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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들의 외침 1 (오바댜, 요나, 미가)
오바댜서는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요나서는 전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선포를, 미가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장차 도래할 영광스러운 메시야 왕국에 대하여 각각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바댜]
* 제목: 오바댜
이는 ‘주의 종’, ‘주를 경배하는 자’라는 저자의 이름을 따른 것임.
* 저자: 오바댜
본서의 내적 증거 “오바댜의 묵시라.”(1:1) 한편, 성경에 등장하는 12명의 오바댜 중 본서의 저자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 기록연대: B.C. 586년경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침략을 당한 직후의 어느 한 시점으로 추정됨.
* 기록목적:
(1) 에돔의 파멸과 유다의 회복을 선포하기 위해.
(2) 불의한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기 위해.
* 기록장소: 유다
* 기록대상: 유다 백성들.
본서는 역대로 에돔에게 공격을 받아 피해를 입은 유다 백성들에게 주는 위로의 예언임.
* 핵심단어: 심판
본서는 심판을 다루되 예레미야나 요엘, 아모스처럼 이스라엘 또는 유다에 대한 심판이 아닌 오로지 에돔에 대한 심판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 배경:
이삭의 아들 에서의 후손인 ‘에돔’은 출애굽 때부터 이스라엘을 대적했고(민20:14~21), 그 후에도 여러 번 이스라엘을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삼상14:17; 대상18:12~13) 바벨론이 유다를 멸망시키는 것을 돕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옵1:11). 이러한 에돔의 행동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오바댜, 아모스, 예레미야, 이사야, 에스겔 등의 선지자가 이들의 멸망을 예언했고, 결국 B.C. 5세기말 아라비아인들의 침공으로 쇠퇴했으며, 후에 로마에 의해 민족 자체가 사라졌던 것입니다.
* 핵심구절: 21절
“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이는 1차적으로 하나님께서 다시금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시고 그 원수를 갚아주시겠다는 약속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의로써 세상을 통치하게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 개요
전체 분량이 비록 21절에 지나지 않지만 에돔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는 1:1~18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고 있는 1:19~21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에돔에 대한 심판의 예고(1~9절)
1)심판의 확실성(1~4절)
2)철저한 멸망(5~9절)
2. 에돔이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10~14절)
에돔은 이스라엘과 인척 관계에 있으면서도 환난당한 이스라엘을 돌아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열국과 손을 잡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침략했기 때문입니다.
1)형제를 사랑하지 않음(10절)
2)형제에 대한 무관심(11~12절)
3)형제를 대적함(13,14절)
3. 에돔이 심판받은 결과(15~18절)
4. 이스라엘의 회복(19~21절)
이스라엘이 옛날 다윗 왕 때 차지했던 영토(삼하8:1~10:9)까지 되찾아 누리게 되고(19절), 이방 땅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인들이 다시금 팔레스틴으로 귀환하게 되리라는 약속(20절)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같은 약속은 당시 절망 가운데 있던 유다인들에게 큰 소망을 안겨다 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이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주어질 영원한 자유와 축복을 의미함).
* 핵심단어 및 구절, 인물연구
묵시(1:1) -원래 어떤 환상 속에서 예언자에게 나타난 장면을 말하는 것이었으나(민24:4,16), 후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당신의 뜻을 전달하는 모든 것(잠29:18)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29:18)
너와 약조한 모든 자들(1:7) -에돔의 동맹국을 의미함. 이들이 ‘너를 쫓아 변경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에돔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 그들의 도움을 요청하나 그들이 단호하게 그 요청을 거부할 것을 의미합니다.
너와 화목하던 자들(1:7)은 에돔의 동맹국 또는 수도 페트라에 상업적인 이유로 체재하고 있던 아라비아 족속들을, 네 먹을 것을 먹는 자들(1:7)은 가장 가까운 우정 관계를 맺은 국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오히려 에돔을 속이고, 함정을 베푼다는 것은 그들이 도리어 거짓과 술수로써 에돔을 파멸에 내어 주게 될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와 화목하던 자들이 너를 속여 이기며 네 먹을 것을 먹는 자들이 네 아래에 함정을 파니...”
드만(1:9) -에돔 북부 지방의 명칭이나 여기서는 에돔 전체를 가리킴. 오바댜가 특별히 드만을 언급한 이유는 그곳이 에돔의 주요 성읍임과 동시에 많은 지혜자들이 거주하였던 곳이기 때문입니다(욥15:18,19; 렘49:7). “에돔에 대한 말씀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데만에 다시는 지혜가 없게 되었으냐 명철한 자에게 책략이 끊어졌느냐 그들의 지혜가 없어졌느냐.”(렘49: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 드만아 네 용사들이 놀랄 것이라...”(8,9절)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1:11) -유다가 이방 민족에 의해 늑탈 당하던 날, (형제국이었던) 에돔은 멀리 서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바벨론을 도와) 유다 예루살렘을 파괴하는 일에 적극 동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11절)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1:15) -하나님께서 그의 위엄과 전능하심을 나타내시어 모든 불경건한 세력을 멸하시며 그의 왕국을 완성시키는 날을 뜻합니다(‘주의 날’, ‘여호와의 날’ 등).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그들이 네겝...(19절) -이는 이스라엘이 잃었던 땅을 다시 회복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이 예언은 페르시아 통치 하에서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부터 팔레스틴으로 귀환함으로써 서서히 성취되어가다가 B.C. 2세기 마카비 때 유다가 완전히 독립을 이룩함으로써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교만이 우릴 속인다(욥1:3,4)
* 에돔이 망한다. 결국 그 교만 때문에....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4절)
본서는 구약성경 중 가장 짧은 책이지만, 에돔의 죄과에 대한 혹독한 책망과 준엄한 심판(1~18절), 형제국인 에돔에게 조차 멸시와 수난을 당한 이스라엘의 회복(17~21절) 등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한편, 에돔이 이와 같은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이스라엘과 인척 관계에 있으면서도 환난당한 이스라엘을 돌아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 열국과 손을 잡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침략하였기 때문입니다.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10,11절)
그런데 이 같은 에돔의 심판에는 근본적으로 무엇이 깔려져 있었습니까? 교만입니다. 즉 그 마음의 교만이 그들을 속였던 것입니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3절 상) 사실, 에돔 족속은 사해 남동쪽 바위가 많은 산악 지대의 난공불락의 요새에 거주했으며, 특히 수도 페트라의 경우 약 3km에 걸친 암반으로 된 좁은 골짜기 끝 부분에 위치, 적은 인원으로도 적의 공격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이 같은 점들은 에돔으로 하여금 그 마음에 무엇을 품게 하였습니까?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 내리겠느냐’는 교만입니다. “...바위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3절 하) 두로 왕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마음에 품었던 것처럼. “...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겔28:2)
아주 오래전 사탄이 그리 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불타는 돌들 사이에 왕래하였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겔28:14,15,17)
*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식의 생각 때문에...
“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르기를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 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겔26:2)
또한 이 같은 교만은 형제국인 유다에 대한 무엇으로 이어졌습니까? ‘한’(히, 에바), 즉 ‘적대감’ 또는 ‘증오’입니다. “네가 옛날부터 한을 품고 이스라엘 족속의 환난 때 곧 죄악의 마지막 때에 칼의 위력에 그들을 넘겼도다.”(겔35:5) 사실, 이 한(恨)의 시작은 창세기 27장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창27:34~41)
이 ‘적대감’ 또는 ‘증오’가 심화, 결국 어떤 생각에까지 미치게 되었습니까? ‘유다(이스라엘)가 망해야 자신이 산다’, ‘그가 황폐할 때 비로소 내가 충만할 수 있다’는 식의 생각 등입니다. 마치 두로가 유다에 대해 품었던 생각처럼 말입니다. “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르기를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 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겔26:2)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누군가에 대해 한(恨) 또는 적대감, 증오 등을 품은 채, 그가 망해야만 내가 살며, 그가 황폐하게 될 때 비로소 내가 충만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에돔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만 합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이 모든 것들은 모두 교만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결국 교만이 우리를 속인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옵 3:1) /“바위틈에 살며 산꼭대기를 점령한 자여 스스로 두려운 자인 줄로 여김과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렘49:16 상)
더 이상 교만에게 속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자 넘어짐의 앞잡이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더 이상 교만 또는 거만함이 우리를 속이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망함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4:6)
[요나]
* 제목: 요나
이는 ‘비둘기’를 뜻하는 저자의 이름을 따른 것임.
* 저자: 요나
2장의 기도가 1인칭으로 기록된 점과 1:1에서 요나에게 예언이 주어진 것으로 보아, 역사적 실존인물이자 체험의 당사자인 요나가 본서의 경험을 마친 후 생생한 기록으로 남긴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욘1:1)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왕하14:2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39,40)
* 기록연대: B.C. 760년경.
요나는 북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했으며(왕하14:25), 본서에서 회개한 니느웨의 왕 역시 앗수르단 3세 (또는 이슈르탄 3세/ B.C. 771~754)로, 당시 니느웨는 B.C. 763년에 있었던 역병으로 국가적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 기록목적:
(1)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의 모든 민족들에게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그들의 하나님 되심을 기뻐하심을 가르치기 위해서.
(2) 택함 받은 민족으로서 선교를 게을리 하는 이스라엘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경책키 위해.
* 기록장소: 북왕국 이스라엘
본서는 선지자 요나가 니느웨 선교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기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대상: 북왕국 이스라엘.
선민이라는 자만심으로 이방을 멸시하던 북이스라엘에게 선교의 사명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 핵심단어: 자비(4:2) 또는 하나님의 사랑의 보편성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만했던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들을 원수로 취급하였고 그들의 멸망이 필연적인 것으로 알아 그들의 구원에 대해 어떠한 노력도 보이지 않는 등 온 세계에 미친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차단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지닌 우월의식을 철저히 파괴시키시고 온 인류에 대한 사랑과 자비를 실현하시는 것은 물론 원래부터 제시하셨던 ‘제사장 국가로서의 비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키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19:5,6)
* 배경:
당시 북이스라엘은 다메섹을 속국으로 삼아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던 반면, 앗수르는 북방의 아라랏과의 전쟁으로 세력이 약화된 상태였으며, B.C. 763년에 있었던 역병으로 국가적 어려움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온 세계의 주인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민족신으로 인식, 이방에 하나님을 전파하기를 꺼리는 편협한 신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특징:
(1) 우주적 신관 -하나님을 전세계의 통치자로 표현하고 있음.
(2) 구원 범위의 확장 -이스라엘만이 구원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폐쇄적 구원관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그 범위가 확장되고 있음(참고로, 하나님은 원래부터 열방, 즉 모든 민족이 구원 받기를 원하셨음). (3)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킬 수 있음을 보여줌.
* 본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요나가 3일 3야 동안 물고기 뱃속에 머물렀던 사건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되시며 결국에 다시 살아나심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39,40)
* 개요:
제1부 요나의 불순종(1:1~2:10)
1. 소명을 받은 요나(1:1,2)
2. 요나의 도피(1:3)
3. 요나에 대한 징벌(1:4~17)
-큰 풍랑으로 인해 요나의 범죄가 발각되다(1:4~11)
-허물을 인정하나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다(1:12~16)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밤낮을 지내게 되다(1:17)
4. 요나의 회개(2:1~10)
-고난을 통해 자신의 범죄를 깨달음(2:1~9)
-기도의 응답으로 구출됨(2:10)
제2부 요나의 각성(3:1~4:11)
1. 니느웨 심판 선언과 참회(3:1~10)
-거듭된 소명에 순응한 요나(3:1~4)
-니느웨 전체의 회개, 각성 운동(3:5~9)
-하나님의 심판 철회(3:10)
2. 인류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4:1~11)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대한 요나의 불만(4:1~3)
-박 넝쿨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자상한 깨우침(4:4~11)
* 핵심단어 및 구절, 인물연구
큰 성읍 니느웨(1:1) -이는 앗수르의 수도로 약 60여 만 명의 주민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우상숭배를 비롯한 궤휼, 강포, 늑탈(나3:1), 극도의 이기심(습2:15), 전쟁과 약탈, 냉정하고 비정한 인간성 등이 만연,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본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자들의 죄악에도 깊이 관여하셔서 그들의 타락을 중지시키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살아계심과 만유의 주되심을 깨우치시는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스(1:3) -지중해 연안의 도시 중 하나로 지금의 스페인 땅에 해당합니다. 후일 사도 바울은 로마를 지나 이곳 다시스를 포함하는 서바나 지역에까지 가 복음 전했다고 전해집니다(사도바울은 개인적으로 이곳 서바나를 행 1:8의 땅 끝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을 보임).
참고로, 다시스(‘금속의 정련’이라는 뜻)는 서바나 남방 지중해 연안에 있는 중요한 무역시장으로 금속의 생산 및 가공으로 유명했으며, 일반적으로 스페인의 남부, 지브롤터에 가까운 타르테수스로 추정됩니다.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롬15:23,28)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1:3) -이는 요나의 잘못된 신관(또는 성령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절로서 그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하나님의 영 역시 자신에게 미치지 못할 것으로 여기면서 니느웨의 반대편인 다시스로 도망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7~10)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어느 민족이나 종파에 국한되는 그런 존재로 제한하고는 있지 않습니까? (편협한 신앙관에 얽매인 채) 하나님을 그저 교회 안에서만 머무시는 분으로 전락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1:12) -요나는 자신의 과오로 인해 폭풍이 일게 되었음을 시인하고 나를 들어 바다에 들어 던지라고 요청했는데 이는 그가 회개하는 심령으로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큰 물고기(1:17) -이는 바다 동물 중 가장 큰 부류에 속하는 고래로 추정되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물고기를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물고기는 하나님의 피조물 중 하나로서 요나가 3일 동안 그 뱃속에서 체류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물고기 뱃속(2:1,2) -이는 ‘음부’에 해당하는 스올의 뱃속에 비유되고 있는데 이는 요나가 지옥이나 무덤 속같이 두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내가 스올(음부)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2절)
두 번째로(3:1) -하나님께서는 처음 요나에게 내렸던 명령(1:2)과 동일한 내용의 사명을 재차 부여하셨는데 여기서 우리는 비록 우리의 실수와 범죄로 당신의 계획이 위협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일을 성취하고 마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러한 분이심을 깨닫고 나에게 맡겨주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 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2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렘15:19)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4)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요나를 통해 니느웨가 회개하지 않을 경우 소돔과 고모라 성처럼 철저히 파괴될 것을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 40일은 회개의 기간으로 책정된 시간임이 분명합니다.
니느웨의 거국적인 회개운동(3:7,8) -당시 앗수르는 앗수르단 3세(또는 이슈르탄 3세/ B.C. 771~754)의 치세 때로 북방의 아라랏과의 전쟁으로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된 데에다가 B.C. 763년에 창궐했던 역병으로 국가적인 재난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왕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니느웨(앗수르)의 멸망에 대한 우려가 팽배, 극도의 위기감이 조성된 가운데 선지자 요나를 통해 실제로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예언이 선포되자,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서 전신전력으로 통회, 자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물론, 이와 같은 거국적인 회개운동 배후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간섭이 있었음이 자명하구요).
심히 싫어하고 성내며(4:1)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치 않고 용서해 주신 사실에 대해 마땅치 않게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분개하기까지 했습니다. 왜 입니까? 이는 필시 이스라엘의 적대국인 니느웨의 멸망을 바란 그의 편협한 성격 탓 때문일 것입니다(국수주의 또는 선민의식).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욘1:1~17)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 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3절 하)
지중해를 횡단 중인 배 한 척이 있었습니다. 이 배는 얼마 전에 지중해 동쪽 ‘욥바’라는 항구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약 3,200km 떨어져 있는 다시스로 가는 배였습니다. 물론 이 배에는 (여느 때와 같이) 많은 상인들이 여러 가지 교역 물품 등과 함께 승선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순풍에 돛 단 배처럼 청운의 부푼 꿈을 안은 채 지중해 해안을 미끄러지듯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4절)
그러나 그들은 모두 뜻밖에 직면한 난관 앞에 낙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망망대해 한 복판에서 큰 폭풍과 맞닥뜨렸기 때문입니다. 선장과 사공들은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대풍 앞에서 갖은 애를 써보지만 하나 같이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거친 파도로 인해 배는 심하게 요동했고 그 선체 또한 하나둘 부서지고 깨어져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5절 상)
배 위에선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각자의 신들을 부르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필사적인 몸부림을 쳐가면서 있는 힘껏 각자의 신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한 번만 살려주신다면 저의 전 재산을 다 바치겠습니다.” “이 번만 살려주시면 평생 선한 일만 하면서 살겠습니다.” “제사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드리겠습니다.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5절 중)
또 한편에서는 극약처방이 투입되었습니다. (뼈를 깎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자신들의 물건 등을 바다에 던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배를 가볍게 할 요량으로 말입니다. 어쩌면 그들 중 상당수는 자신들이 평생 동안 모아온 전 재산을 송두리째 바다에 버려야만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자신들의 손으로’ 말입니다. 이 어찌 허무한 순간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쩌다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요? 무엇 때문일까요? 누구 때문일까요? 우리는 이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요나는 배 밑 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5,6절)
이런 와중에도 홀로 잠들어 있는 이가 있었습니다.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 중에서도 홀로 잠을 잘 수 있습니까? 선장은 우연히 배 밑층에서 홀로 잠들어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선장은 기가 막히다 못해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는 호통을 치며 잠든 그 사내를 깨웠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정신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지금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기는 하는 거요? 제발! 정신을 차리시오. 당신에게도 종교가 있다면 당신의 신께 기도를 드리시오. 이 배에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말이오. 이렇게 잠만 자고 있지 말고...”
그 사내는 단단히 혼이 낫습니다. 너무도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혹 이 사내처럼 지금의 현실을 나 몰라라 한 채 (숨어서) 깊은 잠, 즉 사망의 잠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시13:3) 모두들 살아보겠다고 나름대로 필사적인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나만 홀로 깊은 잠을 자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오늘날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6절 상)
*문제의 원인은 배 밑에서 홀로 잠자던 그 사내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 하였나 알아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7절)
문제의 원인은 결국 배 밑에서 홀로 잠자던 그 사내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였습니까? 요나입니다. 제비가 요나에게 뽑히자 배 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모두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고 여러 가지 질문들을 쏟아 냈습니다. 그에게 무언가 숨겨진 내막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8절)
그러자 그 사내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을 직감하고 그간의 일들을 토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므로....”(9,10절)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더욱 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필이면 이 사람과 함께 배를 타게 되다니... 이제 꼼짝없이 다 죽게 되었구나.’ 뭔가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는 사실을 직감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연신 “네가 어쩌자고 그런 일을 저질렀느냐.. 어쩌자고 말이다.”라는 말들을 되 뇌일 뿐 이 상황이 어찌해야 될지 몰라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졌습니다.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10절 하)
*문제의 원인부터 처리해야 합니다.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하여야 잔잔하겠느냐 하니.”(11절) 문제의 원인이 그에게 있었으니 그 해결 방법 역시 반드시 그에게 있다는 것을 확신했었기 때문일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요나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결국 요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통감하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12절) 무슨 말입니까? 한마디로 “나 때문이다. 나를 들어 바다 가운데 던져라 그리하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요나를 살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13절 상)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파도는 더욱 거세게 일어났고 배는 점점 더 육지로부터 멀어져갔습니다.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13절 하)
결국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졌습니다. 다음과 같이 부르짖으면서 말입니다.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14절)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15절)
그런데 세상에!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 아닙니까? 조금전만해도 배를 삼킬 것만 같았던 파도가 쥐죽은 듯 고요해졌습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들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크게 두려워하며 오직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했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서약했던 것입니다. 조금 전만 해도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그 앞에 부르짖었던 사람들이 말입니다(5절 상).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16절) 생각해보면, 비록 그들은 ‘요나 때문에’ 자신들의 대부분의 것들을 바다에서 잃었지만(5절), 동시에 ‘요나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보다도 훨씬 값진 것을 바다에서 얻게 되었습니다. 무엇 말입니까? 바로 천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알고 경외하게 되는 복을 말입니다(9절, 16절).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6절)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직도 ‘사망의 깊은 잠’(시13:3) 속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요나처럼 말입니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롬13:11) 왜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까? 첫째는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기 위함이고(마26:41), 둘째는 각자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함입니다(눅22:32).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26:4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2)
사실 (본문의 등장하는) 사람들이 폭풍을 만나게 된 것도 선지자 요나가 ‘자신의 사명을 회피한 채’ 여호와의 얼굴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가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2,3절)
그러므로 사명을 맡은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맡은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십시오. 여러분이 맡은 사명이 크든 작든 간에 그것이 속한 공동체를 살릴 수 있다는 점과 여러분이 그것을 회피하려 하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려 하는 그 순간 여러분뿐만 아니라 여러분과 한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점 등을 명심하면서 말입니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욘1:1~3)
*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3절 상)
선지자 요나는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곳을 향해 외치라는 여호와의 명을 뒤로 한 채 니느웨의 정반대인 다시스를 향해 도망갑니다. 무엇을 피해서 말입니까? ‘여호와의 얼굴’(히, 페네이 여호와)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3절)
한편, 우리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라는 이 구절에서 요나의 잘못된 신관(또는 성령관)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실 그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 역시 자신에게 미치지 못할 것으로 여겼으며, 이스라엘 영토를 벗어나기만 하면 하나님과 자신 간의 관계가 단절되고 자신이 받은 사명 또한 상실된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결국, 이와 같은 생각은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전락시킨 셈입니까? 예루살렘 경내에서만 통치하시는 일종의 지방신(地方神)입니다.
어떻습니까? 혹 (요나처럼)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지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 역시 자신에게 미치지 못할 것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 교회가 속해 있는 이 지역을 벗어나는 즉시, 하나님과 자신 간의 관계가 단절되고 자신이 받은 사명 또한 상실된 것으로 알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결코 교회 안에만 머무시는 분으로 전락시키지 마십시오. 교회 밖에서는 마치 하나님께서 아니 계시는 것 인양 그리 살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3절)
* 과연 피할 수 있었을까요?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28:16)
결단코 피할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서야 깨닫고 고백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이런 곳에서조차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뵐 수 있었을까!’,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구나.’, ‘하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는데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할 수 있으리까?’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창16:13)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9 하)
다윗이 시편 139편을 통해 고백한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7~10)
어떻습니까? 지금도 여전히 주의 앞에서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능히 주의 얼굴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까?
* 항상 신전(神前)의식 가운데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참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7~9)
청년 요셉은 인생 최대의 위기 앞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채 여주인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와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일까요? 코람데오(Coram Deo), 즉 신전의식(神前意識)입니다. 사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9절 하) 라는 부분은 의역하자면, ‘하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는데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할 수 있단 말입니까?’ 라는 의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늘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다는 ‘신전의식’이 청년 요셉으로 하여금 그의 인생 최대의 위기 앞에서 당당하게 승리케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늘 하나님 앞에서, 즉 항상 하나님께서 내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다는 의식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 안과 밖, 어느 곳이든지 주의 영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없으며, 국내외 어디에서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그분으로부터 받은) 사명 역시 항상 유효하다는 점을 알고 또한 누리고 있습니까?
더 이상 하나님을 교회 안에만 머무시는 분으로 전락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더 이상 ‘실존적 무신론자(實存的 無神論者)의 삶’, 즉 교회 밖에서는 마침 하나님이 아니 계시는 것 인양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이 같은 ‘신전의식’은 경건생활의 척도임).
하나님의 준비와 그 부르심(욘3장)
* 하나님의 준비
당시 북이스라엘이 다메섹을 속국으로 삼아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던 반면, 앗수르는 북방의 아라랏, 즉 우라르투 왕국과의 전쟁으로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된 데에다가 중앙집권 체제의 약화, 내부적 동요 등 총체적 난국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3장에 등장하는 앗수르 왕은 이슈르 단 3세(B.C. 771~754)로 앗수르 제국의 쇠퇴기(B.C. 823년부터 745년) 말에 집권 했던 왕으로 그의 치세 때인 B.C. 763년의 경우 설상가상으로 역병까지 창궐, 왕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니느웨(앗수르)의 몰락에 대한 극도의 우려와 위기감이 조성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 심령들이 가난해질 대로 가난해진 것입니다.
사실 가난해진 심령만큼이나 하나님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도 없을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심령이 가난한 자가 왜 복이 있습니까? 스스로의 한계와 연약함, 부족함 등을 고백한 채 오직 절대자 한 분만이 자신을 도와 줄 수 있는 분임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언제 스스로의 한계와 연약함 등을 인정하게 됩니까? 재물과 권력, 명예, 인기, 건강, 신뢰 등 자신을 위해 쌓아둔 것들이 흔들리거나 빼앗길 때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세상이 대해 가난해질 때 비로소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해질 수 있으며, 재물과 권력, 명예, 건강 등에 대해 마음을 비울 때 비로소 참된 부요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결국 아라랏 족속과의 충돌, 내부적 동요, 중앙집권 체제의 악화, 대규모 역병 발발 등 이와 같은 점들을 모두 살펴보건대, 우리는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래전부터 니느웨 각성운동을 계획, 지금껏 진행해 오셨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만 남았습니까?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만 얹는 일입니다. 이제 누군가가 나서서 그동안 하나님께서 다 차려놓으신 밥상에 앉아 부지런히 숟가락질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3~15)
무슨 말입니까? 사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려 하나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을 수 있으며, 전도해주는 이도 없이 어찌 그 분에 대하여 들을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누구를 부르셨습니까? 어떤 선지자에게 이 사명을 맡기고자 하셨던 것입니까?
* 그리고 부르심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욘1:1,2)
아밋대의 아들 요나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찌 했습니까? 처음엔 그 사명을 회비하고자 했고(욘1:3), 두 번째엔 마지못해서 억지로 했습니다(욘3:3,4).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욘3:3,4) (이처럼 중차대한 사안을)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큰 성읍에서 고작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쳤다면 그가 마지못해서 억지로 했다가 증거가 아닐까요?
또 요나가 니느웨 성에서 외친 내용을 잘 들여다보십시오. ‘회개의 촉구’ 및 ‘이로 인한 심판의 철회’ 등은 모두 생략된 채 오로지 심판에 대한 내용만 있을 뿐입니다. “...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3:3,4) 어째서일까요? 이는 분명 니느웨가 멸망하기만을 염원했던 그의 민족적인 복수심, 원한 등 때문일 것입니다.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욘4:5)
요나의 이와 같은 무성의한 사명 이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곳 니느웨에서 어떤 경이로운 일들을 행하셨습니까? 거국적인 회개운동, 즉 밑에서부터의 회개운동 뿐만이 아닌 위로부터의 회개운동까지 그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회개운동 중 하나를 바로 이곳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서 일으키신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욘3:5~9)
결국 하나님은 니느웨 성에 대한 심판을 어찌 하셨습니까? 철회(욘3:10), 아니 유보하셨습니다(나훔서 참조).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3:10)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없게 되었음이라.”(나1:1,14).
*우리를 향한 준비와 부르심
이를 통해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특정한 일 또는 어떤 사명에로 부르실 때는 아무런 계획이나 준비 없이 그리 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아 알 수 있듯 말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둘째, 하나님은 비록 우리의 실수와 범죄로 당신의 계획이 위협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일을 성취하고 마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선지자 요나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듯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욘1:2)는 사명을 저버린 채 다시스로 도망 중이던 요나를 바다 한 가운데서 돌이키셨으며, 이후엔 처음 요나에게 내렸던 명령과 동일한 내용의 사명을 재차 부여(3:1), 다시 니느웨로 향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 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욘3:1,2)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러한 분이심을 깨닫고 나에게 맡겨주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렘15:19)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통로라는 점입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의 비전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그 비전을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사역을 통해 마음껏 이루어 가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드려야 하는 통로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면 할수록 그 소명은 더욱 빨리 , 더욱 풍성하게 성취되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성실하고 게으르고, 무책임하다면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관 속에 이물질이 잔뜩 끼어 있으면 물의 흘러가는 속도가 떨어지듯 말입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드리면 드릴수록 그만큼 더 빨리 우리의 소명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명을 발견하고 성취해 가는데 있어서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단지 그분이 이 일을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데 있어서 통로만 되어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단지 축복의 통로, 사역의 통로라는 점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진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업적을 이루게 되면 마치 이 일을 내가 이룬 것 인양, 마치 내 자신에게서 흘러나온 것 인양 의시 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미가]
* 제목: 미가
이는 ‘하나님 같은 자가 누구냐’라는 뜻을 지닌 저자의 이름을 따른 것임(‘미가야’의 축약형).
* 저자: 미가
본서의 내적 증거(1:1)와 예레미야의 증언(렘 26:18) 등으로 보아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의 재위기간에 걸쳐 활동했으며 선지자 이사야와 동시대 미가가 분명합니다.
“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1:1)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디라 하였으나.”(렘26:18)
* 기록연대: B.C. 700년경
유다 왕 히스기야(B.C. 728~697년) 시대로서 미가가 예언활동을 마무리한 시점.
* 기록목적:
(1) 유다에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기 위해(1:8~16)
(2) 유다의 종교적 부패를 책망하기 위해(3:5~8)
(3) 유다의 사회적 불의를 책망하기 위해(3:9~12)
* 기록장소: 모레셋.
팔레스틴의 남서부의 작은 마을로 저자의 출신지임.
* 기록대상: 주로 남왕국 유다의 지도자들.
전체적으로 북왕국 이스라엘도 예언 대상에 포함되나, 주로 유다, 그 중에서도 특히 왕과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 예언되어 있습니다.
* 주제: 유다에 임할 심판과 회복
유다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범한 죄로 멸망당하게 되나 후일에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며, 메시야를 통해 영원하게 될 것임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 배경: 유다는 히스기야 왕을 끝으로 점차 쇠망의 길을 걸었는데 선지자 미가는 바로 이와 같은 ‘유다의 마지막 부흥기에’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안으로 유다에 화폐 경제가 자리 잡으면서 부자들의 경제적 착취로 날로 심해져, 빈부격차가 더욱 심해지는 등 사회적 불의가 만연했으며, 밖으로 앗수르가 당시 근동의 최강국으로 부상, 이스라엘과 유다를 정복하기 위해 원정을 시도했던 시기입니다.
* 특징:
(1) 지도자에 대한 책망 -품꾼과 같은 소외된 자의 편에 서서 부유한 자들의 불의 책망.
(2) 메시야에 대한 예언 -그리스도의 출생 장소와 사망에 대해 언급되어 있음(5:2~9).
(3) 이사야와의 사상적 유사성 -종교지도자들의 타락, 예루살렘의 파괴, 메시야의 탄생 등이 이사야서와 유사함.
* 핵심장: 제4장
장차 전(全)이스라엘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온전히 거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 이는 1차적으로 이스라엘이 열방의 압박과 환난 가운데서 구원될 것을, 궁극적으로는 신약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죄 가운데서 구원되어 그분의 축복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을 각각 의미합니다.
* 본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미가는 B.C. 700년경에 이미 분명하고도 정확한 어조로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예언하고 있으며(미5;2; 마2:5,6), 장차 이 메시야가 ‘온 세상을 통치하실 주권자’(4:1~8)이시자 ‘평강의 왕’(5:5)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4:1~8; 5:5). 이미 평강의 왕으로 초림 하셨던 예수(마2:1~11)께선 장차 천하를 심판하시고 의로 통치하시기 위한 ‘만왕의 왕’으로 다시금 강림하실 것입니다(행1:11; 계19:16).
*개요:
제1부, 심판의 선포(1:1~3:12)
1. 서론(1:1)
2.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1:2~2:13)
-사마리아에 대한 심판(1:2~8)
-유다에 대한 심판(1:9~16)
-심판의 원인(2:1~11)
-미래의 회복에 관한 약속(2:12,13)
3.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3:1~12)
-통치자들에 대한 심판(3:1~4)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3:5~8)
-미래의 심판에 관한 예언(3:9~12)
제2부, 예루살렘의 회복(4:1~5:15)
1. 회복될 예루살렘의 영광(4:1~5:1)
2. 메시야의 출현과 통치(5:2~7)
3. 남은 자의 영광(5:8~15)
제3부, 새로운 은혜의 언약(6:1~7:20)
1.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문답(6:1~7:10)
2.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와 축복(7:11~20)
* 핵심단어 및 구절, 인물연구
땅의 높은 곳을 밝으실 것이라(1:3) -여기서 ‘땅의 높은 곳’은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했던 산당들(당시 백성들은 높은 곳이야말로 자신들이 의뢰하는 ‘신’과 가까이 할 수 있는 곳으로 생각, 그 곳에서 분향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했음) (2) 높은 관직과 재산을 가지고 있어서 교만해진 사람들 (3)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적은 물론 하나님의 심판조차 임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요새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1:9) -앗수르에 의한 사마리아의 멸망이 곧 회복 불가능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욕하는 말(2:6) -완악해진 이스라엘은 선지자의 말을 ‘욕하는 말’로 인식(6절), 나아가 하나님을 속이 좁고 성질이 급한 분으로 몰아붙이면서(7절) 급기야는 그분까지 대적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한편, ‘성급하시다’(히, 카차르)는 원래 ‘짧아지다’, ‘짧다’(사28:20) 등의 뜻이지만, 여기서는 ‘제한하다’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거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너희 야곱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영이 성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유익하지 아니하냐.”(6,7절)
보스라의 양 떼 같이 하며(2:12) -‘보스라’는 ‘벽으로 둘러막다’는 뜻을 지닌 에돔의 한 성읍을 가리키는 지명(地名)이지만, 여기서는 그 지명의 뜻이 상징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요새와 같은 울타리 안에 보호받는 양떼 같게 하며’ 라는 뜻으로 말입니다.
“야곱아 내가 반드시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의 양 떼 같이 하며 초장의 양 떼 같이 하리니 사람들이 크게 떠들 것이며.”(12절)
길을 여는 자, 왕, 여호와(2:13) -‘남은 자’를 위한 하나님의 다양한 사역을 나타내는 단어들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신 자들을 구원을 위해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활동하고 계십니다.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가시리라.”(13절)
길을 여는 자(2:13) -하나님의 별명 중 또 하나는 “길을 여는 자” 입니다. 이 별명은 우리의 비전에 관해 하나님이 모종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한 번도 지나가 본 적이 없는 인생이라는 길을 걸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막막해질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길을 걸을 때마다 직면하게 되는 수많은 갈림길들은 우리를 더욱 버겹게 만들어 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길을 여는 자’로 자청하고 나선 것입니다. 기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길을 여는 자 되신 하나님에 의해' 바른 길로 인도함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길은 매일 그분과 함께 할 때 조금씩 조금씩 열리어져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분은 결코 길을 잃어본 적이 없으시며, 한 번도 도중에 여행객을 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에게는 낯선 곳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훌륭한 길 안내자 되신 그분을 부지런히 좇아가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앞에서 길을 닦아 주시고 열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3:5) -미가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바른 삶을 위해 몸부림치며, 하나님의 뜻을 바로 전하려는 노력보다 일신상의 행복을 위해 거짓 예언을 일삼았습니다. 예컨대 그들은 물질주의에 편승하여 배가 부르면 평화를 외쳐 대지만, 조금만 부족한 것이 있어도 백성들에게 위협과 공포를 조성하는 메시지를 통해 자신의 치부만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그들처럼 물질주의에 편승하여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선지자 미가처럼 하나님의 뜻을 바로 전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까?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5절 상)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3:8) -하나님은 사람은 이처럼 성령의 인도하심과 감화하심에 따라 말씀을 전파해야 할 것입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8절)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3:12) -선지자 미가의 이 예언을 통해 유다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습니까? 히스기야 왕과 모든 유다 백성들이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유다에 내리시기로 한 그 재앙은 어찌 되었습니까? 유보되었습니다. 한편, 선지자 미가의 이 같은 예언은 선지자 예레미야와 우리야 등을 비롯한 수많은 선지자들의 예언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렘 26장).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12절)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라라 하였으나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 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렘26:18,19)
끝 날에(4:1) -이 말은 ‘마지막 날에’(in the end of the days)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어의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특히 바울과 히브리서 기자가 신약시대, 즉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전 기간을 가리켜 ‘마지막 날’ 또는 ‘마지막 때’(딤후3:1; 히1:2)라고 표현한 것으로 볼 때 선지자 미가가 언급한 ‘끝날’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날 이상의 의미를 지닌 메시야의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본문 1,2절은 신약시대에 이르러 그리스도의 교회가 점차적으로 성장할 것이며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들은 이방인들이 개종하여 교회로 들어오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1,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5:2) -유다 산지의 동쪽 사면에 위치해 있었던 까닭에 큰 도시로 성장할 수 없었던 작고 아름다운 마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비천한 이 곳, 즉 다윗의 동네를 택하심으로써 비천한 자들을 높이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눅1:52). 한편, 베들레헴은 ‘떡 집’, 에브라다는 ‘열매가 풍성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어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全)인류에게 생명의 양식을 풍성하게 제공하시고자 이 곳에서 출생하실 것을 예표하고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5:2)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2:4~6) /“오늘 다윗의 동내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5:5) -목자와 군왕은 정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대표적 명칭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소망 중에 있는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대적들을 무찌를 때 사용될 적당한 도구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5절)
이슬...단비 같아서(5:7) -이는 하반절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 인간의 지혜와 힘을 신뢰하지 않고 오직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력과 지혜로 살아가는 자들의 특징을 묘사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인간의 지혜와 힘만을 신뢰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가운데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7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세 가지 삶의 규범(6:8) -(1) 공의를 행하는 것 /인간과 인간 사이에 행해져야 하는 것. 예컨대 매매의 척도가 되는 저울이나 범죄 행위에 대한 재판 등의 공정성. (2) 인자(仁慈)를 사랑하는 것/ 인간관계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변함없는 사랑’. 예컨대 부부간의 문제, 부자간의 문제. 이웃 간의 문제 등 (3)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므리의 율례, 아합 집의 모든 예법, 그들의 전통(6:16)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숭배한 것을 가리킵니다. 사실 오므리(B.C. 885~874)와 아합(B.C. 874~853)은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우상숭배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권좌를 악용하여 폭정을 일삼았으며 백성들에게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바라보나니(7:7) -여기서 ‘바라본다’(히, 호킬)는 ‘참고 기다린다’는 의미로서 끝내 성취하실 하나님의 약속을 인내하는 가운데 소망한다는 뜻입니다(약5:7~11).
이슬과 단비 그리고 사자(5:7~9)
* 야곱의 남은 자는.....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가운데 있으리니....”(7절 상)
성경은 계속해서 이스라엘(또는 야곱)의 남은 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19:18)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가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사6:13)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내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사10:20~22)
그렇다면, 이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이는 은혜 중에 택하심을 입은 자들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 영적 이스라엘, 즉 어떠한 위협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결국 구원 받게 될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리키며, 이 같은 내용은 구약 전반에 걸쳐 나타나되, 특히 바벨론 포로 기간 동안에 더욱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물론, 신약의 경우 ‘남은 자’라는 명칭이 복음서에는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서신서에서 그 명칭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등 구약의 남은 자 사상이 신약에까지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사도 바울은 사10:22를 인용, 이스라엘 민족 중 오직 ‘남은 자만이’ 그 구원을 얻게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롬9:27).
* 이슬 같고 단비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7절 하)
본문은 많은 백성들 중에 야곱의 남은 자가 있을진대 그들이 무엇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습니까? 이슬과 단비입니다.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7절 중) 또한 그들은 누구를 기다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사람, 즉 인생입니다.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7절 하) 이는 무슨 의미입니까? 어떠한 질고와 역경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힘과 지혜를 신뢰하는 것 대신 오직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력과 지혜로 살아가며, 하늘의 법칙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혹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사람을 기다리고 인생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간의 힘과 지혜를 신뢰하면서 말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오직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력과 지혜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법칙을 따라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한편, (당신의 자녀들에게) 이슬 같고 비와 같으신 분은 누구이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호14:5)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6:3) 그런데 본문은 야곱의 남은 자들이 바로 이와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7절 중)
결국 이들이 주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까? 생명의 통로, 은혜의 통로, 복의 통로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력이,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하나님의 넘치는 복이 이들을 통해 주변 열국과 그 백성들에게로 흘러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3)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창22:18)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26:4)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28:14)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생명의 통로, 은혜의 통로, 복의 통로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력이,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하나님의 넘치는 복이 우리를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 젊은 사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야곱의 남은 자는 여러 나라 가운데와 많은 백성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들 중의 사자 같고 양 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그가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라 없을 것이라 네 손이 네 대적들 위에 들려서 네 모든 원수를 진멸하기를 바라노라.”(8, 9절)
또한 본문은 그들이 무엇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밀림의 왕 사자, 양 떼를 밟고 찢는 젊은 사자입니다. “...그들은 수풀의 짐승들 중의 사자 같고 양 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8절 중) 누구에 대하여 말입니까? 그의 대적들입니다. “네 손이 네 대적들 위에 들려서 네 모든 원수를 진멸하기를 바라노라.”(9절)
여기서 대적들이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육체적인 원수가 아닌 영적인 원수로서 야곱의 남은 자와 그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입니다. 모든 악한 영들의 세력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
이들을 대항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사자와 같은 용기와 강력함입니다. “...그들은 수풀의 짐승들 중의 사자 같고 양 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8절) 바로 누가 그와 같은 용기와 경력함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야곱의 남은 자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있습니까? (엡6:13~17) 강한 군사로 준비되어 있느냔 말입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 이 때에 밀림의 왕 사자처럼, 양 떼 중의 젊은 사자와 같이 강력한 주의 군사로 세워져 있느냔 말입니다. 담대하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6:1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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