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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강 신 재
“이거 보세요. 아직 끝이 나지 않았는데요.”
정결한 손을 가진 그 여자는 분주한 듯이 방 안을 오락가락하면서 경아에게 한마디 경고를 하였다. 정중하였으나 어딘지 거슬리는 말솜씨였다.
경아는 장갑을 집어 들려던 손을 잠깐 멈추고 그 깔끔한 간호부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역시 아무 할 말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잠자코 방을 나와 복도를 걸어갔다.
그녀의 충고에 따를 수 없는 것은 경아로서도 지극히 유감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약간 히스테리컬한 음성과는 너무나도 관련 없이, 경아의 일은 끝이 난 것이었다. 그것은 닥터도 알고 있었다. 그는 경아의 위(胃)가 찍힌 X레이의 필름을 펼쳐 든 채, 얘기 중간에 사라지는 경아를 제지할 염도 하지 않았다.
복도는 근심스러운 듯이 웅크리고 앉은 사람이나 부축을 받으며 서 있는 사람들로 그득 차 있었다. 누렇게 부었거나 창백한 낯을 한 그 사람들은 한결같이 공포와 불안이 뒤섞인 눈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공포나 불안으로부터도 경아는 이제 놓여난 셈이었다.
의사는 말하였다.
“용기가 있으시면 수술을 해보셔도 좋습니다. 그러나―하여간 가족 되시는 분과 함께 나와주십시오.”
그는 다른 병원의 의사들보다는 간결한 방법으로 선고를 내렸다. 요컨대 경아는 수술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환자들 틈에서 완전히 별종의 사람인 것처럼 가볍게 사뿐사뿐 걸어나갔다. 검은빛 슈트가 잘 어울리는 날씬한 몸매를 가진 그를, 가운 옆에 노트를 긴 의학생들이 흘깃흘깃 돌아보며 지나쳐 갔다. 커다란 눈을 한 그의 흰 얼굴은 화장한 덕에 신선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가 머지않아―아마 이 복도의 누구보다도 먼저―죽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경아의 입가에는 저절로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비밀이란 어떤 때이고 조금씩은 즐거운 것인가 보았다.
경아는 약국과 수납의 앞을 모르는 체하고 지나버렸다. 아까 간호부가 일러준 듯이, 그런 데에도 사소한 의무 같은 것이 남아 있을지도 몰랐지만……
그는 종합병원의 현관을 나와 맑고 푸른 초동의 하늘 밑에 섰다. 높고 앙상한 포플러 가지 끝에 몇 개 안 되는 네모진 잎사귀가 팔랑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결국 잘되었어.’
하고 경아는 자기로서는 뚜렷이 의식할 수도 없는 깊은 절망의 밑바닥을 방황하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아픈 것은 싫고 그다지 살아 있어야 할 이유도 없고, 또 윤식이한테도 이런 귀결이 제일 자연스러울 테고―’
햇볕을 즐겨 산보하는 사람처럼 그녀는 느릿느릿 한산한 길을 걸어 올라갔다.
완규와 헤어진 것을 조금도 잘못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아였으나, 아이에게는 죄를 지었다는 느낌을 잊지 못했다.
울보이고 어리광쟁이인 여섯 살짜리를 모질게 떼내어버린 것은 아무래도 잔인한 노릇이었다, 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경아가 한 짓이라기보다는 완규의 단호한 조지에 의한 일이었다. 그는 생활 능력이 박약한 경아에게 양육을 맡길 수는 없다는 한마디로 아무러한 타협도 하려 들지는 않았던 것이다. 윤식이와 함께 있기 위해서는 경아가 제 자신을 죽이는밖에 없었다. 그것은 잘못이라 판단했던 것이나 그러나 윤식이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그가 그 자신을 희생했어야 옳았을 것이었다.
경아는 칠 개월 동안 늘 그 생각을 하여왔었다. 완규의 좋지 못한 인간성에 눈을 감고 그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토록 굴욕적인 일이었을까? 아이를 희생하는 잔인성보다도 그것이 더욱더 나쁜 일이었을까?
그러나 어차피 오래지 못할 생명이 라면 윤식이의 손득(損得)에는 실질적으로 별 차이가 없을 계산이 된다.
‘잘됐어 잘됐어 .’
하고 경아는 마음속에 되풀이하였다.
어느덧 의과대학 문을 지나 널따란 포장도로 위에 그는 서 있었다. 어느 편으로건 결어나갈 방향을 정해야만 하였다. 경아는 우두커니 서서 궁리를 한 다음 이편 길로 왔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것을 깨달았다.
그는 되돌아서서 다시 구내(構內)의 비탈길을 걸어 올라갔다. 발바닥으로부터 어쩐지 자꾸 기운이 빠져 나갔다.
반대편 비탈을 내려가다가 경아의 시선은 문득 어떤 한 군데로 쏠렸다.
곤색 스웨터를 입은 청년 하나가 화단 가의 돌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극히 젊은, 아직 소년이라고 하여 좋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길쯤길쯤한² 팔다리를 회색 즈봉과 스웨터가 모양 있게 감싸가지고 있다.
그는 경아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린다고 알자 GI처럼 깎은 머리털을 한 손으로 쓱 하니 쓸어 넘기면서 불량소년처럼 슬쩍 미소를 흘려보냈다. 까무레하고 단정한 얼굴이 고르고 흰 이도 갖고 있었다.
경아는 입술 끝에 고소를 띠었다. 그러나 다음 찰나 그녀는 그러한 가벼운 호의 비슷한 느낌을 가로막는 무언가 스산한 바람결 같은 것을 등 뒤에 느끼고 이내 웃음을 거두어버렸다.
경아는 아까 진찰을 기다리는 동안 이층 복도의 유리창 너머로 이 청년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 청년은 낡은 벽돌 건물 앞에 떼를 지어 늘어선 사람들 틈에 섞이어 있었다. 벽돌 건물에는 ‘혈액은행’ 이라고 적혀 있었다.
서로 비비적대며 몰려선 사람들은 분명 어떤 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면서, 또 되도록 앞쪽으로 나서려고 기회를 노리면서, 일종의 살벌한 긴장 속에 침묵하고 있었다.
어깨가 떡 벌어진 불량배 같은 축도 섞이었고 중학교 모자를 쓴 소년도 보였으나 대개는 후줄근하니 무기력 한, 어두운 눈빛의 젊은이들이었다.
그 대열에 섞이려는 치열한 투쟁을 설명하는 듯, 나무 지팡이를 옆에 낀 상이군인과 인조 치마를 입은 여자 몇몇은 한편으로 비켜서서 아쉬운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이 청년은 유독 눈에 띄었다. 무언지 깨끗해 보이는 데가 그에게는 있었다. 총명한 분위기는 학생일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줄 가운데 끼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과 안면은 있는 듯 이리저리 다니며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때때로 웃기도 하였다. 그 음울한 무리의 곁에서는 웃는 얼굴이 몹시 특이한 것으로 비쳤다.
이윽고 흰 가운을 걸친 사람이 주사기를 쳐들고 나타났다. 사람들은 일제히 한쪽 팔을 걷어붙이면서 왈칵 그쪽 편으로 쏠리었다.
경아는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일까 싶었다. 그리고 가벼운 실망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는 피를 뽑아서 판 것이었다. 그것뿐이었다.
다만 그는 줄 속에 끼어서 음짝도 않은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그렇게 하였다. 필사적으로 순서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어째서 그에게 항거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석연찮은 기분으로 경아는 지금 다시 거기 돌 위에 시원한 낯빛으로 앉아 있는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번에는 자못 대담하게 씽긋 웃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구석은 조금도 없었다. 여자를 보면 한 눈을 째긋¸ 윙크나 하는, 유치한 난봉기와 낭만과 건강―요컨대 젊음이 있을 뿐이었다.
경아는 똑바로 앞을 본 채 그 앞을 지나쳤다. 그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버릇없다’ 고 딱히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요컨대 부질없는 노릇이었다.
네댓 걸음 경아는 걸어나갔다.
그러자 별안간 눈앞이 아찔아찔하여지며 가슴속이 메스꺼워지는 것을 느꼈다. 요즘 빈번히 경아를 엄습하는 빈혈증이 또 일어나려는 모양이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애쓰면서, 반원을 그리고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 눈앞의 광경에 아득한 절망감을 맛보았다.
곁으로 뛰어온 청년의 괄을 경아는 하는 수 없이 붙들었다.
“빈혈 이세요? 저리 도루 들어가실까요?”
그런 말소리를 멀리 들으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 후 그들은 다시 병원의 현관을 나오고 있었다. 차를 불러다 줄까 하는 친절한 제의에 경아는 바람을 쐬며 걸어 내려가겠나고 하였다. 바래다드린다고 그는 따라오고 경아는 한 번 더 고맙다고 인사를 되풀이하였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제법 염려가 된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런 소리를 한다. 아까와는 딴판인 그런 얼굴이 경아에게는 다소 우습게 비쳤다.
그는 두 주머니에다 손을 찌르고 덜렁덜렁 옆으로 따라왔다. 그 걸음걸이가 경아에게 연전에 잃은 남동생의 기억을 소생케 하였다. 수영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경아의 남동생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잃은 육친이었다. 잠깐 망설였으나 경아는 끝내 입을 열었다.
"아까 저기 있었지요? 무슨 사정이 있으신진 모르지만, 그건 좋지 않은 방법 아닐까요?”
상대방은 경아가 자기의 일에 알은체를 하여준 것이 무척 기뻤다는 기색으로,
“뭐 좀 그럼 어떤가요?”
하고 싱그레 웃었다.
“어떤가요라니. 퍽 어리석은 일 아닐까요?”
몹쓸 장난을 한 동생에게 침을 주듯 경아는 가벼운 비난조로 계속하였다. 자기가 이미 인간 사회의 기구 밖으로 한 발을 내디딘 사람이라는 의식도 그가 그 자신에게 다소 무책임할 수 있는 원인이었다.
“왜 누가 피해를 입는 사람이라도 있어서 그리세요?”
넙죽넙죽 주워대면서 웃는 얼굴이 결코 자기의 하는 일을 모르는 사람의 그것 같지는 않았다.
“그야 혈액은행이 있는 이상 그걸 제공하는 사람도 있어야 할 테지만, 그렇지만, 이 일만 따루 떼서 생각해보면……돈을 얻는 수단으로 생각해본다면…….”
경아가 주저주저 말을 하는 것은 자기도 어지간히 싱겁다는 생각을 속으로 하는 때문이었다.
“육체노동이라도 하는 편이 나을까요?”
턱 받으면서 악의 없이 빈정댄다. 화제가 생긴 것만 그에게는 즐 다는 눈치 였다.
“한두 번이 아니죠? 어때요?”
“그러믄요. 용돈만 떨어지면 와야는결요?”
“용돈…… 이 그렇게 필요해요? 저어 학교에 다니시나요?”
“아뇨. 아무 데도 안 다닙니다. 아무 델 가도 금세 쫓겨나니깐요.”
경아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가 농담을 하고 있는지 어쩐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요컨대 남의 일이었다. 대단치도 않은 남의 일이었다. 그녀는 이제부터 곧장 아파트에 돌아가서, 그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방에 돌아가서, 몸을 내던지고 드러누워 있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경아가 할 일은 그것뿐이었다.
“공부를 안 해 또 잘못인가요? 이거 오늘 사곤데…….”
청년은 붙임살 좋게 지껄여댔다. 경아는 그가 꽤 좋은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흘깃 가져보았다. 그리고 한 마디만 더 하였다.
“어쨌든 내 생각엔 자기 손으로 자기 건강을 파괴하는 건 죄악일 것이 틀림 없어요.”
육체라는 말을 경아는 회피하였다. 옆흘 걷고 있는 사람의 체구는 너무도 당당한 남성의 그것이었으니까.
“집의 형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다른 분한테 그런 얘길 들으니 까 좀 이상스런 데요.”
찻길까지 아직도 거리가 있었다.
경아는 무의미한 소리를 물어보았다.
“형님이 계셔요?”
청년은 지금 지나온 건물께로 엄지손가락을 젖혀 보이면서
“대학에서 강의를 하시는 법철학의 대가이죠. 나하군 도대체 의견이 안 맞지만.”
“……”
“헌데 그런 이는 무슨 재미루 세상을 사늠지 도무지 모를 일이에요. 집안에 식구라곤 하나두 없이 그저 책 속에만 묻혀 앉았으니. 그렇게 살 테면 건강은 해서 무얼 해요. 가엾은 사람이죠.”
그러면서 소리를 내어 웃었다.
경아는 잠자코 있었다. 이 낯선 젊은이에 의하면 건강은 폭발할 듯한 향락을 위해서만 의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사람의 일을 누가 알까?
어딘지 어긋난 생활을 하고 있는 듯한 이 젊은이의 의견이 실상은 옳은 것일지도 몰랐고, 어마어마한 학자의 공헌이 의외로 대단찮은 것일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어쨌든 경아의 이마에는 다시 식은땀이 배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서 관자놀이를 누르고 이제는 곁에 선 젊은이에게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차가 앞에 와 멈추고, 경아는 올라가 쿠션에 기대었다. 그가 밖으로 내보낸 목례는 거의 무표정하고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였으나 도어를 닫아준 청년 편은 몹시 서운한 얼굴을 지었다.
어느 때까지라도 자기의 차를 쫓고 있을 듯한 검은 두 눈을 경아는 등 뒤에 감각하였다. 젊음의 부드러움 같은 것이 흘깃 심장 위를 스치고 지나간 듯하였으나 그저 순간의 일이었다. 경아는 역시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한 자기 자신의 문제를 잠시 라도 의식 밖으로 몰아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경아의 오피스는 반도호텔 안에 있었다.
승강기를 육층에서 내리면 ㄱ자로 두어 번 복도를 구부러져 간 곳에 있는 남향 방들이었다. 사무실로 들어가려고 할 때에나 반대로 복도로 나설 때이면 자연 안마당을 격한 건너편 창들이 눈에 띄었다.
그 여러 창문의 하나쯤에는 어느 때고 대략 비슷한 하나의 실루옛이 떠올라 있었다. 남녀가 깊이 포옹한 모습이 그것이었다. 그곳도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는 방들이었지만 고국을 멀리 떠나온 외국인들은 특별히 정서적인 기분에 휩싸여 있기라도 하였던 것일까.
무심히 지나다가는 부딪히는 장면이요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일이기는 하였지만, 요즘의 경아에게는 반드시 그렇다고만도 할 수는 없었다. 인생의 한 가지 심벌에다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댄 것 같아 경아의 눈 속의 우울은 한층 짙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병원을 다녀온 다육으로 곧 직장을 그만두리란 마음도 가져보았었다. 그러나 그 약품 회사의 지점장인 버클레이 씨는 진정한 이유를 모르는 탓으로 경아에게 한 달만 더 그대로 있어줄 수는 없겠느냐고 물었다. 버클레이 씨는 한 달 후에는 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경아는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참아가면서 사무를 볼 수도 있을 듯하였고, 그렇게 하는 편이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는 자기에게는 오히려 나을 듯한 마음도 들었다. 병세를 견제해보려고 조심스러운 그러나 헛된 노력을 하며, 그리고 마지막 단계가 부디 그 후에 와주기를 빌면서 그녀는 계속해서 출근하였다.
빠짐없이 일을 맺고 싶은 마음에서 늦도록 남아서 일하기도 하였다. 습관화된 책임감 이외에 별 의의도 기쁨도 있을 수는 없었으나 되도록 아무런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시간을 넘기려고 하고 있었다.
가끔 경아는 병원 마당에서 만났던 청년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러면 그의 가슴에는 일말의 호감과 또 일말의 염오⁴가 한데 섞이면서 펴져 나갔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무슨 일이―어떤 더욱 아득한 기억 같은 것이, 생각날 듯한 안타까움을 느꼈으나, 그것이 무엇에 관한 일인지는 알 수 없었고, 또 더 깊이 궁리를 해보기도 전에 대충 그런 감은 사라지곤 하였다.
그날 저녁 때 경아는 늦게까지 남아서 일을 하였다. 그러고는 피곤에 못 이겨 이마를 괴고 데스크에 엎드려 있었다.
계절하고는 너무 높은 스팀의 온기가 방 안을 답답할 지경으로 데우고 있었으나 손발이 싸늘하고 한기가 들었다. 그렇다고 열이 나는 모양은 아니었다. 너무 굶은 탓이라고, 일어나 내려가서 무엇을 좀 마시기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대로 언제까지나 엎드려 있었다.
같은 생각만을 여러 번 거듭하고 있으려니까 그는 자기가 실지로 의자를 일어나서 한쪽에 걸어둔 엷은 검정 코트를 벗겨 입고 도어를 밀친 듯한 손바닥의 감촉까지를 뚜렷이 의식 했다. 그리고 또 그의 눈은 건너편 창에 뚜렷이 떠오른 실루옛을 보았다. 그는 걸어가기를 그만두고 등을 벽에 기대었다. 그리고 자기의 귀에도 거슬리는 어렴픗한 음성으로 몇 번이고 중얼대었다. 그들은 살아있다, 나는 죽었다. 그들은 살아 있다, 나는 죽었다. 그들은……
여러 번 노크를 하는 소리에 경아는 겨우 정신을 돌이켰다. 아직도 이러고 있었다고 알았으나 바로 앉아야 한다는 생각은 얼핏 들지 않았다.
다시 노크 소리가 났다. 그리고 한 남자가 실내로 들어섰다. 그는 들어오면서 모자를 벗어 쥐었으나 그런 자세로 있는 경아를 보자 놀라는 얼굴로 급히 다가왔다.
경아는 피곤이 아로새겨진 얼굴을 들었으나 그 삼십을 좀 넘은 신사의 얼굴을 얼른 알아보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그저 습관적으로 미소하려 하다가 그러나 그녀의 입술은 얼어붙고 말았다.
“퍽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그런데 어디가 편찮으신가요?”
상대방의 폭이 넓고 부드러운 음성이 울렸다.
"아니 괜찮습니다. 그런 데 어떻게 여기를 오셨어요.”
경아는 조금 당황해서 일어나면서 그런 소리를 했다.
“경아씨를 뵙고 싶어 왔습니다.”
그러고는
“저 밑에서 한 식 경⁵이나 기다렸지요. 시간이 지나서 가버리신거나 아닌가 했습니다.”
경아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짙은 어둠이 그것을 둘러치고 있었다.
“제가 여기 있는 줄 아셨더랬어요?”
경아는 생각에 잠겨서 한결 다정한 투로 말하고 나서 생각난 듯이 의자를 권하였다.
그――박현태는 경아에게 있어 실은 그토록 까마득히 잊고 있어 마땅한 사람은 아니었다.
여성의 현실성이――본능처럼 여자의 성품 속에 차지하고 있는 비낭만성이, 만약 부끄러워야 할 일이라면, 경아는 박현태의 앞에 그것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박현태는 경아의 첫사랑의 상대였다.
학생 시절의 경아는 사치스럽고 좀 교만하기도 한 소녀였다. 그는 박현태의 말이 적고 신중한 성품이 어쩐지 미지근히 여겨지는 때도 있었고 가다가는 은근히 자존심을 상하는 일도 있었다.
용모부터가 날카롭게 재자형 (才子型)인 최완규가 나타나서, 거의 방약무인하게 경아의 육체와 정신을 뒤흔들어놓았다고 느꼈을 때에 그는 그다지 큰 망설임도 가져보지 않고 박현태로부터 등을 돌렸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불꽃을 이루는 격렬함이 그에게는 없다고 믿은 때문이었다.
현태가 받은 타격은, 그러나 뜻밖이리만큼 심각하였고, 그의 인생은 거의 지리멸렬로 된 듯이 보여지는 일에, 경아는 아연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그는 현태를 잊고 말았다.
완규와의 사이가 종결을 고한 이즈막에 와서도 이상하리만치 그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늘의 돌연한 내의(來意)⁶를 경아는 물론 짐작할 수 없었으나 그에게서 대뜸 느껴지는 것은 봄비 같은 정감(情感)이 촉촉이 그의 전신을 적시고 있는 듯한 일이었다. 그는 마치 사랑을 고백하러 달려온 소년처럼 상기한 빛을 어디엔지 숨겨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은 경아에게 별수 없이 옛일들을 생각나게 하였다.
현태는 경아의 물음을 흘려버리고서
“몸이 그처럼 불편하시면서 일을 해야만 합니까?”
경아는 대답 대신 웃어 보였다.
“선생님은 그새 안녕하셨어요?”
“네…… 저 오피스에 이렇게 앉아 있는 것도 무엇하니 나가보시지 않으렵 니까? 이 위 스카이라운지에라도 잠깐.”
“네 그러지요.”
현태는 코트를 걸쳐주면서 퍽 짧은 사이이기는 하나 경아의 어깨에 두 손을 놓고 있었다. 경아는 알지 못한 체하였다.
라운지의 구석진 자리로 둘이는 걸어 들어갔다. 인공으로 이룩된 아늑한 어둠이 글라스가 부딪는 가만한 소리, 가만한 말소리들과 함께 달콤하고 비밀스러운 공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속삭이듯 한숨짓듯 남미의 음악이 나지막이 마루 위를 감돌고 있었다.
경아는 하염없는 밤 시간을 여기 와서 보내는 일도 있었지만 오늘은 아주 딴 곳으로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속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현태는 탁자를 새에 놓고 마주 앉지를 않고, 통로를 가로막듯 의자를 당기면서 경아의 옆으로 걸터앉았다.
“이렇게 옆에서 쳐다보아야 이야기가 잘 나오죠.”
하면서 전에도 그렇게 앉는 버릇이었다. 모처럼 그렇게 앉아놓고도 대개는 묵묵히 시선을 떨구고 있어 그런 때에 경아는 흔히 그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가 보다고 여겼었다.
“무엇을 드시겠어요?”
“진피즈⁷를.”
“그럼 진피즈를 둘.”
그는 웨이터를 보내고 나서 새삼스러운 눈초리로 경아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여기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느냐 하셨지요? 우연이――어떤 우연이 그걸 가르쳐주었다고 우선 말씀해둘까요? 우연엔 의사가 없겠지 만――사람은 굉장한 작용을 받습니다.”
“재미나게 지내셔요? 무얼하셔요?”
경아는 가볍게 비켜났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경아씨가 판사나 검사 같은 직업은 싫다고 하셨죠. 그래서 학교엘 갔습니다.”
경아는 목을 옴츠리고 웃는밖에 없었다.
“죄송했어요.”
“죄송했구말구. 권총으로 쏘아버릴까 생각했던 일도 있었지.”
현태는 농담인 체하였다.
“이젠 비웃으셔도 좋으실 거예요. 전 실패했어요.”
“알고 있었습니다.”
현태는 낮은 소리로 대답하였다. 그의 낮빛은 경아의 그것보다 오히려 침통했다.
“나는 열심히 살려고 한 결과가 그랬어요. 그러니까 후회하지는 않아요.”
경아는 마치 항변이나 하듯 흥분하면서 그렇게 늘어놓았다. 무엇 때문에 그런 소리를 현태에게 해야 하는지 자기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행복하시라고 빌었습니다만…….”
얼굴을 숙여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가 두 눈을 깊이 감아버린 것을 경아는 알았다. 경아는 그가 정말 그랬으리라고 생각하였다. 피투성이가 되어 괴롭더라도 그는 그랬으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러자 경아의 마음속에는 한 가닥의 애감(哀感)과 더불어 일종의 노여움 같은 것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순수한 사랑에의 향수와 상처 진 자존심의 아픔이 한데 엉킨 것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진피즈가 탁자 위에 놓여졌다.
“이거 괜찮을까요?”
얼음이 뜬 투명한 글라스를 집어 들고 현태는 망설였다.
“무엇하시면 다른 것을 시킬까요? 알렉산더나 핑크 로즈나……”
무언지 초조한 것 같은 경아의 표정을 달래듯 빙그레 웃고 나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공연히 또 센 체하지 마시고…….”
경아는 하는 수 없이 비시시 웃었다.
“사실은 그래요. 밀크를 주세요.”
그러고 나서 은근히 또 캐어물었다. 어째선지 분위기가 편펴롭지 않은 때문이었다.
“오늘은 이 근방에 볼일이 있으셨나요?”
“볼일은 한 군데에밖에 없었습니다.”
현태는 좀 원망스러운 듯이 세찬 말씨로 잘라 대답하였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술잔을 어루만지면서,
“경아씨를 만나고 싶었어요. 병원엘 오셨었다기 어디가 많이 아프시지나 않나 염려도 되고. 참 정말 어디가 나쁘셨어요, 아까도…….”
경아는 고개만 옆으로 저었다. 간에까지 암이 퍼지기 시작하였다는 자기 위의 이야기는 자기 자신과도 하기가 싫은 처지였다.
“병원에 간 결 아셨어요? 누가 그랬어요?”
눈 속에 망설임 이 떠돌았다. 그때 그 곤색 스웨터의 청년이 생각났다. 그리고 찻길에서 손수건을 꺼내면서 진찰권을 흘려버린 듯한 뚜렷잖은 기억도……
“내 아우를 기억 못 하신 게 당연하시겠죠. 코 흘리던 것이 그렇게 자랐으니까요. 그 애가 어쩌다 집 옐 들르더니 경아씨의 진찰권을 꺼내주었어요. 아닌 게 아니라 그때는 놀랐습니다.”
“그럼 그가 바로 현기…… 그런 이름이었지요?”
경아는 아연한 기분과 또 무언지 죄스러운 느낌을 아울러 맛보면서 중얼대었다. 그러고 보면 그 청년에게는 현태의 모습이 없지도 않았다.
“네, 그 애 때문에 상심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것은 고사하고 그 애도 이름을 보고서는 생각났던 모양이지요. 옛날의 경아씨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경아씨라기보다 경아씨의 일을…….”
그의 미간은 어두워진 듯하였다.
경아는 진찰권의 주소란에다 오피스의 그것을 적어 넣었던 일을 상기하였다. 물론 별 의미도 없었으나 구태여 말한다면 아파트의 번지수를 알지 못하는 때문이었다.
“그랬었군요…… 그랬었군요…….”
탁자에 걸친, 그것만은 현기와 신통하게 같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책과 더불어, 그 아우의 눈에는 가엾은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박현태였다.
이제는 확실히 편안치 않아진 듯 탁자 밑에서 경아의 발이 달막달막하였다.
그 낯빛은 조금씩 창백하여져갔다.
그는 되도록 속히 현태의 앞에서 사라질 구실을 생각해내야 한다고 열심히 궁리를 하고 있었다.
다음 주말에 경아는 어느 레스토랑에서 현태와 식탁을 함께하였다.
전번 헤어지고 난 뒤로 현태는 두어 번 전화를 겉어왔고 그때마다 무어라고 핑계를 대어 만나기를 피하였지만, 그랬더니 현태는 편지를 보내와서, 경아는 아무래도 한 번은 만나가지고 자기의 입장을 밝혀두는 것이 옳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이었다. 자기는 이미 그런 문제의 권외에 서 있다고, 다시 말하면 애정이라든가 혹은 단순히 우정이라는 인간관계일지라도 새로 맺을 의사는 갖지 않았다고 밝혀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경아는 자기의 육체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가 싫었으므로 거기에는 묵비권을 쓸 작정이었다.
그날 밤 경아는 트렁크 밑바닥에서 청록색 칵테일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조개껍질을 꿴 목걸이를 가슴 앞에 가져가면서 경아는 자기가 이렇게 단장을 하는 것이 이것으로 진정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자 그는 바로 눈앞에 와 있으면서 또 무한히 아득하게 느껴지던 죽음과 무(無)의 의미를, 순간 두 손으로 잡아본 듯한 느낌을 가졌다.
그것이 바로 죽음인 것이었다.
그 무엇을 하려 해도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절대로, 라는 말은 이 경우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래도 너무 심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한 진실이, 단 한 개의 증명할 수 있는 진실로서,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경아는 오랫동안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그 레스토랑을 향하여 걸어나갔다.
현태의 편지는 그들이 더 젊던 시절에 쓰던 그것들에 비하면 도저히 연문이라고는 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것은 사무적인 문면에 더욱 가까웠고, 길이도 얼마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연문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자기가 한 번 결혼하였으나 이내 상처했다는 경위를 간단하게 적고, 그러한 자기의 운명에 오히려 거역하지 않고 살아왔으나 현실의 경아가 다시 앞에 나타나니까 ‘인간답게’ 살고 싶은 의욕이 자기에게도 돌아왔다고 하고, 어떤 의미로건 경아의 도움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고 적고 있었다.
경아가 만약 지금 같은 경우에 처해 있지만 않는다면 더욱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게 할 힘을 그것은 갖고 있었다. 완규와의 생활에서 경아는 상처를 입은 것이 사실이었고, 현태와 같은 일견 둔중한 성격의 사람만이 왕왕 그의 순정을 지켜가는 수가 있다는 사실을 통찰하게끔 경아 자신이 성장하고 있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은 현태를 만난 것이 청춘을 다시 만난 듯이 경아는 반가웠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유는 물론 한 가지밖에 없었다. 로비의 소파에 현태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쥣빛 양복을 턱 하나 없이 말쑥이 차려입고 새하얀 손수건을 가슴에다 꽂고 있었다. 그의 옷차림도 얼굴 표정도 뜻 깊은 밀회를 가지려는 사람에게만 어울리는 그런 것이었다. 경아는 약간 서글픈 미소를 띠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시간이 느지막했는데도 레스토랑 안은 혼잡하였다. 경아는 이야기가 감정적으로 흐르지 않기를 원하고 있었으므로 적당히 북적대는 편이 오히려 좋았다. 그는 되도록 담담하게 가벼운 말씨로 이 ‘회담’을 끝마치고 싶었다.
“자, 무얼 드실까요. 오늘은 어디 좀 많이 잡숫는 걸 보고 싶습니다.”
경아는 메뉴를 집어 들고 되는대로 주워대었다.
“굴, 병아리, 그린 샐러드하구 어니언 수프, 그리구 아이스크림.”
그래놓으면 실지로는 아주 조금밖에 먹지를 않더라도 현태의 주의를 끌기를 면할 것 같았다.
경아가 현기의 안부를 물었기 때문에 화제는 잠시 그의 일로 쏠렸다. 현태는 되도록 밝은, 그리고 가볍게 아우의 일을 설명하려하는 듯하였으나 그 내용은 그리 달가울 수 있는 것은 못 되었다.
한마디로 한다면 그는 현기가 무엇을 바라고 있으며 생각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으려고 날뛰어서, 학교에서도 형의 집에서도 멀어지기만 했고, 완력 때문에 종종 사고도 일으켰다. 다만 상냥하고 다정한 계집 아이들이 때때로 그의 맘을 달랠 수 있는 듯하였으나 어쩐 일인지 그는 한 소녀를 오래 사랑하지 않았다.
“정의감이라 할까 이상한 자기주장 같은 것은 갖고 있어요. 제 동무라는 운전수가 치어논 어린애한테 늘 피를 뽑아준다든가 하는. 하지만 어디를 돌아다니면서 무엇을 하는지 항상 조마조마합니다. 다만 오래 지나는 사이에 나는 그에게 대해서 무언지 자신 비슷한 게 생겨난 것 같아요. 무뢰한으로 그칠 것 같지는 않다는. 머리도 썩 좋은 애였어요.”
현태의 끈기 있는 어투에는 그저 지나가는 얘기로서가 아니라 경아에게도 이 일을 알고 있어달라는 듯한 열심한 태도가 엿보였다.
“유쾌한 것은 그 친구가 내 걱정을 하고 있는 일입니다. 아니 걱정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적극적으로 어쩌자는 태도는 아니니까요. 방관하고 있을 따름인데 의견을 말한다면 지극히 동정받을 위치에 내가 있다는 거지요. 그래 나는 공부 안 하는 놈은 책이 주는 쾌락도 믿지 않을 게라구 응수해주지요.”
“소년 시절이 너무 쓸쓸했었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랬습니다. 덩그러니 큰 집에서 그 애는 거의 혼자 자라난 셈 이니까요. 나는 한데서 기거를 했으면서도 도무지 그런 무렵의 그의 기억이 나질 않아요. 별로 그의 생각을 안 해주었다는 증거일 겁니다.”
“걸 프렌드도 많이 생기고 그랬으니 이제는 그 문제는 완화됐겠군요.”
“글쎄 원…… 많다는 건 또 없다는 것도 되니까…… 청순한 사랑이라는 걸 요즘 사람들은 믿지 않으려 하지만…….”
현태는 말끝을 흐렸다. 경아는, 현태의 비참했던 청춘을 알고 있고, 그 후의 그의 가는 길도 보아온 현기가 청순한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일 것 같았다. 그녀는 전번에 만난 그 청년이 아니고, 거의 십 년이나 전에 현태의 집에서 본 일이 있는, 눈이 크고 수줍어하기만 하던 소학생을 상기하고 잠시 가슴이 저릿하였다.
“그런데 경아씨는 조금도 잡숫지를 않는군요. 어쩐 일입니까.”
“그렇지도 않아요. 먹고 있어요.”
“좀 고단해 보이기도 하고. 얼른 끝내고 밖에 나가 바람을 쏘이실까요? 이 방은 좀 덥군.”
현태의 제안은 고마웠다. 경아는 쓰리도록 공복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아무 음식도 받으려고 하지 않는 자기의 위를 이제는 만성이 된 절망적인 기분으로 달래고 있을 뿐이었다. 음식 냄새는 고통과 불쾌를 가져올 뿐이었다. 그는 아이스크림을 한 번 떠먹고는 이내 숟갈을 내려놓았다.
현태는 다른 데로 가서 식사를 고쳐 할까고 뭍었으나 경아는 물론 사양하였다. 그럼 요다음 번에는 자기가 맛있는 집으로 안내하겠노라고 하면서 현태는 의자를 일어섰다.
털외투에 감싸인 경아와 현태는 덕수궁 뒷담을 끼고 정동 예배당 앞께로 걸어갔다.
겨울로 접어들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어딘지 따사함이 남아 있는 밤이었다. 달은 없고 찬란한 별들만 하늘에 그득 뿌려져 있었다.
“편지하신 것 보았어요. 그런데요…….”
여학생이 말을 하듯 경아는 말꼬리를 길게 잡아끌었다. 담담하게 말을 해버려야만 하였다.
“저는 어떤 일이 있어서 말이지요, 지금―아마 어데 먼 데로 가거나 그렇게 될 거예요. 그래서 말이지요, 새삼스레 선생님의 생활에 접근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말이지요. 알아주셔야 해요.”
경아는 발끝을 내려다보며 말을 하였다. 그의 그러한 동작과 말씨에는 무언가 단호하고 고집스러운 것이 들어 있어 보였다.
잠깐 동안 현태는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말하기 시작한 그의 음성에는 잔잔한 미소 같은 것이 담겨져 있었다.
“그런 소리 하실 줄 알았지요. 그렇지만 제 말씀이 무어 무리한 것이었나요? 사람과 사람이 알고 지내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경아씨와 내가 한길에서 만나서 그래 서로 못 본 체를 해야 합니까? 그런 말씀이 세요?”
그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정면으로 나오기를 피해버린 것이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다만…….”
“그런 게 아니죠? 것 보세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만해두세요. 요컨 대 저는 물러나지 않습니다.”
현태는 농담같이 덧붙였다.
경아는 고개를 숙이고 혼자 생각에 잠겨버렸다. 현태와 헤어져 있었던 세월의 길이를 헤아렸다. 현태는 이렇게 일을 능처무버릴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장년(壯年)이 가지는 끈기와 무게 같은 것을 경아는 본 듯했다.
‘며칠 내로 버클렉이 씨는 떠나고. 나도 직장을 그만두고 방이나 옮겨버리면 자연 만날 기회도 없어질 테지.’
쓸쓸해지면서 그는 생각을 더듬었다. 더구나 현태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 있는 편지의 내용에다 특별한 해석을 붙일 수는 없었다.
“춥지 않으세요?”
얼굴을 들이대며 현태는 물었다. 그것은 정말 경아가 추워하고 있을 것을 염 려하는 목소리였다. 사람의 마음의 따뜻함을 오랫동안 생각해본 일도 없는 경아는 이때 불쑥 눈 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연신 두 눈을 깜빡거리면서 몹시 난처해하였다.
저 같은 사람의 생일이 무어 대단할 것도 없고 또 물론 까맣게 기억두 안 하시겠지만 오늘이 실은 그런 날이고 보니 별 지장이 없으시면 저녁 시간을 자기에게 달라고, 웃음의 소리를 섞어가며 현태가 전화를 했을 때, 경아는 선뜻 잡아떼지를 못하고 말았다.
자기 말대로 무슨 생일을 어쩌고 할 나이도 계제도 아니었고 그것은 다만 경아가 거절하기 어려우라고 그러는 줄도 알 수 있었지만 그러고 보니 참 그의 생일이 이런 계절이던 것을, 그가 지적한 대로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도 약간 당황을 느끼게 하여 대답이 애매하게 흐려버린 것이었다.
“늦게까지요? 토요일인데도 그렇게 일이 많아요? 어쨌든 모시러 가겠습니다. 제가 세상 밖에 나온 일이 그다지 저주스런 일만 아니라면 설마 거절하시진 않으실 테지. 하하하……”
수화기를 놓고 나서 경아는 요즘 한층 파리해진 얼굴로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는 다시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으나 얼마가지 않아 모두 한편으로 밀쳐버렸다. 가슴께가 답답하고 머리도 무거웠다. 그는 식당에 내려가서 오트밀과 주스를 한 잔 억지로 목구멍으로 밀어넣었다. 그러고 나도 여전히 찌뿌드드한 위께에로만 신경은 쏠렸다. 경아가 소녀 때 집안에 큰 소란을 일으키며 돌아간 백부의 임종 광경이 요새 자주 경아의 안저⁹에 되살아났다. 백부의 병은 위암이었다. 간으로 퍼져간 경위도 경아의 케이스와 한가지였다. 임종을 앞둔 이삼 주일간 그는 몸을 비틀면서 격통을 호소했다. 주위의 사람들께 그지없는 공포를 남기면서 그는 사라진 것이었다.
경아는 환상을 털어버리고는 옆자리 동료에게 한마디 남기고 휴게실 소파로 가 드러누웠다.
벽으로 반 이상 가리고 나며지는 커튼이 쳐진 그 갸름한 방은 언제부터인지 여자 직원들의 전용이 되어 있어 그들은 거기서 화장도 고치고 옷도 갈아입는 것이었으나 요새는 주로 경아가 소파를 독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축 늘어져서 누워 있었다.
편안치 않았으나 옴짝하기도 싫어 새우등을 한 채 의자 밖으로 내민 두 다리를 바라다보았다. 끝이 뾰족하게 세모진 유행의 구두는 화사하고 그리고 약간 우스꽝한 선을 그리며 발끝에 신겨져 있었다. 자기가 신고 있기는 하지만 자기의 것 같지가 않다, 그런 감이 들었다. 검은 스커트도 스웨터도 그리고 건들거리는 브레이술렛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임시로 자기 몸에 부착되어 있을 뿐이라는 기묘한 생각을 그는 하고 있었다. 방금 걸려온 현태의 전화도 다를 것이 없었다. 정열이니 사랑이니 성실이라는 어휘조차도 이제 그에게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보다는 다급한 문제가 있었다. 길가에서 죽으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신변을 거뜬히 정리하고 병원에 들어가서 죽으리라고 맘먹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좌절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유일한 일이었다. 병원이, 치료의 방법도 없는 마지막 고비의 환자를 받아들여준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그 깔끔하고 주제넘은 간호원이 있는 병원은 싫었고, 어디 수녀라도 있는 병원이 좋으리라 싶었다.
내세(來世)라는 것을, 경아는 물론 결코 믿을 수 없었으나, 가톨릭의 수녀의 그 어찌할 수도 없는 착오(錯誤) ―미래에의 환상―만을 제외한다면, 그들은 경아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람은 죽는 것’이라는 명제(命題) 속에서 살고 있었고, 따라서 그들에게만은, 신경을 안 쓰고 자기의 죽음을 개방할 수가 있을 듯하였다.
비용을 준비해서 그렇게 베드에 누워버리면, 줄이 끊어진 고무 풍선처럼 그저 지구 상에서 소멸하는 것이었다. 애끓는 애착도 미련도 있을 수 없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았다.
경아의 눈앞에는 윤식 이의 모습이 커다랗게 떠올랐다. 아이는 눈물이 글썽 해서 입을 비죽거리면서 경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에 경아와 끊을 수 없는 것이 남아 있었다. 경아는 끓어오르는 사랑으로 그를 감싸주고 뺨을 비비고픈 갈망에 전신을 떨면서 죽어가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따로따로 살고 있는 것이 아이와 헤어진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듯이, 자기가 흙이 된 뒤를 상상하더라도, 그와 헤어져 버린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경아가 얼핏 그의 일을 머리에 그려내지 않는 것은 이러한 생각에 빠지는 일이 너무나도 견디기 어려운 것을 알고 있는 때문이었다.
그는 오래도록 소파에 누운 채로 있었다.
저녁 때 조금 원기를 회복하여 아래로 내려갔다. 도어를 밀치고 들어서는 현태와 마주치자 기계적으로 미소해 보이고 문을 열어주는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나증에 다시 시내로 모시기로 하고라도 우선 저희 집에 잠깐 들러주세요. 꼭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어느 정도 명령적으로 들리는 어투로 현태는 그렇게 부탁을 하였다. 경아는 아무래도 좋은 기분으로 찬동하였다. 다만 차가 달리는 방향으로 보아 그가 학생 시절에 있던 그 집이 아닌가 싶어졌고, 그 집이 아니었으면 하고 바라는 듯한 마음은 생겼다. 그러나 현태가 차를 멈추게 한 곳은 역시 경아의 기억에도 어렴풋이 남아있는 양관¹⁰ 앞이었다.
예전에 현태의 숙부는 이 큰 저택에 살고 있었고, 현태는 자식을 두지 못한 그를 위하여 이 집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경아는 한두 번 이 마당에 들어온 일이 있었고, 그때는 물론 현태와 결혼할 것으로 누구나가 믿고 있었다.
지금 현태는 현기와 단둘이 살고 있다 하였다. 그 현기도 돌아오는 일이라곤 거의 없다니까 을씨년스레 넓은 빈집 같은 데서 현태는 혼자 살고 있는 셈이었다. 담장이고 벽이고 정원이고 손이 가질 않아 퇴락한 감이 짙었다. 경아는 마음이 언짢았다.
정원 한구석 돌걸상에는 개가 몇 마리 매어져 있었다. 개들은 사람을 보자 시들한 대로 몇 마디씩 컹컹 짖는 시늉을 했다.
“현기가 말이에요. 접때 돈을 좀 주겠냐기에 주었더니 저렇게 숱한 개를 사들여 왔어요. 그리구는 퍽 귀해하고 그리다가도 또 저렇게 버려두고 나가거든요. 시중할 사람도 없고 골머립니다.”
늙은 식모가 먼저 들어가더니 집 한 모퉁이에 불이 켜졌다.
붉은 양탄자가 깔린 넓은 그 방은 한편에 파이어 플레이스가 있었으나, 시커멓고 모양 사나운 오일 스토브로 덥혀지고 있었다.
낡아빠진 안락의자에 걸터앉아서 현태는 적이¹¹ 경아를 건너다 보았다. 경아가 눈을 들어 마주 쳐다보니까 그는 빙그레 입가로 웃어 보였다. 그것은 북받쳐 오르는 여러 가지 감정을 스스로 익삭이려는¹² 듯한 표정이었다.
“경아씨하구 이렇게 집 안에서 마주 앉아보고 싶었습니다.”
경아는 할 말이 없어 그저 미소하였다.
이윽고
“허긴 생일이라구 생억지를 부렸으니 디너 파티를 열기는 여는데……”
옆방으로 가서 술병이며 글라스를 집어다 탁자 위에 얹으면서,
“빈객하구 주인 측이 합해서 두 명뿐입니다. 게다가 요리는 음식점에서 가져온 것하고 캔으로 참아주시는밖에 없겠어요.”
경아도 일어나서 피너츠가 마구 굴러 떨어지는 접시를 그의 손으로부터 받아 쥐었다.
“천만의 걱정을 하십니다. 저야말로 졸지에 축하의 선물도 없이 와서 죄송합니다. 우선 제가 왔다는 성의나마 받아주세요.”
웃음소리가 흘렀다. 테이블에는 캔에서 나온 햄 덩어리며 썰지도 않은 치즈며 병에 든 피클이며가 요리점 접시에 담긴 음식들과 함께 두서도 없이 늘어놓였다.
“그래도 돌아다니면서 무척 정력을 소비한 결과가 이렇습니다. 어, 참 그것도 있었군.”
현태는 부산히 책상 밑 서랍을 열고 식료품점의 커다란 봉지를 끄집어내기도 하였다. 평상시에 현태의 식사 시중을 별반 들지도 않는다는 식모는 오늘은 거의 소용에 닿지도 않았다.
유쾌하고 약간 진묘한¹³ 식사가 시작되었다. 친밀한 사람들끼리만 나눌 수 있는 즐거운 화락¹⁴함이 방 안에 감돌았다. 만약 경아가 조금만 더 식욕을 느낄 수 있었더라면―만약 그 흉측한 위협을 잊을 수만 있었더라면―그것은 진실로 유쾌한 식탁이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눈치 채이지 않으려고 경아는 보다 많이 지껄이고 웃고 하였다.
먹는 일이 대충 끝나자
“여전히 아무것도 안 잡수시는군.”
현태는 중대한 일을 발견한 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전 그래요.”
경아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을 했다.
“모레 월요일엔 병원에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날은 직장을 쉬십시오.”
“아니라니까요.”
“고집을 부리지 마시고.”
엄격하게 그는 명령하듯 하였다.
그들은 요리 접시를 한데 쌓아 올렸다. 접시에 찍힌 R정 (亭)의 마크는 경아의 눈에 사람을 그리워하며 쓸쓸한 현태의 생활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접시가 싸늘해요.”
그는 의미가 통하지 않을 소리를 하였다.
“접시가 어때요?”
자기도 살아서 이렇게 사람의 체온이 닿이는 곳에 더 오래 머물러 있고 싶다고 경아는 별안간 갈망하였다. 차디찬 돌 밑에 흙이 되어서 혼자 누워 있기는 싫었다.
경아는 마침내 자기가 그처럼 경계하던 ‘발악적인’ 상태에 어느덧 빠져버린 것을 깨달았다. 그는 슬며시 손을 놓고 창가로 걸어갔다. 검은 유리알에 자기의 얼굴이―아직 젊고 곱게 떠올라 있었다.
‘왜 나는 죽어야 하나?’
하고 그는 뼈저린 비명을 처음으로 올렸다. 그의 몸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옆방에 나갔던 현태가 등 뒤에 가까이 와 섰다.
“경아씨 제 물음에 대답해주세요. 어디 먼 데로 가신다고 하셨지요. 쉬이 결혼하신다는 뜻이었나요?”
경아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아닙니까? 감사합니다. 한마디만 더 묻게 해주세요.”
그는 경아의 두 어깨를 잡아 앞으로 돌려세웠다. 눈물 자국이 경아의 얼굴을 더럽히고 있었으나 그는 표정을 움직이지도 않고 재차 물었다.
“경아씨는 제가 여전히…… 싫으십니까?”
경아는 또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꾸며대기 싫은 순수한 마음이 되어있었다.
“감사합니다.”
잠깐 그의 말이 끊어졌다. 그리고 노기를 띤 것처럼 격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감사하다고 말씀드립니다, 물론. 그러나 경아씨로서도 나를 싫다고 하셔서는 안 되었습니다. 전에도 그래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잘못이었어요! 경아씨의 잘못이었어요!”
“……”
“지나간 얘기는 두고라도 경아씨는 나를 싫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지내온 날들을 아신다면·…… 세상이 반드시 부조리하게만 되어 있을 까닭도 없습니다.”
“……”
“이제는 저하고 결혼해주십시오. 이제 또 저를 슬프게 해주셔서는 안 됩니다.”
어느덧 경아는 그의 널따란 가슴 속에 안겨져 있었다. 그곳은 따뜻하고 미더운 장소였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안심하고 있고픈 장소였다. 그러나 경아는 그를 밀어내었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저에게는 그런 말씀 하셔선 안돼요.”
“완규군을 아직도 사랑하십니까.”
현태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고통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을…….”
“아니에요.”
절체절명의 빛을 띤 경아의 얼굴을 현태는 한동안 뚫어지게 주시하였다. 그리고 연민의 빛이 그의 눈 속에 감돌았다.
“알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제가 너무 조급했었나 봅니다. 차차로 설명해주시겠지요. 기다리겠습니다. 몇몇 년이나 한없이 기다리기도 했던걸요…….”
쓰라린 미소로 그는 말을 맺었다. 그리고 다정히 경아의 팔목을 끌어 의자에다 앉혔다. 평범하고 즐거운 잡담으로 이끌어 넣음으로 하여 그는 오히려 경 아를 위로하려는 위치를 취하였다.
경아는 왈칵 눈물이 솟을 듯한 격동을 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진심으로부터 현태에게 죄스러움을 느낀 것이었다. 그것은 또 그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기도 하였다.
말소리가 조금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넋을 잃은 동자가 어느 때까지나 현태의 가슴께로 쏠리고 있는 것을, 현태는 또 구처 없이 바라보며 어느덧 그도 침묵해버렸다. 문득 그것을 깨닫자 경아는 비틀비틀 의자에서 일어섰다.
“나는…… 나는…….”
무슨 말을 현태에게 하려고 하는지 제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아니 그것은 본래 언어로서 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다만 그 전신으로 표현하는 혼란과 격동이 까닭 없이 현태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는 어린애를 달래듯 그 어깨를 쓸어주며 그도 또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밖에――밖에 나가고 싶어요. 사람이 많고, 요란하고, 생각도 없는 데에…….”
경아는 울고 난 뒤처럼 흐느끼면서 호소하였다.
“그렇게 하지요. 경아씨, 그렇게 하지요. 자 코트를 입으세요.”
현태는 경아의 며리칼을 쓰다듬으면서
“피로하시잖게 그럼 잠깐만 거리를 다녔다 갑시다.”:
하였다.
“피로하지 않아요. 오늘은 젤 좋은 날인걸요.”
참담한 바람이 지나간 핼쑥한 얼굴로 경아는 방긋 웃어 보였다.
그는 골목 끝 양품점에서 노란 금속의 이어링과 목걸이를 샀다.
“자, 이제는 어떤 무도회에라도 갈 수 있어요.”
자동차 속에서 그것들을 달면서 즐거운 듯이 재깔거렸다.
주말이어서 그런지 홀은 어디고 북적 대었다. 경아는 퍽 행복한 사람같이 보였다. 마치 취한 것처럼 ―황홀한 꿈에 취한 것처럼 그녀는 현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스텝을 밟았다.
현태의 표정이 반대로 차츰 심각하여져갔다. 그는 테이블로 돌아온 경아가 하이볼을 두세 잔 연거푸 비우는 것을 보자 두말없이 팔목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돌아갑시다.”
그들은 바깥으로 나왔다.
“집에 모셔다 드릴 테니 오늘은 일찍 주무셔야 해요. 거기가 어느 방향이지요?”
경아는 바로 거기 남산으로 올라가는 차도를 가리켰다.
“저리로 가요.”
“국방부 앞으로 넘어갑니까? 차를 붙들지요.”
“아니, 아니, 바로 저기예요. 결어가야 해요.”
경아는 거짓말을 하였다. 술을 마신 탓인지 자꾸 울고 싶었다. 울지 않으려면 여러 가지 말을 지껄여야 하였다. 그럴 수는 없으니까 그와 함께 산길을 걷자는 것이었다.
산을 향한 길에는 인기척도 없었다. 가끔 쏜살같이 스쳐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아스팔트 위에 굵은 줄을 그었다 지울 뿐이었다.
그 무늬 속에는 까뭇까뭇한 점이 무수히 떠올랐다가는 꺼져버렸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경아는 손바닥을 펴보고 또 얼굴을 젖혀 이마 위에 그것을 받으려고 하였다.
“눈이 오네. 보세요, 눈이…….”
“경아씨!”
현태는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난폭하게 경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경아씨는 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아씨 자신도 그걸 알고 있고. 그런데 왜 결혼하자면 거절하는 겁니까?”
“……”
“자, 말해보세요. 그런 이유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말해보십시오. 내가 납득이 가도록, 자, 자.”
경아는 어깨를 흔들어버리고 걸어갔다. 현태는 그를 다시 붙잡아 세웠다.
“경아씨는 모르겠어요? 자기의 마음을?”
“……”
경아의 전신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의 마음에서 달콤한 슬픔, 눈물이 주는 워로는 가시어져버렸다. 그녀는 시선을 발끝에 떨구고 또 걷기 시작하였다. 조금 뒤에서 현태도 묵묵히 따라왔다.
“어디까지 걸어가시는 겁니까? 이 근방에는 집이라고는 없지않아요.”
그 소리에 경아는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미안한 듯이 조그맣게 대답하였다.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어요. 그건 서대문 쪽으로 가야 해요.”
현태는 두 팔로 경아를 껴안았다.
“경아……경아……”
그는 경아의 얼굴에다 볼을 비볐다. 그의 뺨은 차갑게 젖어있었다.
서대문에서 차를 버리고 다시 널따란 비탈을 오르면서 경아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왜 저를 괴롭히세요. 전 현태씨를 사랑하고 있어요. 정말이니까 다신 묻지 마세요. 그리구 결혼하자구 하지 마세요.”
“그런 말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있구말구요. 있구말구요.”
경아는 손등으로 코눈물을 비벼대었다.
“경아를 사랑하면서 경아를 소유하지 말라는 말씀이에요?”
“왜 저를 가지고 싶으세요? 복수하시려는 거죠! 내가 오랫동안 괴롭혀드렸으니깐 복수를 하시려는 거죠!”
억보¹⁷의 소리를 하며 그는 흐느꼈다.
“난 오랫동안 경아를 갖고 싶었다…… 경아만을 갖고 싶었다…… 그새 여러 여자들을 몰랐다고는 안 하지만 끝내 경아만을 갖고 싶었다…….”
현태는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듯이 나직이 꾹꾹 늘러 말하였다.
경아의 방 앞에 와 있었다. 경아는 포켓에서 키를 꺼내 들고 현태를 노려보았다. 그것은 노려본다고 함이 가장 적당한 얼굴이었다. 한참 만에
“내가 만약…… 이대로 어디 먼 데로 가버린다면 현태씨는…… 슬프겠어요? 젤 슬프겠어요?”
경아는 별안간 굵은 눈물방울을 굴려뜨리면서 그렇게 물었다.
“경아는 그렇게 할 권리가 없어! 우리는 사랑하고 있는데! 경아는 그런 말조차 해서는 못써!”
경아는 키가 얹힌 손바닥을 내밀었다.
경아의 얼굴은 처참하였다.
맨몸의 경아를 더스터로 감싸서 현태는 무릎 위에 안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타고 이마는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죽음이 그에게도 나누어진 것이었다. 말을 해버린 경아는 허탈한 듯이 두 눈을 감고 현태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눈물 자국이 뺨에 말라붙고 그는 아마 잠이 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청람빛 더스터코트의 쌀락거리는 차가운 감촉 너머에 부드러운 경아의 육체가 있었다. 호흡하고 있는 그 따뜻한 물체는 회색의 낙인을 찍힌 것치고는 너무나도 향기롭고 아름다웠다.
‘죽음’ 둘이서 나누어 가져보아도 조금치도 가벼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통곡을 하는 대신 현태는 그런 산수를 풀이하고 있었다.
통곡을 하는 대신 그는 심장으로 끝없는 절벽을 더듬고 있었다.
-끝-
2016년 6월 10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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