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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의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물의 반은 안동에서 났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사랑방 『안동』 ‘안동의 인물’을 읽을 때마다 그 말이 심각한 과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몇년전 개목사 앞 전망 좋은 곳에서 눈앞에 보이는 겹쳐진 조그만 산줄기 사이 사이 골골이 박혀 있는 안동의 마을들을 보면서 참으로 마을 단위로 아담하게 경영하기 좋은 땅이라고 생각했었다. 골마다 마을마다 대개 인물 한 둘은 난 곳이 바로 안동이고 보면 인물이 나는 것도 터 덕을 전혀 안보는 것은 아닌가 보다.
유연당의 내력
김대현(金大賢,1553-1602)의 자는 희지(希之)이고 호는 유연당(悠然堂)이다. 본관은 풍산이다. 고려조 봉익대부 삼사좌윤 안정(安鼎)의 7세손이다. 조선 중종조 청백리로 공조참판을 지낸 그의 증조부 허백당 양진(楊震)은 재주와 덕망이 일세의 으뜸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재상감으로 여기었다고 한다. 양진이 간원의 장으로 있을 때 효혜공주와 결혼한 부마 김희(金禧)의 집 규모가 나라에서 정한 법규를 벗어났다고 탄핵하였다. 김희는 당대에 가장 권세있던 간신 김안노(金安老)의 아들이다. 이 때문에 김안노의 심한 배척을 받아 크게 성취하지 못하였다.
조부 잠암 의정(義貞)은 문장과 절개있는 행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과거에 급제한지 한달여만에 홍문관 정자로 뽑혔고 얼마되지 않아 수찬겸 사서경연관의 직책을 맡아 서연(書筵)에 자주 뽑히었다. 그가 정언이 되자 김안노를 중심으로 한 간신의 무리가 그 강직함을 꺼려서 자꾸 미워하고 견제하여 역시 크게 이루지는 못하였다. 인종이 동궁으로 있던 시절 잠암을 서연관 중 제일로 여기어서 늘 국사로 대우하였다고 한다. 잠암은 을사년에 인종이 돌아가자 통곡하면서 풍산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였다.
아버지는 농(農)인데 큰 재주와 국량을 지니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큰 성취는 못하고 중훈대부 장예원 사의에 머물렀다. 어머니 숙인(淑人) 안동 권씨는 봉열대부 군자감 검정 일(鎰)의 따님이다.
타고난 재주가 출중하였을 뿐 아니라 기풍이 원만하고 후덕하였다. 그리하여 7~8세 무렵부터 사람들이 대인군자가 될 것이라 말하곤 했다. 소년 시절에 학궁(學宮)에 놀러갔는데 학궁의 장이 여러 소년들의 기량을 시험해보고자 식사시간에 ‘오늘 밥을 다 먹는 사람은 벌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러 소년들이 모두 감히 다 먹지 못했는데, 유연당은 끝자리에 앉아 있다가 마치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듯 다 먹고난 뒤, 즉시 집에 통지하여 술과 밥을 갖추어 오게 하였다. 그의 넉넉하면서도 당당한 도량을 짐작케 하는 일화이다.
부인은 전주 이씨 효령대군 가문의 외손이었다. 처외조부는 전주부윤을 지낸 이즙(李楫)으로 유연당이 장가 든 17세 때 이미 70여세였다. 그럼에도 유연당을 볼 때마다 반드시 관대를 하고 예를 갖추면서 말하기를, ‘내가 평생에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았지만 김랑과 같은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 다음날 반드시 대인 군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온화함과 엄숙함
천품이 덕성스럽고 도량이 너그러웠던 유연당은 늘 영욕을 마음 속에 두지 아니하고 기쁘고 성냄을 얼굴에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그는 항상 온화하게 사람과 사물을 대하였다. 그러나 사리를 논함에 미쳐서는 시비와 공사와 의리의 분변을 결단함이 해와 별처럼 명료하였다. 다른 이의 착함을 들으면 마음 속으로 진심으로 좋아하여 반드시 도의의 사귐을 가졌고, 다른 이의 착하지 못함을 보면 반드시 먼저 책망하여 깨우쳐 주고 만약 스스로 새로워지면 그 옛날의 잘못을 잊고 정성스레 대하였다.
진실로 마음이 통할만하면 비록 연배가 서로 어울리지 않아도 터놓고 지내었다. 일찍이 여러 사람과 더불어 얘기하는 가운데 좌중의 어떤 사람이 어진 재상을 자못 방자하게 모욕하였다. 유연당이 정색하고 책망하니, 그 사람이 본래 기질이 매우 억세어서 다른 사람에게 굽히지 않는 버릇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듣고 매를 짊어지고 땅에 업드려 부끄러워하며 사과하였다. 이렇게 온화함과 엄숙함을 동시에 지닌 그의 태도는 불쌍한 경우를 보면 한없는 인자함과 넉넉함으로 드러났다.
유연당의 벗 중에 어려서부터 절친한 사람이 있었는데 중년에 불행히 나병이 들었다. 그래서 친척과 오랜 친구들도 모두 피하고 만나지 않았다. 그런데 유연당은 평소와 다름없이 왕래하면서 문병하였다. 또 예전처럼 음식도 같이 먹었다. 어떤 이가 의아하여 물으니, 유연당은 ‘이 사람이 이 병이 든 것은 그의 죄가 아니다. 내가 어찌 차마 평소에 서로 친히 지내던 의리를 저버리고 병이 들어 死生의 즈음에 있는 사람을 끊어버린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감읍하여 그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마땅히 나를 섬기는 바로써 김공을 섬기어라’고 하였다.
이러한 유연당의 마음씀은 바로 논어 옹야편(雍也篇)의 공자가 백우를 문병하는 장면을 상기시킨다. 그가 공자의 경지까지 이른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는 논어를 많이 읽어서 그 내용을 잘 아는 많은 사람의 경지를 넘어서서 논어에 보이는 공자의 경지를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그는 일찍이 ‘사람의 궁하고 현달함, 화복은 천명이 아님이 없다. 모든 일을 하늘의 뜻에 따라야 하고 함부로 영위해서는 안되니 마음 속에 추호라도 계교하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유연하게 산을 바라보듯 삶을 바라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식들의 교육도 과정을 정해서 독려하지 않고 그 근면하고 태만함에 맡기었다.
유연당의 너그럽고 넉넉한 도량은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 더욱 빛이 난다. 그에게는 외숙이 하나 있었는데 일찍이 병으로 인하여 실성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조금이라도 자기 생각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비록 자기보다 나이 많은 어른이라 하더라도 곧 거칠게 욕하며 행악하였다. 유연당이 늘 올바른 도리로 진심으로 대하니 그 외숙도 유연당에게는 패악의 말로 대하거나 포악을 부리지 않았다.
재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난처한 일이 많았는데 유연당은 온화하게 대하여 끝내 그 환심을 잃지 않았다. 그러면서 집을 나란히 하여 삼십여년을 살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진심으로 감탄하였다. 임진 계사년간 왜란 중에는 영주에 있으면서 조석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폭주하는 유민들을 가엾이 여겨 돌보았고, 그로 인해 삶을 온전히 한 사람이 수도 없었다. 그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천성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온화하고 너그러운 성정 뒤에는 깨끗하고 단아하고 절도있는 자기성찰과 자기관리의 끊임없는 노력이 뒷받침 되고 있었다.
유연당은 어려서 한성 장의동(지금의 서울 청운동) 집에 살면서 우계 성혼(成渾)에게 수학한 일이 있었다. 유연당이 고향으로 귀향하여 있다가 1590년 지방관의 추천에 의하여 서울에 올라왔을 때, 우계가 마침 관리 인사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당시에 여러 사람들이 다투어 우계를 만나고자 하였는데 유연당은 우계를 찾아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유연당에게 ‘그대는 우계와 세의와 교분이 가장 두텁고 하물며 일찍이 수학한 은의(恩義)가 있는데도 어찌 가서 보지 않는가?’하니 그는 ‘우계 선생은 일세의 중한 이름을 지녔고 지위는 재상의 반열에 있으니, 포의의 한미한 선비가 어찌 감히 그 문전에 급히 찾아가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그의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 자기성찰이 이와 같았다.
자호에 담긴 삶의 지향점
이러한 성정과 삶의 지향은 유연당이라는 자호의 의미에도 절절이 배어있다. 유연당이라는 호는 그가 1589년 영주 봉향리 집의 서쪽에 당을 짓고 유연당이라고 이름 붙인데서 비롯하였다. 당과 학가산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으므로 중국의 유명한 시인 도연명의 시구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悠然見南山)’의 悠然을 빌린 것이다. 그러나 유연당기의 ‘조화로운 자는 柳下惠(류하혜)요, 깨끗한 자는 伯夷 叔齊(백이 숙제)이니 모두 내가 숭앙하는 바이다. 도연명은 능히 그것을 겸하였으니…’라는 구절은 그가 당호를 유연당이라고 지은 속 뜻을 보여준다.
유하혜는 온화하고 조화롭게 벼슬살이를 하면서 자기관리를 행한 인물이며, 백이 숙제는 수양산에 숨어 속세를 멀리한 채 깨끗한 절개를 지킨 인물이다. 도연명은 내키지 않는 얼마 간의 벼슬살이 후 고향에 돌아와 유연한 삶을 추구한 인물이다. 도연명은 그러한 유연한 심정을 ‘속세에 오두막을 얽었으나 마음이 멀리 있으니 속세가 절로 멀어지네(結廬在人境 心遠地自偏)’라고 표현한 바 있다. 유연당이 추구한 경지도 바로 도연명이 추구했던 바와 같이 속세에 살면서도 속세의 온갖 욕망과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심원의 경지가 아니었을까 한다. 유연당이라는 호가 나타내는 뜻처럼 그는 산수를 좋아하고 소요하면서 때로는 유명한 문장가들과 서로 시를 주고 받으며 초연히 세월을 보냈다.
벼슬길에 오르다
심원의 유연한 삶이라는 기본 정서를 지녔던 그도 젊은 시절에는 여러 형편으로 과거에 관심을 두었던 듯하다. 1575년 어머니의 복상을 마친 후 과거의 일에 힘을 써서 1582년 생원시에 삼등으로 합격하였다. 이로부터 누차 향시 한성시에는 합격하였으나 복시(覆試)에는 합격하지 못하였다. 사림들이 그것을 애석히 여겼으나 유연당은 개의하지 않았다. 1591년 겨울에 아버지 사의공이 서울 집에서 돌아가자 유연당은 유해를 풍산 오무동(五畝洞)집으로 봉환하였다.
여막을 짓고 정성스레 시묘를 하던 1592년 여름 왜구가 쳐들어와서 온 나라가 전란에 휩싸였다. 유연당은 궤연(几筵)을 모시고 급히 태백산 아래로 피난하였다. 피난처에서도 초하루와 보?㎱막? 제물을 갖추어 정성스레 삭망을 지냈는데 매우 어려운 때를 당해서도 거르지 않았다. 1594년 복상이 끝나자 그는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않고 한가로이 참됨을 추구하며(養眞) 일생을 마치려 하였다. 그런데 한음 이덕형(李德馨), 백암 김륵(金玏)이 번갈아 추천하여 1995년 성현도찰방을 제수 받았다. 성현은 적의 길머리에 있었고 왜적이 아직 해상에 주둔하고 있었다.
유연당이 처음 임소에 이르니 누추한 집에는 곤고한 백성들이 가득하고 음식과 역참은 혹사당하여 한결같이 아득한 지경이었다. 그는 온힘을 기울여 어진 정사를 베풀어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피를 토하듯 조정에 소를 올리고 상관에게 서간을 보내 낱낱이 폐단과 병폐를 논하고 그 개선 방안을 개진하였다. 그 서간과 상소에는 전란에 시달리는 백성의 곤고를 덜어주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가득 담겨있다. 조정에서 그 방책을 받아들여 모든 이가 그 은택을 입게 되었으며 허물어진 역참도 점차 완비되었다. 임기가 차서 돌아가게 되자 백성과 병졸들이 마치 부모를 잃은 듯 하면서 서로 의논하여 길가에 비를 세우고 ‘끼친 사랑 오랠수록 더욱 잊지 못하리’라고 새기어 그 맑은 덕을 기리었다.
유연당은 1598년 사도사 직장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해 여름 상의원 직장을 제수 받았는데 주변의 거듭된 권유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 때에 명나라 장수 형개(刑玠)가 한성에 주둔하였다. 조정에서 접대소를 설치하였는데 유연당이 접대낭청을 맡았다. 이는 그의 온화하고 너그럽고 도량이 있는 성품을 고려한 인사였던 듯하다. 실제로 명군과의 관계에서 난처한 일이 생기면 동료들이 유연당에게 미루어 담당하게 하였다. 명군 제조 강섬(姜纖)이 경박하고 포악하여 그가 성낼 때에는 품의할 일이 있어도 동료들이 모두 감히 발언하지 못하고 유연당에게 미루었다. 강제조가 처음에는 유연당에게도 포악을 부리다가 유연당의 사람됨을 밝게 알고서는 후회하고 사과하며 그 말을 따랐다고 한다. 유연당이 비록 낮은 벼슬을 하고 있었지만 조정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공경하고 소중히 여긴 것은 다 그의 성품과 능력에 감복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연당은 명군의 서울 주둔 기간인 1598년 8월 3일부터 1599년 4월 15일까지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군문잡사’(記軍門雜事)라 하여 일기 형식으로 쓰고 있는데 명나라 군인들이 관왕묘(關王廟)에서 제사 지내는 장면, 당시 전쟁의 진행 상황, 우리 조정과 명 주둔군과의 긴장 갈등 관계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서 당시의 상황을 잘 알려주고 있다.
1599년 형개가 회군하자 유연당은 그 접대의 공로로 승진하여 예빈사 주부가 되었다. 가을에 영주로 돌아와 이산서원의 산장이 되어 유학의 교육과 진흥에 힘을 기울이다가 1601년 산음현감을 제수 받았다. 산음현은 병화를 겪어 문묘가 다 무너졌는데 아직도 중건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연당은 부임하자 마자 학교가 무너진 것을 개탄하여 경내의 선비와 부노들을 불러 모아 깨우쳐 대성전과 명륜당과 동서제 등을 세우고 양사(養士)에 힘을 써서 문풍을 일으켰다. 이는 전란의 심각한 후유증으로 무너진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그의 고심이었다. 그는 당시의 인간성 타락을 문견난록(聞見雜錄)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진년의 난리를 겪은 후에 선비들이 삶을 도모하기에 급급하여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탐욕의 싸움짓과 범람하는 비방이 날마다 달마다 심해져서 토풍과 민속이 그전과는 크게 달랐다. 어떤 사람이 세상을 조롱하여 말하기를, 왜적의 화가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집과 재산을 분탕질 당한 것은 차라리 애석하지 않다. 자녀들이 포로로 잡혀간 것도 오히려 안타깝지 않다. 우리의 염치를 빼앗긴 것이 가장 한스러운 일이다.”
그는 현감의 직책을 청렴하고 부지런히 수행하였으며 정사는 평안하고 너그럽게 시행하였다. 공사는 성실로 받들었으며 스스로는 검소하게 지내었다. 따라서 관아의 관속들은 추위와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였다. 혹 견디기 어려워 말하는 자가 있으면, 너희들이 집에 있으면 능히 오늘과 같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재종형 연현(挺賢)이 마침 현을 지나다가 내아(內衙)에 들어와 사방 벽이 싸늘하고 여러 아이들이 굶주려 우는 것을 보고 탄식하며, ‘어찌 스스로 이와 같이 고생하는가?’ 하자 유연당은 다만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유연당이 관직을 맡은지 일년도 안되어 다스림의 효과가 크게 드러났다. 관찰사 이시발이 그 정사의 치적을 포창하여 조정에 계문을 올리었다. 그에 따라 임금이 특별히 승진의 명을 내리었는데 승진하기도 전에 치소에서 병이 들어 낫지 않았다. 이에 스스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친구들에게 긴 이별의 말을 써서 편지하는 등 돌아갈 준비를 하였는데 신색이 마치 평일과 같이 담담하였다.
1602년 임인년 3월 12일 50세로 돌아갔다. 돌아간 뒤에 보니 여벌 옷 하나, 장사지낼 채비 하나 갖추어 있지 않아서 현내의 선비 오장(吳長), 권집(權潗), 박문앙(朴文柍) 등이 옷을 벗어 수의를 만들고 예를 갖추어 장사를 치루었다. 그 해 8월 16일 증조인 참판공 묘의 좌측 언덕에 장사지냈다.
유연당의 적덕
유연당은 권씨 부인과의 사이에 9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들이 모두 현달하였다. 그 중 아들 8형제가 모두 진사에 오르고 그 가운데에서도 다섯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9남 4녀의 아들 딸 아래에서 1628년 장남인 봉조(奉祖)가 가장을 쓸 때, 남녀의 손이 113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현달한 아들들 중에서도 장남 학호 봉조(奉祖)와 이남 망와 영조(榮祖)는 문학으로 이름이 있었다. 영조는 학봉 김성일의 사위이기도 하다. 삼남 장암 창조(昌祖)도 문행으로 이름이 있었고 육남 학사 응조(應祖)는 학자 문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1629년 조정에서 다섯 아들의 등과를 기려 유연당에게 가선대부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를, 부인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을 증직하고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하늘이 보덕한다면 유연당의 후한 덕으로는 현달하여야 마땅하였으나 현감에 머물렀다. 그의 어짐으로 보면 수를 누려야 했으나 짦은 생을 살았다. 하늘의 뜻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와 가장 친한 사이였던 참판 신경진(辛慶晉)은 만년에 ‘내가 일찍이 김모가 후덕하면서 그 복을 누리지 못했음을 괴이하게 여겼는데 자손이 많다고 들었으니, 하늘이 보답하여 베품이 여기에 있는가 보다’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육남 응조가 쓴 유연당 행년기에 보면 재미있는 기사가 있다.
응조는, 1592년 임진년 유연당이 아버지의 묘를 어머니의 묘 뒤 언덕에 썼는데 그 때 술사의 무리가 어머니의 묘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였다. 유연당은 어머니의 묘를 옮기어 아버지의 묘광 왼쪽에 합장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왜란이 일어나 8년 동안이나 나라가 매우 혼란하였기 때문에 뜻을 이룰 수가 없었고 유연당은 그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기었다고 기록하고, 이어 하지만 지금(응조가 행년기를 쓰던 당시)에 이르러서는 그 묘자리가 그 산 안에서는 가장 길지로 여겨진다고 적고 있다.
유연당 어머니의 묘자리가 명당이어서 자손들이 현달했을까? 유연당의 묘갈을 쓴 우복 정경세(鄭經世)는 ‘덕을 씨뿌려 그 보답을 거두지 못한 사람은 그 후손이 필히 창성한다 하였는데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으랴’하여 유연당 자손의 현달을 적덕의 결과로 이해하였다. 우리 시대의 풍수 최창조(崔昌祚)도 ‘積德(적덕)이 明堂(명당)을 만든다’고 하지 않았던가? 유연당의 삶이 그 자손들 삶의 모범이 되었을 것이고 그 결과로 자손이 창성한 것이리라.
죽암서실에서 바라본 오미동
풍산읍 우회도로 끝 하회마을과 예천 방향으로 갈리는 교차로에서 예천 방향으로 약 3km 정도 가다가 호명 방면으로 좌회전 하여 2km 정도 더 가면 오미동이 나온다. 큰 길가 오미동 입구에는 1994년에 재경 풍산 김씨 죽암회에서 세운 오미동의 유래라는 비석이 있다. 그 비석에는 ‘풍산 김씨가 오미동에 정착하여 살게 된 것은 이미 조선 초기 시조 문적(文迪)의 8세손 자순(子純) 때였는데 그 때에는 오릉동(五陵洞)이라 불렀고, 그 후 문정공 잠암 의정(文靖公 潛巖 義貞)이 을사사화 후 낙향하여 오릉동(五陵洞)을 오무동(五畝洞)으로 고치고 은거하였으며, 잠암의 손자 유연당 대현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진사에 이르고 그 중에도 5형제는 문과급제 하였음에 인조가 8연오계(八蓮五桂)라 하고 동명을 오미동(五美洞)이라 내려주어 그 때부터 오미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새겨져 있다.
입구에서 우측으로 이삼백 미터 쯤 안으로 들어가면 적당히 감싸인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에는 여러 채의 고가가 아직도 옛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세태는 어쩌지 못하여 인적은 드물었다. 여러모로 무지한 나는 오미동 답사에 안동 주변의 학자와 가문에 대하여 깊이 아는 임노직 선생을 동행하였다. 임선생 덕택으로 유연당이 손수 지었었다는 유연당 종택을 비롯한 여러 채의 고가를 둘러 보면서 그 내력을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임선생의 안내로 마을 뒷산 중턱쯤에 자리잡은 죽암서실(竹巖書室)에 올랐다. 비록 지금은 공부하는 이 없어 길 조차 산풀들과 칡덩굴에 덮혔지만 죽암서실은 유연당이 자식들을 교육하던 곳이라 전해진다고 한다. 죽암서실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오미동 마을이 지닌 감싸인 아늑함과는 다른 것이었다. 주변이 툭 트여 왼쪽으로는 풍산 들이 넉넉히 보이고 앞으로는 높지 않은 산들이 알맞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 풍광이 유연당의 삶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해 영(안동대 교수,동양철학)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