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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시사뉴스에서는 늘 독도문제를 다뤄왔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중점으로 알찬 내용을 독자여러분께 바르게 알리기 위해서 노력 하던 중 이번에 전 국민에게 애국심을 심기위해 새롭게 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런사람’을 통해서 애국자(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별기획 독립운동가 열두 번째 이야기 -3
독립운동가 김구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
출생 - 사망
1876. 7. 11.(음력) ~ 1949. 6. 26.
1922년 10월 김구 선생은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는 데 앞장서 이사장을 맡았다. 파리강화회의 결과, 독립을 이룰 수 있는 전쟁기회가 눈앞에서 멀어지자, 시간을 갖고 독립전쟁을 준비하자는 계획이 나왔다. 이에 김구 선생이 선택한 길이 한국노병회 창설이었다. 이것은 10년을 내다보고 독립전쟁에 필요한 군인 1만 명과 전쟁비용 100만원을 모으자는 계획이었다. 노병이란 말은 한 사람이 군사훈련을 받아 군인으로 양성된 뒤, 노동자로 스스로 자립하며 지내다가, 독립전쟁을 일으킬 때 참가하도록 준비한다는 전략이 담겼다.
1923년 1월부터 5월 사이에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나라 안팎에서 지역과 단체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13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독립운동의 방향 정립을 논의하는 대규모 회의가 반년 가까이 열린 것이다. 이것은 독립운동사에서 최대 규모이자 가장 오래 열린 회의였다. 여기에서 임시정부를 고치자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 만들자는 창조파로 나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회의가 결렬되자, 내무총장을 맡고 김구 선생은 국민대표회의에 대해 해산령을 내렸다. 이것은 흔들리던 임시정부의 존재를 확고하게 잡아나간 일이었다.
1924년 의회인 임시의정원은 미국에 머물려 원격으로 통치하던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여 면직시켰다. 그 뒤를 이어 2대 임시대통령으로 취임한 박은식은 내각책임제인 국무령제로 헌법을 개정하고 물러났고, 초대 국무령으로 이상룡이 뽑혔다. 그 뒤를 홍진이 이었다가, 1926년 12월 14일 마침내 김구 선생이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 비록 망명정부이지만 그 대표가 된 것이다.
김구 선생은 곧 헌법 개정에 나섰다. 국무령으로서 권력을 한 손에 쥐기보다는, 국무위원들이 권력을 함께 가지면서 공동책임을 지는 국무위원제로 헌법을 고치고 국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한편 1926년부터 임시정부 주변에서 좌우세력이 하나의 당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이끌어가자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났다. 1927년을 넘으면서 좌우합작이 추진될 때에도 김구 선생은 극심한 자금난을 견디면서 임시정부를 고수하였다. 임시정부만이 아니라 1929년 8월에는 교민단장이 되어 동포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여 이봉창 의사 등을 파견하다
1931년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재무장을 맡고 있던 김구 선생에게 권한을 맡겼다. 1932년 김구 선생은 구체적으로 일왕 처단(이봉창), 조선총독 처단(이덕주·유진식), 관동군사령관 처단(유상근·최흥식) 등 세 개 팀을 보냈다. 1월에 이봉창 의사가 도쿄 일본왕궁 입구에서 일황에게 폭탄을 던졌고, 4월 29일에는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을 비롯한 침략군 최고 지휘관 일행에게 치명상을 입혀, 시라카와는 5월 25일 사망하였다.
이때부터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응은 확연하게 달라져 중국 전역에서 모금운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한 번도 공식적으로 한국 독립운동을 돕지 않았던 중국정부가 한 순간에 협조적인 자세로 돌아선 것이다.
장제스 총통을 만나 한인청년을 장교로 길러내는 길을 열다
윤봉길의거 직후 김구 선생은 한국 독립운동을 돕던 미국인 피치(George Ashmore Fitch)의 집에 숨어 있다가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고 쟈싱(嘉興)의 추푸청(楮輔成) 집으로 몸을 피했다. 1933년 김구 선생은 장제스의 요청을 받고, 안공근 · 엄항섭과 함께 난징 중국중앙군관학교 안에 있던 공관으로 가서 그를 만났다.
이 역사적인 회담에서 세 가지를 약속하였다. 첫째, 한국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할 것, 둘째로는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자의 지원 및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 셋째로 중국군관학교에서 한인사관을 양성할 것 등이었다. 이에 따라 뤄양(洛陽)에 있던 군관학교에 한인청년들을 장교로 길러낼 특별반을 만들었다. 여기에 필요한 교관으로 만주에서 독립전쟁을 벌이던 이청천․이범석․오광선 등을 초빙하여 장교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 원대한 계획도 중․일 간의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어 1935년 제1기생 25명의 졸업생을 끝으로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다.
1935년 11월 김구 선생을 비롯하여 이동녕․이시영․조완구 등 6인이 논의한 끝에 다시 국무위원회를 구성하고, 김구 선생이 앞장서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여 임시정부를 지켜나갔다. 이 무렵 임시정부는 난징 가까운 전장(鎭江)으로 옮겼고, 김구 선생을 비롯한 요인들은 난징성 안에 비밀리에 머물며 한국독립군특무대를 운영하면서 청년장교를 길러냈다. 그러다가 1937년 12월 난징이 무너지기 직전에 임시정부는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로 급히 옮겨갔다.
1938년 5월 창사 난무청(南木廳)에서 한국국민당을 비롯한 우파 3당이 통일회의를 열고 있을 때, 이를 시기하던 세력의 저격을 받아 현익철이 사망하고, 김구 선생은 치명상을 입었다. 그러나 중국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치료가 이루어져, 김구 선생은 한 달 만에 기적같이 일어났다.
1939년 창사조차 일본군 침공 아래 위험해지자,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가족들은 바다가 가까워 고국과 연결 가능성이 높은 광저우(廣州)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이 갑자기 광저우를 공격하자, 장제스의 도움을 받아 급하게 류저우(柳州)로 옮기고, 다시 1939년 충칭(重慶) 아래 치장(綦江)으로 이동하였다. 겨우 숨을 돌린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 도착하였다. 그러는 동안 전시체제를 갖추고, 헌법을 고쳐 국무위원제를 주석제로 바꾸고, 김구 선생이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었다.
광복군 국내정진 작전 추진 전날 밤에 일본 항복소식 듣다
임시정부는 충칭에 도착한 1940년에 당·정·군 기본 틀을 완비하였다. 우파 3당을 묶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임시정부를 확충하며,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김구 선생이 당의 집행위원장,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광복군의 통수권자가 되어 이를 이끌었다. 그런 바탕 위에 일본군의 진주만기습 소식을 듣자마자 1941년 12월 10일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중국정부는 1941년 11월 한국광복군을 지원하는 대신에 중국군사위원회로 하여금 행정과 작전권을 손아귀에 쥐도록 만들었다. 「한국광복군9개행동준승(韓國光復軍9개行動準繩)」이 그것이다.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 간섭과 제재를 풀려고 노력하였고, 1945년 초에 가서 겨우 해결할 수 있었다. 한편 1943년 12월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 독립 보장 내용이 담겼다. 여기에는 장제스가 카이로로 떠나기에 앞서 그해 7월 26일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 5명이 장제스를 만나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아달라고 강력하게 부탁하였다. 그러한 노력이 카이로 선언에 한국 문제를 담아 내게 만들었다.
1944년 4월 개헌으로 주석·부주석제가 채택되었다. 좌우합작 체제를 갖추어 김구 선생이 주석, 민족혁명당 대표 몫으로 김규식이 부주석을 맡았다. 또한 쿤밍(昆明)에 있던 미군 전략첩보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CIA 전신) 중국전구사령부와 한미군사합작을 이끌어 내어, 광복군을 국내로 진입시키는 국내정진작전(國內挺進作戰)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1945년 5월부터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서 OSS훈련이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길러진 광복군 국내정진대가 투입되기 바로 전날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환국한 뒤 김구 선생은 세 가지에 초점을 맞춰 활동하였다. 하나는 열강의 신탁통치을 거부하는 운동으로 이미 충칭시절부터 추진했던 정책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다음은 임시정부가 실제로 주권을 행사하는 길을 추진하였다. 1946년 2월 비상국무회의 부총재가 되고, 이것이 국민의회로 개편될 때 부주석에 취임하였다. 그러면서 임시정부가 직접 행정을 장악하려 했지만 미군정에 저지당하고 말았다. 셋째로 김구 선생은 분단을 반대하면서 통일국가를 추진하였다. 남북한이 각각의 국가와 정부를 만드는 단계에 이르자, 마지막으로 남북협상을 선택하여 1948년 4월 19일 평양으로 가서 대표자회의를 가졌다. 하지만 끝내 남북은 분단되고 말았다.
오로지 통일국가를 염원하던 김구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蔣)에서 반대파의 사주를 받은 하수인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하고 말았다. 김구 선생의 유해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치러지고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김구 선생은 의병에서 시작하여 애국계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으로 독립운동 50년 역사를 이어갔다. 그러면서 동학, 유학, 기독교 등으로 종교를 섭렵했지만, 최고 가치는 민족에 두고, 통합·통일운동에 목숨을 걸었다. 그래서 임시정부 시절 좌우합작을 일구어냈고, 환국한 뒤에는 통일국가 수립운동에 몸을 던진 것이다.
정부는 김구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발췌
[네이버 지식백과] 김구 [金九] -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공처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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