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빅단과 데레스
본문:에2:19-23
주요내용-양심론
(요약)
빅단과 데레스에서 양심의 원리가 나타난다. 양심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속일 수 없고 우리 심령을 지키라고 주셨다. 그러나 때로는 양심이 사단의 참소를 받아 자기 심령을 죽이는 일을 서슴없이 감행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양심관리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그 방법은 먼저 하나님 말씀의 지식에 기초한 양심이어야 하며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않는 확신에 서고 범죄했을 때는 회개하고 용서의 확신에 거하며 잘못된 양심은 고쳐야 한다. 우리는 모르드개처럼 말씀에 견고히 서서 마음의 대궐문을 지키는 양심이 되자.
(설명)
☆ 양심이란?
1. 하나님의 선물(21절) '빅단' - '하나님의 선물'
2. 속일 수 없는 것(21절) 둘 - 증거 혹은 증인의 수
3. 심령의 파수꾼(21절) 문 - '사프'는 왕의 침소와 가까운 문 딤전1:19, 딤전3:9
4. 양심의 돌변성(21절) 사단의 참소를 받을 때 - 계12:10
☆ 양심관리법
1. 말씀에 서라(21절). 롬14:22, 23
2. 범죄했을 때 회개하라(22절). 요일1:9, 히10:21-22
3. 잘못된 지식을 고치라(23절). 고전 8장
(본문)
19 처녀들을 다시 모을 때에는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더라 20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명한 대로 그 종족과 민족을 고하지 아니하니 저가 모르드개의 명을 양육받을 때와 같이 좇음이더라 21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 지킨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아하수에로 왕을 원한하여 모살하려 하거늘 22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고하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고한지라 23 사실하여 실정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의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하니라 (에2:19-23)
(강해)
이 시간에는 "빅단과 데레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두 사람 이 아주 큰 일을 저지르려다가 모르드게로 인해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즉 이 두 사람은 아하수에로왕을 모살하려는 왕의 내시들입니다. 왕의 내시들이니까 상당히 높은 직책입니다. 그런데 왕은 왕을 지키라고 높은 관직을 주었지만 그들은 반대로 왕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드개가 그것을 발견하고 왕후에게 보고하고 왕후는 왕에게 보고하므로 반역사건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공로가 궁중일기에 기록되어 나중에 유다 민족을 구원할 아주 중요한 공적이 됩니다.
그런데 놓쳐서는 안될 것은 우리에게도 신령한 측면에서 이러한 일들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 잘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면 수 없는 영적인 실패와 고통이 그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괴롭다고 호소하는데 그럼 과연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할까요? 우리는 본문에서 양심의 비밀을 발견합니다.
그럼, 양심이란 무엇일까요?
1.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21절에 "빅단과 데라스" 가 나옵니다.
그런데 "빅단"이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입니다. 신을 부정하는 철학자들까지도 양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양심이야 말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양심은 예 아니요 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밝혀 주는 구약의 우림과 둠밈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좁은 의미에서 불완전하나마 양심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만약 인간에게 양심을 주시지 않았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됐을까요? 동물의 왕국이 아니라 악마의 왕국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타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양심의 빛은 아직 꺼지지 않았기에 그래도 이렇게 정의가 살아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연은총 가운데 최고의 선물이 바로 양심입니다.
2. 양심은 아무도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21절에 "두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둘은 증거 혹은 증인의 수입니다. 오늘날 재판에서 증거나 증인이 확실해야 판결하는 것도 진실된 재판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혐의가 보여도 증거가 없으면 정죄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증거란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범인들이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다가도 증거가 나오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양심의 특징은 속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남은 속일 수 있거니와 나는 못 속입니다. 거짓말 탐지기도 이 양심이 있기 때문에 작동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은 거짓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그리고 양심은 하나님을 모신 우리 심령궁전의 파수꾼입니다.
그래서 21절에 "문 지킨 왕의 내시"라고 했습니다.
여기 문 "사프"는 큰 대궐문이라기 보다 왕의 침소와 가까운 어떤 문을 가리킨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누구보다 왕의 신임을 받아 왕을 호위할 임무가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그들은 왕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처럼 양심이란 우리 몸을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속의 가장 깊고 귀한 하나님을 모시는 심령성전을 지키라고 주신 것입니다. 만약 양심이 없다면 죄를 구분하지 못해서 우리의 심령은 순식간에 더러워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심은 우리의 보초병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이 바르기만 하다면 죄악은 마음 속에 얼신도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가 아하수에로 왕궁의 문에 함부로 드나들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왕자라도 왕비라도 함부로 나아갔다가는 오직 죽이는 법인 그 엄하디 엄한 파사의 내전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양심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회개란 이런 측면에서 정의한다면 양심의 변화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관점에서 신앙을 정의하기를 선한 양심이 되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벧전3:21). 우리의 양심은 보혈공로로 사죄의 확신과 영광스런 의의 옷 즉 성령으로 변화될수록 하나님과 가까워집니다(요일1:7-9). 그래서 딤전1:19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했고, 딤전3:9에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4. 그런데 양심은 때로는 정 반대로 돌변합니다.
21절에 "두 사람이 아하수에로왕을 원한하여 모살하려 하거늘" 했습니다.
왕이 빅단과 데레스를 크게 신임하여 왕을 지키라고 높은 직책을 주었더니 도리어 그들이 왕을 원한하여 모살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런 배은망덕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마도 왕이 신임이 너무나도 두터운 그들이기에 아무도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사해 보니 그것이 사실이었습니다.이와 같이 양심의 문제가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양심에게 우리 마음을 지키라고 했더니 지키다가 간혹 이렇게 지키라는 자기 심령을 지키지 않고 도리어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양심이란 참 묘한 것입니다. 이 죄라는 것은 모르고 불의와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양심이 우리의 영혼을 죽인다는 사실 아무도 양심이 그럴 줄은 생각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 원인은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만 들으면 궨찮은데 사단의 말을 듣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단의 참소라고 하는데 사단이 하나님 앞에서 뿐 아니라 우리 양심의 법정에서 우리들을 참소하면 이 양심이 잘못 판단을 합니다.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 중에 재판관들이 판결을 굽게 함이었는데 신령한 측면에서 보면 잘못된 양심의 예표일 것입니다. 그래서 계12:10에 사단 마귀를 가리켜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양심관리를 잘못하면 도리어 큰 시험을 당합니다. 예를 들면 양심이 너무 무디어서 죄를 마음대로 통과시킨다든가, 반대로 양심이 너무 예민해서 모든 것을 죄로만 여긴다든가? 그래서 양심이 사단의 참소를 받으면 마치 두 내시가 왕을 원한하듯이 양심이 우리 심령을 찔러서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니 심령이 얼마나 아프고 답답하고 괴롭겠습니까? 그런데 이 양심은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면 우리 속에 은혜고 능력이고 축복이고 평안이고 생명이고 성령의 은사고 열매고 다 죽이고 맙니다. 어떤 면에 서 회개를 위해서 불필요하다 할 수는 없지만 양심의 이 처사에 대한 복음적인 조처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 이와 같이 잘못된 양심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을까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견고히 서야 합니다.
21절을 보면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했습니다.
여기 앉았다는 것은 "야솨브" 즉 "집무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는 보통 자리가 아닙니다. 모르드개의 신분이 비록 수문지기에 불과하지만 왕을 지키는 사람이기에 그 누구라도 모르드개의 허가가 없으면 출입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여서는 안됩니다. 모르드개와 같이 충성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충성하되 이 수문지기는 원칙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얼마나 원칙에 충실한 사람입니까? 얼마나 원칙에 충실했으면 큰 일이 나도록 온 민족이 다 죽는 일이 발생하도록 하만에게 허리를 굽히지 않았겠습니까? 여기에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변태적인 양심의 난동을 방지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서야 한다는 뜻은 약 두 가지 면입니다. 한 면은 범죄하지 않고 주의 말씀대로 살자는 것과, 또 하나는 옳다고 믿는 것은 끝까지 후회하지 않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14:22에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교훈했습니다. 그러면서 23절에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르드개 강직함으로 말씀의 확신에 거하는 것이 첫째의 양심관리입니다.
다음은, 범죄했을 때는 주의 이름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22절에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고하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고한지라" 했습니다.
여기 모르드개는 이 내시들이 역모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왕후에게 고하고 왕후는 다시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고했습니다. 만약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다면 실패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귀한 원리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예수 이름의 원리입니다. 이처럼 우리 양심의 악을 발견할 때 우리의 죄 때문인 것이 확실하면 우리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로 씻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10:21-22에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용서의 확신을 가지고 평안해야 합니다. 대개 평안함이 오기까지 회개하라 하는데 그것보다 진실로 회개했다면 받아주신 것을 믿고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그러면 평안함이 오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는 들먹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때는 이유가 없이 양심이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답답하다고 무조건 죄 때문인 것은 아닙니다. 이 때는 담대히 기도하고 찬송하면 영적인 봉쇄가 풀려집니다. 그런데 사단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정죄하려고 하고 죄를 회개했어도 정죄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의 확신에 굳게 서야 합니다. 보혈의 능력만이 사단의 참소를 이깁니다. 그래서 계12:11에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양심관리는 죄를 회개하고 보혈의 확신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심으로 죽었던 평안이나 은혜나 생명이나 성령의 열매 즉 우리의 선한 행실까지도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그래서 히9:13-14에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는 잘못된 양심을 고치는 것입니다.
23절에 "사실하여 실정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했습니다.
의심 많고 교만하기로 유명한 아하수에로 왕이지만 그는 모르드개의 고발을 접수하고 무조건 그들을 처형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잘못한 확실한 증거를 얻은 후에 처형했습니다. 이처럼 양심을 관리함에 있어서 잘 잘못을 알고 관리해야 합니다. 양심은 각자의 지식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양심도 잘못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양심 다르고 불신자들의 양심이 다릅니다. 신자 중에도 강한 양심이 있고 약한 양심이 있습니다. 불신자 중에도 불교양심 다르고 유교양심 다르고 유물자들의 양심 또한 다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잘못된 것인가 양심이 잘못된 것인가 나는 문제도 없는데 양심이 너무 예민한가 혹은 나는 문제 투성이인데 양심이 무디어서 문제인가 우리의 양심을 바르게 고쳐가야 합니다. 혹시 히틀러와 같이 자기 민족이 최고이고 유대인은 죽여도 좋다는 양심이라
면 그 양심은 빅단과 데레스처럼 그 양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떤 사람은 부자에 대해서 무조건 나쁜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혹은 남을 속이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다는 당연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은 성도인지 세상 사람인지 삶이 구분이 안됩니다.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 가지고도 당연하게 살아간다면 그 잘못된 양심을 이 시간에 빅단과 데레스처럼 나무에 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양심은 육신과 같아서 너무 둔해도 안되고 불필요하게 너무 예민해도 안됩니다. 육신이 너무 둔하면 다쳐도 모르고 너무 예민하여 알레르기 체질이 되면 각종 고통에 시달립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 대개는 양심이 너무 무디어서 문제입니다. 죄가 죄인 줄 몰라요. 그렇다고 죄도 아닌데 날마다 가책 속에서 살아도 문제입니다. 특히 완전주의자 혹은 율법적인 신자들이 되면 더욱 그러합니다. 고한 선이 무엇인가를 알고 떨어진 경우 이런 정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죄인가는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해 방황한다면 말씀은사의 지도를 구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양심의 잘못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서서 성도들을 말씀으로 권면할 수도 있어야 하고 혹은 공연한 고통에서 풀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잘못된 양심을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고치는 것이 마지막 우리의 양심관리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양심을 잘 사용하여 죄악으로 틈타지 못하게 합시다. 그리고 양심을 잘 관리하여 사단이 참소하지 않도록 하십시다. 그러기 위해서 모르드개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견고히 서서 우리 각자 하나님을 모시는 신령한 성전의 대궐문을 굳게 지키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