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가 내리는 아침입니다. 이 비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모두에게 임하시길 기도합니다.
존 오스왈트에 따르면, 40장은 55장까지 이어지는 ‘종으로서의 소명’에 관한 내용 중 시작 부분에 해당됩니다.
특별히 40장에서 48장까지는 종이 된 동기, 즉 은혜에 관한 내용이고, 제가 다루고자 하는 내용(40-42장)이 다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40장은 ‘그 종의 주’ 하나님의 위엄에 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1-11절은 위로의 말씀입니다. 구원/포로생활로부터의 해방/새로운 시작이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일지라도 끝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 오랜 70년의 포로생활, 디아스포라로서의 생활, 그 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랜 고난에 마음이 상하면 아무것도 와 닿지 않는 상태가 되는데, 그것을 아시는지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것은 구원의 때가 다가온다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3-5절에서는 제가 속해 있던 사단에 사단장보다 높으신 군단장(***)이 방문한다고 부대의 길들을 새로 닦던 일이 생각납니다^^
우리의 마음도 주님 오실 것을 고대하며 날마다 거룩하게 준비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영화로운 시간도 들의 꽃과 같으니 그런 것에 연연해 하지 말고 영원히 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듭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말씀은 실제로 살아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따라서 위로할 때는 백 마디 말보다 말씀을 주어야 합니다. 예쁜 글씨로 써서 주면 더 좋겠지요.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도 주님이 오심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다 떠나가고 홀로 주님을 맞이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우리가 전할 수 있는 시간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뿐이고, 복음을 듣는 사람도 그가 살아 있는 동안만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지체할 일이 아닙니다. 미룰 일이 아닙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우리의 일상이 목자 되신 주님이 오시면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아멘
그 주님이 다스리시는 나라,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를 오늘도 우리의 일상으로 끌어오기를 바랍니다.
12-26절은 추가적인 위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에 관한 것입니다.
15절,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진실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과 밀당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사실 그러실 만한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늘도 자신을 낮추고 계시는 것입니다. 틈만 나면 높아지려고 하는 우리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고 있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22절,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모든 것 위에 계신 하나님과의 소통의 창구가 아직은 활짝 열려 있으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하나님께 나아가며 날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겠습니다.
27-31절은 덧붙이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지켜보신다는 것입니다.
27절은 하나님과 소통이 끊어질 때 우리가 흔히 보이는 반응입니다.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우리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those who wait for/hope in the Lord)는 새 힘을 얻을 것입니다.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이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고양(북돋아져 높아짐)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다리되 끝까지 기다리고, 소망하되 끝까지 소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41장은 ‘열방에 대한 도전’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1-7절은 하나님이 열방을 대면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섬들과 민족들은 이방 민족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그들 중 하나를 세워 권력을 주시지만 결국 그도 하나님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우상이요 따라서 그대로는 소망이 없습니다.
8-20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열방과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하신 종이기 때문입니다.
9절,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14절,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은 천하무적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또한 그렇습니다.
15절, “내가 너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을 겨 같이 만들 것이라”
그리고 하나님이 진정으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면 모든 것은 획기적으로 달라질 것입니다.
18절, “내가 헐벗은 산에 강을 내며 골짜기 가운데에 샘이 나게 하며 광야가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이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
이 말씀이 가리키는 그날이 아닐지라도 현실에서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세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다른 세상일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일천하기 때문에 세상에 눈을 돌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게을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안다면 우리가 적어도 지금처럼은 살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21-29절은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지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우상은 그 능력이 대단히 제한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상에게 묻습니다.
22절,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이 어떠한 것도 알게 하라”
24절,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며 너희 일은 허망하며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나 물건이나 소유나 보증이 다 우상입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도울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지할 가치도 없습니다.
42장은 종의 나라(이스라엘)와 대조되는 개별적인 종(메시아)에 관한 말씀입니다.
1-17절은 종과 그의 사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첫번째, 메시아를 가리키는 ‘종의 노래들’(Servant Songs)입니다.
종의 나라, 이스라엘은 원래 자신이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종의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합니다.
열방을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인도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개별적인 종, 메시아가 그 역할을 예시하게 됩니다.
6-7절,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이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18-25절은 이스라엘의 현재의 상태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메시아와 확연히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20절,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하지 아니하며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하나님의 종의 나라, 이스라엘의 실패의 실상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25절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을 이스라엘에게 쏟아 부으시매 그 사방에서 불타오르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
문둥병자와 보통 사람의 차이는 고통을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는데
종의 나라 이스라엘이 문둥병자처럼 무감각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사방에서 불타오르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
이 말씀은 우리의 감각이 둔해지면 똑 같은 상태에 빠질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깨어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삶을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종, 메시아는 너무나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손을 내밀 때 언제나 우리 손을 잡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고아가 아니면서 고아처럼 살지 말고, 그분께 손을 내밀며 그분과 함께 걷는 인생은 복된 인생입니다.
오늘 내리는 단비가 우리 자심을 위한 비가 되고, 우리의 가물어 있는 마음을 촉촉히 적셔 주시기를 바라고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샬롬.
첫댓글 ‘노역의 때가 끝났다‘는 아름다운 소식과 함께 ‘하나님을 보라’는 외침이 울려퍼집니다.
하나님은 목자가 양을 돌봄같이 그들을 인도하겠지만, 장차 임하실 때 상급과 보응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기 좋았다’하신 하나님이시지만 불의와 교만중에 사는 자들과 그들의 우상은 ‘아무 가치도 없다’하실 것인데(40:2,9-17, 41:24) 그들이 우상을 흔들리지 않게 세우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를 굳세게 세우실 것입니다.(40:20, 41:7,10)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흑암가운데 있는 자들을 빛가운데로 이끄시고 정의를 베푸신 것처럼, 예수님이 보내신 우리도 같은 일에 부름받습니다.(42:1-7,요17:18) 우리가 종으로 부름받은 일에 실패하지 않을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기쁨으로 택하셨고 굳세게 붙드시기 때문입니다.(42:1)
과거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보며 새 일 또한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같아보이는 내 모습입니다. 그러나 처음이요 나중이신 하나님이 그 사이에 있는 오늘의 시간도 주관하시고 우리의 사명도 완성케 하실 것입니다.(41:4, 42:9) 이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 우리의 힘이요 능력입니다.
예언을 성취하시는 하나님,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힘이 될 것을 믿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8-20절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호하신다는 말씀중에서~
저는 17절 말씀이 깊이 다가옵니다.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이 오늘 나의 기도에 응답하겠고, 함께 하시겠다는 음성으로 들려서 소망이 되고 힘이 됩니다.
오직 겸손함과 간절함으로 주를 의지하고 승리와 기쁨으로 함께 해 주실 예수님을 의지합니다.^^
하시는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를 바라고, 주를 의지할 때 주께로부터 위로와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날마다 깨어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삶.
고아가 아니면서 고아처럼 살지 말고,
그분께
손을 내밀며 그분과 함께 걷는
인생은 복된 인생.아멘
우리 주님과 동행하며 그 동행속에서 그분이 주시는 무한한 위로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영화로운 시간도 들의 꽃과 같으니~ 누가 주인 인지를 바로 알며 안개 같은 인생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찬양하게 하옵소서!
부질없는 세상 영화를 가볍게 여기는 대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에 매진하여 풍성한 열매 거두시기를 빕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 (40:31~)
나의 힘되시고 구원되시는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소서.
세상의 다른 것들에 눈돌리지 않고 주만 바라보며 주의 말씀에만 귀기울이기 원합니다.
주의 말씀이 빛이 되시고 앞길에 등불이 되시기를 바라고, 오늘도 그 말씀으로 새 힘 얻으시기를 빕니다.
42:25 불타오르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42:9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풀이 부탁드립니다
먼저 질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이사야가 활동했던 시기가 BC 740-700년이기 때문에 이 시기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42:9의 말씀이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기에 이사야가 하던 말을 직접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전에 예언한 일"이 그 시기 이전에 예언한 것들이 되겠습니다. 예를 들어, 아하스의 선택이 실패로 돌아간 것,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으나 실패한 사건 등이 그것에 해당될 것입니다. 여기에 적용되는 기본 프레임은 하나님을 신뢰할 때 건짐을 받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때 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서의 말씀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사람이 들었다면 그 사람이 사는 시기에 따라 "전에 예언한 일"은 보다 다양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바벨론의 몰락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다니엘처럼 오래 살았던 사람의 경우이겠지요.
이처럼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예언서를 대할 때 예언과 성취는 기계적으로 맞춰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학자들이 여러가지 노력들을 기울이지만 그 결과물도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유명한 학자라도 '이것이 저것이다' 다음 댓글에 이어가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예언과 예언의 성취 간의 시간적인 간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 주의 종의 경우도 초림으로 해석되는 부분도 있고, 재림으로 해석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언서를 읽을 때는 예언서가 말하고자 하는 생각의 흐름(flow of thought)을 좇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고, 세부적인 예언과 성취 부분은 좀 더 넓게 열어놓고 묵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에서도 포인트는 우상들은 뒤에 올 일을 알게 하지 못하지만(41:22-23), 하나님은 미리 말씀하시고 그것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데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구요.
성경을 읽는다고 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일이지만 그것을 깊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그 일은 점점 어려운 일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도 연구를 하다보면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는 금맥을 발견하기도 하지요!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제 프레임에 걸릴 때가 종종 있어요 아직 알아가야할것이 많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