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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슬픔의 날이 오지 않으려면!
예레미야애가 1:1-6
예레미야 애가는 유다의 패망을 생각하며 쓴 시인의 애가, 슬픈 노래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패망한 예루살렘의 잔해위에서 슬피 울며 부르짖은 노래라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애가는 5개의 시로 구성되어 있는데 매 시가 유다나라의 언어인 히브리어 알파벳 22개에 맞춰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알파벳 순서로 시작되어 매 장이 22절로 구성되어 있고 3장만 22절을 세 번 반복하여 66절로 되어 있습니다.
애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절기 때 낭독하는 다섯 두루마리가운데 하나인데요,
유대인들은 이 책을 유대력으로 아브월 9일, 즉 성전파괴를 아프게 기억하는 날에 낭독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슬픔의 날이 오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노래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이런 슬픔의 날이 오지 않으려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가 서를 읽으면서 이런 슬픔의 날이 오지 않기를 기원했듯이 우리들도 이 애가 서를 읽으면서 똑같은 마음을 가져야 할 줄 생각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쓴 “난중일기” 1594년 1월20일자 내용을 보면,
‘살을 에이 듯이 추운 날이다. 옷 없는 병졸들이 움추리고 앉아 떨고 있다.
군량은 바닥났다. 군량은 오지 않았다.’
서해 유성룡 선생이 쓴 징비록에 보면, ‘부자가 서로 잡아먹고, 부부가 서로 잡아먹었다. 뼈다귀를 길에 내버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에 보면,
‘굶어죽은 송장이 길에 널렸다. 한 사람이 쓰러지면 백성들이 덤벼들어 그 살을 뜯어 먹었다.
뜯어먹은 자들도 머지않아 죽었다.’
또 다른 내용을 보면, ‘명나라 군사들이 술 취해서 먹은 것을 토하면 주린 백성들이 달려들어 머리를 틀어박고 빨아먹었다.
힘이 없는 자는 달려들지 못하고 뒷전에서 울었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백성들의 참상은 땅위의 지옥과 같았음을 보여주는 역사의 기록입니다.
여러분,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일이 우리 역사 속에서 다시는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참상을 주전 586년경에 경험하였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주전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했고 135년이 지나서 남 왕국 유다가 신흥 강국인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바벨론에게 항복할 것을 말씀하셨지만 예레미야를 통하여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유다 백성들은 처참한 나라의 종말을 맛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이 눈이 빠진 채 쇠사슬에 매여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예루살렘 성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전쟁의 와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처참한 죽임을 당합니다.
-수만 명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오늘 본문이 그 때의 참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에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한 때 사람으로 가득 찼던 예루살렘이 이제는 사람을 찾을 수 없는 적막한 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다 죽었고 죽지 않은 사람들은 다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는 적막한 성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2절을 보면,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모두가 죽거나 포로로 끌려가 버렸고 유다 땅에 남은 자들도 숨어버렸기 때문에 위로할 수 없는 슬픈 상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다는 말은 유다가 망하기 전에 군사적 동맹을 맺었던 나라들이 바벨론의 침략 시에 다 등을 돌렸다는 말입니다.
에돔은 이렇게 망하는 예루살렘을 약탈하기까지 했습니다.
4절에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
시온의 대로는 성전으로 나아가는 대로를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도 없고 성전도 없는데 시온의 대로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서 시인은 한 마디로 ‘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6절)
예전에는 하나님의 선민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로 모든 영광을 누리고 살았는데 이제는 모든 영광이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애가 서에 나오는 비극적인 장면은 그때의 참상을 온전히 표현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의 폐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처참한 모습 그대로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모습이 유대인의 모습이었고 유대인의 모습은 지금도 전쟁 중에 경험할 수밖에 없는 모습인 줄 압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러한 슬픔과 안타까움과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될 줄 압니다.
우리가 다시는 이런 비극을 경험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났을까요?
원인을 아는 것은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그 이유를 단적으로 죄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5절에서 말합니다.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두 단어가 있는데요, 죄와 여호와라는 단어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이 비극의 주체가 여호와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께서 심판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해하는 사람들 중에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느냐? 반문을 가지기도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오래 참으심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언제까지 참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참으실 수 없다고 생각되실 때 하나님은 심판을 하십니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가 있었고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지옥의 심판이 있을 줄 압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다는 말씀의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역사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시는 분이십니다.
유다에 이런 비극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하여 유다를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 하나님이 도우시면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고 축복을 받으며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도 마찬가지고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열왕기하에서 살펴보았습니다만 유다 나라의 여호람 왕과 그의 아들 아하시야 시대에 그들은 처갓집의 영향 때문에 바알과 이방신을 섬기고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여호람 왕의 아내가 아합의 딸인 아달랴였고 그의 아들 아하시야의 어머니는 당연히 아달랴였습니다.
아내와 어머니의 영향 속에서 두 왕은 하나님 보시게 큰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에돔이 유다의 수하에서 배반하였고 립나도 배반하였습니다.
나라가 점점 약해졌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역사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을 잘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나라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을 잘 섬기느냐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방신을 섬기느냐에 의해 결정되어졌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역사의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잘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고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유다 사람들은 그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의 죄가 많음으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노아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유를 성경은 죄가 관영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관영이라는 말은 ‘만연하여 가득 차다.’는 뜻입니다.
유다의 멸망이 바로 죄가 많으므로, 죄가 관영하였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할 때 그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기준은 많은 죄입니다.
그렇다면 유다 사람들이 무슨 죄를 많이 지었습니까?
오늘 본문은 나라가 이미 망한 다음에 기록된 애가이기에 그 죄를 알기 위해서는 그 전에 기록된 예레미야서를 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3장 6절부터 9절 까지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요시야 왕 때에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배역한 이스라엘이 행한 바를 보았느냐 그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
그가 이 모든 일들을 행한 후에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게로 돌아오리라 하였으나 아직도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는 그것을 보았느니라.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그가 돌과 나무와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행음하여 이 땅을 더럽혔거늘”
이 말씀에는 먼저 북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나옵니다.
영적인 간음 즉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이 망했는데 그것을 뻔히 보았던 자매 남 왕국 유다도 북 왕국과 똑같은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돌과 나무로 만든 우상숭배를 저지름으로 영적인 음행에 빠졌다고 예레미야는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의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 5장 1절 2절을 보면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소돔과 고모라는 10명의 의인이 없어서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한 명의 의인이 없어 망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선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얼마나 죄악이 관영하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 6:13절을 보면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유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죄가 얼마나 무서운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가 이와 같지 않습니까?
청문회에서 밝혀지는 사람들 뿐 아니라 밝혀지지 않은 우리들도 똑같은 죄를 짓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똑같은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지금 큰 자부터 작은 자까지, 믿는 자부터 믿지 않은 자까지 모두가 탐욕을 부리며 거짓을 행하며 죄를 짓고 있습니다.
-또 하나, 한 명의 의인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잘 알게 됩니다.
한 명의 의인이 나라를 살릴 수 있고 10명의 의인이 소돔과 고모라를 살릴 수 있습니다.
그 한 명이 얼마나 사회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해서가 아닙니다.
그 한 명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은 나라를 용서하고 민족을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라가 살고 민족이 사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10월 3일 문제인 대통령을 잡으러 청와대로 간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분은 얼마나 신념이 확고한지 나라가 있고 종교가 있다고 하면서 나라를 살리기 위하여 전00 목사가 주도하는 집회에 참석하여 청와대를 가겠다고 너무나 확고하게 말하였습니다.
헌금도 100만원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정말 정당과 이념으로 한 나라가 둘로 갈라져있습니다.
자기가 선호하는 정당이나 사상을 건드리면 부자 사이에도 틈이 생기고 부부사이에도 틈이 생기고 교우 사이에도 틈이 생깁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정당이나 사상을 비방하고 적대하면 금방 친구가 적이 되고 사이가 서먹서먹하기도 합니다.
내 주장에 동조하면 친구고 반대하면 적이 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시대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자기가 선호하는 정당이나 이념에 의지하여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생각과 이념이 더 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지금 얼마나 잘못되어가고 있는지를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많은 죄 때문에 심판하시고 징계하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 우리가 바로 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현실은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정당 앞에서, 말씀 앞에서가 아니라 이념 앞에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그렇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믿는 자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살펴서 어떻게든지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상숭배를 하고 있지는 않는지, 정말 공의와 진리가운데 살고 있는지 냉철하게 살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느 것도 하나님 보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설수는 없습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고 매여 달려야 합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오늘 우리 대한민국의 상황이 완전히 망한 예레미야애가의 상황은 아닙니다.
아직은 예레미야의 상황입니다.
아직도 심판전이기 때문에 기회가 있고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이 시점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도 예레미야 애가처럼 애가를 부를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망할 수 있다고 외치는 예레미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여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든지 하면 그 고통을 어떻게 감내할 수 있겠습니까?
유대 나라의 상황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임진왜란의 상황이 6.25사변의 상황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광장에 모이는 사람의 숫자를 갖고 자기들이 옳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광장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는가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최후의 날, 유다 나라 멸망의 날과 같은 날이 오지 않으려면 진정한 회개 밖에 살길이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 가슴을 찢는 회개와 통곡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줄 믿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입니다.
사랑과 용서를 마음에 품고 내 죄를 깨닫고 슬퍼하고 애통하는 은혜를 가질 때 우리나라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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