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옥산 관광
장 기 활
1989년 8월 4일(금)
종각 지하도 입구에 있는 맹인 거지의 모습을 100% 카피한 모습으로 비행기에 오른다. 어울리지 않는 선글라스를 쓸 수밖에 없는 심정이 괴롭기만 하다. 유행성 결막염으로 1주일 이상 안과를 다녔지만 별 차도가 없고, 가장 좋은 치료는 얼음찜질이라는데 더운 지방으로 떠나는 내 신세가 어쩜 이렇게 운이 없을까? 시연맹 행사의 참석률이 하도 저조해 긍여지책으로 참가케 된 옥산 친선 등반대에 무려 102명의 대규모이기에 1, 2, 3진으로 나누어 출발하였으며 나는 1진에 소속됐다.
2시간의 비행 끝에 대만 중정 국제공항에 내렸을 때의 첫 인상으로 검소한 나라임을 느낄 수 있었다. 국민소득 6,000불에 외채없는 나라인 자그만 섬나라 대만. 우리 보다 잘 사는 나라임에도 거리의 모습은 70년대 서울과 흡사하다. 습기다 많아서 그런 것인지 건물에는 페인트도 칠하지 않았다. 인구 200만에 오토바이가 600만대이니 오토바이의 천국이라 할 수 있고, 인구 밀도가 세계 2위일 정도로 좁은 국토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대만인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짧은 미니스커트에 오토바이를 탄 아가씨가 거리를 질주하는 것이 퍽 인상적이다.
대북시에서 중식 후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등과 더불어 세계 4대 박물관의 하나라는 고궁박물관을 관람했다. 약 60만점을 보유하고 있으나 평균 2만점 정도를 3개월마다 교체 전시하고 있었으며 신석기 시대로부터 근세에 이르는 각종 유물, 도자기, 서화, 조각품 등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불가사의한 것들이라고 밖에 할 수 없어 어안이 벙벙해 질 정도이고, 우리나라의 국보라고 하는 것도 비교하면 현격히 한 수 위인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중국(본토) 자금성에 소장되었던 중국 역대 황제들이 수집한 진기한 예술품 중 당비취병풍은 대만이 망해도 3년은 먹을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시가를 호가한다고 하니 기가 막힌다. 이 모든 예술품은 1948년 내전이 격화되자 본토로부터 옮긴 것인데 14,000상자 중 300 상자만 무사히 옮긴 것이라니 중국 예술품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눈의 통증이 심하고 진물이 흘러나오는 통에 닦아 내기 바빠서, 남들의 반밖에는 볼 수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검소하다고는 하지만 칫솔도 없는 B급 호텔에서 하루를 자려고 하니 야영의 은은함이 새삼 그리워진다.
1989년 8월 5일 (토)
새벽에 기상하여 호텔 내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교장선생님께서 항상 얘기하던 대만 특유의 죽이다. 간단하게 식사를 하는 사람은 몰라도 잡식 동물인 내게는 서글픈 호텔 식사였다. 다행스럽게도 집사람 몫을 내가 처리할 수 있었으니 그런대로 버틸 수 있으리라. 고구마같이 생긴 섬나라 대만은 북쪽 대북시에서부터 대주시, 대난시로 이어졌으며, 대북에서 고속도로를 통해 대중시를 거쳐 가의시에 도착하니 점심때다. 이름하여 상하이식 요리를 주문하였는데 특이한 향을 풍기는 생소한 음식이라 다른 사람들은 눈치만 보고 있다. 우리 청악의 잡식 동물이 함께 했다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인데... 덕분에 눈이 아픈 것을 무시하고 죽순요리, 생선튀김 등등 신나게 먹었지만 마지막 아쉬운 것은 죽엽 청주 한모금 하지 못한 것이다. 어휴! 이놈의 눈병.
해발 2275m의 아리산 위락단지는 우리나라의 설악동과 흡사할 만큼 많은 관광객이 들끊는 곳이다. 비가 오는데도 우리뿐 아니라 일본 관광객도 꽤나 찾아 온 것을 보면 그런대로 쓸만한 관광자원인가 보다. 오늘부터 내일 밤까지는 여성 전용 숙소가 배정되어 할 수 없이 떨어져 자야 하는데, 눈병 간호없이 불편을 생각하니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1989년 8월 6일 (일)
새벽 4시경 제일먼저 기상을 했건만 눈을 뜰 수가 없다. 눈곱이 눈꺼풀을 붙여 놓아서 떨어지질 않기에 겨우 겨우 물수건으로 축여서 장님 신세를 면하긴 했지만 눈에 모래가 들어간 듯 엄청난 통증이 엄습해 온다. 다시 다다미 방바닥에 누워 배낭을 베개삼아 곰곰이 생각해 본다. 노인네 몇 분도 오늘의 옥산 등반을 포기하고 관광이나 할 모양인데 나도 그쪽으로 합세를 할까? 이 엄청난 고통을 이겨낸다 해도 등반의 무리가 화근이 되어 실명이라도 된다면 4,000m 한번 갔다 오고서 병신 되었다는 소릴 들을텐데, 그래도 등반을 해야 하나? 몇 번 망설이다가 본전 생각도 나고 해서 반창고로 한 눈을 완전히 가린 다음 용기를 내어 등반대에 합류하고 나니 이상한 감정과 불안한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버스로 이동하며 차중 산장에서 입산 신고를 하고 동포 산장에 도착하니 07:00 이제부터 실질적인 등반이 시작된다. 대만산악회에서 파견한 고소가이드와 함께 선두 그룹을 형성하여 탑탑가안부(2,680m)에 도착하니 07:40 시야가 트이면서 고산 특유의 밀림이 전개되고 아침 햇살을 받은 능선이 곱게 전개된다. 여기서부터 옥사 정상까지는 외길이고 우리네 설악산보다 훨씬 펀펀한 길을 부지런히 오르다 보니 8.5km거리인 배운 산장(3,528m)에 도착했다. (11:30)
전체적인 산세는 지리산과 같은 노년기의 형상이나 울창한 밀림이 인상적이며, 고소가이드의 감시 덕분인지 쓰레기는 찾아 볼 수도 없었다. 갈수록 오염의 정도가 심해지는 우리의 산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듣기로는 옥산의 고산족들이 코브라 등의 뱀을 잡아 시장에서 즉석 요리를 한다는데... 정말 뱀이 많게 생긴 산이라서 한 마리 어떻게 할 수 있나 싶어 신경을 곤두세워 살펴보았지만 반쪽밖에 볼 수 없어 그런지 구경도 할 수 없다. 배운 사장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는데 교장선생과 지난 6월에 융프라우를 다녀온 최 이사께서 고소 증세를 느껴 기러기같은 걸음으로 기진맥진하여 도착하고 있다. 짙은 가스 속의 3.500 고지에 한국인 100명이 산장을 점령하고 나니 국력과시 같기도 하다.
13:30에 산정을 출발하여 4,000m을 향하니, 눈의 통증은 더욱 심하지만 가스 속에 가끔씩 나타내는 연봉의 웅자는 고통을 잊어버리게 한다. 돌무더기 지대를 몇 군데 지나 2.4km의 거리를 1시간 30분 걸려 정확하게 15:00 3,997m의 옥산 정상에 섰다.
여자로는 우리 집사람이 제일 먼저 정상에 선 셈이다. 알프스는 4.,000m만 되어도 만년설이 있는데 바람만 거세게 불뿐 아무것도 없으니 별로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 등반의 목적이라면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고소증을 경험하기 위함이었는데, 나이 드신 홍 감사께서만 구토를 하며 고소 증세를 나타내고, 나는 증세가 없으니 손해를 본 느낌이다. 그저 그런 기분으로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배운 산장에 도착하는 6시 30분이 되었다.
대만 대학생들이 하이킹 왔다가 우리의 대부대의 밀려 산장 사용을 할 수 없으니 큰 일이라며 수다를 떨고 있다. 고추장과 김치를 의지해서 저녁밥을 먹는데, 닭고기와 오뎅 같은 것을 섞어서 찌개같이 끊여 먹는 대만학생들이 이상한 냄새를 피워 다들 이맛살을 찌푸린다. 중국음식은 향이 첫째라나...
산장 안 난로 속의 장작불이 신나게 타고 있다. 해발 3,500m의 산장이라 이불도 우리네의 두겁은 될 듯 싶다. 어둠 속에서 장작 타는 소리가 수렴동 대피소의 옛 기억을 불러일으키지만 8월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고도는 속일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인가 보다. 한겨울에도 대만 시내에는 영상 5도라는데 역시 높은 산임에는 틀림없다. 준비한 청심환을 집사람에게 전해 주고 눈 치료를 열심히 했다. 3,500m의 생수로 씻으면 혹시 치료할 수 있을까 해서... 몇 몇 사람은 밤새 멀미 증세가 심해 잠을 설쳤다고 투덜대었다.
1989년 8월 7일 (월)
아침을 죽으로 때우고 새벽 5시 30분에 배운 산장을 출발하여 실안개 속을 헤치면서 하산을 했다. 어둠과 나무다리는 병신을 곤혹스럽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처지지 않고 부지런히 걸었더니 8시에 탑탑가안부에 도착했다. 도중에 세팀의 한국인들을 만났으니 옥산은 한국인 일색이다. 도로변의 고사목이 장구속과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여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그래도 4,000m 산이었다고 피로가 느껴지면서, 동포산장까지 도로를 따라 내려오는 길이 지겹게 느껴졌다. 멀리 걷치는 안개 틈으로 보이는 정상은 낭만을 느끼기에는 충분했지만 청악인들이 찾기에는 무용지물이라는게 또 다시 내린 결론이다. 어디까지나 연맹의 친선등반 이었기에 점수관리상 참석했을 뿐, 조금은 속은 생각이 든다.
버스편으로 대북시에 도착 후 호텔에 여장을 풀고 대만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남들은 기본 15,000,원 정도만 내면 밤새도록 마실 수 있다는 술집에도 가는데 나는 이게 뭐냐? 눈병이 낫기만 하면 원수놈의 술을 한꺼번에 마시기로 하고 죽엽청주를 사서 포장해 보지만 마음의 위로는 별로 되지 않는다. 야시장에 가서 뱀 구경을 했다. 즉석에서 잡아 쓸개를 술어 타서 마시는데, 용기도 나지 않지만 눈 때문에 참아야만 했다. 대만사람들도 즐겨 먹는 것을 보면 역시 뱀은 몸에 좋다는 것이 틀림없나 보다...
1989년 8월 8일 (화)
호텔에서 8시에 출발 중정 국제공항에서 11시발 대한항공기에 탑승하고 나니 눈에서는 피고름이 흘러내린다. 아무래도 쓸데없는 친선등반에 참석하느라 눈 병신이 된 것 같아 겁이 덜컥 났다. 조금만 참았으면 될 것을 무리한 등반을 했고 더더구나 얼음찜질을 하라는 의사의 충고와 반대로 청개구리같이 덥게만 지냈으니 미련한 곰의 생리는 어쩔 수 없나 보다. 기내에서 몇가지 쇼핑을 하는데도 흥이 나질 않고, 실명후의 내모습이 눈에 선하다. 종각 지하도의 맹인거지 모습이 또다시 선명하게 떠오른다.
14:50분경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배낭을 찾아 나오니, 용문이가 있기에 부랴부랴 병원으로 향했다. 수술을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건만 의사 왈 "오늘이 고비이고, 내일부터 서서히 가라앉을 게요"라고 아무 걱정 없이 얘기를 한다. 유행성 결막염의 위대함(?)에 새삼 놀라면서 등반 아닌 눈병에 시달린 며칠간이 억울하게 느껴졌다.
눈병 덕에 4일간을 결근해야 했고, 나들이 한번 못 가고 처가 집에서 5일간을 보내고 온 얘들한테도 눈병을 옮기고 말았으니 이번 여름 휴가는 눈병이 완전히 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