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의 촛점을 주님께 맞춰보세요.
본문 : 마가복음8:22-26
제목 : 무엇이 보이느냐 (밝히 보매)
“막 오른 축제, 지상 최대 쇼, 지구촌 홀리다.”
2008년 8월 9일 토요일 국민일보 1면에 크게 올려 진 글입니다.
“13억 100년의 꿈”이 실현됐다는 베이징 올림픽,
성화가 밝혀지고 개막식이 시작되자 전 세계가 환호하며
세계의 이목이 베이징올림픽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각국의 대표들이 베이징에 직접 가 있기도 하고 전 세계의 많은 국민들은 T.V앞에서 불을 밝히고 있을 것입니다.
미디어 정보사회에서 볼거리들이 홍수처럼 흘러넘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예수님은 무엇을 보시며 어디에 관심을 집중하셨던가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 북동쪽에 위치한 벳세다에 이르러서 행해졌던 사건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르자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다시 말하면 고쳐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소경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어보셨습니다. 그 소경은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라고 답했고 예수님이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만물을 밝히 보았다 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교훈 받아야 할까요?
보지 못한다는 것은 엄청난 장애입니다. 너무 깜깜해서, 또는 눈에 무엇이 들어가거나 비눗물 때문에 잠시 눈을 뜨지 못할 때, 잠시이지만 얼마나 답답하고 행동에 장애를 가져오던가요?
그런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것도 잠시가 아닌 계속일 때 얼마나 답답하고 기가 막히겠습니까? 예수님이 많은 소경을 고치셨던 것을 성경에서 찾아보면서 인생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그 분의 사랑과 긍휼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더 나아가 정말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이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줄 압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세 가지 눈이 있습니다.
첫째는 육안입니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사물을 보고 세상의 만물을 보는, 신체에 붙어있는 우리 눈을 말하지요. 요즈음 당뇨나 뇌질환 등 갖은 질병으로 눈이 보이지 않아 고통 하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한 큰 아들이 시력회복을 위한 라식수술을 하기 위해 전주의 푸른 안과에 갔는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안과 전문병원인데 웬 사람이 그리 많던지요. 복도고 병실이고 북적이는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건강한 눈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지안입니다.
어르신들에게 전도를 하다보면 흔히 듣는 말이 있습니다.
“난 까막눈이라 가도 소용없어, 아무것도 못 보는데 가면 뭐 해”
눈은 있으나 글을 모르니 볼 수 가 없다는 것이지요.
몇 십 년전 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여자들은 배움의 길이 열려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어머니들은 까막눈이 많았어요.
저의 친정어머니도 소위 까막눈이셨습니다. 1,2,3,4도 모르셔서 전화기를 옆에 두고도 오는 전화 밖에는 하시지를 못하니 답답해 하셨지요.
제가 전화를 하면 언니들에게 전화 안한다고 막 욕을 하셨습니다.
크게 글자를 써서 전화기 옆에 놔 드리지 못한 것, 가르쳐 드리지 못한 것이 회한이 되어 마음이 아프지만 그 분은 지금 천국에서 그 모든 것을 초월한 삶 속에 안식하고 계실 터이니 위로가 됩니다.
우리 어머니는 어디를 가시든지 찬송가만큼은 보물처럼 소중히 싸 가지고 가셔서 꼭 찬송가를 펴 놓고 찬송을 하셨습니다. 페이지를 못 찾으시니 옆에 사람이 누군가 꼭 찾아드려야 했는데 어느 날 저는 찾아드리며 속으로 ‘펴드리면 뭐 해 보시지도 못하면서’ 했는데 아니었습니다. 그냥 펴놓기만 하고 다른 사람 따라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정말 찬송가를 보시면서 찬송을 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저도 그걸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렇듯 지안도 우리 사람에게는 소중하고 귀합니다.
좋은 시대에 태어나 지안이 있어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음에 감사합시다.
셋째로, 영안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은 육적 동물이 아닙니다. 혼적 동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적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생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눈은 이 영안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영안이 열려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십니까?
십자가 밑에 나아와 나를 위한 그 사랑, 십자가의 사랑이 보여 그 사랑에 감격해 눈물이
나옵니까? 천국과 지옥이 보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 집니까? “나의 눈을 밝혀 주의법의 기이함을 보게 하옵소서” 기도해야 할 줄 압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9장에서 나면서 소경되었던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안식일에 이 일을 했다하여 비난하는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에게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니라”(요9:39)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소경인가?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다시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41)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보는 자입니까? 보지 못하는 자입니까?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못하십니까?
행여 육안이 잘 안보여 고통스러우십니까? 눈을 감고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주목해 보십시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 46장,144장,204장,219장,231장,337장,424장,446장 492장, 496장 등 제일 많은 작시 자는 화니 제인 크로스비 여사입니다. 크로스비는 생 후 6주 만에 실명을 하고 94세 까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세상을 보는 육안은 없었으나 하나님과 그 나라를 바라보며 이렇듯 소중한 시를 9000여 편을 써서 후대에 까지 길이 남게 된 인물이 된 것입니다.
미연방 백악관의 정책보좌관으로 있는 강영우 박사를 보십시오.
10대에 실명을 하고 고아가 되어서 패망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지만 육신의 눈은 안 보이나 지안이 있고 믿음의 눈이 열리니 얼마나 위대한 삶을 살아갑니까?
얼마 전에는 국제 로터리클럽에서 전 세계 사람가운데 1명에게 주는 세계인권상인 “지구촌 인권봉사 상”을 받은 것을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멀쩡한 육안을 가지고 어디에 사용하고 있습니까?
베이징 올림픽에 빠져 텔레비전 앞에서 떠날 줄 모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연속극에 빠져 못 헤어 나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도 사실은 순정파라 연속극을 좋아합니다. 한 번 두 번 보기 시작하면 못 빠져 나오지요.
연속극을 보고 나와 기도를 하려하면 이놈의 T.V화면이 앞에서 아롱아롱 거립니다. 기도를 할 수가 없어요. 한 참을 씨름하고 싸워야 합니다. 그러기에 아주 안 봅니다 인 봐요.
안 볼 것을 안보면 편합니다. 편해요.
예수님은 고쳐준 소경에게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제 보이는 눈을 가지고 세상으로 가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 것을 염려하심이 아니실까요?
밝히 뜨여진 눈으로 정말 볼 것을 밝히 보고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을 따르라 함이 아니겠습니까?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는 주님, 무엇을 보고 있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의 관심은 베이징 올림픽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고통하고, 신음하는 심령들, 눌리고 약한 자들에게 주님의 시선은 머무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선도 그 곳으로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위를 살펴보십시오. 나의 손길이 필요한 자가 있는지, 주님의 사랑을 갈구하는 자는 없는지요.
“보는 것에 대해 심판하시겠다.” 신 주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받아,
볼 것을 보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삼가는 귀한 성도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