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새벽에 드리는 ‘고난기도회’ (월)
“굿모닝!”
⁋ 묵상- 사 53:1-3
⁋ 찬송- 254장 내 주의 보혈은
⁋ 기도- 김국성 집사
⁋ 성경- 마태복음 27:27-33
⁋ 말씀- ‘십자가의 길’
⁋ 주기도문
고난주간 월요일이다.
고난주간 첫날이 성전정화의 날인 것은 의미있다. 성전개혁은 어떠한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진짜 계명’, ‘진짜 복음’을 찾으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참이며, 무엇이 진짜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따르려는 일이다.
본문은 ‘십자가의 길’이다. 빌라도의 관정부터 골고다까지 이르는 그 길이다. 교회의 전통에서는 이 길을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고 부른다. 라틴어로 비아는 길이고, 돌레오는 아픔, 고통, 슬픔이란 뜻이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길은 고통의 길이요, 슬픔의 길이다. 비아 돌로로사는 예수님의 사형에서 골고다 처형에 이르는 전 과정을 의미한다.
이 길은 총독 빌라도의 재판이 열렸던 안토니 요새로부터 실제 십자가형이 집행된 갈보리 언덕 골고다까지 이르는 약 800m 거리이다. 지금은 예루살렘이 확장되어 골고다가 시내에 있지만,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 밖에 있었다.
그래서 해골의 곳이란 불리는 사형장으로 나가려면 성문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 성문 밖으로 나가는 길은 저주와 조롱의 골고다로 가는 길이요, 비참과 죽음의 사형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십자가를 바로 알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 거기에서 십자가 죽임, 그 비참과 저주가 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건이었음을 목격할 수 있다.
십자가의 길은 조롱의 길이었다. 십자가 사건은 철저하게 예수님이 얼마나 철저히 버림받고, 그 대가로 수치와 모욕과 조롱을 당하였는가를 증거 한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희롱을 다한 후”(31).
예수님은 사형 선고를 받고 나서, 총독의 군인들에게 크게 조롱을 당한다. 비아 돌로로사 제1지점에서였다. 예수의 몸에 왕을 상징하는 홍포를 입히고, 머리에는 가시를 엮어 관을 씌웠다. 또 오른손에는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홀을 뜻하는 갈대를 들게 하였다. ‘유대인의 왕’이란 호칭은 빈정거림이었다. 어짜피 죽게 될 사형수를 놀림감으로 삼았다.
엊그제 까지 백성들이 메시야로 추종했는데, 이젠 철저하게 배신을 당하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예수를 영웅처럼 따르다가, 이젠 이 위험인물을 가차없이 내버렸다. 그들이 외쳤던 영광의 이름, 다윗의 자손은 수치와 모욕이 담긴 저주의 이름, 유대인의 왕이 되고 말았다.
예수의 길을 따른다면 이런 희롱과 모욕은 기본이다. 예수를 위해 조롱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이미 비아 돌로로사는 그의 마음에 있다. 예수와 더불어 수치를 당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이미 비아 돌로로사는 그의 삶 속에 있다. 그런 비아 돌로로사를 지니기를 바란다.
십자가 사건의 가장 큰 특징은 조롱이다. 수치다. 모욕이다. 그 조롱이 위험한 것은 심지어 죽음 앞에서였다는 사실에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철저히 고, 또 스스로 자기를 부정하셨다.
본문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에게 동정적인 인물이 있다. 그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다. 물론 그 동정은 자발적이 아니었다. 구경하던 중에 끌려 나왔을 뿐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시다가, 더 이상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셨다. 그대로 두면 정해진 시간에 사형집행이 어려웠다. 그래서 군인들은 대신 십자가를 메고 갈 인물을 찾았다.
그때 재수 없이 걸린 장본인이 바로 북아프리카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란 사람이다.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32).
시몬은 비아 돌로로사 제5지점의 주인공이 되었다. 마가복음은 구레네 사람 시몬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한다. 그는 초대 교회에서 중요한 인물이 된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였다. 시골에서 올라오는 길에 십자가의 장면을 목격하였고, 불운하게도 죄인의 사형틀을 대신 매게 되었으나, 그러나 억지로 맨 십자가가 저를 구원하였다.
애초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스스로 선택한 길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자기 부정의 길이었다. 겟세마네에서 드린 기도를 보라.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이었던가를 고백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십자가의 길은 우리를 유혹할 아무런 매력이 없다. 그 길은 우리의 삶을 부정하게 만들고, 새로운 삶을 선택하게 한다. 그래서 고난의 길이다. 그 길은 우리를 향해 묻는다. 너는 어느 길을 걷는가? 예수의 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선택하였는가? 십자가야말로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예수님은 이 종려주일에 승리자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바로 5일 전만해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종려 나뭇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환영하였다. 길가에서 환영하던 인파는 자기 겉옷을 벗어 길 위에 깔았다. 마치 레드 카펫을 펼쳐 놓은 셈이다. 그들의 행동은 매우 자발적이었다. 온 시민이 들떴다. 앞서 가는 사람들을 쫓아 군중은 뒤를 따랐다.
그들이 외친 구호는 이런 내용이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 21:9).
호산나는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죄와 죽음에서, 압제와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소서라는 가장 현실적이고, 긴박한 의미에서 구원이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불과 5일 만에 호산나는 저주로 바뀌고, 겉옷을 깔았던 백성들의 환호성은 분노와 조롱으로 바뀌고, 기대는 배신으로 바뀌었다.
십자가는 승승장구가 아니다. 십자가는 만세삼창이 아니다. 바로 나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우리는 그 피로 구원받았다. 십자가는 그분의 조롱당하심과 자기를 부정하심과 철저히 낮아지고 실패하심을 통해, 역설적으로 구원의 완성을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었다.
그런 위대한 예수의 길, 비아 돌로로사를 회복하는 것이 복음이다. 그 동안 양탄자를 깔고, 승리의 길을 자랑하였다. 그 결과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다. 권력의 편에 서고, 부자의 입장을 옹호한다. 약자들을 멀리하고, 괴롭게 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길이 아니다. 이제 달라져야 한다. 입에 발린 ‘복음적’이 아니라, ‘예수복음 그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소굴을 뒤집어엎고, 참 성전을 회복하자.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쳐주시고, 그리 행동하셨다.
지금 내 마음의 성전은 어떤가? 내 마음은 거룩하고 참되게 예배하는가? 아니면 매매하는 자들과 환전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로 북새통을 이루지는 않던가?
우리는 순간순간 바른 선택을 위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야 한다.
고난주간은 다시 예수님을 배우고, 닮고, 따르려는 시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에 집중함으로써 나를 새롭게 하고, 정화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첫댓글 주님 고난주간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며 새로워지기 원하오니 인도하여 주옵소서
죽음,치욕,수난의 십자가..
그 십자가의 능력으로 오늘도 제가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함으로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