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꾼들의 흰 옷에 먹물을 뿌렸다.
우리민족은 백의 민족
내가 언제인가 대학 동창회에서 일을 보고 있을 때, 여학생들 모임에 갔었다. 인사말을 하는데 수군수군하는 속에서 한 마디가 귀에 걸렸다. “아~~ 쟤, 생각난다. 군복 물들여 입고 워커 신고 다니던 애”, “맞아 맞아”, “예 맞습니다, 접니다.” 반갑기도 하고 누군지도 모르지만, 그래, 그때 작업복(군복) 물들여 입고 다니든 학생, 군용 워커를 신든 학생들이 많았다. 나도 그중의 한 학생이었다. 새삼 무슨 얘기냐고? 그때는 그게 유행이었어, 옷도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제대할 때 받은 군복이 작업복으로, 일상복으로 입기에 좋았다. 기지도 좋고, 제대 기념품으로 입고 온 것이었는데 제대군인이, 그리고 복학생이 무슨 벼슬이나 한 것처럼 물들인 작업복을 입고 워커를 신고 다니는 것이 당대의 캠퍼스에서 유행이었다. 당시 군복을 염색하는 염색소도 곳곳에 있었다. 그렇게 된 연유가 백의민족과 관련이 되니까 이야기를 꺼내 보자.
한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부른다. 수천 년 동안 흰옷을 ‘즐겨’ 입고 살아오면서 고유하고 독특한 민족 정서를 형성해 왔다. 중국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東夷傳)’, ‘북사(北史)’에도 우리 민족은 흰옷을 숭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백의(白衣)는 삼한·삼국시대 복습(服習)이었지만 유일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면,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송나라 때 고려의 물산을 기록한 ‘계림지’를 인용해 "고려 사람은 옷감에 물을 잘 들였다. 붉은빛과 자줏빛 물을 더욱 잘 염색하였다"고 한 기록도 있다. 그러나 조선조 명종(1565) 이후 국상을 여러 번 치르면서 흰옷을 계속 입다가 하나의 풍습으로 되기도 하였다. 지봉유설에 있는 기록은 "온 나라가 모두 흰옷을 걸치고 있으니 중국 사람들이 보고 비웃는다."고도 하였다. 백의복습(白衣服習)이 변하지 않자 조정에서는 백의금지령(白衣禁止令)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조선 시대에 태종은 백의금지령을 내렸고, 헌종이나 영조 때도 백의금지령을 수차례 내렸다.
백의를 멀리하려는 연유는 ‘음양오행설’ 때문이었는데 동쪽 나라 조선은 오행 중에 ‘목(木)’이므로, 이를 상징하는 청색 옷을 입어야 하고 또, 흰옷은 곧 상복(喪服)이므로, 이를 금기시하였다. 그래도 백성들은 청색의 보다는 백의나 옅은 옥색의 옷을 즐겨입는 풍습이 되었다. 그후 본격적인 흰옷에 대한 구박은 조선 말기인 1894년 갑오개혁 무렵에 개화파들에 의해 색옷을 장려하면서 시작되었다. 1906년에는 아예 흰옷을 못 입게 하는 법령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에는 흰옷이 항일정신의 상징처럼 되면서 흰옷을 즐겨 입기는 8·15광복 이전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인데도 조선에 들어온 서양인들은 한국인들은 ‘백의인(白衣人)’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한국인들도 스스로를 ‘백의민족’으로 자칭하여 ‘백의’가 한민족의 표상으로 되었다.
색복장려운동과 염색 옷 입기
일제강점기 이전에도 1905년 대한제국 정부에서 의복 개량화의 일환으로 흰옷 대신 흑의 입기를 권장하여 색복장려운동(色服獎勵運動)을 벌리었다. 그러나 을사늑약의 반대 시위로 오히려 백의 착용이 확산되었다. 흑의(黑衣)는 조선 말 국책 중 하나인 ‘의복 간소화’로 시작되었다. 첫 시작은 1884년(고종 21) 갑신의제개혁(甲申衣制改革)이다. 그러나 관습에 젖은 관리나 백성들의 호응이 적자 1894년(고종 31)에는 입궁할 때 통상복을 ‘흑색 두루마기’로 하였다. 다음 해 1895년 을미개혁에는 단발령을 내리면서 공사복(公私服)을 관민 상하 귀천 없이 모두 검정 두루마기 하나로 통일시켰다. 이후 검정 두루마기는 공직자나 학생에게도 권장되어 통상예복(通常禮服)이 되었다.
그후 본격적인 색복장려정책은 농촌진흥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색복 장려정책’은 관의 주도로 넘어가면서 ‘색복 장려’는 사실상 ‘색복강제’가 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백의를 입은 이는 관청의 출입을 못 하도록 했고, 시장에 흰옷을 입고 온 이에 대해서는 붉은색 잉크나 먹물을 뿌리기도 했다. 면 직원이 장날 흰옷을 입은 농민에게 잉크를 뿌리면서 스탬프로 잔등에다 도장을 찍고 의복을 찢거나 구타를 가하는 등 강압적으로 계도하여 항간에서 원성이 자자했다(劉昌宣, 白衣考, 동아일보 연재, 1934). 먹물 뿌리기 말고도 여성들의 치마를 들쳐 흰 속바지에 붉은 물감을 칠하거나 초상을 당한 사람의 베옷에까지 먹물을 칠하는 경우도 있었다(高富子, 색복장려운동, 한국민속백과사전).
이러한 지경에 이르도록 백의를 고집한 것은 강압적인 면도 있고 경제적인 면에서의 반감도 있지만, 민족의 자존심에 바탕을 둔 저항이기도 하였다. 백의민족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일제에 반하는 우리 민족의 단결력과 차별성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골 장터의 입구에서 검정 물이 끼얹어진 흰옷 입은 떡장수는 배알까지 검게 할 수 없다는 노래까지 불렀다(* 일본 강점기에 번진 남도아리랑 가운데 한 대목에 이런 것이 있다. “떡 팔러 장에 갔다 베옷에 먹물 탕이라. 옷이야 검었지만, 배알까지 검길쏘냐.” 출처: 박건호, 일제에 의한 '백의 말살 정책', 한빛, 2002.4.24.). 백의 집착의 논리는 우선 밝고 깨끗하고 우아한 것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의복생활에 반영된 것, 의식 복장으로서 상복(喪服)의 영향으로 습성화, 물감이 희귀하고 염료가 발달하지 못한 것, 일제에의 저항수단이라는 주장 등등이 있다. 일제에 항거의 상징이었던 ‘백의민족’ ‘백의 동포’라는 말은 한때 부활하는 것 같았다가 광복과 한국전쟁 이후에는 복식문화의 변화로 양복에 밀리면서 흰옷은 물론 ‘백의민족’이라는 말도 사라졌다.
흰옷이 멀어진 시대상
백의 배척 운동에서 자주 거론되는 것은 돈, 시간, 노동력 등을 들 수 있다. 흰옷은 빨리 더러워지므로 돈이 들고 세탁하는 데도 시간이 많이 들으니까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낭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간과 돈을 낭비하니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색옷은 흰옷보다 빨래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음으로 여성의 가사 부담을 줄일 수 있고, 남는 시간만큼 여성들이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흰옷은 금방 더러워져 자주 빨아야 하고, 방망이질이나 다듬이질을 자주 하다 보니 여성들의 고단함은 물론 노동력도 낭비된다고 하였다.
색복장려운동에는 염료와 기술 문제도 있었지만 색옷이라면 때가 덜 타는 검정 옷을 많이 입게 되었다. 필자는 물론 남학생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는 흰 바지 저고리에 검정 조끼를 입고 다녔고, 여학생들은 검정치마 흰 저고리 같은 것이 교복처럼 되었다. 그래서 당시에 검정 치마 흰 저고리가 나오는 고무줄 노래도 있었다. 6·25를 겪으면서 어려운 시절이 이어지는데 60, 70년대에는 제대복이라던가, 군용밀수품을 염색하는 염색소도 많았다. 소위 ‘군복 패션시대’라고 불릴 만큼 호황을 이뤘다. 물론 민간인이 군복을 입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필자도 검정색 카키색 군복을 물들인 것을 입었고, 제재 군인용 군용 워커를 신고 학교를 다녔기에 많은 세월이 지났어도 여자 동창생들의 마음 속에 나의 모습이 잔상으로 떠올랐을 것이다.
[자료: 심의섭, 곰곰이 생각하는 수상록 2, <집콕, 방콕, 폰콕 단상>, 한국문학방송, 2021.02.25: 5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