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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시리즈 1)
작가/ 낭독: 김인희 소설가
유튜브: 댕댕이와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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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1화
작가/ 낭독: 김인희 소설가
유튜브: 댕댕이와 책을..
봄이 왔다. 겨우내 소복소복 내리던 눈은 그날 이후 다시 오지 않았다. 눈 내리는 날,
길상사에 가자던 이현수와의 약속은 물 건너가 버렸다.
하루를 멀다고 세상을 하얗게 덮던 눈은 겨울이 다 가도록 내리지 않았다.
혼자라도 길상사에 가려다가 그만두었다.
이현수의 전화를 마음 한쪽에서는 기다리고 있었지만,
먼저 길상사에 가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핑계 댈 눈이 내리지 않았으니까.
눈이 푹푹 내리면 마음은 이십 대로 돌아갔다.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백석이 될 것이요,
미자는 나타샤가 될 것이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
라는 백석의 시를 떠올리면 세상한테 지고 살아온 60 인생을 위로받았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대원각을 시주한 자야 공덕비 앞에
꽃다발을 놓고 오려고 했다.
이상하게 길상사는 혼자 가기 싫었다.
눈 오는 날, 길상사 같이 갑시다,
라는 이현수의 제안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 느껴져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약속해 버렸다.
하지만 이현수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김순녀한테 들은 게 다였다.
사람을 알려면 여행을 가라, 고스톱을 쳐보라, 술을 마셔보라고 했는데 사케를 마시고 속을 다 들켜버린 미자는 창피한 마음이 가득해 이현수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았다. 냉정과 열정 사이는 가깝고도 아주 멀었다. 본인이 말해주면 좋고 말하지 않으면 몰라도 되었다.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고 이대로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 어찌 보면 나을 수도 있었다. 적당한 거리 두기는 인간관계에서 지켜져야 할 덕목이었다. 자식도, 남편도, 부모도, 친구도, 연인관계도 그랬다.
이현수 집안은 아주 독특한 예술적 기질을 가진 감수성 높은 집안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알고 보면 박만배를 유명 화가로 키운 건 이현수 누나, 그러니까 죽은 박만배 아내라고 들었다. 겉으로는 건들건들해 보이고 진중한 면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긴 했지만 이현수는 관대하고 자비심이 많은, 자선도 곧잘 베푸는 사람으로 김순녀에게 들었다. 김순녀는 과장이 기본이었다. 10프로만 믿는다 해도 이현수는 미자보다 여러 면으로 나은 사람이었다.
아무 때라도 좋았다. 길상사 사찰을 거닐며 이현수와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 있었다. 책꽂이에서 문고판 무소유를 꺼냈다. 독자를 위해 무소유 일부를 소개하겠다.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
간디 어록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다. 살 만큼 살다가 지상에서 사라질 때에는 빈손으로 갈 것이다.
3년 전, 어떤 스님이 난초를 보내주었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 애들뿐이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운허노사를 뵈러 간 일이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 부시게 쏟아져 내렸다. 아차, 난초를 뜰에 내려 놓은 채 온 것이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친구가 놀러왔길래 선뜻 난초를 안겨주었다. 날 듯 홀가분한 해방감.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책을 덮은 미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옭아매고 조여오는 실체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엄마를 부양하는 일? 막 60대 열차에 합류한 나이? 노후에 대한 불안감? 암 같은 질병에 대한 두려움? 아니면 평생 모아 겨우 마련한 집? 어느 하나 뺄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그중 하나만 미자가 컨트럴 할 수 있었다. 그건 집이었다.
2시 수업 예정인 소영이는 여행 중이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카톡 프로필이 바뀐 걸 보고 소영이네 가족이 이탈리아 피렌체 두오모 성당에 들렀다는 사실을 알았다. 붉은 기와 돔을 배경으로 찍느라 소영이네 가족은 손가락만 공중에 삐죽 조금 내밀고 있었다. 그건 좋은 촬영법이다, 라고 미자는 생각했다. 높은 기와 돔을 배경으로 가족이 사진을 찍는 건 어려운 일일테니까. 스무 살에 헤어진 준세이와 아오이가 십 년 뒤에 아오이 생일날 재회한 곳이었다. 오늘 밤에는 냉정과 열정 사이, 를 넷플릭스에서 보다가 잠들 것이다.
소영이 덕분에 1시간이 비었다. 수업하러 나가던 미자는 메카 옆 부동산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금리가 껑충 뛰자 담보 대출이자에 대한 부담감이 커졌다. 노후의 보루라고 믿었던 달랑 하나뿐인 집은 미자를 옥죄었다. 높은 금리는 미자를 달리는 말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했고 채찍이 되어 쉬지 않고 달리도록 종용했다.
솔직히 말하면 높아진 금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엄마 간병비와 병원비가 가장 큰 부담이었다. 엄마에 대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삭제하고 싶었지만 잘 안되었다. 엄마는 운명이었다. 죽을 때까지 함께 갈, 등에 매달린 짐보따리였다.
짐, 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뿜는 순간 미자는 불행을 느꼈다. 불행은 죄책감과 딱 붙어있었다. 한 가지를 떼어 내려 해도 둘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달라붙어 미자를 조롱했다. 엄마는 끝없이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엄마가 기억을 잃어버리고 기이한 행동을 할 때면 이 꼴 저 꼴 안 보고 같이 죽고 싶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엄마는 위급한 순간이 오면 살고자 발악했다. 죽음을 무척 두려워했다. 그럴 때마다 미자는 다행이다, 생각했다. 사는데 이유가 하나 더 붙는 것이다.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처럼은 못되더라도 자기를 낳고 기른 엄마를 끌어안고 죽는 것은 부끄러운 짓 아닌가. 신문 사회면 기사에 대문짝처럼 날 일이었다. 하지만 미자에게 질병이 찾아와 엄마를 부양할 수 없다면 논개처럼 엄마를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겠다고 결심했다. 미자가 없는 세상에서 엄마는 끈 떨어진 연일테니까.
엄마를 집에 모실 수는 없었다. 엄마가 들어온 후부터 집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냄새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애매한 것들의 총합이었다. 똥, 두엄, 멸치, 젓갈, 오줌 냄새 등의 총합체였다. 냄새는 몹시 역겨웠다. 문을 열어 놓아도 선풍기를 틀어 놓아도 이불을 빨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날은 옷장을 열고 엄마 옷을 다 꺼내 빨아서 널었다. 냄새가 없어지지 않자 다시 그러기를 반복했다.
요양병원에 갔을 때 냄새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미자는 똑같은 냄새를 맡았다. 진한 알코올에 착 달라붙은 냄새는 벽에도 창에도 침대에도 간호사들의 옷에서도 났다. 승규는 아무 냄새도 안 난다고 했다.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엄마 냄새야, 했다.
좋아하는 사람끼리는 서로의 냄새를 좋아한다고 들었다. 기억의 맨 밑바닥에서 어떤 향기가 올라왔다. 밭에서 일하다 말고 달려온 엄마에게서 아늑한 냄새가 났었다. 그 냄새는 한낮에 눈을 떠서 혼자임을 깨닫고 불안해하던 미자를 잠재워 주었다. 그날 이후, 10미터 떨어져 있는 곳에 엄마가 있더라도 냄새를 맡고 편안해지곤 했었다.
엄마는 미자를 보고 얼핏 웃었던가. 그랬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엄마는 처마 밑에 집을 지어 놓은 엄마 제비처럼 일하다가도 자주 둥지를 찾아와 자식새끼 입에 먹이를 넣어주러 온 것이다. 새끼 제비들은 서로 먼저 벌레를 입에 넣어달라고 주황색 주둥이를 쫙쫙 벌렸다. 어미는 공평했다. 기막히게 기억했다. 매번 둥지로 날아와 순서대로 먹이를 넣어주곤 했다.
엄마도 공평했나. 그건 아니었다. 겉으로도 속으로도 절대 공평한 적이 없었다. 공평한 분배를 어미 제비에게 배웠다. 인간보다 뛰어난 면들을 동물들은 많이 갖고 있었다. 아픈 손가락한테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승규는 엄마에게 아픈 손가락이었을 것이다. 미자에게 아픈 손가락이 자식보다 승규인 걸 보면.
승규는 미자를 냉정하다고 비난했다. 승규도 달리 뾰족한 수를 내지 못했다. 승규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속이 훤히 보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마음으로 모시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승규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엄마가 집에 온 주말이면 엄마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앉아 TV만 보거나 미자가 만들어 놓은 음식을 하이에나처럼 다 먹어 치웠다. 마치 지금 다 먹어 치우지 않으면 내일은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반나절 정도라면 괜찮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엄마나 승규가 좋다면 미자도 편했다. 하지만 해도 해도 너무했다. 미자 아들도 아니면서 철부지 아들처럼 구는 50대 접어든 승규를 마구 때려준다면 고약한 버릇이 고쳐질까.
“엄마, 팥죽 먹고 싶어?”
승규가 뜬금없이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목욕을 시키고 벗어놓은 옷을 빨아서 탈수해서 막 널고 마른빨래를 거둬 거실로 왔을 때였다. 낮잠 한숨 자는 게 소원이었다. 그러고 나면 피로가 풀릴 것 같아서 침대에 누워서 단 한 시간만이라도 눈을 붙이려던 참이었다.
“미자 언니, 나 팥죽 먹고 싶어.”
딸을 언니라도 부르다니, 미자는 울고 싶어졌다. 갑자기 팥죽이라니. 큰마음 먹고 비싼 생대구 사서 어슷하게 무 썰어 넣고 생대구탕을 얼큰하게 끓여놓았는데 팥죽이라는 말에 미자는 하마터면 마른빨래를 패대기 칠뻔했다.
“엄마는 대구탕 좋아하는데 승규 넌, 무슨 팥죽 타령이야. 정 먹고 싶으면 팥죽은 내일 먹으면 되겠네. 니가 자꾸 그러면 엄마가 따라하는 것 모르냐?””
“싫어, 싫어. 미자 언니는 나빠.”
승규에게 레이저 눈빛을 보냈다. 승규는 엄마 등 뒤에 숨었다. 팥죽도 못 쑤는 승규, 돈도 못 버는 승규, 눈치도 없는 승규, 염치도 없는 승규. 미자는 속으로 승규를 실컷 욕했다. 그 복잡한 팥죽을 가장 피곤한 날에 내놓으라고 하다니. 그래, 죽기 살기로 해보자. 만약 기회를 놓친다면, 팥죽도 못 얻어먹고 갑자기 엄마가 세상을 떠나버린다면 두고두고 한이 될 것이다.
“승규야, 마트에 가서 국산 팥으로 3K만 사 오렴.”
웬일인지 승규는 일어나 재킷을 걸치고 신발을 신었다. 그사이 철이 들었나 보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돈을 달라 않고 나가다니, 세상이 뒤바뀐 것 같았다. 현관문을 밀고 나갔던 승규가 다시 들어왔다.
“누나, 카드 좀.”
그럼 그렇지. 아이고 내 팔자야. 미자는 신용카드를 승규에게 주었다. 잠시만이라도 좋았던 기억을 놓치기 싫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고 하던데 누구 하나 맞들어 준 적 없었다. 그래도 오십이 넘은 나이에 팥 3K도 못 사는 승규가 자학하지 않고 사는 것은 고마웠다. 다시 옥상에 올라가 뛰어내리는 포즈를 취하지 않은 것만도 고마웠다.
팥을 푹 삶아 체에 걸러서 껍질을 벗겨내고 으깨었다. 다리가 자꾸 풀려왔다. 눈도 감겼다. 몸은 여기저기서 어서 쉬라고 신호를 보내왔다. 불린 쌀에 팥물을 넣고 끓이다가 준비해 놓은 가래떡을 동그랗게 잘라 넣었더니 팥죽이 완성되었다.
TV 볼륨이 더 커졌다. 귀가 안 좋은 엄마를 위해 승규는 볼륨을 자꾸 높였다.
“시끄럽다, 볼륨 낮춰라. 어수선해서 어디 입에 팥죽이 들어가기나 하겠니?”
“엄마, 더 높여? 잘 들려?”
엄마는 더 높이라고 손을 위로 쳐들었다. 승규는 볼륨을 더 높였다. 고요하던 집안이 엄마와 승규가 오자마자 전쟁통처럼 난리였다. 미자는 귀를 막았다.
설탕을 넣어 한 공기 주었더니 엄마는 맛있게 먹었다. 승규는 한 공기 더 달라며 빈 공기를 미자의 코 앞에 디밀었다. 저는 팔이 없나, 다리가 없나. 엄마 모시고 와 집에 온 뒤부터 엉덩이 한 번 붙이고 앉아 쉬지 못했다.
“니가 실컷 더 떠서 먹어라.”
승규가 저럴 때마다 성경에 나온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가 떠올랐다. 승규는 마리아요, 미자는 마르다였다. 예수님 발치에 붙어있는 마리아와는 달리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기느라 동분서주했다. 마르다는 마리아가 준비를 돕지 않는 것에 대해 예수께 불만을 표시했지만 예수는 마리아가 더 나은 것을 선택했다고 평가했다. 분통이 터지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편애였다. 승규를 효자로, 미자를 불효자로 여길 엄마의 편애에는 성경에도 확실한 명분이 있었다. 엄마에게는 마르다 미자보다 마리아 승규가 더 보배로운 것이다.
주말을 보내고 요양원에 엄마를 놓고 돌아오면 녹초가 되었다. 주말을 반납하고 다시 월요일이 오는 것이 매번 두려워졌다. 승규는 엄마를 요양원 보내는 것을 싫어하는 눈치였지만 방법이 없었다. 일부러 불을 낸 엄마가 다시 불을 내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지난 겨울날, 퇴근 무렵 엄마는 현관 밖 계단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 자신이 오기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미자는 엄마가 퇴근 무렵 문밖으로 나와 기다리는 게 싫었다. 얼굴을 찡그리고 매번 여기 아프다, 저기 아프다, 호소하는 것도 듣기 싫었다. 아이들이 아프다는 것은 아이들이니까 그렇다 쳐도 늙어서 아픈 건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닐까. 미자를 기다린다는 건 무언가 긴급한 부탁이 있다는 뜻이었다. 돈이 필요할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왜 나와 있어? 추운데.”
미자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엄마는 미자를 올려다보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나, 불냈다.”
“뭐라구?”
엄마를 밀치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거실과 주방은 온통 검은 연기로 가득했다. 재활용 비닐에 담긴 페트병과 건조된 수건과 빨래들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창문을 열었다. 검은 연기는 용트림하며 깨진 창문을 뚫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불길은 벽지까지 검게 그을리고 집안을 냄새로 가득 채웠다. 엄마가 살아있다는 게 천운이었다. 일부러 라이터를 켜서 불에 잘 타는 것들만 태운 엄마를 감옥에라도 가둬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요양원은 엄마에게 감옥이었다.
이현수 말처럼 손자병법을 불러오지 않더라도 36계 줄행랑치고 싶었다. 그러지 않았던 것은 사방을 둘러봐도 붙잡을 만한 지푸라기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아서였다.
“선상님은 허허벌판에 혼자 비바람 맞고 서 있는 허수아비같네유.”
절망할 때마다 김순녀 말이 떠올랐다. 겉으로는 마냥 순박해 보이는 김순녀 눈을 속일 수 없었다. 제아무리 괜찮은 척 변장해도 늙은 김순녀의 날카로운 눈을 통과하지 못했다.
미자는 자신에게도 감정도 속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래 훈련된 습이 미자를 이렇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쁜 것도 좋게 생각하고 어두운 쪽보다 밝은 쪽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나쁘게 생각하면 불편하고 마음이 불행해졌다. 행복해지기 위해 자신을 위장한 것이다. 그것이 습이 되어버렸다.
‘아니야, 나빠서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럴수 밖에 없는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야.
가해를 하는 사람에게도, 손해를 입히는 사람에게도, 뒤에서 흉보거나 무시를 하는 사람에게도,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도 미자는 아니야, 나쁜 의도로 그런 것은 아닐 거야. 사람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야.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을 생각해 봐. 원수도 사랑할 판에 그깟 모략 하나 했다고 미워해서는 안 돼.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나중에 후회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그쪽이야. 그러니 지금 당장은 패배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진짜 패배한 쪽은 내가 아니야.’
미자는 엄마를 미워한 자신을 자책했다.
횡단보도 앞에서 메카쪽을 바라보았다. 긴 테이블에 인숙이 앉아 있었다. 미자는 잘못 봤나 눈을 의심했다. 연락도 없이 이 시간에 메카에 오다니, 말이 안 되었다. 만약 온다면 예전처럼 미자한테 먼저 연락했어야 옳았다. 미자 몰래 이현수를 만나러 왔을까.
횡단보도 신호는 여전히 빨간 불이었다. 가방에서 마스크를 꺼내 쓰고 후드 티 모자를 푹 뒤집어쓰고 부동산 사무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숙이 미자를 발견한다면 서로 얼굴 발개질 일 아닌가. 제아무리 간 큰 인숙이라지만 이건 서로에게 민망한 일이었다. 미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의리가 인숙에게는 없는 걸까. 여자에게 의리는 아무것도 아닌 걸까.
이현수는 왜 미자 몰래 인숙을 만나는 걸까. 커피 마시러 멀리 여기까지 온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고등학교 때 윤리 선생을 좋아한다고 고백하자 인숙은 윤리 선생한테 고백해서 함께 여행도 가고 편지도 받고 선물 받은 것을 미자에게 자랑까지 했다. 지금 코 앞에서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지고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오후 2시였다. 미자의 스케줄을 훤히 꿰고 있는 인숙은 오후 2시의 미자 스케줄도 알고 있을 터였다. 오후 2시에 미자는 수업을 하러 다른 곳에 가 있어야 옳았다.
‘아니야, 그럴만한 무슨 일이 생겼을 거야. 이현수를 왜 만나야 했는지, 아니면 이현수가 먼저 인숙에게 연락했는지 나중에 얘기해주겠지.’
지난번에 덕수궁길을 걸을 때 인숙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평생 묻어두려 했는데 이현수 내가 만나도 되냐는 인숙의 발언에 용기 내어 물었었다. 인숙은 당황하지 않고 깔깔 웃으며 말했었다.
“내가 왜 니 허락을 구해야한다니, 니가 먼저 윤리 선생을 좋아했다고 윤리 선생이 니거냐? 만약 허락을 구해야 한다면 사모님한테 구해야 맞는 거 아니라니?”
그런 인숙이였다. 지금 인숙은 그때처럼 당당하게 이현수를 만나러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이현수가 먼저 인숙을 유혹했을 수도.
눈가의 늘어진 피부를 절개하고 지방을 제거해 근육을 당긴 인숙은 미자보다 3년은 젊어 보였다. 눈을 치뜨면 사나워 보이긴 했지만 처진 눈매보다는 훨씬 눈매가 선명했다. 너도 해, 라고 인숙은 권했지만, 돈을 준다고 해도 미자는 성형은 하기 싫었다. 자연스럽게 늙어가길 원했다.
고소영이 들락거린다는 강남 피부과에 몇천만 원을 예탁해 놓고 시간 날 때마다 들러 피부마사지를 받은 인숙의 얼굴은 반짝반짝 윤이 났다. 인숙은 때깔이 점점 좋아졌다. 촌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은은한 조명이 있는 침대에 누우면 고양이처럼 조용히 의사가 다가와서 얼굴 가까이에 입김을 불어놓고는 얼굴과 목, 가슴 언저리까지 만져준다고 했다. 효과는 딱 거기까지인지 목주름은 그대로였다. 세 개의 굵은 주름을 감추기 위해 인숙은 한여름에도 스카프를 두르고 다녔다.
서울시장에 출마할 것도 아니면서 얼굴에 돈을 처바르는 인숙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인숙은 목하 열애 중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 대상은 이현수일 수 가능성도 있었다. 페르몬 향수를 뿌리고 한낮에 지하철을 타면 노인들이 바퀴벌레처럼 꼬여 든다고 했었다. 어쩌면 이현수도 페르몬 향수에 이끌렸을 수도 있었다.
인숙을 의심하고 분해하고 질투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마치 프로파일러라도 된 것처럼, 인숙과 이현수를 의심하는 자신이 그렇게 못나 보일 수가 없었다. 인숙이 말대로 이현수를 먼저 소개받았다고 치자. 그렇다고 이현수가 미자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인숙의 말은 백번 옳았다. 사랑은 움직인다는데 이현수 마음이 인숙에게 돌아간 것일 수도 있었다. 왼손엔 미자를 놓고 오른손엔 인숙을 놓고 병아리 감별사처럼 저울질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나쁜 것은 이현수도 아니요, 인숙도 아닐 것이다. 적극적으로 대시해 온 이현수를 간 보는 미자가 가장 나쁠 수도. 어쩌면 이현수는 남자에 관해 빠삭한 인숙에게 벌써 넘어갔는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미자는 이현수라는 모호한 카드를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둘이 연애하다가 지지고 볶고 싸우고 재혼하든 그건 미자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했다. 만약 둘이 미자 몰래 사귄다면, 미자는 친구도 잃고 남자에 대한 로망도 한꺼번에 잃는 것이다.
미자는 추측이 사실인 것처럼 가슴이 쓰렸다. 인숙에게 이현수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씁쓸해졌다. 눈 오는 날, 길상사에 가자는 말에 오케이를 한 것은 미자로서는 크게 용기를 낸 것이었다. 하지만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이현수 또한 개살구일 가능성이 있었다. 한 번 이혼한 경험이 있는 미자는 빛 좋은 남자는 의심부터 하는 습관이 있었다. 60 넘은 남자는 누가 버려도 주워가는 사람이 쉽게 나타나지 않을 터였다. 전 남편이 아직 솔로인 걸 보면 말이다. 개살구를 훔쳐 간 인숙이 갑자기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혼한 남편에게 된서리를 맞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다니, 인숙이 가엾었다. 인숙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넌 꼭 그렇게 관계 파토 내고 싶니? 현수씨와 나 사이를 이간질하고 싶냐구? 엎어져도 내 코 깨지는 거고, 뒤로 넘어져도 니 코 깨지는 거 아니니 걱정 사서 하지 마.”
이간질, 이라는 말도 함부로 내뱉는 인숙이었다. 다 늙어서 윤리 선생 닮았다는 이유로 늙은 남자를 두고 서로 줄다리기하다니. 낼 모래면 관속에 들어갈 여자들이 늙은 남자를 사이에 두고 밀당하는 꼴이라니. 미자는 줄을 놓고 싶었다. 줄다리기에서 갑자기 줄을 놓으면 쓰러지는 건 상대편 아닌가. 이현수와 인숙이 넘어져 피 흘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현수가 모호한 카드, 개살구라고 생각하자 위안이 되었다. 미자가 버린 개살구를 인숙이 주워 갔다고 생각하자 고소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을 달리해도 허전한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쓸쓸한 바람이 가슴 한가운데를 불고 지나갔다. 이현수를 원망할 건 없었다. 어떤 여자는 돈도 주고 마음도 주고 몸도 준다는데 아무것도 안 준 미자가 아닌가. 인숙을 원망할 건 아니었다. 미자가 간 보는 사이 성미 급한 인숙이 먼저 행동을 개시한 것일 뿐. 마음도 주고 몸도 준다는데 외로운 이현수가 인숙을 거부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미자는 횡단보도를 건너가 부동산 문을 힘차게 밀고 들어갔다.
첫댓글
나를 밝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
나를 따뜻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것,
그것은 사랑입니다.
@박현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