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의 위력(대하 20:1-30)
다윗은 골리앗 때문에 유명해졌습니다. 큰 장애물이었던 골리앗이 오히려 그의 발판이 되어준 것입니다. 골리앗 사건 때문에 왕의 자리까지 이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앞에도 가다보면 많이 만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오히려 더 좋은 앞길이 열리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그 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칼과 창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구원하심을 믿고 지극히 높여드렸습니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47절). 주의 이름을 높이면서 나아갈 때 보기 좋게 대승했습니다.
다윗이 유명해 진 것은 골리앗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유명한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알고 보면 그의 인생동안 드려진 찬송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수많은 생명의 위험과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도 많이 만났습니다. 그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찬송했습니다. 가드에서 블레셋 사람에게 붙잡힌 상황에서 찬송했습니다. 시편 56편 10절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사울이 사람을 보내서 다윗을 죽이려고 집을 지킬 때도 찬송했습니다. 시편 59편 17절 “나의 힘이시며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사울에게 항상 쫓기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인데 하나님이 지켜주긴 뭘 지켜 주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찬송했습니다. 그 찬송이 다윗을 건져주었습니다.
다윗이 쫓기면서 광야에 있을 때 어떻게 했겠습니까? 물도 없고 목마른 곳에서 찬송했습니다. 목마른 것을 불평하지 않고 그 목마름을 영혼의 갈망으로 찬송했습니다. 시편 63편 1절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인자하시다고 찬송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3절).
다윗은 일평생동안 주님을 찬송하였기에 유명해진 것입니다.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시 63:4). ‘이러므로’ 왕궁에서 잘 되어갈 때, 그러므로 찬송한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 있을 때 일이 꼬이고 죽을 지경에 빠진 그런 상황 속에서도 찬송한 것입니다. 다윗은 아예 찬송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시편 108편 1절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시편 146편 2절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찬송이 위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위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은 찬송의 사람입니다. 영원히 기억되는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찬송하기로 결단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찬송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그 앞길이 자꾸만 열립니다. 하나님은 찬송 중에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22편 3절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하나님께서 찬송할 때 함께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을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찬송의 위력을 체험하는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송의 위력은 매우 강력합니다. 찬송은 감옥 문을 열어버리기도 합니다. 꽁꽁 묶여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감옥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됩니다. 찬송은 묶인 것으로부터 풀려나게 만듭니다. 이러한 찬송의 위력을 믿으십니까?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한 귀신 들린 여종이 점을 쳐서 주인에게 큰 이익을 주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 점치는 여종에게 붙어 있는 귀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여 쫓아냈습니다. 그러자 수입이 끊어진 주인이 바울과 함께 있던 실라를 끌고 가 고발했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과 실라는 옷이 벗기고 매를 많이 맞은 다음에 깊은 옥에 갇혔습니다. 발에는 차꼬가 단단하게 채워졌습니다. 깊은 캄캄한 감옥에서 소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이것을 함께 있던 죄수들이 듣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25절입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6절이 말합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간수가 자다가 깨어 보고는 죄수들이 다 도망친 줄 알고는 책임이 두려워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 있소”라고 외쳤습니다. 간수는 무서워 떨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바울은 대답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당신과 당신의 집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 밤 그 시각에 주님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전해 듣고 세례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과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했습니다.
찬송은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함께 있는 사람의 모든 것을 풀어주는 열쇠입니다. 간수와 그들의 집안까지 함께 풀려나게 했습니다. 구원을 받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찬송의 위력은 강력합니다. 파급효과가 매우 큽니다. 우리를 감싸고 얽어매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찬송을 통해 우리 자신이 풀려나고 그것을 통해 이웃도 함께 풀려나는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지으신 뜻은 무엇일까요? 이사야 43장 21절에서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자기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엡 1:6)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속량 곧 죄사함을 받은 것은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엡 1:12)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어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것은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엡 1:14)입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다시 받고 내려온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말씀을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섬기는 것이다”(신 10:12)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말이 “그는 너의 찬송이시요 너의 하나님이시다”(신 10:2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이 되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장 15절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하나님이 찬송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자녀로 삼아주시고,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을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게 하시고, 나에게 성령을 보증으로 보내주셔서 믿게 하시고 인도해주시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너무나 감사해서 저절로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그저 실제로 그렇게 좋으니까 흥얼흥얼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07편을 보면 반복해서 나오는 후렴 구절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찬송을 요구해서가 아니라 너무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찬송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징징 우는 아이를 보면 대하면 견디기 힘듭니다. 방긋방긋 웃으면 같이 기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허구한 날 먹구름이 잔뜩 끼인 채로 나오면 하나님의 마음도 울적하시지 않으실까요? 하나님도 한편으론 좋은 말 듣고 싶고 칭찬의 말과 감사의 말을 듣고 싶지 않으시겠습니까?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도 잘한다 잘한다하면 신이 나서 잘합니다. 그러나 못한다 못한다 하면 잘 하는 일도 못하게 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만듭니다.
물론 하나님은 어떤 것도 부족함이 없고 완전하십니다. 어떤 것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그러한 감정을 나누고 싶어 하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울어도 주님의 구원과 사랑에 감격해서 울면서 그 마음을 담아 찬송 드리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높이면서 찬송하면 하나님께서도 힘이 나지 않으시겠습니까? 신이 나서 맹활약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사야 62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하늘로 올라간 그러한 찬송은 응답이 되어 나의 삶속에서 위력을 실제로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의 제사를 드려서 크게 응답받으시고 찬송의 위력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아주 잘 되어가는 좋은 상태입니까? 지금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 서 있는 상황입니다. 모압과 암몬과 세일 산 사람들의 거대한 연합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여호와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려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온 유다 백성들과 함께 금식하며 간구했습니다.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까지 더불어 여호와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문제를 두고 가족이 다함께 부르짖을수록 좋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그들 가운데 서서 기도드렸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지난날에 이방 나라로부터 구원해주신 것과 그 권능에 대해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재앙이나 난리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닥쳤을 때 성전에서 부르짖으면 들으시고 구원해주신다(대하 7:12-16, 참고. 6:12-42)는 솔로몬 왕과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드렸습니다. 솔로몬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대하 7:15-16). 그래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사 56:7, 막 11:17)고 한 것입니다.
여호사밧 왕은 여기에 근거해 기도드리면서 지금 닥친 현실의 문제를 기도드렸습니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 20:12).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여호사밧 왕에게 응답하셨습니다. 야하시엘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15절).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17절).
이에 여호사밧 왕과 모든 사람들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 앞에 엎드려 여호와께 경배드렸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노래하는 사람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였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21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셔서 연합군들이 서로 치게 만들어 패하게 하셨습니다. 먼저 암몬과 모압 자손이 세일 산 주민들을 쳐 죽였습니다. 세일 주민들이 멸망당한 다음에 그들이 서로 쳐 죽였습니다. 가보니 땅에 엎드려진 시체뿐이요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이 진멸당했습니다. 이것이 찬송의 위력입니다. 깨끗한 말끔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군대가 앞서지 않고 성가대의 뒤에 따라갔지만 그런 위대한 결과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찬송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싸워주셔서 대승을 거두어 전멸시키고 뿐만 아니라 전리품도 너무 많아 사흘 동안 거두어들일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넷째 날에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여호와를 송축했습니다. 그리하여 그곳 이름을 ‘브라가 골짜기’라 일컬었습니다. ‘송축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찬양의 위력을 실감하는 이 브라가 골짜기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일평생에 여호와를 찬송함으로 우리의 일평생동안에 송축의 골짜기인 브라가 골짜기가 많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찬양의 위력이 나타나는 우리의 가정과 자녀와 우리의 사역과 학업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더 주의 이름을 높이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