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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8:1~10(51) 부활의 갈릴리로 가라 2023. 4. 9
로버트 풀검 (Robert Fulghum, 1937-2007)은 목사, 교사, 저술가, 바텐더의 다양한 경력과 경험을 토대로 ‘내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지구에서 잘 놀다 가는 70가지 방법’아주 독특한 책제목으로 베스트셀러를 출간하였습니다. 풀검 목사님의 여러 저서 중에‘제 장례식에 놀러 오실래요?(From beginning to endㅡ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라는 책을 통해 죽음에 대한 교훈을 말합니다.
주인공 마샤 카터(Martha Carter) 할머니는 죽음을 예견하고 유서를 남깁니다. “내가 죽으면 상복대신 화사한 옷을 입으라,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마라, 박수치며 나의 천국 입성을 축하하는 승리의 노래를 불러 달라”고 당부합니다. 마샤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은 춤추며 박수를 치며 음악회와 축제요 환송잔치를 합니다.
마샤 할머니가 남긴 유서가 장례식예배에서 인사말처럼 낭독 됩니다. “나는 이 땅에 살아가며 예수 안에서 참 멋진 인생, 행복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이토록 행복한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성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제 곁에 있었기에 나는 여러분을 섬기고, 여러분은 나를 사랑해 주며 나는 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나는 천사들의 손을 붙들고 천국을 향하여 춤추며 달려갈 것입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여러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마샤 카터.”
누구나 인생을 살다가 언젠가는 맞이하는 죽음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생명체들이 자연의 순리대로 만나게 되는 것이 종말입니다. 들에 핀 이름 모를 꽃들도 피었다가 지는 시기가 있습니다. 집안에서 키우는 화초들도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새벽에 교회당 문을 열게 되면, 너무나 진한 꽃향기가 친교실 전체에 머물고 있어서 깜짝 놀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회당 안에 있는 여러 나무들 중에서 현재 꽃을 피울 만한 것이 전혀 없는지라, 코끝을 자극하는 꽃 향기의 출처가 너무나 궁금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물을 주면서 살펴 본 것이 물 나무(녹보수, 행운목)에서 꽃이 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진한 향기를 내던 꽃도 얼마 전에는 떨어져서 이제는 향기를 내지 않아 마음속으로 많이 아쉬웠습니다. 많이 아쉬웠지만 이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입니다. 꽃이 피었다가 질 때도 있습니다. 한동안 벚꽃이 그리 화사하게 피어 있더니만, 이제는 다 떨어지고 없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섭리이며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죽음을 맞이하지만 불신자들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부활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의 죽음은 심판의 죽음으로 끝나 버리는 가여운 인생이지만, 성도들의 죽음은 죽음을 뛰어 넘는 부활이 있기 때문에 성도에게는 참된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며 이 부활로 말미암아 성도에게는 영원한 천국의 소망이 이어지게 됨을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읽은 말씀은 ‘천사가 무덤에 찾아온 여인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여인들은 예수님이 살아 생전에 ‘내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라는 기억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사 된지 3일이 지난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무덤으로 달려 갑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이라는 말은 안식일이었던 토요일 지나고 첫 날이므로 오늘의 <주일 날, 일요일>이라는 말입니다. 주일 새벽에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무덤으로 달려가니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 놓았던 무덤 돌이 굴러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주의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이 부활을 하였다’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 천사로부터 놀라운 부활의 소식을 들은 여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였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한걸음으로 달음박질합니다. 그렇게 달음박질하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9절의 말씀을 여인들에게 합니다. 10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7절 보세요.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천사들도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먼저 갈릴리로 가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여인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합니다.
<갈릴리>가 무엇이길래 천사나 예수님이나 모두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는 것인가요? 갈릴리에 무엇이 있길래 <갈릴리>라는 장소가 언급되는 것인가요? ‘왜 갈릴리로 가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갈릴리는 복음의 선포가 시작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사명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회복시켜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기는, 믿고 의지하였던 스승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제자들은 골방에 숨어 들어가 의기소침하던 때였습니다. 기가 죽은 상태에서, 숨소리조차 제대로 못 내면서 로마 군인들과 유대주의자들을 두려워해서 꼭꼭 숨어 있던 때였습니다.
이런 때에 주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불러 주셨던 그 <갈릴리>를 떠 올리면서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맞이하고 축하하기 위한 모든 성도들은, 내 신앙의 출발점이 되는 초심의 자리를 떠 올리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그물을 씻고 다듬고 있던 제자들을 불러 주셨던 주님을 떠 올려야 합니다.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나를 불러 주셨던 사랑의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두렵고 무서워서 골방에 숨어 있는 것이 신앙인의 자리가 아닙니다. 나를 불러 주신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현실 속에 불안과 좌절, 그리고 힘든 것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부활의 주님은 이런 모든 것을 다 날려 버리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내가 주님을 만났던 나만의 갈릴리로 돌아가서 내 신앙을 점검하고 회복해야 합니다.
다함께 ‘갈릴리 호숫가에서’를 부릅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시몬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주님은 여인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여인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갈릴리에 가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처음으로 주님을 만난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사명을 받은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이제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사탄마귀는 우리가 주님께 받은 사랑과 헌신의 갈릴리를 잊어버리도록 역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나만의 갈릴리에서 무엇이 회복되기를 원하고 있을까요?
1. 신앙의 기쁨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8절,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 새”
천사들을 만난 여인들은 두 가지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8절에서는 ‘무서움과 큰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인들이 두려워한 것은 비어져 있는 빈 무덤이었습니다. 살아생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떠올려 보았지만, 눈에 보이는 천사도 두려웠고, 부활의 소식도 두려움이었습니다.
여인들이 두렵다는 감정만 가졌다면 참된 신앙의 모습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귀신을 두려워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도 귀신이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귀신이 두려움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믿음으로 이길 수 있기 때문에 성도는 믿음으로 귀신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NIV 성경에서는 ‘afraid yet filled with joy(두렵지만 기쁨으로 충만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시적인 두려움이 있지만, 두려움을 극복하는 큰 기쁨이 충만하였다는 말입니다.
여기의 ‘큰 기쁨으로(카라스 메갈레스)’인데 ‘부활의 사실에 대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천사로부터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들은 여인들은 큰 기쁨을 느낍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절망이 모두 사라져 버린 큰 기쁨입니다. 주님이 죽으셨다는 것은 두려움과 큰 슬픔이었지만,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은 기쁨 중에 가장 큰 기쁨의 충만입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자신들이 지금 느끼고 있는 이 놀라운 부활의 기쁨을 전하기 위해 한걸음으로 달음박질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환경과 상황을 뛰어넘는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죽음 앞에서 슬퍼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설교 초두 예화에 나온 마샤 할머니의 말처럼 ‘내가 죽으면 기쁨과 축하의 자리를 만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이런 부활의 기쁨을 가졌던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서 찬송하며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빌 4: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분들이 살아가기에 너무나 팍팍하다고 말합니다. 이구동성으로 힘들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삶의 재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 있어서 힘들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 가요? 제가 생각하기에 지나고 나서 보면 다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는 생활이었지만, 살아가고 있던 현 시점에서는 모든 것이 힘들고 어려웠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기뻐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감사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찬양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뻐하는 것과 감사와 찬양을 잊어 버리게 되면 기도도 잊어버리고 결국은 무너지고 흔들리는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잊지 맙시다.
‘3일의 비밀’이라는 제목 짧은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뉴욕의 고층 빌딩 번화가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고 갑니다. 그 고층 빌딩 모서리에 조그만 좌판에다가 꽃을 파는 연세 드신 할머니 한 분이 있었습니다. 꽃을 파는 이 할머니는 언제나 기쁨으로 얼굴이 빛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궁금해 하던 단골고객 한 분이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손님 : 항상 웃는 할머니는 걱정 근심이 전혀 없으신가 봐요. ○할머니 : 천만에요. 사람에게 걱정 근심이 없을 수가 있나요. 걱정이 없다면 내가 거리에서 이나이에 꽃을 팔겠어요? 내게도 역경과 고통이 있답니다. ○손님 : 그런데 어떻게 그리도 매일 기쁘게 사실 수가 있어요? ○할머니 : ‘3일의 비밀’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이랍니다.
○손님 : ‘3일의 비밀’ 이라니요? ○할머니 : ‘3일의 비밀’ 이란, 걱정거리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3일을 기다리는 것인데, 이는 무덤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것이지요. 때론 숫자대로 3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어떤 암흑 같은 고난일지라도 하나님이 기쁨이 주시기에 나는 항상 기뻐해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보았던 여인들이 가졌던 기쁨을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아무리 우리의 삶이 힘들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얼굴에서 기쁨이 사라지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짜증나고 걱정되는 것들이 많다고 해도, 부활의 주님이 나와 함께하고 계시는데 그 어떤 것들이 우리의 믿음을 막지 못한다는 확신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2.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회복해야 합니다.
9절,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음박질하고 있는 여인들입니다. 정신없이 마구 뛰어가는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여인들에게 던진 첫 말씀이 “평안하냐?”라는 말입니다. 여기의 ‘평안하냐(카이레네)’인데 “두려움이 없어진 참된 평화”를 의미합니다.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걱정과 근심이 변하여 평안이 이루어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평안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본문에 나오는 여인들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제가 여인들 중에 한명이라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이전까지 엄청난 두려움과 걱정이 온 몸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상 속으로 그려보던 천사를 실제로 만나 보았습니다. 단순하게 힐쩍 넘겨다 본 것이 아니라 천사와 대화도 했습니다. 게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실제로 만나 보았습니다. 아마도 머리와 가슴에는 만감이 교차할 것입니다. 두렵고 흥분되고 마구 뛰는 심장은 터질 것 같은 모습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주님이 던진 첫 마디가 “평안하냐?”는 말입니다. 평안하냐?라는 질문은 ‘이런저런 세상 걱정과 염려 때문에 가슴 졸이며 휩쓸리지 말고 평안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처음 만났을 때에도 ‘평안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가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부활하고 아니 계신데, 여전히 무덤 속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죽음의 자리 시체가 썩는 냄새가 나는 무덤 자리를 평안의 자리가 아닙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십자가 아래에 있습니까? 무덤에 머물러 있습니까? 부활의 주님이 계시는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두려움에 빠져 있다면 갈릴리에서 평안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갈릴리에 가면 슬픔이나 걱정이 사라집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평안을 회복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눈물의 예레미야’로 불렸던 독립운동가 주남선(朱南善1888-1951)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붙잡혀 고문을 당했습니다. 일본 경찰은 거꾸로 매달은 상태에서 고춧가루 물을 콧구멍에 붓기도 하고, 손톱 아래에 대나무 침을 끼워 넣는 잔학한 고문을 행합니다. 열 손가락 손톱이 모두 빠져 달아난 상태입니다.
그러면서 일본 형사는 “잘 생각해보고 마음을 돌이켜 신사참배를 하라”라고 말합니다. 주남선 목사는 “백번 생각해봐도 마찬가지요. 참된 신은 하나님뿐 다른 신은 있을 수 없소.” 그러자 몽둥이가 사정없이 날아들었고, 주남선 목사는 바닥에 쓰러져 혼절해 버립니다.
얼마 후 의식을 찾고 보니 고문하던 일본순사도 보이지 않고 조용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물고문으로 인해 흥건히 젖어 있기도 하고 얼어 있는 바닥이 차갑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시멘트 바닥을 만져보니 추운 겨울 물로 젖은 시멘트 바닥이 온돌방처럼 따뜻해집니다. 온몸은 포근한 담요에 싸여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주남선목사님은 자신이 숨을 거두고 죽어 있는 상태라고 판단합니다. 그런데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포근한 담요는 하나님 자신이었어요. 부활하신 주님의 품에서 평안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주를 만난 사람은 평안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환난과 고통 가운데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참된 평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기쁨과 평안의 충만함 속에 보내는 4월의 모든 시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