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깊은 오지 마을인 덕풍계곡에 길이 생기면서 우리도 언젠가는 차가 생길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돈 1백만원을 주고 삼척시에 나가서 머물며 운전을 배우라고 하였습니다.
지금부터 11년 전인 1998년 입니다.
나는 그동안 집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두 아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어린 두 아들은 6km의 덕풍계곡을 걸어서 풍곡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왕복 12km를 매일 걷는다는것은 힘든 일입니다.
아내는 산속에 있는 우리 가족을 위해 아주 열심히 운전을 배우고 있었습니다.그리고
아내는 시험을 칠때마다 단번에 합격을 하였습니다.
아내는 매일 집에 전화를 걸어 오늘의 진도를 내게 이야기 해 주었고 나는 격려해 주었습니다.
마지막 면허시험을 치르는 날이었습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제 아내가 시험을 잘 치르게 하여 주소서.아멘."
그날 오후 아내로 부터 전화가 걸려 왔는데 말을 못하고 웃기부터 합니다.
"자기야..........호호호....."
"됐구나 ! 내 그럴줄 알았어 축하해 !"
"다 자기 때문예요."
"그게 어떻게 나 때문이야? 자기 때문이지 어서와 ! 몹씨 보고 싶다."
"저도 보고 싶어요. 내 당장 내려 갈께요."
+ + +
아내가 돌아오던날 나는 서울에서 한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형 !"
"앗 ! 너 영수냐?"
"예, 영수예요. 형 그동안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몰라요."
+ + +
내가 6.25 후 혼자 살아오면서 청주에서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 학교를 다니던 어려운때
나는 이웃에 사는 꼬마 두 형제를 동생처럼 귀여워 해 주었습니다.하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고 동생은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나는 늘 혼자였기에 너무나 외로웠습니다. 나는 이 꼬마 형제들을 데리고 바로 옆의 무심천 냇가에 놀러 가거나 청주 중앙공원에 데리고 가거나 성당에도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우리집에 놀러오면 이야기도 해주었고 책도 보여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착하고 순진했으며 머리가 아주 좋았습니다.
나는 이 아이들이 초등학교와 중고등 학교를 다니는 것을 옆에서 지켜 보았습니다.
1965년 경에 나의 직장에서 일이 생겨 나는 사표를 내야 했고 서울로 올라와 많은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아이들이 성장하여 하나는 성균관대학교를 다니고 동생은 서강대학을 다니는 것을 멀리서 지켜 보았습니다.
나는 서울에서 20년을 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서울에서 살기 싫어 강원도 깊은 산속에 가서 살기로 작정 하고 1988년에 산으로 들어 갑니다.그리고 꼭 십년있다가 그 동생형제들이 나를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알아내고 전화를 걸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내가 어떻게 40여년전의 아이들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내 아내될 사람이 산으로 나를 찾아왔을때도 나는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목소리를 듣고서야 서울에서 만났던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 형 ! 내일 우리 형제들이 형에게 갈것입니다."
"이 험하고 먼데를 오겠다고?"
"예, 형이 보고 싶은걸요."
다음날 그 형제들이 자가용을 하나씩 타고 왔습니다.
우리들의 만남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지금 글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동생들은 나에게 큰 절을 올렸습니다. 그 조그맣던 아이들이 이제 50을 바라보는 중년신사들이 된것입니다.
우리들은 밤가는줄 모르고 쌓이고 쌓인 회포를 풀었습니다.
다음날 동생 하나가 차를 내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아내가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져 다물줄을 모릅니다.
"세상에나 ! 운전 면허를 따자마자 차가 금방 생기다니 !"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자기야 ,시운전을 해야지!"
내가 그러자 아내가 운전석에 앉아 차를 몹니다.
우리집에서 계곡 따라 100m만 가면 두개의 철제 아치형 다리가 있습니다. 아내가 다리로 진입을 하려고 핸들을 꺾었습니다.
그러자 차가 다리의 난간을 꽝 들이 받았고 헤드라이터가 박살이 났습니다.
이론과 실제의 차이가 엄청나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입니다.
아내는 미안해 어쩔줄을 몰라하는데 동생은 오히려 아내를 위로하며 좋은 경험이라고 말해 주었고 바로 시내로 나가 수리하고 아내 앞으로 등기를 해 주었을뿐만 아니라 보험에도 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더 머물다 형제들은 돌아 갔습니다.
아내는 당장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태워다 주었고 올때도 다시 가서 태우고 왔습니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