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워서 너무나 슬픈 이야기, <산유화>
산유화
김소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출처 《김소월시전집》 (2007) 첫 발표 《진달래꽃》(1925)
출처 《김소월시전집》 (2007) 첫 발표 《진달래꽃》(1925)
김소월 金素月(1902~1934)
평안북도 구성 출생.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이다. 스승 김억과의 인연으로 시작에 몰입해 1920년3월 《창조》에 〈낭인의 봄> 등 다섯 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하였다. 배재고보 시기에 왕성히 시작활동을 하였으며, 짧은 일본 유학 생활을 마친 뒤 《영대》의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고향에 돌아와 1925년 《개벽》에 생전 유일의 시론인 <시혼>과 시집 《진달래꽃》을 발표하였다.
1920년대의 문학적 자장과
김소월
새로운 시 형식의 출현과 관련하여, 이 작품이 발표된 1920년대는 이전 시대인 1910년대와 유의미하게 구별되는 지점이 있다. 1910년대는 자유시가 발견된 또는 등장한 시기로, 1920년대는 자유시의 형식이 정착되고 본격적으로 발전한 시기로 규정된다는 지점에서 그러하다. 특히 1910년대 후반 창간된 최초의 문예지 《태서문예신보》(1918) 이후 《동아일보》(1920), 《조선일보》(1920) 등의 일간지와 《창조》(1919), 《폐허》(1920), 《백조》(1922), 《영대》(1924) 등의 동인지가 창간되면서 작품을 발표할 지면이 확보된 것은 근대 자유시의 형성에 충분한 발판이 되어 주었다.
이처럼 개방된 문학 공간의 존재는 당시 문학 생산을 담당하던 시인과 작가들을 아우르는 문단의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근대 자유시라는 무형의 표상이 구축되고 특정한 시대적 조류가 형성되었다. 1920년대 시인들은 자기 내면의 탐구와 더불어, 식민지 현실에 의해 붕괴된 세계와 가치 체계에 대응해 나가는 삶의 형식을 시로써 추구해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오세영, 1980)를 공유하였다. 이는 평안북도 정주에 살며 10대 시절 《창조》를 통해 문단에 등장한 김소월도 예외가 아니었다.
| 근대 자유시로의 요청에 대한 응답
시인은 작품을 통해 당대의 시대적 과제를 구현하며 여기에는 시인마다 탐구해 낸 자기 내면의 결이 반영된다. 김소월은 당시 서구의 시에 큰 영향을 받았던 문단의 주류 시인들과 달리, 전통에 기반한 의식과 새로운 시 형식의 탐구 사이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중에서도 김동리는 <산유화>에 대해 ‘기적적인 완벽성’을 지녔으며 ‘조선의 서정시가 도달할 수 있는 한 개 최상급의 해조(諧調)’를 보여 주었다(신동욱 편, 1980)고 평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상찬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먼저 짚어야 할 점은 형식적 완결성일 것이다. 성기옥이 분석한 바 있듯 4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구조상 1연과 4연이 동일하고 2연과 3연이 역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고 보면 산의 형상이 떠오를 만큼 형태적 차원에서 회화적 균제미(신동욱 편, 1980)가 돋보인다. 그리고 이 시에서 3.4.5조 혹은 4.3.5조 형태의 3음보의 율격은 4행으로 이루어진 각 연에 2행 - 2행 또는 3행-1행으로 구분되어 나타난다. 행과 연이라는 새로운 형식에 맞춘 변용된 형태(국어국문학회편, 1983)를 취한 것이자, 대칭의 회화적 형태를 율격 차원에서도 실현한 것이다. 이처럼 <산유화>는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변형하는 정교한 실험을 통해 새로움의 형성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답하고 있다.
새로운 시의 형식은 그것이 전달하는 의미와도 무관하지 않다. 시에 구축된 표상은 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담고 있으며,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에 대한 인식 또한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 시는 단 세 개의 사물과 비교적 평이한 시어로 구성되어 있다. 단순화를 무릅쓰고 이 시의 내용을 산문으로 풀어 보면 ‘산에는 꽃이 핀다’(1연), ‘꽃은 혼자서 핀다’(2연), ‘산에는 새가 산다’(3연), ‘산에는 꽃이 진다’(4연)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의 형식이 각 연의 분절을 통해 개별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도 이들의 연쇄를 통해 종합적인 의미를 생성해 내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때문에 <산유화>는 꽃의 피고 짐을 통해 계절의 순환을 보고 그 속에서 삶의 근원적인 의미를 발견하는 데 초점을 둔 작품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시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것뿐만 아니라 ‘저만치’, ‘혼자서’, ‘우는’, ‘작은’, ‘꽃이 좋아’ 등과 같이 의미를 변별하는 시의 어구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의 구조와 주제 의식을 설명하는 비평의 장에서 특히 주목받아 온 시어인 ‘저만치’는 ‘거리’의 관점에서 조명되어 왔다. ‘새’로 표상되는 인간, ‘산’과 ‘꽃’으로 표상되는 자연이라는 두 축을 설정하고 그 사이에서의 고독감에 주목한 김동리의 논의(신동욱 편, 1980)는 ‘저만치’를 인간과 자연의 거리로 해석하는 관점의 원론 격에 해당한다. 이후 ‘저만치’의 두 대상을 ‘꽃’과 ‘꽃’으로 보고 이를 자연 내에서의 균열의 가능성으로 읽어 낸 논의(김종길, 1986)와 같이, ‘저만치’가 모든 존재의 근원적 고독감과 존재론적 의미를 표현한다고 보는 관점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 거리감이 절대적이며 극복할 수 없다고 여겨질 때 인간에게 부여된 고독감은 허무주의(김우창, 1974)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저만치’와 함께 ‘혼자서’라는 시에도 주목하여 이들 표현이 오히려 고독에 맞서는 화자의 대응 방식을 나타낸다고 보는 논의(권정우, 2013)도 있다.
‘거리’의 측면뿐만 아니라 다른 지점에도 주목하면서 시 해석에 입체성을 더하는 논의도 있다. 일찍이 김용직(1974)은 김동리의 논의에서 ‘저만치’의 의미는 ‘저기, 저쯤’과 같은 장소와 거리의 차원으로만 한정할 수 없는 애매성(ambi-guity)을 갖는다고 보았다. ‘저렇게 희게 또는 붉게, 소담히, 그리고 아름답게’와 같은 상태의 의미와 ‘저와 같이’로 여기는 정황의 의미를 포괄하는 ‘보다 높은 차원’의 사유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신동욱 편, 1980). 이러한 해석은 ‘산’과 다른 개별적 존재들을 분리하지 않고 일련의 현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설정하면서 산 속에 놓인 꽃과 그 사태에 담긴 화자의 정감에도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이처럼 ‘저만치’라는 시어가 불러일으키는 긴장과 모호성은 자칫 진부해지거나 관념적 차원에 머무를 수도 있는 시의 주제 의식에 깊이감을 주는 역할을 한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와
노래 <봄날은 간다>
‘저만치’를 여러 관점에서 해석해 보더라도, 3연에 등장하는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앞서 ‘꽃’과 ‘새’의 거리를 언급한 해석에 따르면 ‘새’는 자연으로서의 ‘꽃’과 대비되는 인간의 층위에 놓이거나 또는 ‘새’가 ‘꽃이 좋아’ 산에 산다는 진술로 미루어 화자와 동일시되는 것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접근으로는 왜 새가 산에서 우는지, 왜 꽃이 좋은지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새’의 표상에 관해 이해하기 위해 다시금 시로 돌아가 보자.
1연과 4연의 순환적 구조 안에 놓인 2연과 3연을 읽어 보면, 화자의 시선이 산에 피는 꽃(2연)과 산에서 울고/사는 새(3연)에게로 훌쩍 다가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연과 4연의 ‘갈 봄 여름 없이’ 계절이 지나고 돌아오는 가운데 피고 지는 꽃은 지금, 여기에 놓인 특수한 개체라기보다는 한 무더기의 꽃을 의미할 수도, 혹은 과거나 현재와 같이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런데 2연의 ‘꽃’은 ‘저만치’의 애매성을 감안하더라도 ‘피어 있’는 순간의 바로 그 꽃(들)을 지칭하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통명사처럼 쓰인 1연과 4연의 ‘꽃’과 구분된다. 이처럼 2연에서 꽃이 피어 있는 바로 그 순간을 조명하면서, 원경에서 산의 정경과 계절의 순환에 주목할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에게도 화자의 눈길이 머물게 된 것으로 3연의 의미를 해석해 볼 수 있다. 이때 ‘꽃’과 ‘새’는 화자와 거리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어느 한쪽의 의미를 위해 소모되지도 않는다. ‘새’의 존재를 이렇게 바라보면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꽃의 상태에 대해서도 달리 생각하게 된다.
모든 존재는 홀로 살고 죽는 무상한 삶을 연속하는 까닭에 필연적으로 고독하지만, 삶의 순간을 들여다보면 절대적으로 고독한 것만은 아니다. 이 시에서만 하더라도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것만 같았던 ‘꽃’의 곁에도 그를 좋아하는 ‘새’가 있었듯, 완전한 고독은 ‘무(無)’의 관념을 언어로 나타내는 것만큼이나 도달하기 어려운 상태다. 고독에 관해 언급하는 순간 그 말이 도달하게 될 수신인을 상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를 알아보는 대상이 존재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고독의 상태를 극복할 계기가 된다. 대상과 맺는 관계의 강도가 너무 약해 기억되지 못하고 서로에게 흔적처럼 남게 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다만 그것은 아래 <봄날은 간다>(김윤아 작사·마쓰토야 유미 작곡)라는 노랫말 속 화자의 경우처럼 ‘눈을 감으면 문득’ 떠올라 마음을 저리게 하거나 손에 잡힐듯한 감각으로 되살아나기도 한다.
눈을 감으면 문득 / 그리운 날의 기억 /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 오는 건 / 그건 아마 사람도 / 피고 지는 꽃처럼 /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 꽃잎은 지네 바람에 /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들 / 가만히 눈 감으면 잡힐 것 같은 / 아련히 마음 아픈 추억 같은 것들 / 봄은 또 오고 / 꽃은 피고 또 지고 피고 / 아름다워서 너무나 슬픈 이야기
‘문득’이라곤 했지만 이 감각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되는 계절처럼 계속 무심히 찾아왔다 다시 또 지나갈 것이다. ‘산에서 우는 작은 새’도 봄이 가면 떠오를 ‘눈 감으면 잡힐 것 같은 / 아련히 마음 아픈 추억 같은 것들’로 인해 아름답고 슬퍼서 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새’가 산에서 울면서도 산에 사는 이유는 ‘꽃’이 좋기 때문이다. ‘꽃’이 다시 피는 한, ‘새’는 완전히 고독해질 수 없다. 모든 존재는 다 고독하고 무상하게 살고 죽지만, 그 사이에는 고독을 달래주는 많은 것들이 있다. 이는 꼭 사람이 아니라 꿈일 수도, 좋아하는 일일 수도, 영혼을 달래주는 종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인간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삶은 슬프고 아름답긴 하지만 고독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산유화>는 이렇듯 꽃이 피고 지는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현상 안에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고 이를 위로하고자 하는 시인의 섬세한 시각을 보여 주고 있다.
| 진가연
--------------------------------------
참고문헌
국어국문학회 편 (1981), 『현대시 연구』, 정음사.
권영민 편 (2007), 《김소월시전집》, 문학사상.
권정우(2013), 「김소월 시의 구어체 진술」, 『한국현대문학연구』 41, 한국현대문학회, 5-38.
김용직(1974), 『한국문학의 비평적 성찰』, 민음사,
김우창(1974), 『궁핍한 시대의 시인』, 민음사
김종길(1986), 『시에 대하여』, 민음사,
신동욱 편(1980), 『김소월』, 문학과지성사.
오세영(1980), 『한국낭만주의시연구』, 일지사,
사회평론 교육 총서 19 『문학 교육을 위한 현대시작품론』
2024. 4. 4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