리
중국에서만 찾고 있으니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갑골문의 형태를 보아도 동이족의 작품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한 증거들 가운데 일부를 살펴보자. 7)동녘 동(東)의 전서체를 보고서 학자들은 나무에
해가 걸린 모양이라고 해석하였으나, 은나라의 유적지에서 갑골문이 발견됨으로써 이 글자의 원래 의미가
밝혀지게 되었다.
갑골문에 나타난 동(東)자의 원래 모습은 물건을 단단하게 동여매 묶어놓은 형상을 하고 있다. … 결국 동(東)
자는 '동여매어 묶는다'는 우리말에서 비롯된 것이며, 묶는 줄이나 끈을 '동앗줄'이라고 하는 것 역시 이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집 가(家)'자에 왜 '돼지 시(豕)'자가 들어 있는지 동이족이 아니면 모른다. 갓머리( )밑에
돼지 시(豕)가 들어 있는 것은 고대 동북아시아의 집 구조가 그러했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는 지금도 변소
밑에 돼지를 키우고 있으며, 이는 고대에는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집 밑에 뱀(독사)의 천적인 돼지를 키우고
집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다. 이는 쌀 문화권의 특징이며, 중국의 한족(漢族)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니 중국의 학자들도 왜 갓머리 밑에 돼지 시(豕)가 들어가 '집 가(家)'자를 형성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이밖에도 패를 이룬 무리를 뜻하는 '동아리'와, 원(圓)을 뜻하는 '동그라미'라는 말도 있다.
그리고 지금도 남원의 지리산 자락에 사는 사람들은 집 밑에 돼지를 키우고 있다.
-조영언.《노스트라트 어원여행》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