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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1:1-4(P.948)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가? 2022.4.3.
러더 위트락(Whitlock, Luder)의‘영적 성숙’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는 그의 책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모습으로 사느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도 아주 잘 이해되는 말씀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많은 사람들이 병치레를 하면서 90살 넘어가도록 병상에서 오래 사는 것 보다는 건강하게 살다가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누리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면에서 위트락 목사님이 말씀하신 ‘얼마나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 공감대를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마치 인생의 목적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어느 듯 대한민국이 노령사회에 들어가는 단계이다 보니, 건강과 장수에 대한 논의가 이 시대에 이념화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참 흥미로운 제목을 가진 책이 있어서 읽어 보았습니다. 책 제목이‘10대를 위한 세계 미래보고서 2035-2055’란 책입니다. 내용을 보면 ‘설마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은 엄청난 미래의 세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인체장기 칩을 이용하여 인간의 몸을 분석하고 고치게 됩니다. 광유전학이 발달하여 파킨슨이나 손 떨림 등은 거뜬히 고칩니다. 염기서열 조작으로 죽음을 연장하고, 유전자 가위기술로 모든 장애를 극복합니다. 문제가 발생한 인체 장기가 있다면, 3D 프린트를 통하여 인간의 장기를 만들어 바꾸어 넣습니다. 그러면 다시 아기 같은 몸을 가지게 됩니다.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간 지능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게 도비니다. 이렇게 인간의 과학은 거침없이 진보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책에서 바라는 염원과는 달리 현실의 세계는 냉혹하기 그지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인간의 발달을 말하고 있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계 1차 대전(1914-1918)때 사망자가 약 4천만 명입니다. 인류 역사상 크고 작은 전쟁은 항상 이어져 왔지만, 최초로 국가들이 뭉쳐서 싸운 이 4년의 전쟁 기간 동안 군인과 민간인 합산 4천만 명이라는 엄청난 사람이 죽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30년도 안된 시점에서 발생한 2차 세계대전(1939-1945)은 더 끔찍한 참상을 낳게 됩니다.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 총사망자는 6,100만명 이상이고, 독일을 위시한 추축국 사망자는 1,200만명 이상입니다.
이후에는 이념전쟁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이 있었고, 베트남전쟁이 있었습니다. 20세기 말의 발칸반도 내전, 시리아 내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이 시간에도 계속해서 사람이 죽어가고, 폭탄이 머리위로 떨어지고 있는 참혹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있습니다.
수많은 인류의 비극을 경험하면서 깨달아야 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 과학이 인간의 행복을 만들어 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성과 과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우리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로 인간에게 한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한계는 최근에 와서 더 많이 느끼게 됩니다. 과학과 지식이 발달하면, 인간은 더 과학 앞에서 왜소해지고 무식하게 됩니다. 모르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더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기계가 발달하면 인간의 할 일이 없을 것 같지요? 아닙니다. 기계가 발달하면 더 할 일이 많아집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면 더 바빠집니다. ‘세계가 하나의 촌’이라고 부르짖는 세계화시대에 지구촌은 더 싸우면서 분열하고 있습니다. 평화를 이전보다 크게 외치지만, 전쟁이 단 하루도 멈추는 날이 없는 것을 오늘날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후회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인가요? 오늘 우리가 읽은 전도서는 ‘인간의 궁극적이고도 기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지혜서’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전도서의 저자는 지혜가 풍성한 솔로몬 왕이었고, 세상의 온갖 호사를 다 누린 왕이었습니다. 솔로몬처럼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를 다 누려본 사람은 인류 역사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즐겨 보았던 솔로몬이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지는 지혜서가 바로 전도서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지은 전도서의 시작은 바로 결론적인 말로 시작합니다. 2절,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말하는 것은, ‘솔로몬이 가지고 있었던 지혜와 지식, 그리고 솔로몬이 누렸던 모든 부귀영화, 은과 금이 무의미하고 쾌락이 헛되면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Everything is meaningless.’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솔로몬과 같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누리고 즐기고 가져 보았던 자가 ‘모든 것이 헛되고 무의미하다’고 말하니까 헛된 것입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헛되고 무의미하다’라고 외친다면, 그것은 단순한 푸념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이 헛되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로 헛된 일입니다.
20세기에 활동하였던 유대인 신학자이면서 랍비였던 랍비 아브라함 헤쉘(Abraham Heschel, 1907~1972)은 “삶이란 나 자신의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이다. 삶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소유권을 인정하는 모습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갈 때에 본인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다’라고 말합니다.
과연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고, 본인이 살아가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것인 인생의 행복일까요? 그런 행동에서 인생의 만족이 만들어질까요?
저는 아직까지 제가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지고 살아보지를 못했습니다. 제가 누리고 싶은 것 다 누리면서 인생을 즐겨보지를 못했습니다. 아마도 김목사가 마지막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순간까지 인생을 다 누리고 살면서 즐겨 보지를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제가 불행한 사람인가요? 큰 교회 목사님들처럼 부족함 없이 살아가면 다들 성공한 목회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자신 있게 판단합니다.
제가 다 누리고 살아 보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즐겨 보았던 솔로몬이 던진 한 마디의 말, “인생은 하나님이 없이는 헛되고 무의미하다”는 말은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전도서에 나타난 우리보다 먼저 모든 것을 가지고 살아본 솔로몬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바로 배우는 고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무익하고 헛된 삶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2절,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되고’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헤벧’인데 숨, 증기, 공허함, 속이 텅 빔을 뜻합니다.
특히 ‘헛되고 헛되며’라는 ‘하벧 하벧림’은 ‘헛된 것들 중의 헛된 것’(vanity of vanities)이란 뜻입니다. 헛된 것을 세게 강조하는 관용구입니다. 그래서 NIV 영어성경에는 이 말을 ‘무의미한, 의미 없음’(meaningless)이라고 하였습니다. 헛되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솔로몬과 같이 지혜가 있고, 부유한 왕이 없었습니다. 성경은 “솔로몬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 모든 왕들보다 큰지라”고 합니다. 그는 또 왕들 가운데 가장 많은 처첩을 거느린 왕이었습니다. 후궁이 700명이었고, 첩이 300명이었습니다.
이미 우리는 수요일 사무엘하 강해를 통해서 솔로몬이 얼마나 큰 부귀영화를 누리며, 떵떵거리고 살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상상 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인생을 살고도 삶이 헛되다고 합니다. 인생의 늘그막에서 느낀 솔로몬의 말은 한번 뿐인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모습입니다.
물질과 부귀영화를 바라보면 결국은 허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부여잡으면 허망하게 끝나는 인생이 되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성공병’에 걸린 중환자들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 현상이 현대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병적으로 성공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마시멜로 이야기’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혹은 성공이다.” 그렇습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려 실패하고, 헛된 것을 목숨을 걸고 잡으려고 하다 결국 죽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윌슨 전 대통령은 “가장 큰 실패는 성공 다음에 온다”고 하였습니다. 성공하였다고 기고만장하는 그 순간 바로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10:13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 역시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성경에 보면 수많은 단어가 등장하지만, 성경은 ‘성공’이란 단어를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공이라는 단어 대신 ‘복’이란 단어를 주로 사용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공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성공’이라는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성공’은 우리 스스로 이룬 것에 대해 사용하는 표현이며, ‘복’은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해 준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성공은 내가 노력하고 내가 일구어낸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복은 내가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셔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가 이룬 성공의 결론은 헛되고 헛되다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이룬 성공이란 아무 의미가 없고, 가치가 없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가장 성공한 인물이었지만, 이것을 절실히 깨닫고 우리에게 알게 하려는 의도로 전도서를 쓰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유행하던 도리스 데이라는 가수가 부른 ‘케세라 세라’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말은 ‘될 대로 되라’는 말입니다. 노래의 가사를 보면 ‘미래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될 대로 되라’고 합니다. 이 노래는 두 가지 사상을 말합니다. 1)허무주의(虛無主義), 2)신탁주의(神託主義)입니다.
두 생각의 중요한 차이는 이렇습니다. 인생이 내 맘대로 안 되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허무주의입니다.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이 인생이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되므로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신탁주의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 유익한 삶을 살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K방역이라고 그리 자랑스럽게 떠들면서 전국민들에게 마스크를 씌우게 하고 통제를 하였던 현 정부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제하고 통제를 하였지만, 지금 바이러스 전파 상황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노력해도 안 되니까, 이제는 내 마음대로 마스크도 벗고 생활하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허무주의에 빠져서 인생을 막 사는 분들입니다.
성도는 이렇게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는 때일수록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신탁주의, 신본주의의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 인생의 길을 이끌어 주시고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만 부여잡고 인도함을 받는 4월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 하나님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3절,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솔로몬은 “무엇이 유익한가?”라는 반어법 질문을 합니다. 이 말은 사람이 노력하고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유익하지 않고 무익하다는 반어법 뜻입니다.
‘인간이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가 유익한 것이 없다’는 고백은 실로 충격적 내용입니다. 내가 하는 노력과 수고가 무의미하다면, 왜 우리는 땀을 흘리면서 악착같이 살아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당히 일하고 빈둥빈둥 거리면서 시간을 축내는 버러지처럼 살아도 된다는 말인가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해답이 바로 4절입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인생에서 한 세대는 금방 지나갑니다. 금방 눈 깜빡할 사이에 세월이 지나버리고 맙니다. 여러분들의 인생 또한 한순간입니다. 인생을 조금 알게 되고 느끼면서 살아가려고 하면, 어느새 60을 넘기고 70줄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가변적입니다. 그래서 헛되고 무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으신 땅은 영원히 있습니다. 인생을 흙으로 돌아가 버리는 무상한 짧은 모습이지만, 영원히 존재하는 땅을 부각시킵니다. 고로 여기서 땅은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내 사람이라고 해서 삶은 내 것이 아닙니다. 착각해서 안 됩니다. 내가 정한 인생도 아닙니다.
태어날 것을 내가 정한 것이 아니고, 태어날 날을 내가 정한 것도 아닙니다. 죽는 날을 내가 정하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내 것만을 먼저 챙기기 보다는 하나님을 위한 삶을 먼저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삶의 기본 원칙이 있습니다.
1)‘다른 사람이 나의 삶을 결정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3)‘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인 소명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4)‘하나님과 동행함을 믿으면서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무익한 것을 좇지 말고 유익한 것을 좇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얻지 말고 영원한 것 얻으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doing) 보다는 어떤 사람인지(being)에 더 관심을 두신다”내가 무엇을 노력해서 얻고 쟁취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유익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잘 사는 것과 아름답게 사는 것, 의롭게 사는 것은 다 한가지이다”(Living well and beautifully and justly are all one thing)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세상에서 유익한 삶을 살고, 의롭게 살고 아름답게 인생을 사는 것은 모두 궁극적으로 한 가지 지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을 잘 사는 것과 아름다고 의롭게 사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위해서 어떠한 신앙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인지를 말해주는 내용입니다.
저는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인생을 잘 살고 아름답게 살고 의롭게 살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부족하고 모자라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누릴 것 다 누리고 살지 못하고, 가질 것 다 가지고 살지 못하여도, 하나님만 믿고 내가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면 성공한 인생입니다. 이런 분은 허무한 인생을 사시는 분이 아닙니다.
참 좋은 4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고난도 있지만 부활을 바라보면서 행복한 4월을 보내기를 축원합니다. 전도서가 우리에게 주는 결론은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살아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잘 기억하고 우리 모두가 멋진 인생을 사는 성도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