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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강해
평신도목회자교육원
Ⅰ. 골로새서 강해를 시작하면서
1. 평신도 목회자 에바브로
골로새 교회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세워졌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 서(書)를 기록할 당시에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미처 방문하지 못했으며, 그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아직 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점(골2:1)으로 보아 골로새 교회를 바울이 세우지 않았음은 확실 합니다.
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반 동안 복음을 증거하며 공부를 가르칠 때에(행19:8-10) 에바브로와 빌레몬, 아킵보 등이 골로새로부터 건너와 복음을 듣고 그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에바브로가 골로새 교회를 세운 듯 합니다.
에바브로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개종하여 복음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기에 자신이 은혜 받고 깨달은 복음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자연스럽게 개종한 사람들의 모임이 형성되어 골로새 교회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는 골로새 교회를 직접 목회를 하였으며(골1:7), 목회 중에 유대교의 율법과 전통, 철학과 헛된 속임수, 영지주의적 혼합사상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구원자 되심을 부인하는 불순한 사상 등이 교회를 혼란케 하는 바 에바브로는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을 찾아가 함께 갇힌 몸이 되면서(몬1:23) 교회의 모든 사정을 보고하자 바울이 친필로 골로새 교회 앞으로 본 편지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를 무척 신뢰하며 그의 신앙과 사역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우리와 함께 종된 사랑하는 에바브로...” (골1:7)
“너희를 위해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이요..” (골1:7)
“그리스도 예수의 종...” (골4:12)
에바브로는 매우 훌륭한 평신도 목회자였습니다. 그가 복음을 듣고 깨달으며 주님을 만난 체험을 신앙의 바탕으로 하여 골로새서 뿐만 아니라 이웃 도시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골4:12-13)에서도 복음을 증거하여 순회 전도자의 역할을 하면서 골로새 교회를 목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의 성도였던 ‘빌레몬’도 자신의 가정에서 여러 교우들을 모아 평신도로서 목회를 했던 사람입니다.(몬1:2)
초대 교회 당시에는 주로 개종한 평신도들이 중심이 되어서 가정에서 목회가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현대와는 달리 당시 전문적인 신학교와 목회자들이 없던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여기서 현대 목회와 비교하여 배워야 할 소중한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2. 현대 목회와 교회의 모습
현대 교회의 목회는 전문적인 신학 공부를 마치고 안수 받은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어서 대중(大衆)을 관리하며 예배와 기도회, 성경공부 등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목회자의 인도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은 수십 년의 교회와 신앙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채 언제나 먹여주는 양식을 기다리며 매사에 목회자를 의지해야하는 어린 아기의 신앙에서 성숙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목회자는 물량적인 외적 성장만을 추구하는 비성경적인 목회를 하면서 에바브로나 빌레몬과 같은 제자를 양성하지 못한 채 결국 기복(祈福)을 좇는 무속(巫俗)신앙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무미건조(無味乾燥)한 예배와 기복적인 기도회, 감성이 앞서는 찬양과 지식 전달에 그치는 성경 공부 그리고 목회자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권위 의식 등 신약 시대의 유대교나 중세기 때의 로마 가톨릭과 같이 무의미한 이방 종교적 색채만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도무지 성경적이고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위한 목회와 교회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영성(靈性)은 상실한 채 인위적인 수단과 방법만이 교회를 뒤덮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건물을 신성(神聖)시 하는 이방 신전(神殿)이 되어 버렸으며, 하나님의 사람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 이방 신도들로 양성하고 말았습니다.
성경 말씀을 열어가면서 설교를 하고 공부를 한다 해서 모두가 영적(靈的)인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프로그램과 계획이라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사역인 것도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여러 번 읽었고 암송을 한다고 해서 결코 좋은 믿음의 사람은 아닙니다.
또한 기도를 목이 쉬도록 하고 찬양을 눈물을 흘리면서 한다고 해서 은혜가 넘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런 모든 행동을 결코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모든 행동들이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는 방향으로 성숙되게 하는 밑거름이 되어야 하는데 사실 그렇지 못하기에 가슴이 아프며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3. 현대 목회의 방향과 교회의 비전
이제 목회자들은 교회의 외적 성장에 대한 욕심과 야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인위적인 능력을 행사하기보다는 진정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도록 자신을 텅 비워야 할 것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항상 자신을 비워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며 그 비워진 곳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채우실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항상 겸손히 서서 “말씀을 하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하는 자세로 영감을 얻기까지 인내하며 하나님의 생각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며 또한 골방의 깊은 기도가 생활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말씀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과 비밀을 깨달아 바울과 같은 영적인 능력을 겸비한 좋은 목회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목회자란 자신을 먼저 예수의 사람화 하는 일에 전념을 하는 사람입니다. 매사에 쉽게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며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을 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종이 아닐 것입니다. 범사(凡事)를 판단하고 행동으로 옮길 때에는 언제나 이해와 용서와 같은 관용의 정신이 앞서야 하며, 빈부귀천을 떠나 누구든지 인격을 존중해 주며, 진실한 마음으로 섬기며 자신의 것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자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높은 마음에 있으면서 낮은 사람을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목회자가 물질적으로 부유하면서 말과 혀로만 가르치는 것은 위선일 뿐입니다.
목회자라는 신분으로 권위 의식을 앞세우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어리석음입니다. 목회자는 신(神)이 아니고 지도자도 아니며 선생도 아닙니다. 다만 머슴일 뿐입니다.
물(水)은 항상 아래로 흐르듯이 목회자는 항상 아래로 향하는 목회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이 담겨진 그릇의 모양대로 존재하듯이 목회자는 모든 상황에 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흐르는 물을 막는다고 해서 물이 항변하지 않듯이 목회자의 뜻대로 안되어도 결코 분을 내어서는 안되고 온유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범사에 목회자가 ‘사랑의 덕(德)’을 잃지 않는다면 교인들뿐만 아니라 이웃 사람들에게까지도 존경을 받게되어 교회의 모습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러한 영성으로 인격을 이룬 목회자에게는 반드시 에바브로와 빌레몬과 같은 제자가 양성될 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목회자들만이 모든 일을 주관하고 교인들은 수동적으로 따라주는 꼭두각시 같은 사람들을 모아 두는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목회자 자신은 바울이 ‘나를 본(本) 받으라’고 했던 것처럼 오직 예수의 영성으로 무장되어 교인들을 가능한 한 훌륭한 목회자인 자신과 같은 제자를 양성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종 된 사역이며 목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양성된 평신도 목회자에게 기꺼이 또 다른 소그룹을 맡아 목회 할 수 있도록 분가시키는 일에 목회적인 철학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평신도 목회자가 중심이 되는 소그룹의 가정교회가 많아질수록 목회자 자신은 물질적인 욕심과 권위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며, 밖으로는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 세상에 비춰지어 복음의 확장을 위한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Ⅱ. 골로새서의 내용 전개
골로새서는 당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던 각종 이단적 사설을 바로 잡기 위해서 바울이 에바브로에게 교회 보고를 받은 후 쓰게 된 편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한 변증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언급하였으며, 아울러 후반부에서는 성도로서의 성숙한 삶이 무엇인지를 신앙과 생활의 두 측면에서 다양하게 일깨우는 지침서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목회자의 바른 목회관과 그의 인품, 교회와 복음이 주변에 끼치는 영향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할 성서적인 생활관 등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에 오늘 기복적이고 물량적으로 흐르고 있는 기독교에 새로운 경종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제 1 부 문안 인사와 바울의 감사 (1:1-12)
1. 은혜와 평강 (1-2절)
2. 바울의 감사 내용 (3-8절)
3. 바울의 중보 기도와 당부 (9-12절)
제 2 부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신앙의 대상 (1:13-2:23)
1. 그리스도의 우월성 (13-22절)
2. 교회의 일군/복음의 일군 (1:23-2:7절)
3. 세속적인 가르침에 대한 경계 (2:8-23절)
제 3 부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성숙한 삶 (3:1-4:6)
1. 두 개의 세계와 그 삶 (1-4절)
2. 그리스도인의 내적 변화와 성숙 (5-17절)
3. 그리스도인의 대인관계 (3:18-4:6절)
제 4 부 평신도 동역자들에 대한 배려 (4:7-18)
Ⅲ. 문안 인사와 바울의 감사 (1:1-12)
1. 은혜와 평강(1-2)
바울은 언제나 편지의 서문에서 ‘은혜와 평강’이라는 인사말로 시작을 열고 있습니다.
‘은혜’는 헬라인들의 전형적인 인사이며, ‘평강’은 히브리인들의 전형적인 인사입니다. 당시 초대 교회 안에는 유대인의 개종자들과 이방인 개종자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기에 이런 합성적인 인사를 한 듯 합니다.
그러나 한편 ‘은혜와 평강‘이라는 인사는 매우 복음적인 인사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은혜’라 함은 만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해 주신 그 사랑을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총을 의미하는 인사말입니다.
또한 ‘평강’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게 되면서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 에덴 동산이 회복되어 기쁨과 환희를 누리게 됨을 의미하는 인사입니다.
‘평강’은 ‘은혜’속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결과로 얻어지는 내적인 평화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가난과 질병, 아픔과 고통, 슬픔과 괴롬 등에서 살게 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면 결코 우리는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여전히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건강하고 물질의 넉넉함과 문화 혜택을 누리며 산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의 짧은 행복과 평화는 누릴 수 있어도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행복과 평화는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은혜와 평강’이라는 인사는 대단히 심오하고 의미 심장한 인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에게도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 ‘은혜와 평화’를 누리는 사람일까요? 우리가 매일 매 순간마다 하나님과 동고 동락하며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누구든지 은혜와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살다가 교회에 오는 시간에 국한하여 잠시 하나님을 기억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사는 평일에는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이방 사람들과 똑같은 의식과 생활 습관으로 살아갑니다. 욕심과 욕망, 미움과 원망, 시기와 질투, 아픔과 괴롬, 짜증과 분노 등 인간의 기본적인 악성을 지니고 살면서 때때로 울고 웃으면서 삽니다.
그러나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떠한 불우한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결코 인간의 악성이 튀어나오지 않습니다. 이미 그 모든 악성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새로 거듭난 예수의 인격으로 살기 때문에 가난 속에서도, 질병 가운데서도, 슬픔과 괴롬을 안고서도 심지어는 죽음 앞에서도 ‘은혜와 평화’를 상실하지 않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23편)
2. 바울의 감사 내용(3-8)
바울은 자신이 직접 세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뿐 아니라. 제자들이 세운 교회도 일일이 기억을 하면서 깊은 관심 속에서 애정을 갖고 늘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내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도 힘이 들거나 귀찮아서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뿐 아니라, 교인들을 위한 영적인 수고와 희생을 다 하지 못한 채 개인적인 일과로 하루의 시간을 거의 할애하다 보니 교인들이 영적으로 바르게 성숙하지 못합니다.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할 조건이 별로 없습니다. 이럴 때마다 모든 책임이 교인들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설교 시간을 통해서 개인적인 불만을 책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목회관은 교인들과 멀리 떨어져 있거나 생면부지의 제자와 성도의 관계이거나 심지어는 감옥에 갇혀 있을지라도 여전히 그 영향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목회자에게 훌륭한 제자 그리고 훌륭한 성도들이 양성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하고 기도할 때마다 주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칭찬하며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사회 생활 속에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믿음’일 것입니다. 믿음이 깨지면 대인관계가 무너지고 불신으로 인하여 사회의 조직과 행정에 마비 등 많은 불편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가정과 사회와 국가 간의 상호 믿음은 매우 희박한 실정입니다.
더욱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믿음’이 절대적이며 최우선의 문제입니다. 이 믿음은 사람을 향한 믿음이 아닙니다. 본시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다만 이해와 용서와 사랑할 대상일 뿐입니다.
오직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필요를 이 세상에 가득 채워 주신 분이시며,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구세주이시며, 우리의 영생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신 은혜와 능력의 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믿음의 대상이 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영혼을 위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전반적인 일들 즉 육체의 질병들과 정신적인 고민들,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불화 등을 위한 지혜와 능력을 주시며 또한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행복을 위해 은혜와 평화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그리스도 밖에서 1m의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 이성으로만 믿는 믿음이 되어서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 존재해 주는 믿음의 대상으로 만들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이런 믿음은 이방 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이방인의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적인 믿음이 감성적인 믿음과 하나가 되어 그 분을 향한 감사와 찬양으로 이어지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날마다 그 분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 분께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으며 아브라함은 믿음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 믿음의 조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 분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마음으로 우리의 인생 전체를 맡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분을 위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당신은 하나님/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이유가 무엇입니다. 당신의 필요를 위해 찾습니까? 아니면 모든 은혜가 감사하여 영광과 찬양을 드리기 위해 찾고 있습니까?
둘째로,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삶을 보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실한 믿음은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과 평화는 우리 속에서 ‘사랑’이 되어 다시 주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되어 “하나님 사랑”을 표현하게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사랑‘은 처음부터 하나입니다. 믿음 속에 사랑이 있고 사랑 속에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없는데 그를 어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성적인 믿음은 감성적인 믿음을 낳고 감성적인 믿음은 의지적인 믿음을 이끌어 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 즉 은혜와 능력에 대한 감사와 찬양하는 마음은 결국 주변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하며, 그들의 필요를 보면 즉시 도와주도록 성령께서 역사를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은 자연스럽게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의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굶주린 자, 병든 자, 슬픈 자, 소외당하는 자 등 약자들을 보고 지나칠 수 없어서 서로 힘을 모아 수고와 희생함으로 도와주는 사랑을 베풀었던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은 가히 칭찬 받을 만한 ‘하나님 나라의 삶’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에서 46절에는 마지막 때의 심판에 관한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생(永生)과 영벌(永罰)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당신은 진실로 무엇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돈, 권세, 명예, 재산, 학벌, 애완동물, 자녀, 세속 문화 등.....? 그렇다면 당신에겐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있는 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사랑은 두려운 심판을 통과하게 합니다. 사랑의 삶은 구원과 영생을 보장해 주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세 번째로,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가득한 신앙을 보고 감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소망을 세우고 추구하며 열심히 살아갑니다. 집단체나 교회들도 미래의 계획을 세워서 그 소망을 향해 힘을 모으며 열심히 노력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교회들은 세속적인 소망을 세우고 그것을 위해서 땀을 흘리며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소망들과 성취된 결과는 결국 이 세상의 종말 때에 함께 다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웅장하고 위엄 있어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며 자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때 곧 무너지게 될 것을 내다 보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제자들과 같이 썩어져 없어질 것들과 곧 무너지게 될 것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삽니다.
우리는 지금도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만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 나라에서 필요한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가 실존하고 있음을 믿고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마치 하나님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것만 추구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 하실만한 일들을 말로만이 아니라 몸소 행하며 사는 것이 곧 하늘 나라에 소망을 쌓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둔 사람들은 항상 마음을 비우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속적인 욕심과 욕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기적이지 못하고 늘 이타적인 사람들입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손해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소유가 목적이 아니라 나눔이 목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속적인 부와 명예를 초월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있는 교회와 성도, 사랑이 있는 교회와 성도란 하늘 나라에 소망을 쌓는 사람들만이 얻을 수 있는 축복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실존에 대해서 확신이 없기 때문에 하늘에 대한 소망이 없는 것이며, 하늘에 대한 소망이 없기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이방인의 믿음으로 전락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 밖에 있는 구경꾼들에 불과하여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으므로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려는 삶이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와 성도들이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무서운 책임이 누구에게 먼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는 확실히 존재합니다. 지금 당신은 어느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까? 지금의 당신의 마음(긍휼, 인애, 자비)과 하는 일(세속적인 이익)이 여러분의 마지막 심판대에서 영생(永生)과 영벌(永罰)을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교회와 신앙의 3대 요소입니다. 어느 한 부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항상 3요소가 함께 ‘하나’를 이루는 것이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믿음의 증거요 소망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3. 바울의 중보 기도와 당부(9-12)
바울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가득한 골로새 교회와 성도들을 칭찬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지금 헬라의 철학과 유대교의 율법 그리고 영지주의 등 이단적 사상이 교회를 혼란케 할 우려가 있어서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드리면서 아울러 교회 앞에 당부를 전하고 있습니다.
1.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얻어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깊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2. 영적으로 성장하여 주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합당한 생활로 열매맺기를 기도했습니다.
3. 하늘의 권세로 모든 이단 사상을 능히 이기기를 기도하였습니다.
4. 성도의 삶 가운데 인내와 기쁨과 감사 등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길 기도했습니다.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고, 성령 안에서 바로 살자]라는 “바른 신앙”을 계속 유지 발전해 갈 것을 기도하면서 당부를 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목회자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할 때에 기도의 내용이 영적인 것인지 아니면 세속적인 것인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교회의 정체성과 성도들의 믿음을 결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는 골로새 교회의 신앙을 본 받아 지금의 왜곡된 믿음과 신앙으로부터 돌이켜 진정한 초대 교회의 신앙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Ⅳ.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신앙의 대상 (1:13-2:23)
1. 그리스도의 우월성(1:13-22)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신앙과 이단 사상의 침투에 대한 보고를 에바브로에게 듣고 그 아름다운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해서 다각적으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타종교는 도덕과 윤리적인 종교인 반면 기독교는 영적인 종교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인’임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구원’을 제시해 주는 유일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1) 흑암의 노예로부터 구원하신 구세주이십니다.-그리스도의 신분(13-14)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를 통해서 구원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너희를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해 낸 여호와 하나님이시라”하시며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한시도 잊지 말 것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영적인 애굽 즉 흑암의 권세, 죄악의 권세, 사단의 권세, 죽음의 권세로부터 출애굽 시키신 구세주가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과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노예, 죄악의 노예, 죽음의 노예에 있었던 우리를 자신의 죽음으로 대가를 치르시고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어둠의 나라에서 광명의 나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엡2:1-2) 우리 생활의 터전을 옮기어 주셨고 또한 환경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 되시며 우리는 그 분의 종이 됩니다. 종은 주인의 것입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종은 자기의 생각과 뜻을 앞세워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 주인은 항상 우리에게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대하시며,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따뜻하고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까지나 오직 예수님만을 감사함으로 믿고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구세주(주인)이심을 진정 믿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당신은 무엇을 믿으며 섬기고 있습니까? 혹시 돈이나 세속적인 배경은 아닙니까?
2) 모든 만물과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그리스도의 권위(15-17)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영(靈)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거룩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 분은 만물의 존재보다, 시간의 시작보다, 역사의 출발보다 훨씬 앞서 계셨던 하나님으로서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모든 천체와 산천초목과 각 종류별로의 동.식물 그리고 보이지 않는 천사들과 바람과 공기 등을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자연 만물의 모든 피조물들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듯이 모든 사람들도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예수 그리스도를 당연히 믿고 섬겨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며 또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존재입니다.(골1:16, 엡2:10)
그러므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며 살든지 그 모두가 나를 위한 삶이 아닌 하나님/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선한 삶이어야 합니다.
‘선한 삶’이란 도덕과 윤리적인 선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계명대로 순종하는 삶을 의미하는바,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피조물의 절대적인 의무요 책임입니다.
3) 몸 된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그리스도의 지위(18-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칭찬하시며 그 고백을 기초로 하여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16:18)
이것은 가톨릭의 주장대로 베드로를 교회의 초대 교황으로 세우신다는 뜻이 아니고, 신앙 고백 속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삼아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교회의 기초가 되시며, 교회의 몸을 이루고 계시며, 또한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즉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 안에 부름을 받아 몸의 일부를 맡고 있는 지체일 뿐입니다.
사람의 신체 중에 가장 위에 있으며 중요한 부분이 ‘머리’ 부분입니다. 머리는 신체의 모든 신경계와 지체를 관리하고 다스리는 총 사령관실입니다. 따라서 신경계와 지체들은 언제나 머리의 명령을 따라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의 몸에 붙어있는 각 지체로서 머리되시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만일 지체가 몸에서 떨어져 있다면(명령에 따르지 않고 불순종을 한다면) 생명을 잃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요15:4-6)
그리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에서 ‘그리스도’란 기름부음 받은 자 또는 메시아라는 뜻으로서 자기 백성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할 사명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神)적인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와 신앙의 기초와 내용과 그 정체성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오늘의 교회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교회를 이루고 있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혹시 예수님이 밀려나고 돈이나 성경 지식이나 목회자의 경영 능력이나 교회 건물은 아닙니까? 교회의 기초와 그 내용을 예배나 기도와 찬양 등으로 제한해서도 안됩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살아있는 삶으로 신앙의 기초를 이루어야 하고 믿음의 내용이 되어야 하며 교회의 정체성이 되어야 합니다.(마16:24, 갈2:20, 빌3:7-9)
4)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그리스도의 역할(19-22)
모든 인간은 본성이 악하여 죄인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롬3:10) 아담의 타락 이후에 모든 인간은 정결하지 못하며 경건하지도 못하며 거룩하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을 상실하고 사단의 속성으로 불경(不敬)스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사단의 노예가 되어 이기적이고 미움과 원망과 불평과 음란과 살인과 절도 그리고 세속 문화를 사랑하며 죽음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긍휼과 자비와 사랑이 크신 하나님께서 사단의 권세 아래에 있는 이 세상에 친히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여 상실되었던 ‘거룩’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사단 앞에 자신의 몸을 희생의 제물로 내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의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죄인으로서의 각자 이름이 아닌 의인으로서의 공통된 이름인 ‘거룩’으로 바뀐 것입니다. 나의 이름은 거룩이며 당신의 이름 또한 거룩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는 거룩한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거룩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레19:2) 내가 거룩해지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거룩은 거룩을 찾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거룩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화목 제물이 되심은 단지 ‘믿음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함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어서 거룩성을 되찾아 주는데 있는 것입니다. 즉 거룩한 사람 그리고 거룩한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먼저 ‘내적인 거룩’이란 반드시 회개가 전제되어야 하며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과 깊은 묵상(기도)으로서 세속과 구별된 경건한 인격체를 이루는 것을 의미하며(엡5:26, 딤전4:5) 그리고 ‘외적인 거룩’이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이며(골3:12) 또한 고아와 과부를 그 어려운 중에 돌아보고 또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아니함을 의미합니다.(약1:27)
우리가 오직 예수님과 그의 복음만을 믿고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그 분이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창조주이시며,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화목의 다리를 놓아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예수님과 그의 복음만으로 만족하고 충분히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과 명예와 지식과 향락과 학벌과 출세와 성공 등 그 무엇과도 비교가 될 수 없으며 대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2. 교회의 일군/복음의 일군(1:23-2:7)
사도 바울은 본래 태어난 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 이스라엘의 자손이요 베냐민 지파로서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었으며 율법적으로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는 유대교의 전통과 관습에 반(反)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는 철저히 박해를 가하는 열심 당원이었습니다.(빌3:5-6)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성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부터는 사회적 신분이나 가문의 혈통 그리고 종교적 열심 등을 무가치하게 여기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앙과 인생의 전부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빌3:7-8)
그리고 지금 그는 자신이 교회의 일군이 된 것을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1) 교회 일군의 사명(23, 25-27)
바울은 언제나 자신이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교회의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과 삶 속에서 유일한 소망으로 삼을 것을 소원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충만한 삶을 누리며 또한 복음의 능력 안에서 모든 이단 사설로부터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신앙을 유지하는데 최선을 다 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양식이요, 영원한 재산이며, 영원한 문화임을 성도들에게 심어주어 굳건한 믿음의 터를 마련토록 하는데 그의 사명이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은 선민 사상으로 교만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뿐 아니라 모든 이방 민족인 전 세계인에게도 전파되어야 함이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임을 전하면서 자신의 사명이 여기까지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의 일군인 목회자들과 장로들은 무엇을 사명으로 여기고 있으며 무엇을 계획하고 추구하고 있는지 깊이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종교적인 예배와 설교 그리고 대표로 기도하는 일이 결코 사명은 아닙니다. 교회건물을 확장하거나 건축하는 일도 사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산 경험이 빠진 성경 공부는 지식에서 지식으로 전달될 뿐 변화와 성숙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그 역시 사명은 아닐 것입니다.
초청 받아 설교하는 일들로 바쁘게 보내는 일이 결국 자신의 부와 명예를 얻는 일에 그친다면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군 된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 경험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경험하여 깨닫고 얻은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설교요 가르침이며 구원의 소식을 전파하는 선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일군 된 자들의 사명은 성도들에게 “오직 예수”만으로 충분히 만족하며 행복할 수 있도록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채워주는 일 그것뿐입니다. 이 사명 외에 교회의 성장과 확장 및 건축 그리고 많은 프로그램의 운영 등은 결국 공허하게 할 뿐입니다.
2) 교회 일군이 받아야 하는 고난(24)
사람은 누구나 불행보다는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일군은 누구보다도 불행을 선택할 수 있는 믿음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12제자들은 복음 전파 뒤에 좇아오는 핍박의 길을 선뜻 나섰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는 불행도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피가 터지도록 곤장을 맞으면서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증거 하다가 여러 차례 차가운 감옥에 갇히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동안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면서 수많은 수치와 고난을 겪으시다가 결국엔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현실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입니다. 자랑이 아니라 수치이며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고 영광이 아니라 고난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그리고 미래적으로는 현실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 일군 된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 아무런 고난과 역경이 없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난과 역경의 길을 피해간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래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전통과 관습을 답습하여 그대로 따르던 유대교와 바리새인들에게는 아무런 고난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잘못된 전통과 관습을 수정하려던 예수님과 초대 교회와 그 일군들이 고난과 죽음이 따랐습니다.
오늘 현대 기독교가 과연 종교 개혁의 정신을 담고 있습니까? 그리고 초대 교회의 정신을 대변할 수 있는 믿음의 정체성이 있습니까?
진정한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이니까? 오늘날 그 뜻을 따르는 길에는 무관심과 외면과 소외감이라는 고난이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 교회의 일군은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복음의 영향(28)
흰 색 옷감에 붉은 물감을 들이면 붉은 옷감이 됩니다. 근본 바탕이 완전히 변하여 이제는 흰색 옷감이 아니라 붉은 색의 옷감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고염 나무에 감나무를 접붙임 시키면 감 열매가 맺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접붙임을 받고 그의 복음으로 가르침을 받았다면 마땅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복음의 열매를 맺어야할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며 권면하고 가르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전케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을 뿐 아니라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열매를 온전히 맺게 한다고 하였습니다.(딤후3:15-17)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완전한 자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요3:3-4)
오늘의 교회의 일군들은 성도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그리고 성도들은 어떠한 영향을 받으며 신앙과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4) 복음의 사역은 성령의 능력(29)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신령한 하나님의 언어요,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리고 복음은 죄인들은 향한 구원의 소리이며, 생명의 양식이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전파하며 가르치는 일은 사람의 생각과 판단과 의지(意志)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복음 사역은 사람의 능력이 닿을 수 없는 신령한 능력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특수 사역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음성으로 선지자와 예언자들을 통해서 구원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구원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는 하나님의 영(靈)이신 성령을 통해서 구원의 사역을 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복음의 사역은 사람의 지성(知性)이나 열심, 돈이나 권위, 또는 사람의 결심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의지(意志)와는 상관없이 오직 성령이 우리 안에 권능으로 임하여 친히 일(事)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에 충만하여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눅4:1) 비겁했던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하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행4:8) 스데반이 성령에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행7:55) 그리고 교회의 일군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세웠습니다.(행6:3)
따라서 교회의 일군은 성령의 도구요 복음의 노예일 뿐입니다. 오직 성령 충만을 입어야 교회의 일군이 될 수 있으며 성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엡5:18)
5) 부모 심정 된 일군(2:1-5)
튼튼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는 어린 아기에게도 부모들은 늘 노심초사하면서 사랑을 아끼지 않습니다. 놀이터에라도 나가 놀게되면 엄마는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다치지 않을까 하고 신경을 써야 합니다.
성인(成人)이 된 자식일지라도 가난하게 살면 가슴 아픈 마음으로 자식을 위해 늘 기도를 하며 때로는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먼저 주려고 합니다.
바울은 생면 부지의 성도들일지라도 언제나 그들에게 부모된 심정으로 마음을 쓰면서 기도하며 권면을 아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강퍅하고 교만한 예루살렘 백성들을 향하여 마치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으려함과 같이 그들을 아끼고 사랑했던 자신의 마음을 소개 하셨습니다.(마23:37)
부모는 자식의 인생을 돌보며 사시는 것처럼 교회의 일군들은 늘 성도들이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 하늘의 지혜와 지식으로 세속 문화 속에서 구별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6) 그리스도께 뿌리를 내리라(2:6-7)
본문은 1:23-2:5절까지의 말씀을 정리하면서 당부하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으면 오직 그 분께만 온 마음과 뜻을 두고 그의 계명대로 살면서 감사가 넘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학교에 입학을 한 학생이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다 하며 학교의 규칙을 준수한다면 모범생으로서 선생님께 칭찬을 듣고 더 따뜻한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이니 그 기쁨 또한 클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좋은 가르침으로 키워주신 선생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수업 시간에 만화책을 본다거나 쉬는 시간에 교우들을 괴롭히고 방과후에는 담배를 피며 늦은 시간까지 시내나 골목을 배회하며 지낸다면 그는 교복만 입은 몸만 학생이지 실제는 학생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의 학교’에 입학을 한 학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학교의 교훈과 지침과 규칙을 잘 알고 그 안에서 성실히 준수하는 모범생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선생님들이나 교우들이 예수 교장 선생님의 가르침과 위배되는지를 잘 판단하면서 잘못 된 가르침이나 유혹에 흔들리지 않도록 자신을 잘 관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삶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열매는 뿌리에서 결정되듯이 온전하고 진실되게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세속적인 가르침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예수 안에서만 순종하며 기쁨을 누리며 감사의 생활을 지속하게 될 것입니다.
3. 세속적인 가르침에 대한 경계(2:8-23)
지금까지 이단 사상들의 영향을 받을 것을 염려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다각적으로 설명을 하고(1:13-23) 그리스도를 위한 바울 자신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심정으로 사역을 하고 있으며 아울러 골로새 교회에 대한 염려가 매우 큰 것을 알리면서 끝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잘 유지할 것을 권면 했습니다.(1:24-2:7)
그리고 이어서 골로새 교회에 침투해 오는 여러 이단 사상들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의 계시와 신앙과 비교하면서 경계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1) 사람의 지식을 기초로 하는 철학과 이단 사상을 좇지 말라고 당부를 합니다.(8-9)
예수 그리스도는 본체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인간의 죄악을 속죄하시기 위해서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이시며, 공생애동안 말씀의 권세와 각종 기적의 능력과 긍휼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역사적이고 실존적인 사람이면서 동시에 신(神)이셨습니다.
12제자와 바울은 바로 이 주님을 직접 만나서 보고 듣고 만진바 된 사실들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바울이 증언하는 내용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요 정신이며 하나님 나라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가 뿌리이며 기초입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께 충만하게 거하셨으며, 그리스도의 충만은 다시 바울과 성도들에게 충만히 채워지는 것입니다. (9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철학과 사상이 불필요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외에 더 알 것이 없고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빌3:7-9)
철학과 각종 이단 사상은 사람들이 고상하게 만들어낸 인위적인 철학이요 율법이며 결국엔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와 멀어지게 하면서 그릇된 우상적 신앙을 심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8절)
오늘 현대 교회 안에도 하나님을 더 잘 알기를 원하고 더 잘 믿기를 원한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신학과 교리 또는 헌법 등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생각을 제한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설교와 성경 공부 등으로 지식을 전달하는데 그치어 결국엔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바리새파와 같은 신앙으로 전락을 시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람의 생각과 지식과 가르침을 잘 분별하여 경계를 해야 합니다.
2) 율법 조항에 문제가 많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11-17)
그렇다고 율법 자체가 무익하거나 불필요하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율법의 정신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사랑과 순종 그리고 이웃에 대한 인애(仁愛)의 삶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정신은 결여된 채 할례를 행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저절로 되고 안식일과 절기 등을 잘 지키면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도리를 다 한 것으로 생각하는 등 사람이 정한 전통과 제도를 준수하는 일이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율법을 지킨다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율법 조항의 지킴이 즉 세례와 주일 성수 등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가족과 이웃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기도와 찬양 등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3) 천사 숭배에 대한 문제를 언급했습니다.(18-19)
초대 교회 당시 천사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영물(靈物)이기에 사람들이 천사를 중보자로 삼아 기도를 하면 좋다고 가르치었습니다. 그 이후 가톨릭에서도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성모(聖母)라고 부르면서 중보자로 가르쳤으며, 성인(聖人)으로 추대된 믿음의 사람들도 중보자로 삼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연옥 사상을 만들어 헌금으로도 중보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심을 희석시키거나 무익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되니 이는 이단이라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히9:15, 13:11, 4:14)
현대 교회 안에도 혹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역할을 희석시키거나 무익하게 만드는 일은 없습니까? 이단 종파의 교주들과 가르침들이 그러하니 조심하십시오. 지나친 권위 의식은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일이 될 것입니다.
4) 금욕 사상을 경계해야 합니다.(20-23)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정신을 무시한 채 문자(文字)적으로 지키는 일에만 관심을 쏟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더 잘 믿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세심하게 분해를 해서 더 많은 율법 조항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고 도리어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율법은 “~하라”와 “~하지 말라”로 가득차 있습니다.
흑백 논리 즉 정(正)과 부(不), 선(善)과 악(惡) 등을 분명히 구분하는 일을 하는 율법 그 자체로는 용서와 자비가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으로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대신 율법을 친히 다 지켜 주시고 그 율법 조항들을 십자가에서 마침표(.)로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 조항들은 예수님과 함께 매장되고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에 본래의 율법의 정신이 회복되어 사랑의 계명으로 다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이 부담이 되거나 짐이 되지 않고 자유와 평화로 주어지는 것입니다.(요8:32,36)
오늘 교회 안에도 사실 금욕 사상이 많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명령이며 주님의 뜻과 다른 가르침입니다.(22절)
이런 규정들은 자의(自意)적으로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이 되어 겉으로 보기에는 믿음이 있어 보이고 겸손해 보이는 듯 하지만 실상은 주님의 뜻대로 영성(靈性)을 회복하고 육신의 욕심과 욕망을 제어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23절)
성령의 내주(內住)하심과 인도하심이 결여된 채 인간의 의지와 노력과 인위적인 겸손의 모양으로 하나님/예수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것은 잘못 된 이방인의 신앙인 것입니다.
Ⅴ.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성숙한 삶 (3:1-4:6)
본 장은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해 기록한 골로새서 본론 전반부(1:13-2:23)에 이어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은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성숙한 삶에 대한 권면을 기록한 후반부(3:1-4:6)의 일련기사입니다.
1. 두 개의 세계와 그 삶(3:1-4)
성도들에게는 두 개의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육신의 고향인 ‘이 땅의 세계(아래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영(靈)의 본향인 ‘하늘의 세계(위의 세계)’입니다.
이 땅의 세계는 자연인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세계이나 하늘의 세계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세계입니다.
이 땅에서 태어난 것을 ‘제1의 탄생’이라고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것을 ‘제2의 탄생’이라고 합니다. 제2의 탄생의 삶이 필요한 것은 제1의 탄생의 삶 즉 자연인으로서의 삶이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바로 제2의 거듭난 삶을 요구하는 최대의 사랑의 사건입니다.
만일 우리가 제2의 거듭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여전히 자연인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는 불신의 관계임을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하며 예배와 기도, 헌신과 충성을 다한다 하여도 우리의 일상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와 성숙 즉 제2의 탄생의 경험이 없다면 이들이 믿는 하나님은 죽은 우상의 하나님이지 결코 살아 계신 창조주요 구속의 주(主)이시며 부활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인은 아래인 이 땅에서 태어난 속성을 갖고 살기 때문에 세속적인 삶을 추구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세계인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언제나 하늘의 속성을 본질로 삼아 세속적인 문화와 유행과 그 삶을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세속에 대해서 항상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1-2절)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는 말씀은 땅의 속성을 죽이고 위의 속성을 좇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할 두 가지의 큰 이유가 있습니다. 첫 째는 제1의 탄생과 그 생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자연인으로서의 육신의 삶, 물질적인 삶, 욕심과 욕망의 삶 등은 이미 십자가 안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새 생명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숨겨져 있기에 오직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살 때에 살아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3절)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를 위해서 우리는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4절)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제2의 거듭난 삶을 산 사람들이 휴거 되어 공중에서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여 혼인 잔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계19:7-9)
바로 이 영광 가운데 참예하는 복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늘의 속성을 갖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제2의 거듭난 경험과 그 삶이 없다면 평생동안 교회 생활에 열심과 충성을 다 했다 하여도 새 생명을 얻지 못한 채 자신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이방인의 믿음으로 살았다면 누구든지 두려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내적 변화와 성숙(3:5-17)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자연인으로서 가졌던 인격과 생각과 생활 습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함께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면의 세계는 자연인의 속성인 이기적인 욕심을 가지며 타인에 대한 이해와 용서와 자비심이 없는 채 목회와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과연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열매는 뿌리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예수의 뿌리를 가졌다면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성령의 열매/사랑의 열매가 맺을 것이며, 자연인의 뿌리를 가졌다면 세속적인 욕심과 이기적인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내면(內面)의 세계가 근본적으로 하늘의 심성으로 변화를 받아 깊고 넓게 성숙해 가면서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이치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십시오.(5-9절, 엡5:3-5절)
땅에 있는 지체는 곧 음란과 더러운 행위와 욕정과 못된 욕심과 우상숭배와 같은 탐심 그리고 분노와 비방과 추잡한 말과 점잖지 못한 농담과 거짓말 등입니다.
이런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우 부끄러운 수치이며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들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런 자들은 결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히 땅의 지체들을 죽여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肉)과 육의 생각은 항상 죽어야 우리의 영(靈)이 사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창조자의 형상을 좇아야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길입니다.(10-17절, 엡5:8-9절) 우리는 처음에 지음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빛의 속성을 뜻하는 것으로서 곧 모든 선과 정의와 진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그리고 관용과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열매요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 빛의 열매를 맺고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요 그렇지 못한다면 그는 위선자가 받는 저주와 심판을 면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믿음이란 빛의 열매를 맺는 일을 말하며, 그 결과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게 될 것입니다.(15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주님의 제자라고 인정을 하게 될 것입니다.(요13:35)
우리가 세속적인 사람들과 세속의 문화를 멀리하려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목회자나 교인들이 바쁘게 지내다보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묵상하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영적인 공간이 없게 되어 인위적인 의지와 수단과 방법론을 강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속적인 일로 세상에 머무는 시간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생각과 멀어지게 될 것이며 반면에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일에 고민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머무는 시간이 많을수록 그는 평화와 감사와 찬양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16절)
목회자의 삶에서 그리고 성도의 삶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은 단지 그 분 앞에 앉아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이 곧 우리의 삶이 되기 위해서는 ‘머무름’과 ‘움직임’이 하나로 이어질 때에 가능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 말씀 안에 머무르지 못한다면 우리가 교회 안팎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수고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일들로 변질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부르신 후 예배와 계명을 가르치시며 전도하라고 파견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자신과 함께 머무는 것을 먼저 요구하셨으며 당신의 사역을 지속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먼저 당신의 삶을 자연스럽게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마음을 쓰셨습니다.
3. 그리스도인의 대인(對人)관계 (3:18-4:6, 엡5:21-6:9)
바울은 앞에서(3:5-17)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내적인 덕목들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이제 타인과의 관계와 관련해서 사회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1) 부부간의 생활 원리(18-19절, 엡5:22-33)
서로 타고난 성품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른 사람끼리 만나서 한 마음 한 뜻으로 산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처음엔 서로 좋아하는 감정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을 희망해서 부부가 되었지만 살아가면서 생각과 성격의 차이, 경제적인 현실 문제 등으로 다투는 일이 많아지며 더 나아가서는 이혼을 쉽게 결정하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부부는 모든 일의 생각과 그 판단의 기준은 자신들이 아니고 언제나 하나님과 그 말씀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남자를 먼저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남자 혼자 생활하는 것을 보시고 ‘돕는 배필’로 여자를 지어 주셨습니다.(창2:18-22)
(The LORD God said, "It is not good for the man to be alone. I will make a helper suitable for him.")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그 부모를 떠나 둘이 동거하여 한 몸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창2:24) 여기서 남자와 여자는 성(性)과 신분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신체의 일부인 갈빗대를 취하여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자 안에 여자가 있으며 여자 안에 남자가 있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인격적인 면에서 동등합니다. 다만 부부간에 역할 부분에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먼저 아내 된 여자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인 교회의 구원자로서 그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것처럼 남편은 아내의 주인이 됩니다. 그래서 아내 된 사람들은 마치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것처럼 모든 일에서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8절, 엡5:22-24)
순종하는 삶이 곧 남편을 잘 내조(內助)하는 일이며 돕는 배필(helper suitable)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훌륭한 여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아내와 여자의 역할인 ‘내조’와 ‘돕는 자’로서의 마음을 버리고 가정과 사회에서 머리 역할을 한다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 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역할은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히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남편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바치시면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자기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19절, 엡5:25-32)
‘사랑’은 어떤 조건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드는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적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린 일이 전제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언제 예수님께 크나큰 은총을 입을 만큼 그리스도 앞에 의로운 일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 언제나 불효자였고 배신자였으며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시고 계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편 된 사람들은 언제나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기 아내를 아무 조건 없이 아껴주고 사랑해야 합니다.
절대적인 순종함과 무조건적인 사랑의 만남이 그리스도인 부부의 관계가 된다면 다툼과 이혼 등 부부 관계의 악화 현상은 최소화 될 것입니다.
이제 서로 자아(自我)를 죽이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남편 된 사람들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아내 된 사람들은 자기 남편을 존경하여 마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 같은 부부의 관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부모와 자녀간의 생활 원리(20-21절, 엡6:1-4)
하나님은 부모를 자식의 권위자로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자식은 자기를 낳아 길러 주신 부모님을 하나님의 권위의 대행자(代行者)로 알고 부모를 존경하고 순종하는 자세를 갖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효(孝)의 기본이요 시작입니다.
부모에게 생활의 능력이 없거나, 허물이 있거나, 병이 들었다 해서 부모를 무시하거나 미워하고 원망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부도덕한 일이며 불효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술에 취해서 정신을 잃은 노아에 대해서 세 아들이 취한 행동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창9:20-27)
효(孝)는 인륜(人倫)의 근본이 되는 덕목(德目)입니다. 효(孝)는 백 가지 행실의 근원으로서 모든 가르침이 여기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식은 부모를 물질적 봉양뿐 아니라 항상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밝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대하며 기쁨을 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일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의논도 하여 자식이 무엇을 생각하며 무슨 일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의 뜻을 따르는 것이 자식의 도리입니다.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이 곧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과 동일한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주신 계명 중에서 제일 먼저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신5:16) 하신 계명을 주셨으며, 그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 장수의 축복과 영생의 약속을 하셨습니다.(출20:12)
그리고 부모들은 권위 의식을 앞세워 지시나 명령하는 습관으로 자녀들로 하여금 그들의 의지를 꺾어서는 안되며 그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자식들이 하는 대로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며 잘 양육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다만 매사에 자식들에게 대하는 태도에서 그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말 것이며 언행은 부드럽고 친절해야 하며 때로는 오래 참는 습관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부자(父子)간의 인륜 관계에서 강조되는 부자자효(父慈子孝)는 가정 생활에 있어서 부모는 자녀에게 인자(仁慈)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존경과 섬김을 다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정신이 곧 자(慈)의 근원이며, 부모의 자애에 대하여 자녀로서 자연적으로 우러나오는 존경과 순종함이 효의 정신입니다.
3) 사회 구성원간의 생활 원리(3:22-4:1, 엡6:5-9)
일반 사회는 조직 사회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상하(上下)의 구조 즉 수직 관계를 형성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수직관계 안에서는 서로 의견 차이로 인해 마찰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각 기업체와 공무원 사회에 노동조합이 형성되어 있어서 노동자와 경영주간에 잦은 마찰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노동자는 부당한 대우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고, 경영주는 물질적 손실을 최소화하려는 마음을 끝까지 유지해 보려는 가운데서 파업과 폭행과 자살 등 불미스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고무줄을 당기기만 하고 상대적인 이해와 원만한 타협과 양보의 정신이 없다면 자신들은 물론 사회 전체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서로 물리적인 힘으로 부딪히며 자신의 이익만을 주장하기보다는 ‘내 마음이 곧 네 마음(吾心卽汝心)’이라는 생각으로 욕심을 조금씩 버리고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을 발휘한다면 상호간의 입장을 고려하여 서로 만족스런 합일점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사회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주님은 고용인과 피고용인 모두에게 사회 생활의 기본 원리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특히 그리스도인 고용인과 피고용인이 잘 실천해야 할 성서적 규범입니다.
먼저 고용인의 입장에 있는 노동자들은 피고용인에게 무조건 복종한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작업 환경이 나쁘고 임금(賃金)이 다소 낮으며 심지어는 인격적인 침해를 받는다 해도 자신의 감정을 지혜와 인내로써 잘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처음 입사했던 마음으로 성심(誠心)을 다하여 땀 흘려 일을 합니다. 불평과 불만을 보이지 말 것이며 요령과 꾀를 부리지 말 것이며 또한 어떠한 불의(不義)한 일을 행해서는 안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일을 마치 주님께 하듯 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은 몰라주고 사람에게 대우를 못 받는다 해도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주님께서 위로의 대가(代價)와 상(賞)을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지금의 고충과 괴로움을 잘 극복해야 합니다.(22-25, 엡6:5-8)
다음으로 피고용인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경영주는 노동자들을 자신의 자녀들 같이 여기고 노동자들이 어려운 여건과 환경 속에서 고생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며 무조건 아껴주고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경영주는 노동자들에게 인격적인 존중과 함께 정당한 물질적 대우와 복지 향상을 위해서 항상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노동자들을 업신여기거나 정신적/신체적 학대를 하여 고통을 주고 괴롭히는 일 그리고 임금(賃金)을 체불하는 일 등 경영주의 권세를 휘두르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경영주나 노동자나 큰 차별이 없는 인격적/물질적/복지적 혜택을 줄 수 있어서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는 경영주로 거듭날 수 있다면 노사의 관계와 사회 환경은 세계 제 일의 선진국이 될 것입니다.
경영주 위에는 당신의 상전이신 하나님이 계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당신이 행한 대로 반드시 보응(報應)을 받게 될 것입니다.(4:1, 엡6:9)
4) 목회자와 성도/교회와 세상간의 생활의 원리(1:3,24-25, 4:2-6, 엡6:18-20)
그리스도인에게 생명의 양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일 것입니다. 말씀의 깊은 묵상은 우리의 심령을 더욱 가난하게 할 것이며, 기도는 우리에게 영적인 능력을 누리며 살게 할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특히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뜻과 모든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목회자들은 그 뜻과 비밀을 아는 일에 한 날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며 또한 그 뜻과 비밀을 성도들에게 그리고 세상 앞에 담대히 전할 사명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이 곧 교회의 일군으로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목회자들이 그 사명을 바르게 완수할 수 있도록 항상 중보 기도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즈음부터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항상 마귀로부터 훼방을 받아 왔습니다.
12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일군들 그리고 바울에 이르기까지 말씀 사역 앞에는 언제나 고난을 통하여 방해를 받아 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편하게 말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말씀 때문에 고난을 겪으며 순교를 당한 믿음의 선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해질 수 있도록 목회자들을 위해서 힘써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2-4, 엡6:19-20)
목회자에게 영적인 권위와 능력이 있기를 기도할 것이며, 매사에 마음을 비우고 겸손과 온유함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영성과 인품 안에서 말씀을 바르게 전할 때에 존경과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며 그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또한 거듭나고 성숙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회자에게 영적인 권위와 능력이 없고, 말씀이 목회자의 권위와 필요에 따라 이용되고, 인격적으로도 존경과 신뢰를 얻을 수 없다면 목회자뿐 아니라 성도들도 모두 함께 영성(靈性)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이 발견되어질 수 있기 위하여 세속적인 삶을 포기하면서 항상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과 소망 안에서 잘 양육 받으며 자랄 수 있도록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일 외에 개인의 이익과 명예를 위해서 분주하다면 그는 선한 목자가 아닌 삯군 목자일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에서 교회(목회자/교인)는 교회의 사명이 교회당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있음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소속된 교회당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교회당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영적인 능력을 채우기 위해 잠시 모이는 집결지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건물과 그 안의 환경과 각종 비품을 성물(聖物)이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고 웅장하고 고가(高價)의 비용으로 낭비를 하는 일이 있어서는 오히려 하나님/예수 그리스도께서 미워하시는 일 인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헌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가난하고 연약하고 불우한 환경 가운데 계시며 예수님 또한 가난한 자, 묶인 자, 눈먼 자, 억눌린 자들을 위해서 오셨고 그들을 위해서 평생을 보내셨습니다.(눅4:18)
그리고 우리에게 그 사역을 이어 가도록 부르셨고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일터는 세상입니다. 교회의 주변과 지역에서 이웃 사람들에게 언제나 지혜와 영적인 능력과 겸손과 온유함으로 대하며 범사에 내 일처럼 생각하며 빛과 소금이 되어 주어 평신도 목회자로서의 사명을 다 한다면 세상은 교회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을 가져 자연히 교회는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가정 안에서의 부부(夫婦)의 관계와 부자(父子)의 관계, 사회 안에서의 상하(上下)의 관계, 교회 안에서의 목회자와 교인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을 향한 교회와 외인(外人)과의 관계 등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와 동일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모두가 사랑의 관계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함에도 불구하고’의 정신으로 우리의 마음과 뜻과 물질 더 나아가서는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사랑의 시작은 부부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되어 가정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와 이웃과 사회로 확산되어 나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원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바른 인격과 인품, 바른 언행과 생활 그리고 바른 믿음과 신앙은 오직 수고와 희생을 기쁨으로 자원하면서 [오직 사랑해 주는 일]뿐이라고 마무리 할 수 있습니다.
Ⅵ. 평신도 동역자들에 대한 바울의 배려(4:7-18)
이제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평화와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을 위한 당부와 권고를 모두 마치면서 그동안 복음 사역에 함께 동참 해 준 동역자들과 후원자들의 이름과 그들의 수고를 일일이 열거하면서 감사와 격려를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복음 사역은 전문적인 목회자들만의 사역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소위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동역과 후원이 뒷받침될 때에 그 효과가 크게 나타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평신도들의 복음 사역은 단순히 기도와 물질적인 후원으로 그치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바울처럼 직접 복음을 널리 증거하고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하면서 양육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결코 복음 사역은 멈추는 일이 없습니다.(12-13절)
현대 교회는 안수를 받은 전문적인 목회자들만이 교회를 담임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전해야 하고 일반 평신도들은 목회자의 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한 소극적인 후원과 순종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회자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하며 겸손보다는 거만함이, 온유함보다는 강함이, 동역하는 마음보다는 독선을 선호하는 모습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와 평신도의 관계가 협력과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억지와 불신의 관계로 굳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교인 한 사람이 교회를 한번 옮기려면 목사의 눈치를 살펴야하고 옮기고 나면 목사의 저주와 험담이 뒤통수를 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모든 평신도들은 목사의 동역자입니다. 목사는 스포츠에서 감독과 코치 역할과 같은 것이며, 평신도들은 운동장에서 직접 뛰어야 하는 선수들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을 제2의 목회자로 잘 훈련하고 교육을 하여 세상이라는 운동장에서 동역자의 역할을 훌륭히 해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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