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필> 2025. 2월호 신인상 수상작
손님
백 년 내 가장 무더웠다는 지난여름 하순의 아침이다. 산책길, 집 앞 화단 모퉁이를 막 지나려는데 하얀 가루 같은 것이 길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가루는 바로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올려다보니 길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고목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뒤로 물러서서 나무 위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흑갈색 몸통에 흰색 가로줄 무늬의 참새만 한 작은 새 한 마리가, 발톱으로 소나무 기둥을 꽉 움켜잡고 꼬리로 몸을 지탱하면서 부리로 나무를 쪼아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오가는 주택 근처에 둥지를 만들고 있는 새가 너무 신기하여 서둘러 휴대폰 카메라에 담으려고 했다. 새는 사람을 의식했는지 금세 날아가 버렸다. 둥지를 만들기 위하여 부리로 쪼아댄 소나무 속살 하얀 알갱이들을 아래로 버린 존재가 바로 저 녀석이었다니.
나는 휴대폰에 찍힌 새 사진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딱따구리과의 종임을 직감했다. 가끔 수리산 등산로에서 키가 큰 나무 기둥에 붙어서는 딱딱 딱따딱 소리를 내면서 쪼아대는 모습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휴대폰 어학사전 단어 검색에서 딱따구리를 쳤다. 좀 전에 본 그 새는 한국 등 동아시아 텃새로 흑갈색 등에 흰색 가로줄 무늬가 있는 딱따구리과에 속한 쇠딱따구리였다. 어렸을 적 고향 뒷산에서 본 까치만 한 오색딱따구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쇠딱따구리다. 주 서식지는 산이나 공원이라고 한다. 우리 집 근처에는 산도 많고 공원 등 여건이 좋아 자주 새를 만나는 것 같다.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설명하고 이웃들에게도 알리는 등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는 만나는 사람마다 쇠딱따구리가 놀라지 않도록 주의를 당부하기도 하고, 최초 발견자로서 마치 그 쇠딱따구리의 소유자인 양 나대기도 했다.
그날부터 이웃사촌이 된 그 녀석에 대한 관찰에 들어갔다. 주택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귀한 새인 만큼 보금자리를 만들고 편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자는 생각에서였다. 아침에는 평소 보다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는 해가 지기 전 화단 멀찌감치에서 녀석이 나가고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버렸다.
8월에 들어서자 비가 자주 내리기 시작했다. 중순쯤이었나 보다. 잠자리에 들 무렵 천둥소리와 소낙비 쏟아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바람도 거세게 불었다. 우산을 들고 나가 둥지를 살펴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밤잠을 설치면서 녀석이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다음 날 아침 날씨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화창했다. 새벽 일찍 둥지가 있는 소나무 고목 앞으로 달려갔다. 아침이면 가끔 보이던 쇠딱따구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밤사이 쏟아지는 비바람을 피해 피신한 것이 분명했다. 그 작은 몸으로 세찬 비바람 속을 뚫고 어디로 어떻게 갔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뒷산 풀덤불 속으로, 바위굴이나 토굴로,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면서 저녁녘에는 돌아오겠지 하면서 기다렸다. 여느 때 같으면 진작 돌아왔어야 할 녀석은 끝내 돌아오질 않았다.
며칠 동안 무덥고 쾌청한 여름날이 이어졌다. 둥지가 다 말랐을 법한데도 녀석은 그 밤 수해 이후로 영영 볼 수가 없는 ‘손님’이 되고 말았다. 나와 우리 가족, 이웃 사람들 모두는 그 녀석이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한동안 우리 집이나 이웃 사람들은 애써 만든 둥지를 버리고 떠나버린 녀석에 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그 이후로 화단 앞을 지날 때마다 잠깐 머물다 간 나의 손님이 된 그 녀석의 빈 둥지를 습관처럼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아직도 나는 그 조막만 한 쇠딱따구리 새를 잊지 못하고 있다. 때로는 빈 둥지를 바라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영영 가버린 녀석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잊게 해 줄 새로운 손님이 찾아와 주었으면 하는 희망을 품곤 한다.
내 마음속에는 아직도 그 조막만 한 쇠딱따구리 성체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변화무쌍! 예측할 수 없는 사계절 날씨에 어떻게 적응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여름철에는 먹을거리라도 풍성하지만, 풀과 잎새 하나 없이 차갑고 앙상한 겨울철에는 어디에서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어느 곳에다 잠 잘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지? 또, 그 장구한 세월 동안 종(種)을 용케도 보존해온 놀라운 생명력에 대한 경외심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가끔 잠깐 머물다 간 나의 ‘손님’이 보고 싶을 때면, 휴대폰 갤러리에 들어가 둥지 입구서 보일 듯 말 듯 내밀고 있는 앙증맞은 쇠딱따구리 얼굴 사진을 보곤 한다.
정자에서 일어난 일들
김성룡
남향 창문을 열면 앞에 아담한 공원이 있다. 이곳은 마을 주민 모두의 안식처다. 나는 이 공원을 내심 ‘나의 정원’이라 명명하고, 평소에는 그냥 정원이라고 부른다.
이곳으로 이사를 온 후, 틈만 나면 창으로 내려다보거나 정자에 가서 앉거나 걷는 게 일상이다. 정원이 내게 주는 재미와 이야깃거리가 제법 쏠쏠한데, 정원 옆에서 사는 것은 처음이다. 이전 생활에서는 느끼지 못한 다감(多感)과 사유가 꽤 쌓여, 계절 따라 변해가는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나무와 풀과 꽃과 새, 곤충과 함께 다양한 군상이 남기고 가는 흔적은 더없이 좋다. 그중 어떤 것은 내 기억 저장고에서 오랫동안, 잠깐 머물거나 금세 사라지기도 한다.
봄이면 연두색 새싹이 돋고, 여름이면 초록 우산 갓이 점점 넓어지고 우산대도 굵어진다. 가을이면 단풍이 들어 낙엽 지는 풍경과 겨울이면 나목들 사이로 지나는 바람 소리를 듣고 보는 것이 일상이다. 눈이 오는 날이면 나가서 발자국을 남기고 싶어지는 백설 카펫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곳을 이용하는 이웃들과 견공, 수시로 날아드는 다양한 새들, 운동 기구와 놀이기구가 평소의 친구들이다.
가장 가까운 벗은 남서쪽 모서리에 터 잡은 사각기둥형 정자다. 성인 열 명은 족히 앉아서 놀 수 있는 크기다. 지붕은 사각 고깔 형에 흑갈색을 칠했고, 나무로 된 마룻바닥은 황갈색이고. 정자는 밤에도 환하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많은 군상(群像)이 들고 난다. 나도 그중에 한 사람이다.
정자 마룻바닥은 여름엔 습기가 배어나고, 가을엔 서늘해도 앉을 만하고, 겨울엔 차가워서 오래 앉을 수가 없지만 그래도 정취를 생각해서 앉아본다. 이렇든 저렇든 사철 다양한 군상이 찾아오면서 무수한 흔적을 남기고 간다. 정자에서 일어난 일 중, 내 기억 저장고에서 특별한 일들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하나. 전철을 타거나 도로에서 차를 타고 버스 정거장이나 택시 정거장 앞을 지날 때면, 하나처럼 거북목을 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새로운 풍경이다. 정자를 찾아오는 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앉자마자 하는 행동은 비슷하다.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거나 뉴스나 유튜브를 보는 일이다. 학생들은 바닥에 엎드려서 게임을 하는 등, 휴대전화는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으로 신체 일부가 되어 가고 있다.
둘, 중학생인 듯한 여학생 네 명이 가끔 정자를 찾는다. 어느 날 오후, 무심히 창문을 열었다. 학생들이 정자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눈을 의심했다. 우리가 자랑하는 ‘K-댄스’를! 잘 짜인 군무다. 어찌나 잘도 추는지 흥이 절로 돋았다. 주변에 사람들도 구경 삼매경. 나는 정자에서 추는 ‘K-댄스’를 처음 본다. 정자에서 저런 춤을! 가만 앉아서 이야기나 하고 놀던 예전 정자가 아니었다. 정자가 이렇게도 쓰이는가 싶어서 새삼 놀랐다.
셋. 요즈음 어디를 가든 어린아이들 보기가 쉽지 않다. 가끔 동네 어린이집 원생들이 정자에 나와서 야외 학습을 한다.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고 뛰놀기가 바쁘다. 학습은 뒷전이다. 손(孫)이 없는 내겐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이 생경하다.
넷. 가끔 있는 일이다. 등교시간이 한참 지난 시각에, 중·고생인 듯한 남·여학생 둘이서 정자에 앉아 있다. 책가방은 마룻바닥에 내던져 놓고 마냥 논다. 조바심이 났다. ‘녀석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속으로 나무랐다. 그 아이들은 11시가 다 되어서야 정자를 떴다. 귀여워 보였지만, 마음 한구석에 이는 염려는 왜일까.
다섯. 올봄부터 정자로 꾸준히 출석하는 청춘 남녀가 있다. 이들은 저녁 8시 전후로 출석해 밤 10시 전후로 퇴정한다. 간혹 자정을 넘길 때도 있지만. 보통 10시가 지나면 그들 둘만이 정자에 남게 되는데, 우리 가족은 이들을 ‘찐 사랑’이라 부른다. 하는 행동이 찐해서다. ‘찐 사랑’은 옆에 사람이 있든 말든 뽀뽀를 해대고 껴안기 때문이다. 나는 속으로 “그리 좋으면 빨리 결혼해라! 이 친구들아!”하고, 가끔 성원을 보내기도 한다.
여섯. 어느 해였던가, 몹시 추운 겨울 아침. 검정 옷을 입은 한 여인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정자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 추운 날씨에 언제부터 이곳에 나와서 있었던 걸까? 실연? 부부싸움? 불면증? 삶이 힘들어서? 등등. 온갖 추측을 했다. 오전에도 몇 번이나 내다보았다. 저런! 여인은 계속 미동도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다. 마음 같아선 나가서 사정을 물어보고 싶기도 했지만 꾹 참았다. 그녀는 정오가 다 되어서야 자리를 떴다. 아직도 나는 그 여인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다. 그날, 아무런 연고나 인연도 없이 애를 태운 그 여인! 내 기억 저장고에서 언제쯤이나 사라질지.
마지막 일곱. 근 백 년 내에 가장 더웠다는 올여름 이른 아침. 웬 사람이 정자에서 큰 대(大)자로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나가서 살폈다. 한 할머니가 정신없이 자는 게 아닌가. 허름한 상의에 일바지 차림이다. 얼마 후, 할머니는 오며 가는 인기척에 깨어서는 기운 하나도 없이, 아주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아랫마을 쪽으로 간다. 그렇게 갔다. 여름 내내 그랬다. 집이 찜통이라서? 쪽방이라서? 독거노인? 자식들은 있을까? 그럼 끼니는? 하고, 나는 또 엉뚱한 생각을 해댔다. 그런데 추석 지난 후로는 그 할머니가 아예 보이질 않는다. 정자를 볼 때나 나가 앉을 때마다 그 노인 생각이 난다. 할머니가 내 기억 저장고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것만 같다.
어릴 적 고향 정자에서는 노인들이 긴 곰방대를 물고 정담을 나누면서 세월과 벗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한가로웠던 풍경은 지금도 뇌리에 박혀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우리 동네의 ‘나의 정원’ 내의 정자도 샘물처럼 이야기꽃이 함박 피어나는 장이었으면 좋겠다.
수상소감/ 김성룡
대양을 항해해 보리라
수상 소식을 듣고 먼저 떠오른 생각이다. 적은 나이도 아닌 내가 수필을 배우고 써보겠노라고 수필문학반에 입반(入班)하고 첫 습작품 합평을 받을 때였다.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지적을 받고 얼굴이 몹시 화끈거렸다. 당황스러움과 부담감으로 얼마간의 마음을 다독이는 시간이 필요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도서관은 내 안방이나 진배없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고등학교 교내 백일장에서 나는 장원급제(?)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국어 선생님께서는 나를 교무실로 불러서 대학교는 꼭 국어국문학과로 진학하라고 명령처럼 권유하셨다. 대답은 했었지만, 여러 형편상 진학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번 수상으로 당시 국어 선생님께서 당부하신 말씀에 조금이나마 보답이 된듯해서 마음이 편하다. 그리고 지금껏 가슴 속에 남아있는 송구함과 응어리가 사라진 듯 홀가분한 마음도 감출 수가 없다.
직장생활과 학업을 병행하는 가운데서도 문학에 대한 욕구는 쉼 없이 솟아오르는 옹달샘 같았다. 내 마음속 샘과 힘의 원천은 국어 선생님께서 당부하신 말씀과 백일장 장원이었다. 샘물은 오랜 세월 풀숲 사이사이로 긴 도랑과 좁은 시내를 흘러, 오늘 기쁜 소식을 가지고 노을 진 저녁녘 넓은 바다에 닿았다.
이제 새로운 출발선에 서게 됐다. 선실이 튼실한 널따란 배를 준비하고 식량과 항해에 필요한 준비물을 가득 싣고, 넓고 탄탄한 닻을 곧추 달고 망대에 올라 대양을 항행해 보리라.
이 모든 기쁨과 감사와 영광이 있기까지는 따스한 분들이 있다. 수필 입문에서부터 이론까지 세심히 지도하고 이끌어주신 문학가 지송 선생과 늘 함께해준 수필문학반 문우들과 이 영광을 공유한다. 그리고 수필 수업을 하러 갈 때마다 장난기 가득한 응원을 보내준 사랑하는 가족과도 같이하고 싶다.