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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18(264)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2024. 4. 28.
영화배우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 멜 깁슨 (Mel Gibson)이 거액 3천만 달러를 들여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이라는 영화를 2004년도에 제작합니다. 단순하게 영화에 투자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메가폰을 들고 영화감독을 하면서 찍은 영화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전 세계에 상영되었고, 특히 한국에서는 교회와 성도들이 단체 관람을 하면서 대 흥행을 기록하였습니다. 당시에 우리 덕민 교회에서도 모든 성도님들이 서면에 있는 극장으로 가서 이 영화를 본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멜 깁슨이라는 영화배우는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출연하는 영화마다 대 흥행을 하면서 매우 많은 돈도 벌었고, 인기도 받게 됩니다. 그러다가 대중의 인기에 파묻혀 술과 마약,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인생이 망가지게 됩니다.
어느 날 마약에 취한 체 우울증을 견디지 못하고 창밖으로 뛰어내려 투신자살을 시도합니다. 결국 투신자살을 성공하지 못하였고, 방황 하고 있는 멜 깁슨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신앙에 빠져 들면서 멜 깁슨은 십자가를 보며 고백합니다. “나는 정말 죄인이다. 나의 죄악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이다.”
회개하며 올바른 신앙생활을 다짐한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영화로 제작하기로 결심합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극심한 고통 즉 수난(passion)을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성경을 읽으면서 오랜 시간 준비합니다. 당시 3천만 달러(400억)이 넘는 영화 제작을 위하여 본인의 전 재산을 투입하는 모험을 감행합니다. 미국의 영화 제작사들은 흥행이 보장되지 않는 기독교 영화에 대하여 큰 돈을 투자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멜 깁슨은 자신의 전 재산을 끌어 모아 영화를 제작하였고, 영화를 제작하는 이유는 ‘십자가를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너무나 기독교색깔이 짙은 이 영화는 흥행에 참패하여 망한 영화가 아니라 큰 돈을 벌게 됩니다.
특히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은 느껴셨을 터이지만, 예수님이 당하는 수난을 가장 사실적이고도 처절하게 표현하여서 영화를 보는 내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함께 아픔을 동참할 정도로 역사적 사실을 잘 표현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보아야 할 영화로 자리매김한 것입니다.
미국의 영성 목회자인 존 파이퍼(John Piper)목사님은 영화가 크게 성공한 후,‘The Passion of the Christ- 예수님께서 못 박힌 50가지 이유’라는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책을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고 돌아가셔야 했던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십자가 사건이 너무나 처참하기 때문에 수긍하지 못합니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종교적 동정을 유발하기 위한 치밀한 음모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현실을 떠나 공상의 세계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영화가 예수님의 고난 자체를 그리고 있다면, 책은 예수님이 왜 고난과 죽임을 당했는지 그 목적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를 죽였는가?’ 라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죽게 하심으로 죄인들을 위해 성취하신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대중들에게 던진 것입니다.
파이퍼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목적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첫번째가 ‘내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으로 받으셨고, 자신을 하나님에게 기꺼이 드림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함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다’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이유를 요약한다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이 오늘 나를 온전히 세워주는 원동력이 된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종교 다원화 영향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에 필요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말하는 분들 중에서도, 십자가가 없어도 신앙 생활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말하는 위험천만한 신앙관을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헛된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없이는 온전한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십자가의 길이 아니고서는 구원의 길이 절대 없다는 것을 확고부동하게 믿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등한시 하고 하찮게 대하는 이런 모습이 2천년 전 고린도 교회 안에도 존재하였습니다. 특히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 일부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하찮게 생각하면서 교회 안에서 분란과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고린도교회를 자목한 바울이 단호하게 던진 한 마디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입니다. 바울은 18절에서 십자가의 정의를 이렇게 내립니다. 18절 함께 읽어 보십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똑같은 십자가이지만 전혀 다른 두 개의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십자가를 헛되고 미련한 것이며, 아무에도 쓸모없는 것이 여기는 자들에게는, 십자가는 단지 죄인을 사형시키는 멸망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전해주는 도구가 된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왜 십자가가 능력일까요? 십자가에는 어떤 능력이 있길래 바울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십자가가 능력이라면,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으면 귀심이 덤비지 못하고 건드리지 못하나요? 십자가를 손에 들고 있으면, 드라큘라 영화처럼 흡혈귀들이 놀래서 도망가는 능력이 있어서 그런가요?
정확하게 말하면 ‘십자가 도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기서 ‘도’는 쉽게 생각하는 길 도자를 사용해서 ‘십자가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전혀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원어 헬라어에 근거한 올바른 해석 또한 아닙니다.
여기서 ‘도’란 헬라어노 ‘로고스’인데, “말, 진술,연설,교훈”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NIV영어 성경에서는 ‘the message of the cross(십자가의 메시지)’라고 번역을 했고, 현대어 성경에서는 ‘집사가의 진리’라고 번역했습니다. 제 개인적 생각으로는 ‘십자가의 도’라는 단어가 ‘도를 아십니까?’라는 사이비종파들의 느낌이 들어서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본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라는 단어보다 ‘십자가의 진리 혹은 십자가의 말씀’이라는 단어가 더 의미전달이 올바르다고 생각을 합니다.
십자가가 능력이라는 말을 오해해서 곤란합니다. 아주 명확하고 올바르게 표현하는 것은 ‘십자가 자체에 능력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의 말씀과 진리가 능력이 있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입니다. 단순하게 금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십자가 반지를 하고 다닌다고 해서 십자가의 능력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찬송가 ‘만왕의 왕 내 주께서(151장)’1절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만왕의 왕 내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이 찬송가를 지은 작사가는 ‘십자가를 볼 때에 마음의 고통과 근심이 사라지고, 십자가를 볼 때에 나의 영안이 밝아져 천국을 보게 되고, 십자가를 볼 때에 참된 나의 기쁨이 영원하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십자가의 놀라운 능력이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들 님에게 임하는 은혜의 능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한국교회가 흔들리고 있다는 말을 많이들 하고, 한국교회 성도님들의 신앙이 많이 약화되었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은, 능력의 십자가의 말씀을 전하는 교회와 강단은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진리의 말씀을 믿고 따라가는 성도는 세파가 아무리 거세게 몰아쳐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에 굳게 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나아가는 칭찬듣는 성도가 되길 소망합니다.
1.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 진리의 말씀을 믿고 따라가는 성도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의 말씀입니다.
여기의‘구원을 받는’이라는 문구는‘죽은 자를 살려내는 영원한 구원’을 의미합니다. 죄와 허물로 이미 죽었던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함을 주어지는 내용입니다. 즉,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상징이 되는 십자가만이 절대적인 구원인 것을 말해 줍니다.
이 세상에 구원을 얻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 종파에서는 각기 정한 구원에 이르는 규칙을 따라 행동합니다. 이단이라 불리는 신천지나 구원파, 통일교 등에서도 각기 구원을 말하고 있지만, 거기서 말하는 구원은 전부 거짓이며 헛된 내용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로는 십자가를 떠들어도 이단 사설을 따르는 무리들에게는 십자가가 주는 구원의 능력을 맛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심으로 나의 죄를 사해 주셨고, 그 보혈의 능력을 믿는 모든 자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혼탁한 세상에서, 그리고 진리가 왜곡되는 이 세상에서 절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보혈의 십자가를 귀히 여기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작년 가을로 기억합니다. 시골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귀농인들의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방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농부의 집에 밤사이에 난리가 났습니다. 농부가 아침에 닭장에서 닭이 밤새 낳은 계란을 가지러 갔다가 죽어 있는 어미 닭을 본 것입니다. 무언가 사나운 짐승에게 물어 뜯겨 죽어 있고 여기저기 닭깃털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습니다.
농부가 닭장 안으로 들어가자 구석에서 작은 병아리들이 삐약삐약대며 나왔다 들어갔다 합니다. 병아리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입니다. 농부의 말로는 어미 닭이 야생 짐승이 철조망을 뚫고 닭장 안으로 들어오자, 자신을 희생하면서 새끼들을 지킨 것이라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일개 닭들도 자신의 새끼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에 저는 많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개 미물인 닭조차 자신의 희생하는 모습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은 이런 희생정신을 본받고 따라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닭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믿음을 등한시 한 체 자신의 지식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사람들도 십자가의 희생을 받아 들이지 못합니다.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십자가의 능력이 나를 구원하신 놀라운 능력인 것을 의심하지 말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십자가에는 화목과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1997년 10월 아프리카 케냐의 리무르에서 250명의 세계 각처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GCF(Global Christian Forum)이라는 모임을 가졌습니다. 여기에 참석한 각 나라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들 나라의 특색 있는 옷차림으로 참석을 합니다. 한국목회자는 한복을 입고 일본 목회자는 일본식 옷을 입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개회 예배를 마치고 30명씩 그룹을 나누어 ‘신앙 여정’이란 순서를 가졌습니다. 한 명씩 돌아가며 ‘그리스도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고 믿게 되었는가?’를 발표합니다. 참석자들의 종파와 신학, 나라 배경, 그리고 구원과 소명의 경위는 모두 달랐으나 간증이 시작되자, 참석자 모두가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개인적 경험과 사랑, 그리고 그 사랑에 의해 불타는 소명이 모두 일치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였던 시간과 환경은 모두 달랐지만, 각자가 만난 분은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점 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인종과 국적과 환경을 뛰어 넘어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을 하나 되게하는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우리 역시 살아가는 환경과 여건이 모두 다르지만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었고, 믿음 안에서 덕민교회라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몸담고 봉사하고 있는 이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다른 교우들을 믿음 안에서 존중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나누는 행동의 모습입니다.
에베소서 2:16절,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십자가로 하나가 되게 하고, 십자가로 화목하게 하신다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스스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모두를 화목하게 할 수 있음을 알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초대 기독교 전설 중에 하나있습니다. 로마 병사 한명이 있었습니다. 이 병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던 병사인데, 전투 중 부상을 입어 눈 하나를 잃어버린 외눈박이 병사였습니다. 그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깊게 찌릅니다. 자신이 찔렀던 창으로 예수님의 몸에서 피가 떨어져서 남아있는 한쪽 눈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이 병사는 눈을 감으면서 “내가 예수를 찔렀기에 그의 몸에서 나온 물과 피가 나를 저주하여 남아있는 눈마저 멀게 하겠구나” 생각합니다. 두려움에 떨던 병사가 조심스럽게 눈을 떠 보았는데 눈은 실명하지 않았고 앞이 보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부상을 당하여 시력을 잃어 버린 다른 눈까지 띠여지면서 앞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순간 병사는 창을 던지며 외칩니다. “내가 예수를 찔러 저주까지 하였는데, 그의 피가 보이지 않던 눈까지 뜨이게 하는 능력이 되었도다. 예수야말로 나를 치료하시는 메시아가 분명하시다. 이제 내가 그를 믿겠노라.” 그 후 이 로마 병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는 기독교 야사가 있습니다.
이사야 53:5절,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여기의 ‘나음을 받았도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육간에 모든 것이 나음을 입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오늘날에도 놀라운 신유의 능력이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김권사님의 허리수술 때문에 모든 분들이 걱정도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과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김권사님에게 치유의 능력이 크게 임하리라 믿습니다. 믿고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나를 살리는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